박은식
박은식(朴殷植)은 유학자·독립운동가이며 대한민국의 제2대 임시대통령이다.
개요[편집]
박은식은 《황성신문》의 주필로 활동했으며 독립협회에도 가입하였다. 대동교(大同敎)를 창건하고 신한혁명당(新韓革命黨)을 조직하여 항일활동을 전개하였다. 1915년 상하이에서 이상설·신규식과 함께 신한혁명당을 조직하고 이 당의 취지서와 규칙을 작성, 감독으로 선임되었고, 또한 신규식과 함께 대동보국단(大同輔國團)을 조직하여 단장이 되었다. 1918년에는 러시아에서 한인교포 잡지 《한족공보(韓族公報)》 발행에 관여하던 중 1919년 블라디보스토크에서 3·1운동을 맞이하였다.
3·1운동 후 임시정부가 수립되자 그는 임시정부의 기관지 《독립신문》의 사장이 되었고, 1924년 임정 국무총리 겸 대통령 대리, 1925년 3월 이승만의 대통령 면직으로 제2대 대통령이 되었다. 이때를 전후하여 임정은 독립운동의 이념·방법·지연·인맥 등의 파벌 암투로 내분을 겪고 있었다. 그는 독립운동의 대동단결을 위하여 임정의 헌법을 개정, 대통령제를 국무위원제로 고치고 1925년 8월 개정된 헌법에 따라 국무위원을 선임하고 자신은 대통령직에서 물러났다. 박은식은 독립활동과 많은 저술들을 통해 독립정신을 함양하고 민족해방운동의 정신적 지주를 유지하려면 무엇보다도 주체적인 역사서술과 교육이 필요하다고 생각하였다. 그는 비록 정신주의적·관념적 역사관에 머물긴 했지만 역사 연구와 서술을 민족해방운동의 한 방법으로 생각하였다. 1962년 건국훈장 대통령장이 추서되었다.[1]
생애[편집]
박은식(1859년 10월 25일 ~ 1925년 11월 1일)은 일제강점기의 학자, 언론인, 독립운동가, 교육자, 애국계몽운동가, 정치가이다. 그는 대동교(大同敎)를 창건하고 신한혁명당(新韓革命黨)을 조직하여 항일활동을 전개하였다. 자(字)는 성칠(聖七)이고 호는 겸곡(謙谷), 백암(白岩·白巖·白菴), 태백광노(太白狂奴), 무치생(無恥生)이다. 밀양 박씨이다.
박은식은 1859년 9월 30일 황해도 황주군 남면에서 아버지 박용호와 어머니 노씨 부인 사이에서 태어났다. 오랫동안 몰락했던 그의 가문은 할아버지인 박종록(朴宗錄)의 대에 농업으로 재산을 모으고 가세를 일으켰고, 아버지 박용호는 서당의 훈장으로 생계를 이어갔다. 그는 17살 때까지 서당에서 공부를 한 뒤 1875년 황해도에서 널리 이름나 있던 안중근의 아버지 안태훈과 서로 사귀면서 여러 의견들을 자주 나누는 등의 교류를 하였다. 이 두 사람은 신동이라 불릴 정도로 대단히 자질이 뛰어났다.
1877년 박은식은 부친상을 치르기 위하여 다시 고향으로 되돌아왔고, 1879년 연안 차씨(延安車氏)와 혼인, 분가하여 평안남도 삼등현으로 거처를 옮겼다. 1880년 경기도 광주로 가서 남인계 정약용 학파의 계승자였던 신기영(申耆永)과 정관섭(丁觀燮)에게 학문을 수학하였다. 1885년 관서(關西)의 대학자였던 화서학파 운암 박문일(朴文一, 1822~1894)과 성암 박문오(朴文吾) 형제에게서 정주학(程朱學)을 수학하였다. 1년 후 1886년 그는 향시에 참가해서 특선으로 합격하였다. 이후 6년 동안 박은식은 줄곧 숭인전 능참봉이란 벼슬을 맡아 생활하였다.
1892년 민병석(閔丙奭)의 천거로 동명왕릉참봉(東明王陵參奉)으로 전직하였다. 1894년 동학농민운동이 발생하자 동비(東匪)들의 반란으로 규정하였다. 그해 갑오개혁이 단행되자 그는 갑오개혁은 사설(邪說)이라며 조정의 정책에 비판을 가하였다. 박은식은 40세가 가까워오던 무렵부터 여태까지 공부했던 주자학과 위정척사사상의 본질에 의심을 품고 신학문·신지식을 알아야겠다는 필요성에 절감하여 1898년 독립협회에 가입했다.
1898년 9월 민족지사 장지연·남궁억·나수연·유근(柳瑾) 등과 함께 《대한황성신문》을 인수하여 새로이 《황성신문》으로 제목을 바꾸고 창간 보급하였으며, 박은식은 장지연과 같이 공동주필에 취임하였다. 박은식은 1906년 신석하, 김달하, 김병도등과 함께 서우학회를 결성하여 기관지 《서우》의 주필로 취임하였다. 서우는 1906년 12월에 창간호를 냈으며, 1908년 1월까지 모두 4책을 발행하였는데 박은식은 집필, 편집, 지도를 모두 맡았다. 1908년에는 서우학회를 한북흥학회(漢北興學會)와 통합하여 서북학회를 창설하고 기관지인 서북학회월보를 창간하였다.
1925년 3월 대한민국 임시정부 관계자들은 파벌 싸움으로 인해 대통령으로서 마땅한 사람이 없자, 대통령 서리 겸 국무총리를 맡고 있던 박은식을 2대 대통령으로 추대하였다. 그러나 박은식은 7월 오히려 임시정부의 정치 체제를 대통령 중심제에서 국무위원제로 바꾼 뒤, 9월 국무위원제의 최고 대표자격인 국무령에 이상룡을 추천하여 당선시켰다. 또한 상하이의 대한민국 임시정부와 관련이 없는 이승만 중심의 구미위원회를 폐지했으며, 헌법을 개정하여 임정을 중심으로 독립운동을 일치시키고자 하였다. 박은식은 건강이 악화되었고, 결국 지병을 이유로 사임하였고, 박은식은 1925년 11월 1일 인후염으로 67세의 나이로 세상을 떠났다.
한국통사[편집]
한국통사(韓國痛史)는 일제의 한국 점령으로 주권을 상실하자 민족주의 사학자 박은식(朴殷植)이 조국의 주권을 상실한 슬픈 역사를 적은 한국 최근세 정치사 책이다. 한-일관계를 중심으로 한국의 대외정책과 일제의 한국 병탄 경위, 탄압 내용 등 1863년 고종 즉위로부터 1910년 105인 사건 발생까지 47년간의 민족의 수난사를 담은 한문으로 쓴 역사서이다. 한국통사는 1915년 중국 상하이(上海)에서 출판되었다. 민족주의 사관에 입각하여, 국교(國敎)와 국사(國史)를 지키면 나라의 독립을 지킬 수 있다는 신념으로 독립운동의 힘을 기르기 위해 저술하였다.
체제는 범례, 목록, 서, 서언, 삽화, 제1편 2장, 제2편 51장, 제3편 61장, 결론, 후서, 발 의 순으로 되어 있다. 삽화는 모두 12항목으로 되어 있는데, 제1항은 광개토대왕비에서 집자한 제사(題辭), 제2항은 백두산 천지, 제3항 신라 태종 묘비 등 12점, 제4항 이순신 장군의 철갑귀선, 제5항 금강산, 제6항 궁전의 명소, 제7항 서울의 명소, 제8항 한국 황실, 제9항 순종, 제10항 황실의장과 경내명소, 제11항 을사늑약과 한-일신협약 때의 한국측 대신과 일본 대표, 제12항 을사늑약 이후 순국한 인물 등의 사진이다. 본문은 총 3편 114장으로 되어 있고, 중요 내용에는 해당 장 후미에 저자의 의견을 붙였다.
박은식은 역사를 보존하는 것이 나라를 되찾기 위한 전제조건이고 원동력이라고 생각한 것이다. 따라서 박은식에게 있어 한국사의 연구와 저술은 곧 독립운동이었고, 또 그를 위한 역량의 축적과정이었다. 풍찬노숙(風餐露宿)의 독립운동 전선에서 선생이 한 날 한 시도 붓을 놓지 않고 역사를 저술한 이유가 바로 여기에 있는 것이다. 한국통사는 1864년 대원군 집정으로부터 경술국치 직후인 1911년까지의 한국 근대사를 다루었다. 구체적으로는 일반 정치사와 일제침략사, 그리고 독립운동사를 하나의 체계로 묶어 기술하고 있다. 특히 일제침략사에 초점을 맞추어 대외적으로는 일본제국주의 침략의 잔학성과 간교성을 폭로 규탄하고, 대내적으로 민족적 통분과 적개심을 유발하면서 동포들의 각성과 반성을 촉구하였다.
한국통사는 대한민국의 근대사를 최초로 종합적으로 서술한 것으로 의미가 있으며, 특히 독립운동에 직접 참여한 저자가 경험을 바탕으로 민족주의 사관이 깊이 반영된 역사책이라는 점에서 높이 평가되고, 나아가 근대사 연구에 중요한 문헌적 가치가 있다.
대동단결 선언문서[편집]
대동단결 선언문서(大同團結 宣言文書)는 1917년 임시정부 수립을 위해 신규식(申圭植) ·박은식(朴殷植) ·신채호(申采浩) ·조소앙(趙素昻) 등 14명이 발기하여 작성한 선언문이다. 2015년 12월 8일 국가등록유산으로 지정되었다. 독립기념관에 기증된 안창호(安昌浩)의 유품에서 발견되었다. 대동단결의 필요성, 국내참상, 해외동지의 역할, 국제환경, 대동단결의 호소 등과 강령 및 이에 대한 답장관계로 구성되어 있다.
내용은 주권행사의 의무 ·권리는 국민에게 있다는 국민주권설을 주장하고, 일제에 구속되어 있는 국내의 동포 대신 해외의 동지가 그 책임을 감당해야 한다고 하였다. 독립된 조국으로서의 원만한 국가를 위해 임시정부와 같은 통일국가를 만들어야 하고, 그러기 위해서는 민족대회의(民族大會議)인 통일기관을 만들어야 한다는 것이다. 이 통일국가를 수립하는 데 있어서 러시아의 3월혁명(구력 2월), 폴란드의 독립선언, 아일랜드 ·모로코 등의 독립운동, 연합국의 산환(散渙), 민권연합회 등을 들어 국제정세가 우리의 독립운동에 유리하게 작용하고 있다는 국제환경론을 말하고 있다.
한국독립운동지혈사[편집]
한국독립운동지혈사(韓國獨立運動之血史)는 민족운동가이며 사학자인 박은식(朴殷植)이 1920년에 지은 항일독립운동에 관한 역사서이다. 순한문으로 기술되어 있다. 박은식은 민족독립운동가로서, 일본의 한국 침략과정과 병탄 이후의 탄압과정을 모두 경험하였다. 그리하여 그의 생활은 민족의 독립에 초점이 맞추어져 있었다. 조선 말기에 일본의 침략이 진행되고 있을 때 언론계에 종사하였는데, 이때에도 애국계몽운동을 전개하여 국민의 독립정신을 고취시켰다.
박은식의 생활 속에서 경험한 동시대의 민족운동의 참모습을 모아 역사로 남기는 동시에 민족이 가슴에 간직해야 할 민족정신의 역사를 가르치기 위한 것이었다. 대한민국임시정부에서는 제1차 세계대전 이후의 파리강화회의와 국제연맹회의에 민족독립운동을 지원받기 위해 제출할 문서를 만들기 위해 임시사료편찬회를 조직하였다(1919. 7). 박은식은 이 회에 참여하여 사료를 모았고, 《한·일관계사료집(韓日關係史料集)》4책을 간행하였다. 박은식은 수집된 사료가 한국독립운동사를 집필하는데 매우 요긴하다고 생각하고 이를 십분 활용하여 독립운동사를 집필하였다. 또한 그의 민족운동 활동 경험도 책의 집필에 큰 도움이 되었다.
평가[편집]
박은식은 지식인 출신의 독립운동가로서, <대한매일신보>와 <황성신문>을 비롯하여 다수의 신문과 잡지들에 나라를 위한 논설을 쓰고 애국 계몽 사상가로서 영향을 끼쳤다. 독립운동가들 중에서도 연장자 세대로서 누구보다 독립운동에 힘썼고 의외로 강한 작전도 계획하여 독해보이기도 한 독립운동가이나, 평상시 사생활에서의 인품은 아량이 넓고 온화하고 사려깊은 인격자의 성품으로 유명하였기에 절로 수많은 청년과 중년 독립운동가들이 큰 어른으로 모신 인격자였던 위대한 인물이다.
한국 근대 역사학에서 가장 중요한 인물로 현대의 근대 사학자들은 박은식의 책을 읽지 않고는 연구가 불가능할 지경이다. 동명성왕실기(고구려)나 발해태조건국지(발해) 같은 고대사 서적도 그가 저술한 것이다. 특히 안중근에 대한 역사적 재발굴도 박은식의 저서에 의해 이뤄졌다. 박은식이 어릴 때 안중근의 부친 안태훈과 친구였기 때문이기도 한데 중화민국에서 독립운동을 하던 시기 남겼던 "안중근전"이 중일전쟁 중에 분실되어 버렸던 상황에서, 먼 훗날 1992년 중국 흑룡강성의 하얼빈에서 70년 만에 발견되면서 안중근이 재조명되었다.
신한혁명당[편집]
성낙형(成樂馨), 유동열(柳東說) 등 독립운동가들은 북경에서 상해로 가서 박은식(朴殷植), 신규식(申圭植), 이상설(李相卨)·이춘일(李春日)·유홍렬(劉鴻烈) 등을 만나서 신한혁명당을 조직하였다. 1915년 당시는 제1차 세계대전 중이었는데, 이들은 동맹국이 승리할 것이라고 보았다. 때문에 전쟁이 끝나면 독일은 연합국의 일원으로 1914년 11월 독일에 선전포고를 했던 일본을 공격할 것이며, 이때 국가적으로 일본에 원한이 있고 당시 반중정서가 심화되던 중국도 함께 할 것이라고 예상했다. 독일과 중국은 당시에 모두 제정정치 국가였는데 이들의 도움을 받기 위해서는 공화정이 아닌 제정정치를 해야 한다고 보았다. 그래서 우선 제정체제를 표방하고 고종을 내세울 필요가 있다는 데 의견을 모았다. 그러나 정작 주요 당원들의 대부분은 이미 공화주의자였다.
신한혁명당이 실패한 이유에는 국제 정세에 대한 예측이 크게 틀어진 것과 중국이 일본에게 굴복한 것, 그리고 당의 방향성과 당원들의 사상이 일치하지 못한 점 등이 작용하였다. 이들의 시도는 당시 국제정세 및 중국 정세에 대한 판단의 미숙성을 드러낸 것이었다. 하지만 국제정세에 대한 적극적인 인식과 독립의 기회포착 의지를 보여주었다.
동영상[편집]
각주[편집]
- ↑ 〈박은식(朴殷植,1859.9.30.~1925.11.1)〉, 《두산백과》
참고자료[편집]
- 〈박은식(朴殷植,1859.9.30.~1925.11.1)〉, 《두산백과》
- 〈박은식〉, 《위키백과》
- 〈신한혁명당〉, 《위키백과》
- 〈박은식〉, 《나무위키》
- 골드만 싹쓰리, 〈한국 통사의 독립 운동가 박은식〉, 《네이버블로그》, 2024-09-21
- 개미실 사랑방, 〈대한민국임시정부 2대 대통령 박은식(朴殷植) 묘〉, 《네이버블로그》, 2024-08-21
- 달뫼, 〈11월 1일 / 백암 박은식 죽음〉, 《네이버블로그》, 2024-11-01
같이 보기[편집]