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박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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박열

박열(朴烈)은 일제강점기 때 활동한 독립운동가이다. 대한민국의 독립유공자이며 언론인, 시인이다.

개요

박열은 1919년 일본으로 건너가 무정부주의 운동에 투신하였으며 비밀결사 흑도회를 조직하였다. 1923년 당시 그의 애인이었던 가네코 후미코(金子文子)의 협조를 얻어 천황 암살을 실행하려던 직전에 발각되어 일본 경찰에 체포되었다. 천황 암살을 위해 해외에서 폭탄을 수입하려 했다는 것이 재판 과정에서 밝혀졌으므로 1926년 3월 25일에 가네코와 함께 사형선고를 받았으나, 4월 5일에 무기징역으로 감형되었다.

두 사람이 일본검찰의 문초를 받을 때 서로 포옹하는 모습을 일본 판사가 촬영, 사진이 사회에 누출되자, 정부에서 국사범(國事犯)을 우대한다고 야당에서 들고 일어나는 등, 일본 정계에 큰 파문을 일으키기도 하였다. 두 사람은 복역 중 결혼신고서를 구청에 제출하여 공식적으로 부부가 되었으나 가네코는 형무소에서 생을 마감하고 박열은 1945년 8·15광복으로 22년 2개월 만에 석방되었다. 저서로 《신조선혁명론(新朝鮮革命論)》이 있으며, 1989년 건국훈장 대통령장이 추서되었다.[1]

생애

박열(1902년 3월 12일 - 1974년 1월 17일)은 한국의 아나키스트, 사회운동가이다. 본관은 함양(咸陽). 본명은 박준식(朴準植). 간토 대지진 직후 대역사건 중 하나인 박열 사건의 주모자로 체포된 후 1945년까지 22년간 투옥 후 출소하여 일본에서 결성된 한국인 교민단체인 재일본조선거류민단의 초대 단장(1946년 10월 ~ 1949년 4월)을 지냈다.

박열은 상주시 함창초등학교를 졸업한 후 15세에 서울로 올라와 경성고등보통학교 사범과 현재 서울대학교 사범과로 진학했다. 재학 중에 3·1 운동 만세 시위에 가담한 혐의로 퇴학당하고, 1919년 일본 도쿄로 건너가, 세이소쿠가쿠엔 고등학교에서 수학하였다. 형편이 어려웠던 그는 신문배달 등 아르바이트를 하면서 세이소쿠가쿠엔 고등학교를 다녔다. 박열은 일본에서 사회주의자, 아나키스트들과 교류했다. 1920년 1월 일본에 있는 조선인 고학생들과 노동자 사회의 상부상조를 표면상의 목적으로 하는 동경 조선고학생동우회를 결성해 조직 활동을 시작했다. 이후 의열단, 흑우회 등을 조직했다. 박열은 흑도회라는 아나키즘 단체에 가담한 아나키즘 신봉자로 활동하였다.

1922년 김약수·정태성 등과 함께 동경조선고학생동우회에서 '전국노동자 제군에 격함'이라는 선언을 발표했다. 박열은 1923년 4월 불령사(不逞社)라는 비밀결사를 조직했고, 국제공산당 자금사건 때 증발한 자금을 횡령했다는 의혹이 있는 장덕수를 잡아다 구타하기도 했다. 같은 해 관동대지진 이후 험악한 분위기 속에서 일본인 부인인 가네코 후미코(金子文子)와 함께 1923년 10월에 히로히토 황태자의 혼례식 때 암살을 기도한 죄로 체포되었다. 불령사가 다이쇼 천황과 히로히토 황태자 등을 폭탄으로 암살하기로 모의했다는 혐의 때문이었으나, 사건 자체가 과장, 조작되었다는 설도 있다.

박열과 가네코 후미코는 1926년 사형 선고를 받았으나 무기징역으로 감형되었고, 가네코 후미코는 1926년 7월 23일 우쓰노미야 형무소에서 의문의 죽음을 맞았다. 박열은 22년 2개월을 복역하고 해방 후 미군에 의해 풀려났다. 1946년 2월 ~ 6월 김구의 부탁으로 3의사(윤봉길, 이봉창, 백정기) 유해발굴 봉환 위원장으로 활동했다. 1946년 12월과 1947년 4월 2차례에 걸쳐 국제연맹 회의에 참가하기 위해 미국을 방문하고 돌아오는 이승만과 회담했다.

박열은 1947년 6월 〈민단신문〉에 '건국운동에서 공산주의를 배격한다'는 성명서를 발표하고, 1947년 10월 민단 정기대회에서 이승만 계열의 남한 단독정부 수립 노선을 지지했다. 민단은 1948년 남한 정부수립 직후 '재일본대한민국거류민단'으로 이름을 바꾸어 활동하였다. 1948년 재정 문제와 민단 내 반대파들 때문에 단장직에서 물러났다. 정부 수립 이후 이승만의 초청으로 1949년 귀국하여 한국독립당 당무위원을 지내다가 한독당 탈당 후 한국전쟁 당시 납북되었다. 박열의 고향인 경상북도 문경시의 생가터에도 그를 기념하는 기념관이 건립되어, 2012년 10월 9일에 개관되었으며, 기념관 옆쪽에는 2003년 3월에 먼저 자리 잡은 가네코 후미코의 묘소가 있다.

가네코 후미코

가네코 후미코(かねこふみこ 1903년 1월 25일~1926년 7월 23일)는 일본의 아나키스트(무정부주의자)로, 독립운동가인 박열 의사의 부인이다. 1903년 1월 25일 일본 가나가와현(神奈川縣) 동부의 요코하마 시(横浜市)에서 태어났다. 어릴 적 부모님의 보살핌을 제대로 받지 못하고, 호적에도 오르지 못한 채 불우한 시절을 보냈다. 조선으로 넘어온 후에도 어려운 삶이 계속되었으며, 부강심상소학교와 부강고등여학교에서 수학하였다고 알려져 있다. 1919년 7년여의 조선 생활을 끝내고 일본으로 돌아가 외가가 있는 야마나시현(山梨縣)에 머물다가, 1920년 학업을 이어가겠다는 목표를 세우고 도쿄(東京)에 정착하였다.

가네코 후미코가 본격적으로 사상운동에 뛰어든 계기는 박열(朴烈)을 만나면서 부터였다. 그녀는 박열의 시에 감명받아 정우영의 소개로 그와 인연을 맺었고, 1922년 5월부터는 박열과 동거하면서 사상운동에도 적극적으로 참여하기 시작했다. 재일조선인 사상단체인 흑도회(黑濤會)에 가입하고, 박열과 함께 기관지를 발행했다. 1922년 10월 흑도회가 해산한 이후에는 1922년 12월 박열 등이 만든 재일조선인 아나키즘 단체인 흑우회(黑友會)에서 활동을 이어갔다. 1923년 4월에는 흑우회와 별도로 박열과 함께 불령사(不逞社)를 직접 만들어 더 적극적으로 일제에 저항하는 운동을 펼쳤다.

그녀와 박열의 활동은 노동운동을 지원하거나 민중을 사상적으로 일깨우는 데 그치지 않고, 일제의 폭압에 맞서 직접적인 무장 투쟁을 모색하는 것으로 나아갔다. 가네코 후미코와 박열은 옥중에서 혼인신고를 하고 정식으로 부부가 되었다. 일본은 재판과정에서 일본인이었던 그녀에게 전향을 종용하였으나, 끝까지 뜻을 굽히지 않았다. 오히려 일본 제국주의와 천황제를 비판하는 법정 투쟁을 벌였으며, 결국 1926년 3월 25일 가네코 후미코와 박열은 일왕을 암살하려고 시도했다는 죄목으로 사형을 선고받았다. 두 사람은 4월 5일에 무기징형으로 감형되었으나, 가네코 후미코는 수감 중이던 1926년 7월 23일 스스로 목숨을 끊었다. 그녀의 죽음에 대해서는 타살의 의혹이 제기되기도 한다. 그녀의 시신은 박열의 가족에게 인계되어 박열의 고향인 경북 문경에 안장되었다가, 박열 기념관이 자리한 기념공원 한편에 묘소가 마련되어 있다. 2018년 11월 17일 대한민국 정부는 그녀에게 건국훈장 애국장을 추서하였다.

아나키즘

박열은 한국의 아나키스트이다. 개인주의적 아나키즘(individualist anarchism)은 국가를 최소화시키는 여러 혁명 행위, 단합 행위에서도 개체 간의 자유로움의 존재 또는 그들의 투쟁 목표가 또 다른 국가, 권력의 탄생이 아닌 진정한 자유로움의 탄생이어야 한다는 것을 보장해야 한다는 아나키즘이다. 주류 아나키즘인 사회적 아나키즘도 다른 좌익, 우익 사상에 비해, 개인주의를 크게 내포하는 것은 사실이지만, 개인주의적 아나키즘은 그보다 더 많은 개인주의를 강조한다.

아나르코자본주의(capitalist anarchism)은 재산의 사적 소유 및 시장 경제에서의 자유로움을 주장하는 아나키즘의 분파 사상이다. 자본주의적 아나키스트들은 주요 국영화 산업을 민영화해야 한다고 주장한다. 그러나 주류 아나키스트들은 기본적으로 아나코 캐피탈리즘을 아나키즘으로 인정하지 않는다. 그들에 따르면 기본적으로 자본주의에서는, 사장과 직원의 위계관계, 상사와 부하 직원의 위계관계, 집주인과 세입자과의 위계관계 등이 존재한다고 주장한다. 이기주의적 아나키즘은 슈티르너가 발전시킨 아나키즘의 분파 사상이며, 자유란 세상에 대칭 하여 자신의 자유로움을 마음껏 발산할 때 비로소 진정한 자유로움을 얻을 수 있다고 주장하는 허무주의(虛無主義)와 관련되기도 하는 아나키즘 사상이다. 상호주의적 아나키즘은 프루동이 처음으로 주장한, 생산수단의 상호주의적 소유를 바탕으로 한 좌파 시장 아나키즘 중 하나이다.

박열 생가지

박열 생가지(朴烈 生家址)는 경상북도 문경시 마성면 오천리에 있는 일제강점기 때 독립운동가인 의사 박열(朴烈)의 생가터. 2004년 6월 28일 경상북도 기념물로 지정되었다. 박열 의사는 1902년에 태어났으며 1923년 일본 천황을 암살하려다 체포되었다. 무정부주의자로서 민족해방운동에 참여하였던 공로로 1989년 3월 건국훈장 대통령장이 추서되었다.

시도기념물 지정 당시 수차례에 걸친 소유주 변경과 새마을 사업 등으로 인한 증개축으로 원래의 모습이 거의 남아 있지 않았다. 현재의 건물은 그 후 보수 작업을 통해 옛 모습을 복원하였다. 경상북도 문경시 마성면 오천리 98번지에 있다.

동영상

각주

  1. 박열(朴烈,1902.2.3.~1974.1.17)〉, 《두산백과》

참고자료

같이 보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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