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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3년 10월 16일 (월) 20:26 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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피낭섬 또는 페낭섬(영어: Penang Island, 말레이시아어: Pulau Pinang, 중국어: 槟岛)은 말레이시아 피낭주의 일부이다. 말레이반도 서해안에 위치해 있는 섬이다. 피낭이라는 이름은 '아레카 너트 섬'(areca nut island) 즉 빈랑섬(檳榔嶼)을 의미하는 현대 말레이어 이름인 '풀라우 피낭'(Pulau Penang)에서 유래하였다. 피낭섬은 동양의 진주, 또는 진주의 섬이라고도 불린다.[1]
개요
피낭섬은 말레이시아 북서부에 위치한 섬이다. 면적은 1,048㎢, 인구는 1,738,600(2023년)명이다. 말레이반도와는 피낭 다리(Penang Bridge)와 술탄 압둘 할림 무아잠 샤 다리(Abdul Halim Mu’adzam Shah Bridge)와 연결되어 있다. 피낭섬은 원래 원주민 뱃사람들에 의해 '풀라우 카-사투'(Pulau Ka-Satu), 즉 '첫 번째 섬'(The First Island)이라는 이름으로 알려졌는데, 이는 링가(Lingga) 군도와 크다(Kedah) 사이의 무역로에서 마주치는 가장 큰 섬이었기 때문이다. 이와 유사하게, 당시 크다의 지배자였던 시암(Siam, 현재의 태국)인들은 이 섬을 코 마악(Koh Maak, 태국어: กากมหะา)이라고 불렀다. 15세기에 피낭섬은 빈랑섬(Bīngláng Yù)(檳榔嶼, 槟榔屿)이라고 불렸다. 중국 명나라의 정화가 사용했던 항해 도면에는 '빈랑섬'으로 표시되어 있었고, 16세기 포르투갈의 역사학자 에마누엘 고디노 데 에레디아(Emanuel Godinho de Eredia)는 이 섬을 '풀로 피나옴'(Pulo Pinaom)이라고 표기하기도 했다. 웨일즈 왕자의 섬(Prince of Wales Island)라는 이름으로 영국의 동인도회사가 1786년 8월 12일에 당시 웨일스 공, 후에 대영제국의 왕이 된 조지 4세(King George IV)의 생일에 이름붙인 적이 있다. 주도인 조지타운(George Town, Penang)은 그가 왕이 된 후에 붙여진 이름이다. 피낭섬은 약 400년간 동서양을 잇는 무역항으로 번영을 구가하는 한편, 포르투갈, 네덜란드, 영국의 식민지와 일본의 점령기를 경험하였다. 섬의 주도는 조지타운(George Town)이고, 가장 큰 도시는 스버랑 페라이(Seberang Perai)이다.[2]
역사
피낭섬은 15세기 ~ 16세기 말라카 술탄국의 일부였는데, 포르투갈이 소수의 콩키스타도르들을 동원해 말라카 술탄국을 멸망시키며 이곳까지 점령하였고 나중에는 포르투갈의 세력이 점차 약화되면서 말라카가 네덜란드인들에 함락되자 네덜란드로 넘어갔다. 그러다가 1786년에 영국이 이 지역을 포함해 말라카와 싱가포르에 해협 식민지를 설치했으며, 지금 서말레이시아인 말라야 지역의 타 지역에 비해 상당히 영국화되었다. 그리고 영국의 통치 과정에서 아유타야 왕조가 멸망한 후 태국이 혼란스럽자 수많은 중국계 태국인들이 건너오고 아편전쟁 이후 청나라에서 남방 푸젠성과 광둥성, 하이난성 사람들이 대거 쿨리로 건너오면서 중국계 이주민이 늘어났다. 이들은 나중에 중국계 말레이시아인들의 조상이 된다. 1826년 페낭은 말라카, 싱가포르와 함께 1867년 영국의 식민통치를 이끌기 위해 인도에 있는 영국 행정부 하의 해협 정착촌의 일부가 되었다. 나중에 이 해협식민지들은 1946년 영국 정부가 설치한 말라야 연합에 반환되었으며 1948년 말라야 연합을 계승한 말라야 연방 등에도 잔존하였고 1963년에 창설된 말레이시아 시대부터도 계속 잔존 중이다.[3]
조지타운
조지타운(영어: George Town, 중국어 간체자: 乔治市, 정체자: 喬治市)은 말레이시아 풀라우피낭주의 주도로 면적은 약 150km²이다. 도시 이름은 영국의 조지 3세 국왕에서 유래된 이름이다. 1786년 영국 동인도 회사가 이곳에 기지를 설치하면서 신설되었으며 영국의 식민지였던 해협 식민지의 중심 도시로 성장했다. 그 후 자유항으로서 싱가포르와 경쟁하면서 발전했는데, 특히 말레이 반도 서해안의 코프라, 주석, 고무의 수출항으로서 발전하였다. 동남아시아에 있는 전형적인 복합도시의 하나로, 화교와 인도인 거주자가 많다. 시내에는 약 200개의 중국인 사원(寺院)이 있으며, 또 이슬람 모스크, 인도인의 시바 사원도 있다. 이들 각 민족의 축제는 시의 명물이 되어 있다. 시를 조망하는 피낭힐(900m)의 꼭대기까지는 관광을 위한 케이블카가 통하며, 대안(對岸)의 본토와는 페리보트가 왕래한다. 2008년 7월 8일 믈라카와 함께 유네스코가 지정한 세계유산으로 선정되었다. 페낭 항의 돌제 부두 하나가 이곳에 있다.
1824년 영국이 이곳에 해협식민지를 설치하면서 본격적인 역사가 막을 열었다. 이때는 싱가포르, 말라카와 같은 해협식민지를 구성했으나 저 둘은 갈려져 나와버렸으며 이후 역사가 엇갈려버렸다. 그리고 청나라 남방에서 쿨리들이 들어와 개간해서 어느새 쿨리들의 숫자가 말레이인보다 많아졌으며 쿨리들만으로 부족하자 인도 남부에서도 쿨리를 데려와서 타밀인도 많이 이주했다. 사실 여기 화교 사회는 태국에서 아유타야 왕조가 미얀마 신뷰신의 침략으로 처참하게 멸망한 후 혼란을 피해 배 타고 도망친 중국계 태국인들이 시작했다. 오늘날 중국계 말레이시아인 중에서 영국 문화를 받아들이며 기독교를 믿고 영어를 쓰는 부류와 함께 불교를 믿고 민남어와 치우차우 등 전통 중국 언어를 고수하며 전통을 지키는 부류가 있는데 후자는 중국계 태국인과도 대거 섞여버렸다. 쿨리들이 들어오면서 태국 화교들과 협업하고 서로 상부상조하며 자연스레 화교 사회가 형성되었다. 말레이시아가 형성되면서 풀라우피낭주의 중심도시가 되었으며 해협식민지 시절부터 영국의 영향을 강하게 받았다.
영국은 이곳에 자국의 문화를 대대적으로 이식시켰으나 그렇다고 미국, 캐나다 등 북아메리카나 호주, 뉴질랜드처럼 백인이 우세하게 이어지지는 않았다. 이는 아시아에 위치한 식민지라서 영국인 이주민이 너무 터무니없이 적었기 때문인데 그렇다고 호주처럼 유형지로 쓰일 만한 넓이도 아닌지라 백인들이 거의 오지 않았다. 대신 중국계 말레이시아인들이 대거 영국식 문화를 받아들였다. 1957년 1월 1일 특별시 승격을 받아 말레이시아 최초의 특별시가 되었으나, 1972년 쿠알라룸푸르가 특별시로 승격되었고 2년 후 직할시로 승격되면서 위상이 역전되었다. 이전부터 화교 중심의 피낭과 말레이인 중심의 쿠알라룸푸르가 다소 경쟁관계였으나 이후로 본격화되었다. 물론 중국계 말레이시아인들은 쿠알룸푸르에서도 상당수다. 오히려 쿠알라룸푸르는 허허벌판 나대지를 쿨리들이 청나라 남부에서 내려와서 개간한 곳이다. 쿠알라룸푸르는 단지 정치 대권은 말레이인이 쥐고 있지만 페낭은 정치 대권조차 화교의 손에 있다는 점이 다른 점이다. 2015년 1월 1일 피낭 주 전체가 특별시로 승격되면서 조지타운의 의미는 사실상 무의미해졌다. 조지타운, 바얀르파스 등 풀라우피낭을 구성하던 도시들은 그냥 일개의 구역으로 전락한다. 그러나 여전히 풀라우피낭은 '주'로 규정되어 있으며 그 자체를 도시로 규정하는 건 아직까지도 지켜지지 않고 있다. 물론 사람들 사이에서는 언제나 피낭이 일개의 '도시'로만 취급된다.[4]
피낭주
피낭주(말레이어: Pulau Pinang) 또는 페낭주(영어: Penang)는 말레이시아를 구성하는 13개의 주 가운데 하나로, 프를리스주 다음으로 말레이시아에서 두 번째로 면적이 작은 주이며 말레이시아에서 여덟 번째로 인구가 많은 주이다. 말레이반도 서부와 피낭섬으로 구성되어있는데, 주도는 피낭섬 쪽에 있는 조지타운(George Town)이다. 사실 섬과 주 이름뿐만 아니라 이 도시 자체를 그냥 페낭이라고 부른다. 인구는 약 177만 명으로 이중 75만명 가량이 페낭섬에 살고 있다. 중국계 말레이시아인이 다수인지라 1인당 주민 소득이 2위일 정도로 말레이시아 안에서는 경제 사정이 꽤 괜찮은 주이다. 말레이시아 수도인 쿠알라룸푸르로부터 서북쪽으로 한참 떨어져 있으며 상당한 부분이 육지에서 떨어진 섬에 위치해 있다. 섬과 맞닿은 말레이 반도 본토에도 풀라우피낭 주 관할 지역이 일부 있으며 크다 주에 약간 끼어있다. 중국계 말레이시아인들이 다수인 도시란 점이 특이점이며, 역사도 수도인 쿠알라룸푸르보다 더 오래되었다. 말레이시아에서 유일하게 중국계 말레이시아인이 다수를 차지하는 주이다. 하지만 가장 큰 종교는 이슬람이다. 그래도 화교들이 다니는 교회도 많으며 특히 성공회 소속 조지타운 교회는 19세기에 세운 곳으로 영국식 영어와 표준 중국어 감사성 찬례를 드린다. 그리고 태국인 이민자들도 은근히 많아 거대한 와불상이 있는 태국 사원 같은 태국 절도 많이 보인다. 태국에서 온 이민자들은 대부분 중국계 태국인인 시노타이인들이다. 이러한 중국계 태국인 즉 시노타이들이 만든 절 중에서 한국에서도 유명한 사사(蛇寺) 즉 뱀의 사원도 있다. 내부는 말 그대로 중국풍과 태국풍이 마구 섞여있다. 드나드는 사람들은 태국에서 건너온 중국계 태국인들 및 그들과 통혼 및 교류를 이어간 중국계 말레이시아인 불교도이며 법회도 태국어를 쓰는 등 태국 분위기가 강하다. 태국절 외에는 미얀마 출신들이 만든 절도 있으며 미얀마절은 분위기가 태국절과 또 다르다.
섬과 육지를 연결하는 두 개의 피낭대교가 존재한다. 그러나 안타깝게도 두 다리는 체제선전을 위한 흑역사일 뿐이며 막상 현재에는 별로 볼거리가 없어졌다. 그리고 다리 외에도 배를 통해서도 연결되는데 배 타는 곳이 버터워스역 기차역 바로 앞이라서 태국이나 쿠알라룸푸르, 싱가포르에서 여기로 기차 타고 왔으면 배로 갈아타서 들어가는 게 편하다. 공항으로는 말레이시아 제3의 공항인 피낭 국제공항이 있다. 한국에서는 화물편 외에 직항은 없으며 쿠알라룸푸르 국제공항 또는 코타키나발루 국제공항을 거쳐야 한다.[5]
피낭 대교
페낭 대교는 말레이시아 본토인 세베랑 페라이(Seberang Perai)와 페낭섬을 연결하는 다리로 총 길이가 13.5km이다. 완공 당시 아시아에서 최대, 세계에서 3번째로 긴 다리였다. 한국의 현대건설이 만들었으며 1982년 착공, 1985년 완공하였다. 현대건설은 이 작업으로 1986년 미국 컨설팅엔지니어링협회 주관 연례 엔지니어링 우수상 시상식에서 대상을 수상하였다. 페낭 대교가 지어지기 전까지 말레이시아 본토와 페낭섬은 페리로만 운항하였다. 페낭 대교는 개통된 이후부터 페낭의 주요 길목이자 말레이시아의 대표 명소로 자리하였다. 해상 구간만 약 8.5km에 이르며, 중앙 경간은 왕복 6차로, 기타 구간은 왕복 4차로이지만 최근 전체 구간 왕복 6차로로 확장을 앞두고 있다. 해상으로부터 주탑 높이는 101.5m에 다다른다. 차로 페낭 대교를 건너는데 약 20분이 소요된다고 한다. 페낭 대교는 현재 말레이시아 플러스 고속도로 주식회사가 관리하고 있다. 페낭섬에서 가장 높은 페낭 힐 정상에 오르면 페낭 대교의 모습이 내려다보이는데, 그 모습이 장관으로 꼽힌다.[6]
지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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동영상
각주
참고자료
- 〈피낭섬〉, 《위키백과》
- 〈조지타운(말레이시아)〉, 《나무위키》
- 〈풀라우피낭〉, 《나무위키》
- 〈페낭 섬〉, 《요다위키》
- 〈피낭섬(두산백과)〉, 《네이버 지식백과》
- 〈페낭 대교(저스트고 관광지)〉, 《네이버 지식백과》
같이 보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