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양상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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양상쿤

양상쿤(중국어:杨尚昆yáng shàng kūn)은 중화인민공화국 제4대 주석이다.

개요

양상쿤은 중국의 정치가로 광저우시 당위원회 제1서기, 광둥군구 제1정치위원, 전국인민대표대회 상임위원회 비서장, 중앙군사위원회 상임위원 겸 비서장 등을 지내고 국가주석이 되었다. 쓰촨성(四川省) 퉁난(潼南)에서 출생했다. 1926년 중국공산당에 가입, 1927∼1930년 모스크바 중산(中山)대학에 유학, 귀국 후 상하이(上海)에서 활동하였다. 1934년 장정(長征)에 참가하였고 전국소비에트 제2차 대표자대회 중앙집행위원에 선출되었으며, 1943년 당 화북국(華北局) 서기 겸 통일전선공작부장이 되었다.

양상쿤은 1945년 중앙군사위원회 비서장, 1956년 제8기 중앙위원과 중앙서기처 후보서기의 직을 맡았으나, 1966년 문화대혁명으로 숙청당하였다. 1978년 복권되어 광둥성(廣東省) 당위원회 제2서기 및 혁명위 부주임, 1979년 광저우(廣州)시 당위원회 제1서기, 당중앙위원으로 보선, 1980년 광둥(廣東)군구 제1정치위원, 전국인민대표대회 상임위원회 부위원장으로 보선되고, 동(同)상임위원회 비서장으로 임명되었다. 1982년 이후 중앙군사위원회 상임위원 겸 비서장 등을 지내면서 막강한 영향력을 행사하기 시작하여 1988년 국가주석이 되었으나, 1992년 이후에는 일체의 당직에서 물러났다.[1]

생애와 활동

양상쿤(1907년 5월 25일 ~ 1998년 9월 14일)은 중국의 정치인이자 군인(1950년 3월 예비역 중화인민공화국 지상군 준장 전역)이다. 충칭 직할시 퉁난 현에서 태어났다. 국가 주석과 당중앙 정치국 위원, 중앙군사위원회 부주석을 역임하였으며 장정에 참여했다.

양상쿤은 동생 양바이빙(楊白冰)과 함께 양자장(楊家將:양씨 집안의 장군)으로 불리며, 인민해방군 내에서 막강한 영향력을 행사했다. 쓰촨성 충칭 출신으로, 1926년에 중국공산당에 입당하였고, 당에 의해 소련에 파견되어 모스크바 중산 대학에 유학하였다. 1931년 중국에 돌아와서 1933년 마오쩌둥과 주더의 장시 소비에트에 합류하였다. 친소련 성향의 지도부 "28인의 볼셰비키"의 일원으로 당중앙위원 후보로 선출되었다. 이들은 기존 지휘부였던 마오쩌둥주더 대신 홍군을 지휘하였으나 기존의 게릴라전략을 버리고 정규전을 펼치다 1935년 국민당군의 제5차 토벌전에서 궤멸적 타격을 입었다. 이 패배때문에 중국공산당은 장정을 결의했고, 양은 장정 중에 열린 쭌이 회의에서는 "28인의 볼셰비키"를 벗어나 마오쩌둥을 지지하여 마오쩌둥이 다시 당권을 장악하는데 기여했다.

제2차 국공합작 이후 항일 전쟁기에는 당중앙 북방국 부서기와 서기를 거쳤고, 화베이에서 게릴라전을 지도했다. 해방 전쟁 시기에 중앙군사위원회 비서장으로서 군의 고급 간부에게 명령을 전달하는 역할을 맡았다. 건국 이후, 1949년부터는 당의 일상 업무를 처리하는 중국공산당 중앙서기처 주임을 지냈고, 1950년 3월에는 중공 서기처 주임 직위 재직 중 예비역 중화인민공화국 지상군 준장 전역하였으며 1956년에 덩샤오핑이 당 총서기에 취임하면서 업무적으로 밀접한 관계를 가지게 됨으로써 그의 신뢰를 얻게 되었다. 1965년경에 중앙서기처 주임에서 해임되어 광둥성 당위원회 서기로 격하되었고 문화대혁명이 시작되면서, 펑전(彭眞), 루딩이(陸定一), 뤄루이칭(羅瑞卿) 등과 함께 "양상쿤 반혁명집단"으로 몰리게 되었다. 또 마오쩌둥으로부터 "양상쿤은 위연이다"라는 비판을 받고 실각하였다.

1978년에 복권되어, 1982년에는 당 관료에 재임명되었다. 덩샤오핑과 함께 1989년의 천안문 광장의 민주화 시위를 군에 의한 진압에 대해 책임이 있는 것으로 알려져 있다. 그는 형식적으로 국가주석직에 있었지만 실권을 쥐고 있던 덩샤오핑과 갈등관계에 있었다. 더구나 군부 내에 그의 지지자가 많은 것 역시 덩샤오핑에게 걸림돌이 되었다. 인민해방군에 있어서 그의 영향력이 너무나 컸기 때문에, 당 지도자를 장쩌민으로 교체시키기 위해서 1992년에 덩샤오핑에 의해 정치국원의 자리로부터 제거된다. 양상쿤과 그의 동생 양바이빙은 군 내부에 너무나 많은 지지자와 동지가 있었기 때문에, 그의 사직으로 군의 최고위직의 절반이 퇴역하게 된 것은 잘 알려진 사실이다. 그리고 중공팔대원로 중의 한 명이기도 하다.[2]

양상쿤은 나이가 엇비슷한 데다가 동향인이었기 때문에 덩샤오핑과 매우 친한 친구였고, 1966년 실각해서 12년간 수감생활을 하던 양상쿤을 다시 불러서 복권시켜준 것이 바로 덩샤오핑이었다. 실제 덩샤오핑이 남순강화를 할 당시에도 가장 먼저 연락한 원로가 양상쿤이었고 양상쿤 또한 이에 호응하여 덩샤오핑이 있던 선전시를 방문하여 덩샤오핑의 개혁개방노선에 힘을 실어주었다. 다만 연배도 그렇고 역임한 직위도 그렇고 덩샤오핑이 만만히 볼 수 있는 상대는 아니었고, 정치개혁에 대해서는 제동을 걸기도 하는 등 언제나 의견을 같이한 것은 아니었으니 덩샤오핑의 부하라기보다는 파트너에 가까운 관계였다.

양상쿤은 다음 세대인 장쩌민, 후진타오에게 권력을 넘겨주려던 덩샤오핑의 뜻에 반발하고 계속 권력을 유지하려 하였으나 결국 자신의 중앙군사위 주석직까지 넘겨가면서 강력하게 밀어붙인 덩샤오핑의 뜻에 밀려 세대교체는 피할 수 없는 대세가 된다. 대신 덩샤오핑은 양상쿤을 달래기 위해 그의 동생 양바이빙을 중앙군사위 비서장에 임명하고, 양상쿤이 은퇴한 1992년 14차 당대회에서는 양바이빙을 정치국 위원으로 승격시켜준다. 양상쿤을 비롯한 중공의 정치원로들이 은퇴하는 대신 2선에서 실질적인 영향력을 행사하던 통로였던 중앙고문위원회도 1992년 폐지되었으며, 1993년 국가주석직에서 물러난 양상쿤은 5년 뒤인 1998년에 사망하였다.

2017년에 공개된 영국의 외교문서에 따르면 양상쿤의 동생인 양바이빙 중앙군사위원회 비서장의 아들이 지휘관을 맡고 있던 제27집단군이 1989년 천안문 사태 당시 유혈진압을 자행한 부대였다는 것이 밝혀졌다. 양상쿤의 주치의였다가 후에 반체제인사가 된 장옌융은 양상쿤이 자신에게 "천안문 사태는 당의 커다란 실수다. 나중에 재평가될 것"라고 말했다고 증언했다.

노태우와 양상쿤의 회담

1992년 9월 27일 당시 대통령이었던 노태우 전 대통령이 역사상 처음으로 중국을 방문해 중국 양상곤(楊尚昆) 주석과 한중 정상회담을 진행했다. 앞서 한국 정부는 1992년 8월 24일 중국과 수교하며 단절된 양국관계를 개선했다. 이후 양국은 수교 교섭과정에서 양국관계의 획기적인 발전을 위해 정상회담이 필요하다고 공감해 한중정상회담을 진행했다. 한국과 중국이 관계를 개선할 수 있었던 이유로는 당시 국제 사회 흐름 변화가 컸다. 국제적 배경으로는 1989년 12월 미소 몰타회담에서 미국 조지 H.W 부시 대통령과 소련 고르바초프 서기장이 두 국가 간 적대행위를 중단시킴으로써 냉전 체제는 끝 무렵에 달했다. 아울러 국경 분쟁과 미국의 핑퐁외교(미국 키신저-중국 저우언라이 회담, 이를 계기로 미중관계 개선)로 인해 흔들렸던 중국과 소련 관계 역시 정상화됐다.

한국 정부 또한 중국과 관계개선을 계기로 한국기업의 대중국 진출을 증대시키고 양국 간 경제협력 규모를 확대하고자 했다. 노태우 전 대통령은 양상쿤 주석 초청으로 1992년 9월 27일부터 30일까지 3박 4일간 중국을 공식 방문했다. 9월 28일 노 전 대통령과 양 주석은 베이징 인민대회당에서 사상 첫 한중 정상회담을 진행하고 한반도 비핵화 의견 일치 등 한중관계와 한반도 문제를 두고 의견을 함께 나눴다. 9월 29일 노 전 대통령은 장쩌민(江澤民) 공산당 총서기와 리펑(李鵬) 총리 등 중국 지도자들과 회담했다. 장쩌민 총서기와 리펑 총리는 노 전 대통령에게 한반도 안정이 중국에 유리하다고 언급했다.

방문 마지막 날인 9월 30일 양국은 '한중공동언론발표문'을 발표했다. 주요 내용은 양국 정상은 한중 수교의 의의를 높이 평가하며 이는 양국의 이익에 부합할 뿐만 아니라 아시아와 세계 평화에도 중요한 기여를 할 것, 양국은 앞으로 경제와 과학기술 분야에서의 협력을 적극 추진할 것, 양국은 한반도 긴장완화가 한국과 동북아·아시아 전체 평화와 안정에 유익하다는 점 인정 등이었다.

천안문 사건

천안문 사건(天安门事件) 또는 제3차 천안문 사태(第三次天安門事態), 또는 6·4 항쟁은 1989년 6월 4일, 후야오방의 사망 이후 발생한 천안문 광장 등지에서 시위대와 인민이 전개한 반정부 시위를 중화인민공화국의 개혁개방 정권이 유혈 진압한 사건이다. 중화인민공화국 정부는 일반적으로 이 사건을 1989년 춘하계 정치풍파라 지칭하는 반면, 비판적인 반체제 세력 및 서방세계에서는 천안문 광장 저항시위 또는 천안문 광장 도살, 89년 민주운동이라고 칭한다. 중국의 검색엔진에서 천안문 사건을 검색하면 접속이 불가능하게 되기 때문에, 5월 35일(5월 31일+4일), VIIV(로마숫자 64), 82(64=6월 4일) 등을 은어로써 사용하기도 한다.

애초 공식 발표로는 민간인 사망자 300여 명, 부상자 7,000여 명이 발생한 사건이며, 국제적십자협회는 2,600여 명으로 사망자를 발표했고, 비공식 집계로는 10,000여 명 사망했다. 그 후 중화인민공화국 공안부가 1990년 7월 10일 제5차 국무원 보고에서 정식 발표한 것을 따르면, 민간인 사망자는 875명, 민간인 부상자는 약 14,550명이었으며, 군인과 전경은 56명이 사망, 7,528명이 부상당했다. 당시 강경파로 덩샤오핑, 양상쿤, 리펑, 야오이린, 리시밍, 천시퉁, 츠하오톈, 류화칭이 있었다. 당시 국가주석이었던 양상쿤이 강경 진압을 지지했다는 설이 있으나, 양상쿤의 주치의였다가 후에 중국공산당 비판자가 된 장옌융의 증언에 의하면 양상쿤은 사건을 두고 천안문 6.4 항쟁은 우리 당의 실수라고 말했다고 한다.

동영상

각주

  1. 양상쿤(楊尙昆 양상곤, 1907.5.25.~1998.9.14)〉, 《두산백과》
  2. 양상쿤〉, 《위키백과》

참고자료

같이 보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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