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논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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논개

논개(論介)는 조선 시대 임진왜란 당시 의기(義妓)로 알려진 기생이다.

개요[편집]

  • 논개조선기생이었으며 옥반지를 끼고 임진왜란 당시에 일본 장군을 안은 채 남강에 뛰어들어 장군과 함께 죽었다. 전라북도 [장수군]] 출신이다. 성은 주(朱)씨라고 하지만(신안 주씨) 이는 양첩설과 함께 유포된 것으로 지방 전승이 출처라 근거가 희박하다. 이름인 논개를 '놓은(낳은)+개'라고 해석하여 4갑술인 술년 술월 술일 술시(1574년 음력 9월 3일 밤)에 태어났다고 보기도 하고 논개라는 이름 자체가 본명이 아니라 일본군이 말을 잘 하는 사람이라는 뜻으로 붙인 별명이라는 설도 있다. 의기 주씨(義妓朱氏), 의암 주논개(義巖朱論介)라고도 불린다.[1]
  • 논개는 병마절도사 최경회(崔慶會)의 후처이다. 임진왜란 때 최경회가 전사하자 일본군이 촉석루에서 벌이는 잔치에 참석해 일본군 장수 게야무라 로구스케를 끌어안고 남강에 투신하였다. 성은 주씨(朱氏)이고, 본관은 신안(新安:중국)이다. 전북 장수(長水) 임내면 주촌마을에서 태어났다고 전해지는데 출생일에 관해서는 알려지지 않았다. 논개에 대한 기록은 조선 광해군 때인 1621년 유몽인(柳夢寅)이 저술한《어우야담(於于野談)》에 전하는데 "진주의 관기이며 왜장을 안고 순국했다"는 간단한 기록만 남아 전한다. 그 때문에 논개는 기생이었다고 알려지게 되었다.[2]
  • 논개(1574년 ~ 1593년) 또는 주논개(朱論介)는 조선 선조 시대의 열녀이다. 조선 전라도 장수현 임내면 대곡리 주촌마을 출생으로 1574년 선비 주달문(朱達文)과 부인 밀양 박씨 사이에서 반가(班家, 양반의 집안)의 딸로 태어났다. 1592년 임진왜란이 발발하고, 최경회가 전라 우도의 의병장으로 의병을 모집하고 병사를 훈련할 때 주논개는 이를 도우며 보필한다. 1593년에 최경회가 경상우도(慶尙右道) 병마절도사로 임명되어 동행하였으나, 진주성이 함락되고 최경회가 순국하자 주논개는 일본군들이 진주 촉석루에서 연회를 벌이고 있을 때 기녀로 위장 잠입하여 왜장 기다 마고베(게야무라 로쿠스케)를 진주 남강 진주 의암으로 유인 후 기다 마고베를 끌어 안고 남강에 투신하여 순절(殉節) 했다. 1625년(인조 3년) 논개가 순국한 지 32년 뒤 논개가 떨어져 죽은 바위에는 진주의 백성들의 입에서 입으로 논개의 이야기가 전해져 오고 있었는데, 함경도 의병장 정문부의 둘째 아들 정대륭이 진주로 이사를 와서 의암(義巖)이라는 글씨를 써서 바위에 새겼다. 1651년(효종 2년) 경상우도의 재난을 살피러 조정에서 파견된 오두인이 진주에 들렀다가 바위에 새겨진 '의암(義巖)'이라는 글자를 보고, 촉석루에 의암기(義巖記)를 지었다. 1721년(경종 1년), 경상우병사 최진한(崔鎭漢)이 의암사적비를 의암 바로 위에 세워 그 뜻을 기렸다.[3]
  • 논개는 조선 중기 임진왜란 때 진주에서 순절한 의기(義妓)이다. 본관은 신안(新安). 아버지는 주달문이고, 어머니는 허씨이다. 임진왜란 중이었던 1593년 6월 김천일, 황진, 최경회, 고종후 등 관군과 의병의 결사적인 항전에도 불구하고 가토 기요마사(加藤淸正, 1562~1611), 고니시 유키나가(小西行長) 등이 이끄는 일본군에게 진주성이 함락되었다. 유몽인의 『어우야담 (於于野談)』 인륜편의 '효열' 대목의 기록에 따르면, 논개는 진주의 관기였다. 진주성이 함락되고 7만 민관군과 백성이 모조리 죽자, 논개는 구국의 일념으로 원수를 갚기로 결심하였다. 논개는 곱게 단장하고 왜장들이 촉석루에서 승전연을 베푸는 자리에 나아가 술에 만취해 접근하는 왜장을 남강으로 유인한 뒤, 왜장을 껴안고 남강 물에 투신하여 죽었다. 이때부터 의기 논개가 강물에 떨어졌던 바위를 의암(義岩)이라 부르게 되었다. 논개의 사실을 최초로 기록한 유몽인의 『어우야담』은 임진왜란 후 쑥대밭이 된 삼남(충청도, 전라도, 경상도) 지방을 돌아본 뒤 저술된 한국 최초의 야담집이다. 논개가 순국하던 1593년 세자시강원(世子侍講院)에서 광해군의 교육을 맡고 있다가 그해 가을 광해군을 모시고 수원, 전주, 진주 등 현장으로 다니며 직접 목격한 백성들의 참혹상을 기록하고 그 자료를 수집하게 된다. 또한, 유몽인은 삼도순안어사(三都巡安御使)로 왜적이 휩쓸고 간 곳곳을 살피고 사실을 기록하여 세자에게 전했다. 이처럼 유몽인의 기록은 현장에서 눈으로 보고 적은 것이나 다를 바가 없다고 할 수 있다. 논개에 대한 유몽인의 기록 또한 이런 점에서 사실로서의 가치를 지닌다.[4]

논개의 생애[편집]

  • 구전에 의하면 원래 양반가의 딸이었으나 아버지 주달문이 사망하고 집안에 어려움이 겹쳐 가산을 탕진하자 장수현감이었던 최경회(崔慶會)의 후처가 되었다고 전한다. 1592년 임진왜란이 일어나 5월 4일에 이미 서울을 빼앗기고 전라도 지역에서 고경명이 의병을 일으켜 왜적과 싸우다 전사하자 최경회가 의병장으로 나서 싸우게 되었다. 경상도에서 진주성만이 남아 왜적과 싸우고 있었는데 최경회는 의병을 이끌고 진주성을 지원하여 승리를 거두었다(제1차 진주성 싸움). 1593년 최경회는 경상우병사로 임명되어 싸웠으나 수많은 군관민이 전사 또는 자결하고 28일 만에 진주성이 함락되고 말았다. 이때 최경회는 남강에 투신하여 자결하였다(제2차 진주성 싸움).
  • 1593년 7월 일본군 왜장들은 승리를 자축하기 위해 촉석루(矗石樓)에서 주연을 벌이는데 논개는 최경회의 원수를 갚기 위해 기생으로 위장하여 참석하게 된다. 이 자리에 있던 그녀는 계획대로 열 손가락 마디마디에 가락지를 끼고 술에 취한 왜장 게야무라 로쿠스케[毛谷村六助]를 꾀어 벽류(碧流) 속에 있는 바위에 올라 껴안고 남강(南江)에 떨어져 적장과 함께 죽었다. 훗날 이 바위를 의암(義岩)이라 불렀으며, 사당(祠堂)을 세워 나라에서 제사를 지냈다. 1846년(헌종 12) 당시의 현감 정주석(鄭胄錫)이 장수군 장수면(長水面) 장수리에 논개가 자라난 고장임을 기념하기 위하여 논개생향비(論介生鄕碑)를 건립하였다. 그가 비문을 짓고 그의 아들이 글씨를 썼다. 1956년 '논개사당(論介祠堂)'을 건립할 때 땅속에 파묻혀 있던 것을 현 위치에 옮겨놓았다. 비문에는 "矗石義妓論介生長鄕竪名碑"라고 씌어 있다. 장수군에서는 매년 9월 9일에 논개를 추모하기 위해 논개제전(論介祭典)을 열고 있다.

논개에 대한 평가[편집]

  • 논개는 진주목(晉州牧)의 관기(官妓)로 1593년(선조 26) 임진왜란 중 진주성이 일본군에게 함락될 때 왜장을 유인하여 순국한 의기(義妓)이다. 진주성이 왜적에게 짓밟힐 때 기녀로서 적장을 유인하여 남강(南江)에 빠져 산화한 사실은 많은 사람들의 입을 통하여 널리 유포되었다. 구전되어오던 논개의 순국 사실이 문헌이나 금석문에 기록되기 시작한 것은 1620년경부터라고 추정된다. 사회의 멸시를 받던 기녀의 몸으로 나라를 위하여 자신의 목숨을 바친 충성심에 감동한 유몽인(柳夢寅)이 『어우야담於于野談)』에 채록하여 문자화된 것이었다. 한편 진주 사람들이 논개의 애국적 행위를 기리고 전하기 위하여, 순국한 바위에 '義巖(의암)'이라는 글자를 새겨넣은 것도 이 무렵이었다.
  • 논개를 추모하는 지역민들의 노력에도 불구하고, 임진왜란 중의 충신·효자·열녀를 뽑아 편찬한 『동국신속삼강행실도(東國新續三綱行實圖)』에는 논개의 순국 사실이 누락되었다. 이는 유교 윤리에 젖은 일부 편집자들이 관기를 정렬(貞烈)로 표창함이 불가하다는 주장 때문이었다. 보수적인 집권 사대부들의 편견 때문에 논개의 애국 충정은 정당하게 평가받지 못한 것이었다. 일부 사대부들의 몰이해에도 불구하고, 진주성민들은 성이 함락된 날이면 강변에 제단을 차려 논개의 의혼(義魂)을 위로하였다. 그리고 국가적인 추모 제전이 거행될 수 있도록 백방으로 노력하였다.
  • 진주성민들의 오랜 노력이 결실을 맺기 시작한 것은 경종 이후의 일이었다. 진주성민들은 절의(節義)를 위하여 자신의 몸을 바친 논개의 의로운 행위를 정부가 마땅히 표창해야 한다고 주장하였다. 진주성민들의 요청을 받은 경상우병사 최진한(崔鎭漢)은 1721년(경종 1)에 기녀 신분으로 의를 위하여 목숨을 바친 논개의 의열에 대한 국가의 포상을 비변사에 건의하였다. 이때 거론된 구체적인 포상 방법은 봉작(封爵)을 내려주고 사당(祠堂)을 건립해주는 것이었다. 최진한의 건의를 받은 비변사는 보다 확실한 인증 자료를 요구하였다. 이에 최진한은 관민합동으로 「의암사적비(義巖事蹟碑)」를 건립하고, 그 인본을 제출하여 자손의 급복(給復)에 대한 특전을 허락받기에 이르렀다. 이는 진주 지역민들의 숙원인 논개에 대한 봉작과 사당을 세워 사액(賜額)을 받는 것에는 미치지 못하는 것이었다. 그러나 국가가 논개의 순국 사실을 공식적으로 인정하고, 의기가 논개를 지칭하는 공식 호칭이 되는 계기가 되었다. 논개 자손에 대한 급복의 특전이 베풀어진 20여 년 뒤, 의혼을 봉안하는 사당이 건립되었다.
  • 1739년(영조 16)에 경상우병사 남덕하(南德夏)의 노력으로 의기사(義妓祠)가 의암 부근에 세워지고, 논개 추모제가 매년 국고의 지원을 받아 성대히 치러지면서 국가의 공식적인 포상 절차가 마무리된 것이었다. 의기사는 그 뒤 홍화보(洪和輔)·홍백순(洪百淳)·이지연(李止淵) 등이 여러 차례 보수하여 지금까지 촉석루(矗石樓) 옆에 그 모습을 유지하고 있다.

의암 주논개생가지[편집]

  • 의암 주논개생가지(義巖朱論介生家址)는 임진왜란 때 왜장과 함께 남강에 투신한 논개를 기리기 위해 조성한 곳으로 전북특별자치도 장수군 장계면 대곡리에 있다. 임진왜란 때 왜장을 끌어안고 남강에 뛰어들어 함께 죽은 논개(論介 ?~1593)를 기리기 위해 조성한 곳이다. 논개의 성은 주씨(朱氏)이고, 전라북도 장수군 장계면 대곡리 주촌마을에서 태어났다. 1986년 대곡저수지(오동제)를 만들면서 논개가 태어난 마을 전체가 수몰되자 저수지 근처에 생가만 복원해두었다가 1996년부터 2000년에 걸쳐 조성한 현재의 위치에 새로 복원하였다.
  • 의암 주논개생가지에는 생가뿐 아니라 논개기념관·단아정(丹娥亭)·의랑루(義娘樓) 등의 건물과 주논개비·최경회비·주논개부모묘 등이 있고 민속놀이마당과 인공폭포·관리사·판매점도 조성되어 있다. 부지면적은 약 6만 6,100m²이다. 생가는 건물 2동으로 이루어진 ‘一’자형 초가로 돌담으로 둘러져 있으며, 방 안에는 영정과 침구, 책들이 놓여 있다. 장수군 장수읍 두산리에는 논개의 영정을 모신 논개사당(전북특별자치도 기념물 제46호)이 있다.

논개 비[편집]

  • 논개 비(論介碑)는 경상남도 진주시 본성동 진주성의 의기사(義妓祠) 앞에 있는 비로 조선 중기의 의기(義妓)인 논개의 충절을 기리기 위해 세웠다. 1954년 조선 중기의 의기(義妓)인 논개의 충절을 기리기 위해 세운 비이다. 경상남도 진주시 본성동 진주성의 의기사(義妓祠) 앞에 있다. 비문은 설창수(薛昌洙)가 짓고 오제봉이 썼다. 논개의 충절을 기리기 위해 봉작 하사 및 사당 건립 등이 추진되었으며, 1740년(영조 16)에는 의기사(義妓祠)가 세워지기도 하였다.

논개 묘역[편집]

  • 논개 묘역(論介墓域)은 경상남도 함양군 서상면 금당리 산31번지에 있는 논개의 묘역이다. 전북특별자치도 장수군과 경계를 이루고 있는 이곳 방지마을 옆 속칭 탑시기골에 있다. 높이 1.2m, 지름 5.4m, 길이 5.3m에 달하는 대형 분묘가 남향으로 자리 잡고 있다. 전북특별자치도 장수군의 의암사적보존회에서 십수 년 동안 문헌과 구전을 토대로 현장 탐문 조사와 경상남도 문화유산 전문위원 및 향토사학자들의 고증을 거친 끝에 1976년에 발견하게 되었다. 1980년대 후반 함양군의 논개묘 성역화사업으로 봉분을 다시 만들고 비석을 세우며 주위를 정화하여 새로운 모습으로 단장하였다.

논개사당[편집]

  • 논개사당(論介祠堂)은 전북특별자치도 장수군 장수읍 두산리에 있는 사묘·제단이다. 1981년 4월 11일 전북특별자치도 기념물로 지정되었다. 장수군에서 관리하고 있다. 장수읍 남산 남쪽 기슭에 위치한, 논개의 영정을 모신 사당이다. 의암사(義岩祀)라고도 한다. 장수삼절(長水三節)로 알려진 논개는 조선 중기의 의기(義妓)로, 진주병사 최경회(崔慶會)의 사랑을 받았다 한다. 임진왜란 때 끝까지 저항하던 진주성이 함락되자 왜장들은 촉석루(矗石樓)에서 주연을 베풀었다. 기생으로서 그 자리에 참석한 논개는 성의 함락과 군관민의 죽음에 대한 울분을 참지 못하고 왜장 게야무라 후미스케[毛谷村文助]를 바위 위로 유혹해 껴안은 채 남강 아래로 투신하여 자결하였다. 그가 뛰어내린 바위를 훗날 의암이라 하였다. 지금 사당을 의암사라 부르는 연유이다. 조선 헌종 12년(1846)에 현감으로 장수에 온 정주석(鄭胄錫)은 이곳이 논개가 자란 고장임을 기념하여 논개생향비(論介生鄕碑)를 세웠는데, 사당 건립 당시 발굴되어 경내에 옮겨져 있다. 지금의 사당은 1956년에 호남절의록(湖南節義錄)·호남삼강록(湖南三岡錄)·의암주논개사적비 등 사실(史實)에 근거하여 장수군 내 각계 인사가 성금을 모아 건립을 추진하면서 비롯된 것이다.

진주 의암사적비[편집]

  • 진주 의암사적비(晉州 義巖事蹟碑)는 경상남도 진주시 본성동에 있는 조선 시대의 비(碑)이다. 2000년 1월 31일 경상남도 유형문화유산으로 지정되었다. 1593년(선조 26) 임진왜란 2차 진주 싸움 때 진주성(晉州城)이 함락되고 7만여 명의 민·관·군이 순절한 뒤 촉석루에서 왜장을 끌어안고 순국한 논개(論介)의 공적비이다. 의암에서 촉석루로 올라가는 길목 암반 위의 비각 안에 세워져 있는데, 명암(明庵) 정식(1683∼1746)이라는 선비가 진주 사민(士民)들로부터 금품을 모아 논개 의거의 징표로서 1722년(경종 2)에 다듬은 것이다. 비문에는 설화문학의 대가 유몽인(柳夢寅)의 《어우야담(於于野譚)》에 기록된 내용을 인용하여 정리하고 논개를 기리는 정식의 시가 새겨져 있다. 논개의 사적을 기록한 금석자료로서 임진왜란 당시 진주성의 상황과 논개의 순국사실을 알 수 있는 귀중한 자료이다.

진주 의암[편집]

  • 진주 의암(晋州 義巖)은 경상남도 진주시 본성동에 있는 임진왜란 때 논개가 왜장을 껴안고 순국한 바위. 2001년 9월 27일 경상남도 기념물로 지정되었다. 논개의 의로운 행동을 기리기 위해 진주 지방의 양반들과 백성이 이 바위를 의암이라고 하였다. 1629년(인조 7) 정대륭(鄭大隆)이 바위벽에 <의암>이라는 글씨를 새겼고 의암의 강 쪽 절벽에는 <일대장강 천추의열(一帶長江 千秋義烈)>이라고 새겨 충의를 기리고자 하였다. 2001년 9월 27일 경상남도 기념물로 지정되었다.

동영상[편집]

각주[편집]

  1. 논개〉, 《나무위키》
  2. 논개(論介,?~1593)〉, 《두산백과》
  3. 논개〉, 《위키백과》
  4. 논개〉, 《향토문화전자대전》

참고자료[편집]

같이 보기[편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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