루앙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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루앙(프랑스어: Rouen)은 프랑스 북부 오트노르망디 레지옹의 중심지이자 센마리팀주의 주청 소재지이다. 인구는 약 11만 명이고 대도시 인구는 47만 명이다. 고딕 양식의 건물이 많고 옛 가옥이 많아 '고딕의 도시'라는 별칭이 있다.[1]
개요[편집]
루앙은 프랑스 북서부, 파리 북서쪽 123㎞에 위치하며 센강이 시내를 통과한다. 켈트 시대에는 라토마구스라고 불리었으며, 기원전 1세기 중엽 이후 로마의 지배하에 들어갔다. 911년 노르망디 공국의 수도가 된 이후 내외 교역의 거점이 되었으나, 14~15세기 백년 전쟁기에 교역상의 특권을 상실하여 한때 쇠퇴하였다. 중세 유럽의 가장 크고 가장 번영한 도시 중 하나였다. 지명은 라토마구스에서 유래한다. 라토마구스는 '개간지에 있는 도시'라는 뜻이다. 예로부터 노르망디 지방의 중심지로 로마 시대부터 있었던 역사적 도시이며 강 좌안 지역은 제2차 세계대전 때 거의 파괴되었으나, 복구되어 시의 범위가 많이 확장되었다. 내륙으로 120km나 깊숙이 들어가 있지만, 원양선이 들어올 수 있는 주요한 항구이다. 주로 제2차 세계대전 후에 복구된 부두는 이웃 마을 라부유까지 확장되었다. 전형적인 면직물공업의 중심지이며, 제지공업도 발달하여 프랑스가 소비하는 인쇄용지의 대부분을 공급하고 있다. 그 밖에 화학공업, 철강공업, 기계공업, 자동차공업, 항공산업 등이 발달해 있다. 루앙의 기후는 해양성 기후로, 여름 평균 기온은 15~18°C이고, 겨울 기온은 3~4°C이다. 초기 고딕양식과 후기 플랑부아양 양식이 다양하게 사용된 루앙대성당은 프랑스에서 훌륭한 고딕 양식 성당으로 꼽힌다. 이 밖에 15세기에 세워진 생마클루성당은 플랑부아양 양식의 훌륭한 예이며 12∼15세기에 세워진 생투앙성당은 내부의 아름다운 창문으로 유명하다. 후기 고딕 양식의 재판소 청사와 시계탑 등의 건축도 있다. 회화와 도자기 박물관에는 17·18세기의 프랑스 회화작품과 루앙 자기(瓷器)가 소장되어 있다. 그 밖에 이 고장 출신의 위대한 시인 P.코르네유와 소설가 G.플로베르의 이름을 딴 박물관이 있다. 오랫동안 영국과 프랑스 사이의 분쟁지였으며 백년전쟁에서 활약한 프랑스의 수호성인 잔 다르크(프랑스어: Jeanne d'Arc)가 처형된 곳이기도 하다.[2]
역사[편집]
루앙은 벨리오카스의 갈리아 부족에 의해 설립되었는데, 벨리오카스는 센강 계곡의 넓은 지역을 지배했다. 갈리아 부족은 이 지역을 라투마코스라고 불렀고, 로마인들은 로토마구스라고 불렀다. 루그두눔에 이어 갈리아 루그두넨시스 제2의 도시로 여겨졌다.
디오클레티안의 조직 개편으로 루앙은 분단된 주 갈리아 루그두넨시스 의 주요 도시였고, 터가 남아 있는 원형경기장과 온천은 로마의 절정의 흔적이다. 5세기에는 주교의 교구가 되었고, 나중에는 메로빙거 왕조 네우스트리아의 수도가 되었다. 912년부터 정복자 윌리엄이 칸으로 거주지를 옮길 때까지 루앙은 노르망디 공작 영지의 수도였고, 지역 공작의 거주지였다. 1150년에 루앙은 자치권을 인정받는 설립 헌장을 받았다.
12세기경 루앙에 라메종 쉬블랭으로 알려진 탈무드 학원인 예시바가 설립됐다. 그 유적이 1976년에 발견되어 지금은 박물관이 되었다. 그 당시 약 6,000명의 유대인이 이 도시에 거주하며 전체 인구의 약 20%를 구성했다.
1204년 6월 24일 프랑스의 필립 2세 오귀스튀는 루앙에 입성해 노르망디를 프랑스 왕국에 확실히 합병시켰다. 그는 노르만 성을 허물고 갈로로마 원형경기장 자리에 세워진 자신의 성 부브뢰유로 대체했다.
이 도시는 영국에서 수입된 양모를 바탕으로 섬유산업이 발달했는데, 플랑드르와 브라방의 도시와 끊임없이 경쟁해야 했기 때문에 샴페인 박람회에서 시장을 찾았다. 루앙은 또 독점적으로 파리의 상류까지 도달하는 센강의 교통에 그 번영을 의존했다.
필립 4세는 질서를 다시 회복시키고 도시의 헌장과 수익성 있는 하천 교통 독점권을 억압했지만, 1294년 루앙인들이 그들의 옛 자유를 다시 찾도록 기꺼이 허락했다. 1306년에 그는 루앙의 유대인 공동체를 추방하기로 결정했고, 그 수가 약 5,000~6,000명에 달했다. 1389년 아렐이라는 하층 계급이 또 다른 도시 반란을 일으켰다. 루앙의 헌장과 강 교통 특권이 회수되면서 다시 한번 억압이 일어났다.
백년전쟁 중인 1419년 1월 19일 루앙은 노르망디를 플랑타주네 영토에 다시 합병한 영국의 헨리 5세에게 항복했다. 그러나 루앙은 영국의 죄수들을 사형시키는 등 가만히 있지 않았다. 성당 참사회 회원이며 주교 총대리인 루앙 로베르 드 리베는 영국 왕을 파문한 영웅이 되었으나, 영국에서 5년간 수감되었다.
프랑스 통치로의 복귀를 지지했던 잔 다르크는 루앙성으로 잡혀와 고문을 당하다 1431년 5월 30일 이 도시에서 화형되었다. 루앙성에는 잔 다르크의 마지막 행적을 둘러보는 잔 다르크 투어가 있다. 대부분의 주민은 프랑스 왕의 적인 부르고뉴 공작을 지지했다. 프랑스의 왕 샤를 7세는 1449년에 이 도시를 탈환했다.
루앙은 프랑스 종교전쟁 때 가톨릭 편에 섰으며, 1591~1592년 헨리 4세와 에섹스 백작이 지휘하는 영국군에 의한 5개월간의 포위 작전을 잘 견뎠다. 독일 점령 기간 동안 해군은 성에 본부를 두었는데, 현재는 루앙경영학교가 있다. 도시는 제2차 세계대전 중 노르망디 상륙작전의 D-데이에 큰 피해를 입었고, 유명한 노트르담 성당은 연합군의 폭탄에 의해 거의 파괴되었다.[3]
경관 및 유적[편집]
루앙 식물원은 1840년 스코틀랜드의 은행가 존 로가 소유했던 유명한 식물원이다. 1817년 엘리사 가르느랭이 기구에서 낙하산을 타고 뛰어내린 장소이다. 잔 다르크가 화형된 비외마르셰 광장의 중심에는 생 잔 다르크의 현대식 교회가 있는데, 광장을 압도하는 크고 현대적인 건물이다. 건물의 형태는 위로 올라간 바이킹 보트와 물고기 모양을 나타낸다.
루앙은 또 1952년~1968년 사이에 근처의 루앙레제사르 트랙에서 경주를 개최한 프랑스 그랑프리의 고향이기도 했다. 1999년 루앙 당국은 과거 루앙의 경주 관중석과 다른 잔해들을 철거했다. 오늘날 경주장으로 쓰이는 공용 도로 너머에는 거의 흔적이 남아 있지 않다.
루앙 노트르담 대성당은 1200년에 소실된 로마네스크 성당을 재건한 것으로 높이 156m인 중앙탑은 1827~1877년 재건되었다. 16세기에 완성된 루앙 대성당의 내부는 길이 135m, 높이 28m에 달한다. 스테인드글라스가 화려하며 고딕 외양은 클로드 모네의 연작 그림의 소재였다. 모네의 작품 중 일부는 파리의 오르세 미술관에 전시되어 있으며, 두 작품은 워싱턴 D.C.에 있는 국립 미술관에 있다. 또 다른 두 작품은 모스크바의 푸시킨 미술관에 있고, 한 작품은 베오그라드에 있는 세르비아 국립 박물관에 있다.
다른 유명한 건축물로는 한때 노르망디 의회 의사당인 팔레 드 쥐스티스가 들어서 있었던 생우앙 교회(12~15세기)와 15세기 고딕식으로 건축된 생마클루교회가 유명하다.
루앙에는 많은 미술관과 박물관이 있다. 루앙 미술과 도자기박물관은 16~18세기 유명했던 찬란한 도자기 컬렉션을 소장하고 있다. 보자르 박물관은 클로드 모네와 제리코 같은 유명한 화가들의 그림을 전시하는 미술관이다. 해양박물관은 루앙항과 항행의 역사에 관한 유물과 자료를 전시하고 있으며, 고대 박물관은 청동기 시대부터 르네상스 시대에 이르는 지역 유물들을 소장하고 있다.
관광지로서는 시계탑, 루앙 대성당 등 고딕 양식과 플랑부아양 양식의 건물들이 주요 볼거리이다. 루앙 노르망디 오페라하우스에서는 연중 오페라가 상연되고 데자르 극장에서는 다양한 음악과 춤이 공연된다. 루앙은 5년마다 대규모 해양박람회인 라르마다를 개최한다.
교통[편집]
간선 열차가 루앙리브드루아트역에서 르아브르와 파리까지 운행하며, 지역 열차는 노르망디의 칸과 디에프 및 다른 지역까지 운행한다. 직통 열차가 매일 아미앵과 릴로 운행되며, 직통 TGV(고속열차)는 매일 리옹과 마르세유를 연결한다. 루앙의 도시 교통은 전차와 버스 시스템으로 구성되어 있다. 전차는 시내 중심부 아래의 터널에서 두 갈래로 갈라진다.
루앙에는 자체 공항이 있어 주요 국내 목적지는 물론 국제선도 운항하고 있다. 센강은 루앙항에 있는 해상화물 연결의 주요 축이다. 칸, 르아브르, 디에프까지는 승용차로 50분이 걸리고, 칼레의 페리 항구와 채널 터널은 2시간 30분 이내에 도달할 수 있다.[4]
루앙 생투앙 수도원 교회[편집]
루앙 생투앙 수도원 교회(St. Ouen Church, Rouen)는 프랑스 북서부의 상공업 중심지이자 역사 도시인 루앙(Rouen)에 있는 유서 깊은 수도원 건물이다. 루앙 대성당(Cathédrale Notre-Dame de Rouen), 생 마클루 교회(Église Saint-Maclou) 등과 함께 지역의 주요한 중세 종교 건축물이자 관광 명소로 꼽히고 있다. 시청 건물 바로 아래쪽 제네랄 드 골 광장(Place du Général de Gaulle)과 시청사 공원 사이에 있다.
베네딕트회 수도회가 주도한 교회 건립공사는 1318년경에 처음 시작되었다. 이후 백년전쟁(Hundred Years' War, 1337-1453)으로 잠시 중단되었던 공사는 15세기까지 장기간 이어졌다. 지어졌을 당시 유행하던 고딕 양식의 영향을 많이 받은 건축물로 날개부분이 돌출되지 않은 십자구조를 가지고 있다. 교회 정면 하단에는 끝이 뾰족한 세 개의 화려한 아치형 입구가 나있으며 그 양쪽으로는 거대한 쌍둥이 종탑 두 개가 하늘 높이 솟아있다. 벽면과 종탑 꼭대기를 뒤덮고 있는 후기 고딕의 상징처럼 여겨지는 섬세한 플랑부아양 양식 조각들이 특히 인상적이다. 예배당 내부는 레요낭(Rayonnant) 양식의 정수로 일컬어지는 14세기 방사형 채색 유리창들로 아름답게 꾸며져 있다. 1840년 수도원은 그 오랜 역사적 가치와 시대를 반영한 뛰어난 건축미를 인정받아 문화재로 선정되었다.[5]
지도[편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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동영상[편집]
각주[편집]
- ↑ 〈루앙〉, 《위키백과》
- ↑ 〈루앙(두산백과)〉, 《네이버 지식백과》
- ↑ 〈루앙〉, 《요다위키》
- ↑ 〈루앙(유럽지명사전)〉, 《네이버 지식백과》
- ↑ 〈루앙 생투앙 수도원 교회〉, 《네이버 지식백과》
참고자료[편집]
- 〈루앙〉, 《위키백과》
- 〈루앙〉, 《요다위키》
- 〈루앙(두산백과)〉, 《네이버 지식백과》
- 〈루앙(유럽지명사전)〉, 《네이버 지식백과》
- 〈루앙 생투앙 수도원 교회〉, 《네이버 지식백과》
같이 보기[편집]