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장중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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장중경

장중경(중국어:张仲景zhāng zhòng jǐng)은 중국 한나라 말의 의사이다. 《상한론》의 저자로 알려져 있다.

개요

장중경은 자 중경. 본명 장기(張機). 허난성(河南省) 난양(南陽) 출생. 《상한잡병론(傷寒雜病論)》의 저자이다. 창사(長沙)의 태수(太守)를 지냈으나, 그의 일족이 열병으로 목숨을 잃자 의학에 깊은 관심을 가지게 되었다. 그러나 역사적인 문헌에 그에 관한 행적이 나타나지 않기 때문에 《상한잡병론》의 저자가 진(晉)나라의 신선가(神仙家)인 갈홍(葛洪)의 증조부 갈현(葛玄)이나 오(吳)나라의 장사 태수였던 장선(張羨)이라는 설도 있다. [1]

장중경은 중국 의학계에서 '의성' 또는 '의학의 원조'로 칭하고 있다. 그의 저서 '상한론'은 과거와 현재의 경험을 종합하고 자신의 실전 의료 경험까지 망라하여 저술하였고 총 16권이다. 이는 동한, 서한시대 이전의 의학을 집대성한 저서로 평가받는다. 후대 임상의학 본보기가 되었으며 현재에도 일부 의사들이 이 저서에 기록된 내용을 토대로 처방을 내리고 있다. 현재에는 <상한론>, <금궤요략> 두 권만이 전해 내려오고 있다. 장중경은 저서에서 진맥과 임상경험을 종합하여 총 20여 종의 병과 관련된 맥에 대해 언급하고 언급하고 있다.

장중경의 가계

장중경(150년 ~ 219년)의 본명은 장기(張機)이며 조조, 유비, 화타와 동시대 사람으로 중국 후한 말기의 유명한 중의사이다. 동시대인인 화타도 신의(神醫)로 이름난 사람인데, 화타는 저서를 남기지 못하였지만 반면 장중경은 '상한론'을 비롯한 의서의 저자로 동양의학에 큰 영향을 미쳤지만 그 자신에 관한 일화는 별로 남기지 못했다.

남양에서 태어난 장중경은 어려서부터 총명했는데, 10여 세쯤 춘추시대의 전설적인 의사인 편작이 제환후의 병을 단지 보기만 하는 것으로 알아내고는 치료했다는 이야기를 듣고 의술에 뜻을 두었다. 같은 마을의 장백조를 스승으로 모시고 의술을 배웠는데, 장중경은 실력도 뛰어났고 열의도 지극했기에 장백조는 자신이 평생 배운 의학지식을 그에게 모두 물려주었다. 한편, 장중경은 후한 영제 재위기에 효렴(孝廉)으로 뽑혀 관리가 되고, 헌제 때는 장사의 태수에 임명되었다. 효렴이란 효행과 품행이 뛰어난 사람을 지방의 추천을 통해 관리로 임명하는 제도인데, 후한 말기에는 선발 과정의 공정성이 대체로 사라져서 좋은 집안의 자제가 관리가 되는 수단에 지나지 않았다. 이를 볼 때 장중경의 집안이 어느 정도 유력했음을 짐작할 수 있다.

장중경의 정치 활동

장중경은 태수가 되어서 귀족놀음이나 하며 편안히 살지 않았다. 당시 장사는 거의 해마다 일어나는 역병에다 황건적의 난으로 백성들의 삶이 피폐했다. 게다가 190년 이후로는 장중경의 전임 장사 태수였던 손견과 그 후계자들이 형주목 유표와 세력 다툼을 벌였고, 이후 조조와 유비까지 이 지역의 지배권을 두고 싸워 바람 잘 날이 없는 고장이었다. 이런 상황에서 장중경은 세력 다툼에 한몫하기보다 백성을 위한 행정업무를 우선했으며, 시간을 내어 직접 백성들의 병을 진료하고 치료했다. 매달 1일과 15일에는 공무를 전폐하고 하루 종일 의사로서 환자들을 돌보았는데, 그래서 그날이면 태수의 관저 앞이 백성들로 메워져 발 디딜 틈이 없었다고 한다. 그리고 이렇게 직접 환자를 대하며 얻은 의학지식과 옛 문헌에 나타난 지식을 비교하고 종합하며 자신의 의학을 완성해 갔다.

그는 '건안칠자(建安七子)', 즉 헌제 시대에 이름을 날린 일곱 명의 문인 중 한 사람인 왕찬과 사이가 각별했다고 한다. 전설에 따르면 하루는 그가 왕찬을 만나 보니 안색에 병의 기운이 도사리고 있었다. 그래서 왕찬에게 충고했다고 한다. '오석탕을 빨리 들게. 그렇지 않으면 마흔 살쯤 되어 눈썹이 떨어지게 될 걸세. 그때가 되면 약도 듣지 않고 목숨이 위험해질 테니 서둘러야 하네.' 하지만, 왕찬은 '그래, 그래야지' 하면서 장중경의 말을 듣지 않았고, 끝내 40이 되자 눈썹이 떨어지더니 187일 만에 죽었다고 한다.

장중경이 어떻게 일생을 마쳤는지는 잘 알려져 있지 않은데, 장사 태수를 그만두고 의술에 전념하기로 하고 귀향했다고 한다. 그런데 많은 사람들이 혹독한 추위로 병들고 귀에 동상을 입어 괴로워하는 것을 보고 귀 모양의 만두인 교이(娇耳)를 빚고 특별한 약재를 넣어 먹이니 모두들 완치되었다고 한다. 이를 기리기 위해 동지가 되면 교자 물만두를 먹는 것이 풍속이 되어 나중에는 전 중국으로 퍼졌으며, 제갈량이 통만두의 시조이듯 장중경은 물만두의 시조라고도 한다.

장중경은 평생의 의술 성과를 집약해서 '상한잡병론'(상한졸병론이라고도 한다)이라는 책을 써냈다. 이를 읽은 화타가 '이것이야말로 사람을 살리는 책'이라고 감탄했을 만큼 당대에 이미 영향이 컸다고 한다. 하지만 그 원본은 전란 통에 유실되었고, 장중경의 제자인 왕숙화가 진(晉)왕조의 태의를 지내면서 '상한론'과 '금궤요략'으로 정리해 펴냈다. 하지만, 이 역시 유실되고 말았으며, 지금 보는 장중경의 저서는 북송 때 고보형, 손기, 임억 등이 정리해 펴낸 내용이다.

상한론

상한론(傷寒論)은 중국의 의서(醫書)이다. 《금궤요략(金匱要略)》과 함께 한방(韓方)의 쌍벽을 이루며, 한의학의 중요한 원천이다. 한의학을 상한론의학이라고 일컬을 정도이며 그 연구서목만도 500종을 넘는다고 한다. 중국의학에서 약물요법의 대성자라고 지목되는 후한(後漢)의 장중경(張仲景)이 저술한 것이라 전하며, 원래는 《상한잡병론(傷寒雜病論)》이란 이름으로, 급성열성전염병과 그 밖의 질환에 대한 치료법을 나타낸 것이었다. 3세기 말에 진(晉)의 왕숙화(王叔和)가 이것을 상한(傷寒)과 잡병으로 나누어 하나는 《상한론》, 또 하나는 《금궤요략》이라 개정(改訂)하였다 한다. 이 책은 수(隋) ·당(唐)의 의서에도 인용되고 있으나, 중요시하게 된 것은 북송(北宋) 이후의 일이다.

송나라 초기에는 국가에서 직접 개정출판하여 총 10권 22편으로 된 이른바 송본(宋本) 상한론이 나왔는데 모두 397조로 기재되고 처방수(處方數)는 중복된 것을 제외하고도 112종에 이른다. 그러나 이 송대의 실본(實本)은 전하지 않으며 현존하는 것은 후세의 번각본(飜刻本)이다. 상한이란 외감(外感)을 원인으로 하는 병의 총칭이며 책의 내용은 이들 각종 병증(病症)에 대하여 경험상 알려진 약재의 처방법을 지시한 것으로 어디까지나 실용 위주의 문헌이라 할 수 있다.

장중경의 상한론은 당시 감염병에 대한 매우 체계적이고 혁신적인 치료법을 제시한 한의학 고전으로, 전염병의 발전 단계에 따른 진단과 치료 방법을 구체적으로 설명하고 있다. 이 책은 도교나 불교의 신성적인 사상에서 벗어나 실질적인 의학적 접근을 통해 병의 상태와 증상에 맞춘 치료법을 발전시켰다. 특히 "육경변증(六經辨證)"이라는 체계는 인체의 생리와 병리, 치료 방법을 상세히 구분해 오늘날 한의학에도 큰 영향을 미치고 있다. 또한 상한론은 병을 치료할 때 면역력을 증강시키는 약물의 사용을 강조했다. 이는 약물을 통해 면역 반응을 유도하고, 이를 통해 환자가 자연적으로 병을 극복할 수 있도록 하는 방식으로 이해된다. 이는 현대 면역학적 이해와도 연관이 있는 중요한 개념으로 여겨진다. 상한론의 이러한 혁신적인 치료법은 한의학의 진보에 큰 공헌을 했으며, 이를 통해 다양한 질병을 치료하는 원리를 세우는 데 기여했다.

대한민국에서 '상한론'이 처음 언급된 것은 신라 진평왕 27년인 605년이며 일본에도 당나라에서 건너갔다고 한다. 이로 미루어 장중경의 의학이 중세 동아시아를 풍미하고 있었음을 짐작게 한다. 하지만, 이미 언급한 대로 오늘날 볼 수 있는 '상한론'은 송대 이후의 것이며, 그 해석도 주해서에 따라 6경 중심으로 보기도 하고, 본초 중심으로 보기도 하여 혼란이 있다.

금궤요략

금궤요략(金匱要略)은 동한 시기의 저명한 의가인 장중경이 저술한 '상한잡병론'의 잡병 부문이다. 상한잡병론은 총 16권으로 구성되었는데, 이 중 10권이 상한에 관한 내용이고, 6권이 잡병에 관한 내용이다. 금궤요략은 동한에서 서진 사이의 전란으로 소실되었다가 서진 시기에 왕숙화가 다시 수집하고 정리했지만, 상한 10권만 있고 나머지 잡병 부분은 누락되었다. 이후 북송 때 한림학사인 왕주가 한림원에 소장되었던 옛 의서 중에서 금궤옥함요략방을 발견했는데, 이는 모두 3권으로 상권에서는 상한론, 중권에서는 잡병, 하권에서는 방제 및 부인과 이론과 처방을 수록하고 있었지만, 간략본으로 완전하지 못했다. 그 후 임억이 이 간략본 중 상권을 제외한 나머지 중권과 하권을 교정하여 하권의 방제 부분을 중권의 각 증후의 아래 나열하고 상, 중, 하 3권으로 편집했다. 여기에 후대 의가들의 량방을 수집하여 각 편의 말미에 중경방과 같이 기재했는데, 이 책이 간략본인 까닭에 금궤략방론이라 명명했고, 후세에서는 이를 금궤요략이라 부르고 있다.[2]

1065년 북송(北宋)의 교정의서국(校正醫書局)에서 당시에 있던 두간본(簡本)을 근거로 해서 다시 교정하여 편찬하였는데 그중의 상한(傷寒)부분은 생략하고, 잡병(雜病) 위주의 내용만 취하여 다시 정정(訂正)해서 3권으로 만들고 《金要略方論》이라 개명(改名)하였다. 전서(全書)는 모두 25편이고 방제(方劑)가 262방이다. 서술한 병증은 내과 잡병면으로는 경습갈(痙濕?), 백합(百合), 고혹(孤惑), 음양독(陰陽毒), 학병(?病), 중풍역절(中風歷節), 혈비(血痺), 허로(虛勞), 폐옹(肺癰), 해수상기(咳嗽上氣), 분돈기(奔豚氣), 흉비(胸痺), 심통(心痛), 단기(短氣), 복만(腹滿), 한산(寒疝), 숙식(宿食), 풍한적취(風寒積聚), 담음(痰飮), 소갈(消渴), 소변이림(小便利淋), 수기 (水氣), 황달(黃疸), 경계(驚悸), 토뉵(吐?), 하혈(下血), 흉만(胸滿), 어혈(瘀血), 구토얼(嘔吐), 하리(下痢), 질궐(跌厥)등 40여 가지를 포괄했고 외 과면으로는 옹종(癰腫), 장옹(腸癰), 도부상(刀斧傷), 침음창(浸淫瘡) 등의 병증을 포괄했고, 부인과면으로는 경(經), 대(帶), 잡병(雜病), 임신(妊娠) 및 산후(産後)등의 병증을 포괄했다. 이밖에 급구졸사(急救卒死), 장부경락병맥(臟腑經絡病脈), 음식금기(飮食禁忌)등도 기술(記述)하였다.

금궤요략은 한대(漢代) 이전의 풍부한 임상경험을 총결하였고, 변증논치(辨證論治)와 방약배오(方藥配伍)의 일부 기본원칙을 제공하였다. 이 책은 매우 많은 실용적이고 유효한 방제(方劑)를 소개하여 현재까지도 임상에 널리 이용되고 있다. 그러나 글 가운데에는 약간의 미신적이 내용도 있다.

장중경의 의학사상

장중경의 의학 철학은 병의 근원을 파악하고, 인체의 자연 치유력을 극대화하는 데 중점을 두었다. 그는 치료에 있어서 약물의 남용을 경계하고, 몸의 균형을 맞추는 섭생을 중요시했다. 이는 서양의 히포크라테스 의학 철학과도 유사하게, 최소한의 약물 사용과 자연 치유의 원칙을 강조하는 접근법을 취했다. 특히 장중경의 처방에서 중요한 점은 개별 환자의 증상에 맞춰서 치료를 진행하는 것이었으며, 이러한 방식은 현대의 개인 맞춤형 의료와도 연결될 수 있다. 예를 들어, 계지탕 같은 처방은 단순히 약물의 투입보다는 체질과 병증을 종합적으로 고려해 처방되었고, 당시와 현대의 한약재 차이에 대한 연구도 계속되고 있다.

동영상

각주

  1. 장중경(張仲景,150~219)〉, 《두산백과》
  2. 금궤요략〉, 《위키백과》

참고자료

같이 보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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