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범석
이범석(李範奭)은 일제강점기 때 활동한 독립운동가·정치가이며 대한민국 초대 국무총리이다.
개요
이범석은 조선민족청년단(朝鮮民族靑年團) 창설, 국방장관 수행 등 활발한 활동을 하였다. 1915년 경성고등보통학교 재학 중 중국으로 망명, 1919년 윈난(雲南)에 있는 중국육군강무학교(中國陸軍講武學校) 기병과(騎兵科)를 졸업하고 둥베이(東北:만주)로 진출하였다. 1920년 청산리(靑山里)전투에서 중대장으로 참가, 전투를 승리로 이끄는 데 큰 공을 세웠다.
이범석은 1922년 소련합동민족군 연해주지구 지휘관으로 소련 혁명전(革命戰)에 참가하였고, 1933년 중국 뤄양(洛陽)군관학교 한인장교대장, 1936년 중국 제3로군 사령관, 1940년 중국 중앙훈련단 중대장을 지냈다. 1941년 한국 광복군 참모장에 취임하고, 1945년 광복군 중장으로 8월 귀국하였다. 1946년 조선민족청년단(朝鮮民族靑年團)을 창설하였으며, 1948년 정부수립 후 초대 국무총리에 기용되고 국방장관을 겸임하였다. 1950년 주중(駐中)대사, 1952년 자유당 부(副)당수 및 내무장관 등을 지냈으며, 1952년 8월과 1956년 2차례 부통령(副統領)에 입후보하였으나 모두 낙선하였다. 1960년 충청남도에서 자유연맹(自由聯盟) 소속 참의원(參議員)에 당선되었고, 1963년 ‘국민의 당’ 최고위원에 추대되었다. 1963년 건국훈장 대통령장을 받았다.[1]
생애
이범석은(1900.10.20.~1972.5.11)은 대한제국 한성부 용동에서 이문하(李文夏)와 연안 이씨(延安 李氏)의 아들로 출생하였다. 그의 가계는 조선 왕족으로, 세종의 다섯째 아들이었던 광평대군의 후손이었고 광평대군의 셋째 손자인 청안군 이영의 셋째 아들이었던 정안부정 이천수(李千壽)의 15대손이었다. 왕족으로서의 예우는 15대조 정안부정에서 끝났고, 14대조 이한(李漢)은 음직으로 출사하여 배천군수(白川郡守)에 이르렀다. 이후 줄곧 벼슬을 배출하여 한성 근교에서 거주하였다. 그 뒤 증조부 이목연(李穆淵)의 대에 충청남도 천안군 목천면으로 이주하였으나 관료 생활을 하던 아버지 이문하의 대에 다시 한성부로 상경했다.
이범석의 증조부 이목연은 형조판서와 전라도 관찰사를 지냈고, 양자로 들어온 종조부 이인명(李寅命)은 예조판서와 의금부 판사를 역임하였다. 할아버지 이인천(李寅天)은 서자였으며 부사용과 학관을 지냈다. 충청남도 천안군 목천면 교촌리에는 종조부 이인명 대부터 거주하던 집이 있으며, 그 후손들이 거주하고 있다. 이범석의 아버지 이문하는 구한말의 관료로 농상공부 참의와 궁내부 참사관을 역임했다. 이범석이 태어날 무렵 이문하는 당시 대한제국 관료였으며 농상공부의 비서관으로 근무하여 외근이 잦았으며, 어머니 연안 이씨는 심장병으로 와병중이었다. 위로는 형 이범홍, 누나 이범호, 누나 이범숙이 있었고, 후에 계모 김해 김씨에게서 이복 남동생 이범혁이 태어났다.
이범석은 경기도 제물포에서도 유아기를 보냈다. 풍족한 가정 환경과 개화 성향 분위기 속에서 자랐으나 불행하게도 어머니를 일찍 여의게 되었다. 1911년 아버지는 강원도 이천군수에 임명되었다. 이범석은 아버지의 임지를 따라 이천에서 어린 시절을 보냈다. 1907년 자신을 친동생처럼 보살피던 정태규가 정미 7조약이 강요한 군대해산에 저항하다 참살되는 것을 보고 이범석은 항일을 결심하고 16세이던 1915년 중학교 2학년에 해당하는 경성고보 시절 중국으로 망명했다. 정태규의 처참한 시신을 보고 그는 복수심에 불타 배일사상(排日思想)을 품게 되었다. 그는 후일 이를 신의 계시인지도 모르겠다고 회상하였다. 소학교에 입학하기 전까지 그는 집안에 훈장을 초빙하여 한학(漢學)을 배웠다. 1913년 이범석은 집을 떠나 경성으로 유학, 당시 중학교이던 경성제일고등보통학교에 추천으로 입학하였다. 이때 박헌영, 심훈 등을 만났고, 그들은 이범석의 동창생이 되었다.
1914년부터 아버지 이문하에 의해 결혼이 준비되었다. 그는 1915년 당시 천안군 군수이던 김승현의 딸과 약혼하였고, 1915년 가을 김씨와 결혼하여 서울에 집을 마련하였다. 그러나 부인과의 관계에는 관심이 없어 그가 중국으로 떠나면서 헤어졌다. 1919년에 윈난성 육군강무학교를 기병과를 수석으로 졸업하였다. 강무학교 졸업 이후 이범석은 중국군 견습사관을 지냈고, 건해자(乾海子) 기병연대에 배속되었다. 1919년 가을부터 1920년 만주 신흥무관학교의 교관으로 독립군을 양성하였으며, 근교의 장쭤린 군벌의 영향으로 일본의 간접적 압력을 받아 고충이 심했다. 1920년 이범석은 길림성 왕청현(汪淸縣)에 도착, 김좌진 장군이 이끄는 북로군정서(北路軍政署)에 가담하여 중대장으로 청산리 대첩에 참전했고 이어 사령관이 되었다.
이범석은 김좌진과 함께 청산리전투에서 성과를 올린 뒤 따로 병력을 이끌고 갑산촌(甲山村)으로 이주, 새벽 2시에 천수동 골짜기에서 19사단을 공격하고 포로로 잡힌 독립군을 구출했다. 마록구(馬麓溝)에서는 2천 명의 군사로 일본군을 상대, 한인 교포들이 탄환과 물자를 수송하였고 90명의 독립군 전사자를 내고 수백 명의 일본군을 섬멸했다. 1945년 5월 섬서성 서안 교외 두곡(杜曲)에서 이범석의 지휘를 받는 광복군 정진대가 미국의 전략첩보국 OSS와 연합하여 국내 진공을 위한 특수 훈련을 받았다. 1945년 8월 일본의 패망 소식을 접하고 8월 18일 미군 중국전구 총사령관 고문 자격으로 비행기 편으로 김포공항에 입국했다가 일본군에 의해 저지당하여 다시 상하이로 되돌아왔다.
1946년 6월 이범석은 정식으로 귀국할 수 있었는데, 이는 김구가 아닌 이승만의 부름을 받아 귀국할 수 있었다. 1946년 6월 22일 비행기편으로 서울 여의도 비행장에 도착하였다. 귀국 당일 돈암장의 이승만을 방문하자 이승만은 그를 환대하였다. 이후 이승만은 공식, 비공식 행사에 그를 대동하였으며 내외 귀빈을 만날 때마다 이범석을 소개하였다.
이범석은 1948년 3월 좌우대립과정에서 미군정에 의해 포고령 위반으로 사형을 선고받은 김두한에 감형을 위해 지청천 등과 존 하지에게 진정을 하며 구명운동을 벌였다. 1948년 이후 대한민국임시정부 내에 김구·김규식 등이 남북협상을 주장하자 그들과 결별하고 신익희·지청천 등과 임정의 다른 지도자인 이승만의 휘하로 건너갔다. 이후 이범석은 단독 정부 수립에 찬성 의사를 표시하였고, 1948년 5.10 총선거와 남한 단독 정부 수립에 참여하였다. 1948년 8월 2일 110 대 82의 표결로 국회의 인준을 얻어, 초대 국무총리가 되었다.
이범석은 1972년 5월 10일 장개석 총통의 취임식에 참석하기 위해 대만으로 떠날 예정이었으나 9일 밤 갑자기 심장장애를 일으켜 입원하였고, 입원 사흘째인 1972년 5월 11일 오전 5시 40분 지병인 심근경색으로 서울 명동의 성모병원에서 타계하였다. 장례는 5월 17일 서울 남산광장에서 성대한 국민장(國民葬)으로 거행되었고 서울특별시 동작구 동작동 국립현충원 국가유공자 제2묘역에 안장됐다. 저서로는 회고록 《우둥불》, 《방랑의 정열》, 《한국의 분노》 (1945), 논설집 《민족과 청년》 (1948), 《혈전 : 청산리 작전》, 《톰스크의 하늘아래》,《용의 굴》 등이 있다.
청산리전투
이범석은 청산리(靑山里)전투를 승리로 이끄는 데 큰 공을 했다. 청산리전투는 1920년 10월 21∼26일 김좌진이 이끄는 북로군정서 군과 홍범도가 이끄는 대한독립군 등이 주축이 된 독립군 부대가 만주 허룽현[和龍縣] 청산리 백운평(白雲坪)·천수평(泉水坪)·완루구(完樓溝) 등지의 10여 차례에 걸친 전투에서 일본군을 대파한 싸움이다.
청산리전투 이후 각 독립군은 1920년 11월~12월 밀산(密山)에 집결하였다. 러시아로 이동하여 전열을 재정비하고 독립군을 통합하기 위함이었다. 곧 여러 독립군은 서일(徐一)을 총재로 하는 대한독립군단(大韓獨立軍團)으로 통합되었고, 러시아의 지원을 기대하며 자유시(自由市)로 이동하였다. 그러나 한편으로 일본이 청산리전투의 보복으로 간도의 한인사회를 초토화한 간도참변이 발생하기도 하였다. 청산리전투에서의 승리는 20세기 초부터 만주에서 독립운동을 위하여 역량을 결집한 여러 노력의 결실이었으며, 이후 독립운동에서 무장 투쟁과 의열 투쟁이 이루어질 수 있는 기반을 마련하였다고 평가된다.
이범석에 대한 평가
이범석은 대한민국 건국의 주역, 대한민국 국군의 이념과 징신을 바로 세운 대한민국 국방건설의 아버지, 청산리 전투를 승리로 이끈 유능한 장군이라는 평가가 있다. 족청 운영 당시 미군정의 지원을 받은 점 때문에 미군정의 앞잡이라는 비난을 받았다. 독재주의라는 비판도 있었는데, 그는 '미군은 투쟁했던 적이 독재주의라면 그 미군이 독재주의 성격을 띠고 있는 청년 운동을 도와주지 않았으리라는 것은 간단한 논리의 귀결'이라며 반박하였다.
이범석은 권력을 위해서는 수단과 방법을 가리지 않는 사람으로도 평가받았다. 한편, 파시스트라든가 권력 지향이라는 주장은 대체로 이범석의 정치적 반대자들이 이범석을 비판할 때 주로 사용한 주장이다. 특히 이범석이 국방장관 재직시 군의 사상통일을 기하기 위해 강력히 추진했던 국방부 제2국 정훈국과 정훈병과 창설, 대북첩보수집 및 교란 전담 제4국 창설을 국방장관의 파시스트적 독단이라고 당시 미군정고문단들과 일부 정치적 반대자들이 주장하였다. 그러나 이는 일본군, 만주군, 광복군, 우익, 좌익 등 잡다한 세력이 집합된 군의 인적구성과 북한 공산주의자들과 대적하기 위한 효율적 정책이었음은 그 이후의 역사가 증명하고 있다.
이범석이 민족주의자가 아니라는 비난도 있다. 역사문제연구소에 의하면 그가 민족을 많이 외쳤으니까 친일파 숙청을 열렬히 주장해야 될 것인데도 불구하고 실제는 그와 정 반대였다며 이범석의 민족지상이나 일민주의는 기만적인 것으로 민족주체성이 배제된 파시즘이라 비판하였다. 한편, 이범석이 일본군 출신들을 군내 입대를 허용한 것은 신생 국방 인력 부족을 고려한 실용적 측면이며, 결국 이들 중 많은 이들이 이후 6·25전쟁에서 공산주의 적화를 막아낸 공로자가 되었다는 긍정적인 평가가 많다. 이범석의 민족주의는 극단적 민족주의를 표방하지는 않았다. 이범석에 대한 비판은 주로 좌익 측에서 주장하는 것으로 이는 정부 출범과 군 창설시부터 강력한 반공을 주장한 이범석을 견제하고 하야시키기 위한 음모로 인식되고 있다.
이범석은 재정적으로 가난함과 궁핍한 생활을 하였다. 민족청년단 운영 과정에서도 자금 부족으로 운영의 어려움을 겪었고, 의연금이나 기부금에 의존해야 했다. 국무총리와 국방장관 직을 마친 후 야인시절에는 서울의 변두리인 약수동과 신당동, 대방동을 전전할 정도로 재물에는 관심이 없었다. 당시 고위층들은 일본 적산가옥이나 사업체 한둘은 그저 당연한 것처럼 자기 차지를 하였던 것에 비하면 지도층의 품격에서 큰 차이가 있다고 평가받고 있다.[2]
동영상
각주
- ↑ 〈이범석(李範奭,1900.10.20.~1972.5.11)〉, 《두산백과》
- ↑ 〈이범석〉, 《위키백과》
참고자료
- 〈이범석(李範奭,1900.10.20.~1972.5.11)〉, 《두산백과》
- 〈이범석〉, 《위키백과》
- 〈이범석〉, 《나무위키》
- 어깨너머, 〈친일과 종북 논쟁〉, 《네이버블로그》, 2023-03-22
- 다알리아 향기, 〈국군 창군 `산파역' 맡은 이범석 장군〉, 《네이버블로그》, 2022-12-20
- 산의로, 〈烏史 人物 : 독립운동가 이범석〉, 《네이버블로그》, 2024-12-12
같이 보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