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후진타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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후진타오

후진타오(중국어:胡锦涛hú jǐn tāo)는 중화인민공화국의 제6대 주석이다.

개요

후진타오는 중국의 정치가. 간쑤성 수력발전소 노동자로 시작하여 간쑤성 건설위원회 비서가 되었다. 공산주의청년단 서기에서 1992년에는 중앙당 정치국 상무위원으로 최정상부 권력에 올랐다. 1998~2003년 국가부주석, 2002~2012년 중앙위원회 총서기, 2003~2013년 국가주석, 2004~2012년 중앙군사위원회 주석을 역임했다.

2004년 9월에는 장쩌민이 물러난 중국 중앙군사위원회 주석으로 임명되었다. 하지만 장쩌민이 주도하는 상하이방과 권력투쟁은 계속되었다. 후진타오가 주석으로 재임하는 동안 중국의 경제발전은 가속화되었고 미국 이외 서방의 많은 나라들과 외교관계의 폭을 넓혔으며 아프리카에도 진출하여 중국의 영향력을 확대해 나갔다. 2012년 11월 15일 중앙 군사위원회 주석을 퇴임하고 2013년 3월까지 임기를 마치고 국가주석을 퇴임했다.[1]

생애

후진타오(1942년 12월 21일 ~ )는 정치인으로 전 중국공산당 중앙위원회 총서기이자 중화인민공화국의 주석이다. 칭화대학교에서 수리공학을 공부하였으며, 문화대혁명 기간 동안 일체의 정치 활동을 하지 않아 혁명의 광풍에 휘말리지는 않았다. 대학교 졸업 이후 수력발전소에서 노동자로 근무를 시작하여 기술자, 정치인을 거쳐 중국의 최고 권력자가 된다. 덩샤오핑은 국가 주석직과 당수직과 군권을 분할하되 실질적으로 모든 권력의 집행자로 군림하였으나, 2002년 장쩌민으로부터 당 총서기직을 넘겨받아 당권을, 2004년 9월에는 국가 주석직과 당 중앙군사위원회 주석직을 넘겨받아 공식적으로 정권과 당권, 군권을 모두 장악하였다. 장쩌민의 삼개대표사상을 토대로 중국 내 자본가들을 잇따라 중국공산당 내로 끌어들였으며 중국 내에서 이른바 제2의 만리장성이라고 부르던 천산 고속도로의 공사를 마치는 등 다양한 업적을 남겼다. 2010년 11월, 미국 대통령 버락 오바마를 제치고, 미국 경제전문지 포브스 지가 선정한 세계에서 영향력이 가장 큰 인물에 선정되었다. [2]

후진타오의 조상이 대대로 살아온 본적지는 안후이성(安徽省) 지시현(績溪縣)이지만 1942년 후진타오의 아버지가 상하이에서 초등학교 교사를 했기 때문에 중국 상하이(上海)에서 태어났다. 1948년 생활고로 인해 녹차잎 장사를 위해 상하이에서 장쑤성(江蘇省) 타이저우(泰州)로 이주하였으며 7살 때 어머니가 사망하자 할머니 슬하에서 성장하였다. 아버지 후징즈(胡靜之)가 운영하는 녹차잎 사업은 중국 정부의 정책에 따라 타이저우 시(市)의 식료품회사로 합병되었고 부친은 그곳에서 회계업무를 맡았다가 문화혁명 때 사망하였다. 후진타오는 타이저우에서 초등학교, 중고등학교를 마쳤다.

후진타오는 1959년 베이징(北京)의 칭화대학교(淸華大學校) 수리공정과에 진학하여 하천발전 분야를 전공하면서 졸업할 때까지 6년 동안 한 과목을 제외한 모든 과목에 만점을 받을 정도로 성적이 우수하였다. 대학 재학 중인 1965년 4월 공산당에 가입하고 석달 뒤 대학을 졸업하였다. 하지만 바로 사회생활을 시작하지 않고 1966년 대학 내 설치된 공산당의 하부조직인 정치부에서 약 3년간 학과 후배들의 정치교육을 담당하는 정치보도원(政治輔導員)으로 일했다. 칭화대학 정치부에서 일하는 동안 문화대혁명의 소용돌이를 겪으면서 소극적으로 참여만 하는 '소요파'(逍遙派)로 지냈다.

1967년 농촌으로 '하방'(下放)되어 간쑤성(甘肅省) 수력발전소에 노동자로 배치되었지만, 이후 승진을 거듭하여 1971년 수리전력부 제4공정국 기관당 총지부 부서기로 발탁되었다. 이 무렵 대학 동창인 류잉칭(劉永淸)과 결혼을 하고 첫 아이를 낳았다. 1974년 발전소 공사가 끝나자 간쑤성 성도인 란저우의 간쑤성 건설위원회 비서로 취임하였고, 여기서 평생동안 그의 강력한 후원자가 된 당시 간쑤성 당서기 쑹핑(宋平)을 만나게 된다. 쑹핑은 후진타오의 겸손하고 선배를 존중하는 성격을 보고 좋은 인상을 받았으며 그의 인품을 높이 평가했다.

1980년 간쑤성 건설위원회 부주임이 되었고 쑹핑의 추천을 받아 1982년 간쑤성 공산주의청년단 중앙위원회 서기가 되었으며, 당시 후야오방(胡耀邦)을 만나 신임을 받았다. 전국청년연맹 제6기 주석을 거쳐 1984년 공산주의청년단 중앙위원회 제1서기에 임명되어 후야오방의 후원을 받았다. 그러나 8개월 뒤인 1985년 중국 공산당과 정치계의 강력한 파벌인 '태자당(太子黨)'의 견제로 중국 남서부 구이저우성(貴州省) 당서기로 밀려났고, 1988년에는 티베트 시짱자치구 당서기로 근무하였다. 후진타오는 중국의 깊숙한 내륙에 위치한 가난하고 중앙정치에서 밀려난 지역에서 행정과 정치경험을 쌓았는데, 오히려 이 기간 동안 시짱자치구에서 일어난 티베트 독립운동 진압에 성공하면서 좋은 평판을 얻는 기회를 잡게 되었다. 동시에 1989년 중국 베이징에서 일어난 톈안먼 사건의 위기도 피해갈 수 있었다.

소수민족자치구의 당서기는 일반 성(省)의 당서기보다 한 단계 낮은 직책인데, 당시의 긴급한 상황이 후진타오를 중앙에서 파견토록 한 것이다. 티베트는 1950년대 마오쩌둥에 의해 중국에 편입된 곳으로 오랫동안 달라이라마와 판첸라마가 함께 투쟁을 전개하고 있던 지역이었다. 후진타오가 발령 난 뒤 판첸라마가 공공연히 지도부를 비판하자 후진타오는 정치적으로 몰리게 되었다. 1989년 3월 5일 티베트의 지도자 판첸라마가 의문의 죽음을 당하자 1989년 3월 7일 대대적인 반 중국 시위가 일어나게 된다. 후진타오는 계엄령을 선포하였고 유혈진압을 하게 되었으나, 그 뒤 지역이 안정을 찾으면서 후진타오는 중앙 정치인들에게서 신임을 얻게 되었다.

1992년 제14차 중국 공산당대회에서 장쩌민(江澤民) 이후 중국을 이끌어갈 지도자로 49세의 후진타오가 추천되었고 중앙당 정치국 상무위원 겸 중앙위원회 서기로 취임하면서 중국 정치권력 7위에 올랐다. 하지만 원만하고 예의 바른 성격의 소유자인 후진타오는 자신을 숨기고 정치적 야망을 드러내지 않았으며 상하이방(上海幇)의 리더인 장쩌민 뒤에 가려져 있었다. 1997년 16차 당 대회에서 권력 5위로, 1998년 3월 제9기 전국인민대표대회에서는 국가부주석으로 선출되어 2003년 3월까지 재임했다.

정치 업적

과학적 발전관은 인간을 근본으로, 사회와 조화를 이루면서, 지속가능한 발전을 추구할 수 있는 과학적 통치 체계를 말하며 불균형한 성장을 바로잡는 데 중점을 두었다. 과학적 발전관이 제기된 것의 배경은 개혁, 개방 이전의 정치와 경제, 국제관계를 비판하고, 개혁, 개방 이후의 국가발전의 동력을 과학기술 및 사회적 균형의 증진에 둔 것이다. 과학적 발전관은 후진타오 지도부가 일관되게 진행한 중요한 전략 사상이었고, 후진타오 및 그의 싱크탱크로부터 집권 초기인 2004년에 공개되었다. 경제성장 일변도를 관철하였던 덩샤오핑, 장쩌민 시대로부터 부분적인 궤도 수정이 도모되는가에 대해 주목을 받았다. 2007년의 중국공산당 제17회 전국대표대회에서 당의 중요한 전략 사상으로서 "덩샤오핑 이론"과 장쩌민의 "삼개대표사상"과 나란히 당 규약 중에 명기되었다.

2006년 3월, 중국 인민들이 해야 할 여덟 가지의 일과 해서는 안 될 여덟 가지의 일을 고시로 표현한 팔영팔치를 제시하여, 경제발전 이후 불거진 양극화 문제와 개인주의의 확산 문제를 해결하고자 애국심과 단결을 강조하였다.

2005년 3월의 전인대 이후, 후진타오 지도부는 "조화로운 사회 건설"의 건설을 강조하였다. 현재, 중국에는 경제발전의 이면에, 빈부의 격차, 치안, 실업, 부패 등의 문제가 심각하게 되었다. 생활고 및 토지수용이나 독직 등 당국에의 불만으로부터 중국 각지에서 데모와 폭동이 빈발하기도 했다. 정부는 이러한 사태의 악화를 염려하며, "조화로운 사회"의 건설을 중요과제로써 제기하였다. 그 실현을 위해서는, 부의 재분배 시스템을 확립하고, 빈부 격차의 해소에 노력하지 않으면 안 된다는 것이다. 그러나 기득권층의 이해에도 저촉하기 때문에, 그 실현에는 곤란이 뒤따르기도 했다. 조화로운 사회 개념을 이해하기 위해서는 그 이면의 인문학적 시야도 필요하다는 것이었다.

후진타오는 는 임기 동안 대한민국을 여러 차례 방문하였는데 그중 2005년에 APEC 정상회담을 참석하기 위해 부산을 방문하였고 노무현 대통령(당시)에게 시베리아 호랑이 1쌍을 기증하였다. 그리고 2008년 베이징 올림픽이 끝난 뒤에 방한을 하여 이명박 대통령에게 따오기 1쌍을 기증하기도 했다. 또한 두 차례 북한을 방문한 바가 있는데 한 번은 북과 합작으로 만든 유리 공장을 방문했다.

원자바오

원자바오는 1942년 9월 톈진(天津)에서 태어났다. 1965년 중국공산당에 입당한 뒤, 1967년 베이징지질학원 광산학과를 졸업하였다. 이후 베이징지질학원 지질구조연구생으로 있던 중, 문화대혁명 당시 하방운동으로 인해 1968년 간쑤성(甘肅省) 지질국 지질역학 기술원으로 쫓겨났다. 1978년 간쑤성 지질국 부처장이 되었는데, 이는 1976년에 일어난 탕산(唐山) 대지진 이후 지진 예보 전문가를 찾던 중앙정부에 의해 뛰어난 업무 능력을 인정받았기 때문이다. 이때부터 승진을 거듭해 1981년 간쑤성 지질국 부국장을 거쳐 이듬해 중앙정부 지질광산부 정책법규연구실 주임, 1983년 부부장이 되었다. 1998년 3월 국무원 부총리 겸 당 중앙농업영도소조 조장, 2002년 11월 공산당 정치국 상무위원이 되었고, 2003년 3월에는 후진타오(胡錦濤)·우방궈(吳邦國)에 이어 당 서열 3위인 국무원 총리로 임명되었다.

하방운동

하방운동(下放運動)은 중국에서 당 ·정부 ·군간부들의 관료화를 막기 위하여 실시한 운동이다. 중국이 당 ·정부 ·군간부들의 관료주의 ·종파주의 ·주관주의를 방지하고 지식분자들을 개조하며 국가기구를 간소화한다는 명분으로, 간부들을 농촌이나 공장으로 보내 노동에 종사하게 하고 고급 군간부들을 사병들과 같은 내무반에서 기거하며 생활하게 하는 간부정책으로 1957년 3월부터 시작되었다.

문화대혁명 때에 한동안 중단되었다가 1980년대 다시 재개되었다. 특히 도시의 중 ·고등학교 졸업자들을 변방지방에 정착시켜 도시의 인구과잉과 취업난을 완화시키는 편법으로서도 사용되어 각지의 하방청년들의 반발이 극심해져 사회문제로까지 야기되었다.

칭화방

칭화방(淸華幇)은 2000년 이후 중국 차세대 지도부의 핵심으로 떠오르고 있는 칭화대학교 출신의 인맥을 일컫는 말이다. 1980~1990년대 혈맥(血脈)을 바탕으로 한 태자당(太子黨)과 지연을 바탕으로 한 상하이방(上海幇) 등에 이어 2000년 이후 중국의 새로운 지도부로 급부상하고 있는 베이징(北京) 칭화대학교 출신의 인맥을 일컫는다. 칭화대학교는 중국의 MIT(매사추세츠공과대학)로 불리는 명문으로, 중국이 본격적으로 경제발전의 시기를 맞아 과학기술과 합리성을 바탕으로 한 경제의 중요성이 강조되면서 이 대학 출신들이 정치·경제의 요직에 등용되었는데, 칭화방은 바로 이들 칭화대 출신의 관료들을 말한다.

대표적 인물로는 총리를 역임하면서 중국 경제개혁과 산업발전을 이룩한 주룽지(朱鎔基), 2003년 국가주석 겸 당 총서기인 후진타오(胡錦濤), 전국인민대표대회 상무위원회 위원장 우방궈(吳邦國), 정치국원 겸 상무부총리인 황쥐(黃菊), 정치국 상무위원 우관정(吳官正), 국가발전계획위원회 주임 쩡베이옌(曾培炎), 최고인민검찰원 검찰장 자춘왕(賈春旺) 등을 들 수 있다. 그 밖에 2008년 베이징올림픽 개최 신청 등을 계기로 급부상한 국가체육위원회 주임 우샤오쭈(吳紹祖), 국가개발은행장 천위안(陳元) 등도 모두 칭화대 출신 인맥들이다.

동영상

각주

  1. 후진타오 Hu Jintao, 胡錦濤(호금도), 1942.12.21~〉, 《두산백과》
  2. 후진타오〉, 《위키백과》

참고자료

같이 보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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