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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3년 7월 4일 (화) 10:12 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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유카탄반도(영어: Yucatán Peninsula, 스페인어: Península de Yucatán, 문화어: 유까딴반도)는 멕시코 남동부에 있는 중앙아메리카의 반도로 멕시코만과 카리브해를 나눈다. 면적 18만km²이며 중심지는 메리다(Mérida)이다.[1]
개요
유카탄반도의 서쪽과 북쪽은 멕시코만과 접하고, 동쪽은 카리브해에 면한다. 반도의 면적은 약 181,000km², 대부분이 멕시코령(領)이며, 남부는 벨리즈와 과테말라에 속한다. 반도의 대부분이 저평한 석회암대지로 되어 잡목림을 이룬다. 북부는 기온이 높고 건조하며, 남부는 고온다습한 기후이다. 해안은 멀리까지 얕으며, 석호(潟湖)와 사주가 발달하였다. 북서부의 1/5이 개척되어 있고 19세기 말경부터 사이잘삼의 재배지로 유명하다. 역사적으로 마야문명이 이 일대를 중심으로 번성했다. 16세기 스페인의 탐험가 프란시스코 에르난데스 데 코르도바(Francisco Hernández de Córdoba)가 노예사냥과 황금약탈을 위해 유카탄반도 일대를 탐험했으며 그는 원주민과의 대화에서 '그들이 이렇게 말하는데'라는 의미의 '시우탄'이라는 마야어가 '유카탄'으로 불리게 되었다. 당시 유카탄반도 일대는 황금이 많다는 소문이 퍼져 많은 원정대가 이 지역을 약탈하였다. 1535년 프란시스코회의 사제들이 유카탄 반도에 상륙하였고 이들은 마야인의 문명을 미개한 것으로 여겼고 신전 건물과 서적 등이 파괴되거나 사라졌다. 메리다의 외항인 프로그레소는 많지 않은 양항 중의 하나이다. 석회암 지형으로 물이 흡수되기 때문에 지표수가 적으며, 지하수를 길어 올리기 위한 풍차가 독특한 풍경을 이룬다. 다른 지역은 미개지가 광활하며 옥수수, 사탕수수, 잎담배, 목화, 커피가 재배되고 껌의 원료인 치클이 채취된다. 에스파냐인이 오기 전에는 마야 문명의 중심지였으며, 욱스말과 치첸이차를 비롯하여 그 유적이 많다. 이들 유적에는 특히 미국인이 많이 찾아오며, 메리다는 그 관광기지이기도 하다. 유카테코(유카탄人) 사이에서는 지금도 마야어가 사용되고 있다. 한편 코수멜섬과 무헤레스섬도 휴양지로 널리 알려져 있다.[2]
어원
유카탄(스페인어: Yucatán)이라는 지명의 어원에 대해서는 크게 두 가지 설이 있다. 하나는 프란시스코 에르난데스 데 코르도바(영어판)가 1517년 처음 이 지방에 도착해서 현지인에게 지명을 물어봤을 때 ‘모르겠다’고 대답한 것이 ‘유카탄’으로 들렸다는 설이다. 유카텍 마야어로 실제 말했을 거라고 추측되는 말로는 'mathan cauyi athán'·'tectecán'·'ma'anaatik ka t'ann'·'ci u t'ann' 등이 있다. 이 설은 에르난 코르테스가 카를 5세에게 보낸 편지에 실려 있다. 두번째 설은 카사바(스페인어: yuca)가 많이 나는 지역이라서 붙은 이름이라는 설으로, 베르날 디아스 델 카스티요(영어판)가 주장했다.
지리
멕시코의 유카탄주, 킨타나로오주, 캄페체주, 벨리즈의 북부, 과테말라의 북부에 해당한다. 옛 마야문명이 발달했던 곳으로 그 후예인 마야인과 메스티소가 이 지역 인구의 상당수를 차지며, 유카텍 마야어가 널리 쓰이고 있다.
지형
유카탄반도는 탄산염암으로 이루어진 유카탄 대지(臺地)의 일부로, 석회암층이 주로 분포하고 돌로마이트(dolomite) 층도 곳곳에 분포한다. 유카탄반도, 쿠바섬, 미국의 플로리다반도 모두가 신생대 제3기에 형성된 석회암 대지에 해당하여, 유카탄반도의 경관도 전체적으로 석회암으로 이루어진 카르스트 지형이 주를 이루며 고도가 낮고 기복이 완만하다. 세노테(cenote)라 불리는 석회암 함몰 지형이 북부 저지대를 중심으로 광범위하게 형성되어 있다. 유카탄반도는 반도 전체가 석회암 지대를 이루다 보니 지하로 물이 흡수되고 지표 유출이 적어서 하천의 발달은 미약하다. 호수와 습지가 형성되어 있기는 하지만 이 또한 음용수로는 적합하지 않은 상태이다. 그러나 해안과 인접한 지리적 특성으로 해수의 압력에 의해 형성된 지하 대수층(帶水層)이 분포하고 있다. 무수히 많은 세노테가 이러한 지하 대수층으로의 접근을 가능하게 해 주었고, 그 지하수가 고여 천연 우물이 되었다. 그 결과 세노테는 식수원으로서 고대로부터 현재까지 마야 인들의 존립 기반이 되어 왔다. 유카탄반도 북쪽 해안에는 위성 사진으로 확인할 수 있는 거대한 웅덩이가 있다. 지름이 180㎞가 넘는 칙술루브 크레이터(Chicxulub crater)인데, 다수의 세노테들이 이 웅덩이의 외곽을 따라 둥글게 늘어서 있다. 이들 세노테의 환상 구조를 세노테의 고리(Ring of Cenotes)라고 부르는데, 이러한 경관은 일반적으로 운석의 충돌과 관련하여 설명되고 있다. 중생대 말 공룡의 멸종을 설명하는 가설 중 하나로, 운석 충돌로 거대한 충돌 구덩이(운석공)가 만들어지고 그 위에 석회암 지층이 쌓인 이후, 운석공의 가장자리를 따라 다수의 석회암 함몰 지형이 형성되어 원형의 분포 형태를 띠게 되었다는 것이다. 통상 석회암 함몰 지형은 지질 경계선, 단층선 또는 절리면을 따라 용식이 진전되기 때문에 선상으로 배열되는 경우가 흔하다.[3]
기후와 식생
대부분의 카리브해 연안과 마찬가지로 유카탄반도 역시 대서양의 허리케인 통과 지대에 속해 있어 열대성 폭풍(태풍)에 취약하다. 허리케인의 내습은 유카탄 반도를 포함하여 멕시코의 관광 산업 전반에 큰 영향을 미칠 정도이지만, 실제 허리케인이 이 지역을 통과하면서 머무는 시간은 상대적으로 짧은 편이다. 기온은 높지만 해안으로부터 불어오는 바람의 영향으로 청량감을 느낄 수 있다. 습도는 전반적으로 높으며, 특히 열대 우림이 분포하는 지역은 기온과 습도가 매우 높다. 열대 우림은 유카탄 반도의 대표적인 식생이다. 멕시코, 과테말라, 벨리즈의 접경 지대에는 중앙아메리카 최대의 열대 우림 지대가 펼쳐져 있지만, 현재 이들 지역은 광범위한 벌목으로 몸살을 앓고 있다.[4]
마야 문명
유카탄반도는 역사적으로는 마야 문명이 생겨난 곳이다. 유카탄 반도에는 마야 문명 당시의 유적들이 남아 있으며 대표적으로 치첸 이트사가 있다. 백악기말에 소행성이 떨어져 백악기 대멸종을 일으킨 곳도 유카탄반도이다. 마야 문명(영어: Maya civilization)은 메소아메리카의 멕시코 동남부, 과테말라, 엘살바도르 북부, 벨리즈, 온두라스 서부, 유카탄 반도 지역을 중심으로 번영하였던 문명이다. 당시 아메리카 대륙에서 가장 발달한 언어 체계와 고도의 문화를 향유했으며, 높은 수준의 예술, 건축, 수학, 달력, 천문학 기술을 가지고 있었다. '마야'라는 단어 자체는 당시 유사한 지역 전체에 살고 있던 민족들을 통칭하는 단어이나, 정작 그 시대의 사람들은 자신들을 동일한 민족이나 국가 단위로 여기지 않았기에 스스로를 '마야인'이라고 부르지 않았다. 마야 문명은 크게 3개의 시기로 나누어진다. 이는 선고전기, 고전기, 후고전기이다. 선고전기 앞에는 고대 시대(Archaic)가 있으며, 고대 시대에는 첫 정착촌들과 농업의 초기 형태가 이루어졌다. 현대의 고고학계들은 이 시기 구분법을 특정 문화의 발전이나 쇠퇴와는 전혀 상관없이 마야 달력을 임의대로 해석한 것으로 여기고 있다. 마야의 역사 자체가 베일에 싸인 것이 많기 때문에, 시기들의 시작 시기와 종결 시기는 때에 따라 몇 십 년, 혹은 심지어 몇 백 년까지도 차이가 날 수 있다.
마야 선고전기(Preclassic period)는 기원전 2000년경부터 시작되며, 이때 최초의 마을들과 농업이 만들어졌다. 마야 선고전기는 기원전 2000년경부터 기원후 250년까지 지속되었으며, 처음으로 단체 생활을 하며 국가와 도시들이 세워졌다. 또한 마야인들의 주요 작물인 콩, 고추, 옥수수도 이때부터 재배되기 시작하였다. 첫 도시는 기원전 750년 즈음에 생겨나기 시작했으며, 기원전 500년 즈음이 되자 마야의 도시들은 정교하게 장식된 석비들로 꾸며진 거대한 사원들로 가득 차게 된다. 기원전 3세기경부터 상형문자들이 쓰이기 시작하였다. 선고전기 후기에는 페텐 분지, 과테말라와 같은 지방들에서 절대다수의 도시들이 생겨났으며, 기원후 250년부터는 마야 고전기(Classic period)가 본격적으로 시작되며, 마야 달력들을 사용하여 새로운 형식의 신전들을 세우기 시작하였다. 이 시기에는 다양한 도시국가들이 복잡한 교역로로 얽혀진 채로 서로 연결되었으며, 마야 저지대에 티칼과 카라크물, 이 두 개의 도시가 중심으로 떠올랐다. 이때는 멕시코 지역의 테오티우아칸이 마야 지방의 국가들에게 거대한 정치적 영향을 미쳤다. 9세기경이 되자 마야의 전통적인 도시들이 모두 무너지기 시작하였으며, 곳곳에서 내전이 벌어졌다. 이 때문에 사람들이 도시들을 버리고 북쪽으로 이주하는 등 혼란이 지속되었으며, 후고전기(Postclassic period)에는 치첸이트사가 마야의 새로운 중심으로 떠올랐다. 16세기가 되자 스페인 제국이 메소아메리카 지방을 군사력으로 강제로 병합하였으며, 1697년에 마지막 마야 도시인 노즈페텐이 스페인에 함락됨에 따라 마야의 전통적인 역사는 끝나게 된다. 마야 고전기 통치의 핵심은 바로 '신정일치'다. 마야 도시들의 왕은 자신이 인간들과 신들의 세계를 이어주는 중재자로 자칭했으며, 부계로 이어지는 사회였기에 거의 대부분의 경우 왕위는 장남에게 물려주었다. 거의 대부분의 '훌륭한' 왕들은 어느 정도의 전쟁 수행 능력 또한 갖추고 있어야만 했다. 마야의 권력층은 매우 폐쇄적이었으나, 다만 도시들에 따라 다른 경우들이 있었다. 고전기 후기로 가면 갈수록 군주정보다는 귀족정이 많아졌는데, 이 때문에 왕권은 갈수록 약화되었다. 마야 문명은 고도로 발달된 예술 체계를 갖추고 있었으며, 옥, 흑요석, 도자기, 돌들을 사용하여 아름다운 작품들을 끊임없이 만들어냈다.
마야의 도시들은 무질서하게 뻗어나가는 경향을 보이며, 그 중심부에는 거대한 궁전들과, 특히 신들에게 바치는 사원들이 있고 그 주변에는 거주 지역들이 뻗어있다. 도시의 각 권역들은 보도를 따라 연결되어 있으며, 도시는 주로 석조 궁전, 피라미드 형식의 사원들, 상징적인 공놀이 경기장, 천문을 살피기 위해 만들어진 천문대 등이 있었다. 마야의 엘리트층은 모두 독해를 자유자재로 다루었고, 복잡한 상형문자 체계를 완성하여 콜럼버스가 도착하기 전 아메리카에서 가장 발달된 언어 체계를 만드는 것에 성공했다. 마야인들은 자신의 역사와 신화들을 접는 책 속에 기록하였는데, 스페인 식민시대에 워낙 많이 파괴되었기에 현재 이 책들은 3권밖에 남아있지 않다. 이 때문에 고고학자들은 거의 대부분 마야의 석비나 건물들에 새겨진 문자들을 사용하여 고대 역사를 해독해 내고 있다. 마야인들은 매우 복잡한 달력 체계를 만들어 냈으며, 수학에 0의 개념을 도입한 최초의 문명이었다. 마야의 종교관에서는 인신공양도 들어있었다.[5]
치첸이트사
치첸이트사(스페인어: Chichén Itzá ) 혹은 치첸이차(유카텍 마야어: Chiʼchʼèen Ìitshaʼ 치첸이차)는 멕시코 유카탄 반도에 위치한 마야 문명의 도시이다. 치첸이트사는 북부 마야 저지의 주요 유적들 가운데 하나로, 마야 고전기 후기(AD 600 - 900)에 지어졌다. 다만 몇 백년에 걸쳐 지어진 도시이기에, 후기 마야 시대(AD 900 - 1200)의 초기 건축 양식풍도 어렵지 않게 찾아볼 수 있다. 치첸이트사에서는 중앙 멕시코 지역의 건축풍에서부터 북부 마야 저지대 건축풍에까지 다양한 건물들이 섞여있다. 초기 고고학계는 이와 같은 비-마야적 건축양식들이 타 지방에서 쳐들어온 정복자들의 영향을 받은 것이라고 여겼으나, 나중에 연구가 거듭됨에 따라 현재는 문화 전파에 의하여 이러한 타 지방의 양식들이 자연스레 마야 도시에 섞여들어온 것이라고 여기고 있다. 치첸이트사는 마야 문명의 도시들 중 가장 거대한 규모였으며, 이 때문에 후기 메소아메리카 문학에서 '잊혀진 신의 도시'라고 불릴 정도의 영광을 자랑했다. 최고 전성기 당시 치첸이트사는 마야 전체에서 가장 많은 인구를 가지고 있었으며, 타 지방들과 교역도 대단히 활발했다. 치첸이트사에 있는 다양한 건축양식들은 이와 같은 문화교류 때문인 것으로 추측된다. 치첸이트사 유적은 국유이며, 유적의 관리권은 멕시코 국립 인류학 역사 학회(National Institute of Anthropology and History)이 소유하고 있다. 다만 몇몇 신전들의 소재지는 사유지였으나, 2010년에 유카탄 주에서 이를 모두 사들였다.[6]
지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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동영상
각주
참고자료
- 〈유카탄반도〉, 《위키백과》
- 〈마야 문명〉, 《위키백과》
- 〈치첸이트사〉, 《위키백과》
- 〈유카탄 반도〉, 《요다위키》
- 〈유카탄반도(두산백과)〉, 《네이버 지식백과》
- 〈유카탄 반도(세계지명사전 중남미편)〉, 《네이버 지식백과》
같이 보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