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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한민국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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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한민국(大韓民國, ROK; Republic of Korea)
인공위성으로 촬영한 대한민국(大韓民國, ROK; Republic of Korea)

대한민국(大韓民國, ROK; Republic of Korea)은 동아시아에 있는 국가이다. 간략히 한국(韓國, Korea)이라고 한다. 대한민국의 수도는 서울특별시(Seoul)이다. 대한민국은 분단국가로서, 휴전선 이남은 남한(南韓, South Korea), 이북은 북한(北韓, North Korea)이라고 부른다.

개요

대한민국은 동아시아의 한반도에 위치한 민주공화국이다. 대한민국은 자유민주주의 체제로서 자유주의와 민주주의가 결합된 모습을 드러내며, 대통령 중심의 다당제 체제로서의 특징이 존재한다. 3.1 운동을 계기로 1919년 4월 11일 선포된 대한민국 임시정부의 법통을 계승하여 1948년 8월 15일 자본주의와 자유민주주의를 기반으로 하는 대한민국 정부가 수립되었다.

남북 분단이 시작된 대한민국 제1공화국 시기 북한의 기습남침으로 한국 전쟁을 치렀으며 직후 세계 최빈국으로 전락하는 국난을 겪기도 했다. 휴전 이후 냉전체제의 최전방이라는 지정학적 특성을 지닌 대한민국은 미국의 동맹국으로서 유엔의 지원을 받았고 대한민국 제3공화국 이후 수출과 제조업 집중 육성을 통한 고도 성장을 거듭하여 산업화를 이룩하였다. 경제의 발전으로 민주 의식이 태동된 1987년 6월 항쟁을 통해 군사정권을 무너뜨리고 민주화를 순차적으로 이룩하여 대한민국 제6공화국을 출범시켰다.

대한민국의 국기는 대한민국 국기법에 따라 태극기, 국가는 관습상 애국가, 국화는 관습상 무궁화이다. 공용어는 한국어와 한국 수어이다. 수도는 서울이다. 인구는 약 5,160만 명으로, 전체 인구 중 절반 정도(약 2611만 명)가 수도권에 살고 있다.

대한민국은 1948년 5월 10일 총선거를 통해 제헌국회를 구성하였고, 1948년 8월 15일 대한민국 정부를 수립하였다. 1948년 제헌 국회에서 대한민국의 국호를 계승하여 헌법에 명시하였고, 다시 1950년 1월 16일 국무원 고시 제7호 '국호 및 일부 지방명과 지도색 사용에 관한 건'에 의해 확정하였다.

대한민국은 20세기 후반 이후 급격한 경제 성장을 이루었다. 그 과정에서 1990년대 말 외환 위기 등의 부침이 있기도 했다. 대한민국의 2022년 1인당 국민 총소득 (GNI)은 명목 3만 4,994달러이다. 2020년 유엔개발계획 (UNDP)이 매년 발표하는 인간개발지수 (HDI) 조사에서 세계 22위를 기록하였다. 2021년 7월 2일 스위스 제네바 본부에서 열린 '제68차 무역개발이사회' 마지막 회의에서 한국의 지위를 선진국 그룹으로 '의견 일치'로 변경하고 선진국으로 인정했다. 다만 높은 자살률, 장시간 근로 문화와 높은 산업 재해 사망률, 저출산 등의 사회 문제가 이 같은 성과와 병존하고 있다.

대한민국은 이코노미스트에서 발표하는 민주주의 지수 조사에서 2019년 기준 23위의 8.0점을 기록한 바와 같이 아시아에서 민주주의 수준이 가장 높은 국가 가운데 하나이다. 또한 대한민국은 주요 20개국 (G20), 경제 협력 개발 기구 (OECD), 개발 원조 위원회 (DAC), 파리 클럽 등의 회원국이다. 한국 영화, 한국 드라마, K-POP, 온라인 게임, 웹툰 등으로 대표되는 대한민국의 소프트 파워는 오늘날에 이르러 세계적인 영향력을 행사하고 있다. 경제적으로는 GDP 12위, 외환보유고 9위, 수출규모 5위, 수입규모 8위의 경제대국이자 선진국이며, 국방비는 세계 8위, GFP는 세계 6위에 달하는 지역강국이다.

1948년 이후로 오늘날까지 한반도에는 대한민국과 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이라는 두 개의 분단국가가 각각 남북에 위치하고 있다. 한반도와 부속도서의 면적은 약 22만 km²이며, 인구는 대한민국과 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을 합쳐 2019년을 기준으로 약 7,700만 명에 달한다.

상징

국호

대한민국 헌법 표제 및 제1조에 따라 공식 국호는 대한민국(大韓民國)이며 1948년 제헌 국회에서 이 국호를 계승하여 헌법에 명시하였고 다시 1950년 1월 16일 제정된 국무원고시 제7호 「국호및일부지방명과지도색에관한건」에 따라 약칭은 대한(大韓) 및 한국(韓國)으로 정해져 있다. 역본 및 정부령에 따라 정식 영문은 Republic of Korea이며 통상적으로는 South Korea가 자주 사용된다. 이는 대한민국이 'Korea'라는 이름을 북한을 제치고 선점한 효과이기도 한데, 대외적으로는 북한과의 구분을 위하여 'Republic of Korea'와 'South Korea'를 병용하고 국가별 리스트를 일람할 때는 편의상 K를 앞으로 따 와서 'Korea, Republic of', 'Korea, South' 또는 약칭인 'S.Korea'로 적지만 'Korea'라는 국호 자체가 대한민국을 칭하는 경우도 적지 않다. 한국은행의 영문 표기는 'Bank of Korea'이며 국제적으로도 'Korea'는 남한으로 우선 인식된다.

반면 북한에 대해서는 'N.Korea', 'DPRK' 등으로 'Korea'와는 명확히 구분되는 표기를 붙이는 것이 국제적으로 가장 일반적이며 국가코드도 대한민국의 KOR과 다르게 PRK로 표기한다. 국제사회에서 대한민국이나 한반도 전체가 아니라 북한을 단독으로 'Korea'로 칭하는 경우는 찾아보기 어렵다. 대외 무역에 있어서도 'Korea'라는 이름은 대한민국이 선점하여 한국산 제품에는 'Made in Korea'가 붙으며 대신 북한 제품에는 'Made in DPR Korea'가 붙는다.

대한민국(大韓民國)이란 국호 중 '한' 또는 '대한'(大韓)은 대한민국의 민족이 한민족을 중심으로 이루어졌기 때문에 생긴 말로서 이는 고조선과 '한(韓)'이 한민족의 혈통이며, '한(韓)'은 환웅을 모시고 백성들을 다스린 입법부, 사법부, 행정부의 세분의 책임자로서 위대한 지도자, 이상적인 인간상을 말한다. 나중에는 한(汗)이 군주를 뜻하는 말로 사용되었다. 이후 여기에 민국(民國)을 더한 대한민국(大韓民國)이라는 국호는 이승만, 김구 등 대한민국 임시정부의 강력한 의지에 따라 결정되었다. 이에 20세기 전반까지도 널리 사용되던 지명으로서의 "조선"이라는 이름은 "대한(大韓)"이나 "한국(韓國)", "한(韓)"으로 대체하여 현재 대한민국 내에서는 거의 쓰이지 않는다. 이에 따라 대한민국의 국민은 자국의 국호를 "대한민국", "한국" 등으로 부르며, 자국을 호칭할 때는 흔히 "우리나라"라고 한다. "대한"이라는 칭호를 사용하기도 하며, 한반도 북부에 자리한 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과 대비해 한반도 남부에 있다 하여 "남한"으로도 불리는데, 특히 대한민국 한반도 북부를 점거하고 있는 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은 한국을 남조선(南朝鮮)이라고 부른다.

대한민국 내에서는 대한민국을 간단히 한국(韓國) 또는 남한(南韓) 등으로도 부른다. 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은 대한민국을 반국가단체로 보기 때문에 대한민국이라는 정식 명칭 대신에 남조선(南朝鮮)으로 부른다. 대한민국은 과거엔 구한국(舊韓國), 신한국(新韓國)이라고 부르기도 하였다. 국제사회에서는 관습상 대한민국을 간단히 코리아(Korea)라 부르며, 이 이름은 동아시아의 고대 국가인 고려에서 유래하였다.

코리아(Korea)란 영문 국호의 어원은 동아시아의 중세 국가인 고려에서 유래하였다. 고구려가 5세기 장수왕 때 국호를 고려(高麗)로 변경한 것을 918년 건국된 중세 왕조 고려(高麗)가 계승하여 '고려'라는 국명이 아라비아 상인등을 통해 전 세계에 알려졌다. 유럽인들이 '고려'를 코레(Core, Kore), 코리(Kori)로 불렀고, 이 명칭에 '~의 땅'을 의미하는 '-a'를 붙어 '고려인의 땅'이라는 '코레-아'(Corea), '코리-아'(Korea), '코리-아'(Koria)가 되어 프랑스어로 Corée, 스페인어로 Corea, 영어로 Korea라고 불리게 되었다.

공식 문서에는 'Corea' 또는 'Korea'가 혼용되어 사용되었고, 1900년대 초기부터 영어권에서는 'Korea'의 사용 빈도가 높았다. 1892년 외국인이 자주 보는 잡지 〈The Korean Repository Archived 2016년 2월 18일 - 웨이백 머신〉 5월 호에는 "미국 국무부와 영국의 왕립지리학회는 우리가 차용한 이 땅의 이름을 아주 조리 있게 Korea로 표기하기 시작했던 것"이라는 내용이 나온다.

중화인민공화국, 중화민국, 일본, 베트남 등 주로 동아시아에 있는 한자 문화권 국가들에서도 일상에서 대한민국을 간단히 한국(중국어 간체자: 韩国, 정체자: 韓國, 병음: hánguó 한궈, 일본어: 韓国 간코쿠, 베트남어: Hàn Quốc한 꾸옥)이라 부른다. 다만 여전히 한반도 전체를 부를 때는 조선(중국어 간체자: 朝鲜, 정체자: 朝鮮, 병음: cháoxiǎn 차오시엔, 일본어: 朝鮮 조센, 베트남어: Triều Tiên찌에우 띠엔)이라는 명칭을 사용한다.

국기

대한민국의 국기 태극기

대한민국의 국기는 태극기이다. 흰색 배경 중앙에 파란색과 빨간색의 태극을, 네 귀퉁이에는 팔괘 중 상하가 대칭되는 사괘인 건(乾, ☰), 곤(坤, ☷), 감(坎, ☵), 리(離, ☲)를 그렸다. 이는 음양화합을 상징한다.

1882년(고종 19년) 조미수호통상조약에서 최초로 사용되었으며, 1883년 3월 6일(음력 1월 27일) 조선의 정식 국기로 제안되어 고종에 의해 공포되었다. 대한제국이 1910년 경술국치로 국권을 상실한 이후 일제에 의해 사용이 금지되었으나 1919년 3.1 운동 이후 대한민국 임시정부에 의해 국기로서의 정통성이 계승되었고 광복 이전까지 한국 독립운동의 상징으로 기능하였다.

1945년 8월 15일 광복과 함께 국기로서의 기능을 회복하였고 대한민국 제1공화국 정부가 수립되면서 1949년 10월 15일 국기시정위원회에서 국기제작법 고시가 확정되었다. 이후 문교부고시 '국기제작법', 대통령고시 '국기게양방법에 관한 건', 대통령령 '대한민국국기에관한규정' 등의 규정들이 마련되었으며, 2007년 제6공화국 참여정부 시기에 통합된 대한민국 국기법이 마련되었다.

한편, 북한에서도 광복 후 1948년 7월까지 태극기를 공식적으로 사용하였으나, 소련군정의 유물론 사상에 회유되어 1948년 북조선인민위원회에서 새로 인공기를 제정한 뒤로는 적대 중인 대한민국의 상징으로 쓰인다는 점 때문에 사용이 금지되어 있다.

국장

1963년 12월 10일 (나라문장규정)

대한민국의 국장인 나라문장(Nara Munjang)은 대한민국의 국장으로, 대한민국의 국기인 태극기와 함께 국가를 상징하는 표상이다.

이러한 문장은 서양에서는 일반적으로 씨족이나 집단, 국가의 족보와 권위를 나타내기 위해 도안되었다. 한국사에서는 근대 다른 아시아 국가처럼 대한제국이 서양의 국장 개념을 수입하여 오얏꽃 문장을 황실 문장이자 국장으로 사용한 사례가 있으며, 오늘날 대한민국은 대통령령인 <나라문장규정>에서 규정한 대로, 태극기의 태극 문양과 무궁화 꽃을 모티브로 한 국장을 사용하고 있다. 태극 문양이 다섯 개의 무궁화 꽃잎에 둘러싸여 문장을 이루고, 다시 전체 문장이 '대한민국'이라는 글자가 새겨진 리본에 둘러싸여 있는 형태이다.

나라문장은 일반적으로 외국기관에 발송되는 중요문서, 훈장 및 대통령표창장, 재외공관의 건물, 대한민국 외교부 해외 업무 서류 등에 도장된다. 일반인이 나라문장을 가장 흔히 접할 수 있는 문서는 바로 대한민국 여권의 표지이다. 대한민국뿐만 아니라 많은 나라에서 여권 표지에 국장을 새겨놓고 있다. 화폐에 쓰인 사례는 기념주화를 제외하고는 없다. 외국에서는 국가대표 선수의 경기복에 국장을 다는 경우도 있으나, 한국의 경우 국기나 협회 휘장은 달아도 나라문장을 다는 경우는 찾아보기 어렵다.

대부분의 공공 행정 업무를 행정부(정부)가 맡아 하는 특성상 대한민국 정부에서 발행한 공문서나 공공 서비스에 상징으로 사용되는 일이 잦았으나, 2016년에 대한민국 정부상징을 도입한 이후에는 이들 상징이 대부분 정부상징으로 대체되었다. 국가공무원공채시험, 사법시험, 변호사시험 등 국가시험의 합격증서에도 도장되었으나 이들 역시 현재는 정부상징으로 대체되었다.

사실 나라문장은 국기와 마찬가지로 대한민국이라는 나라 자체를 상징하는 것으로 대통령령으로 정해진 것이고, 정부상징은 대한민국 정부만을 상징하는 것으로 행정안전부대통령공고로 정해진 것이므로, 정부상징보다는 나라문장이 훨씬 격이 높다고 볼 수 있다. 정부상징은 모든 나라에 다 있는 것이 아니지만, 국장은 국기와 함께 주권국이라면 거의 모두가 갖고 있기 때문이다.

애국가

애국가

법률상 정해진 대한민국의 국가는 없으나, 국제적인 행사에서도 대한민국을 상징하는 음악으로 애국가가 연주되는 등 국가로 인식되고 있다.

현재 애국가의 가락(작곡)은 안익태가 작곡하였고, 이 가락만이 현재 공식적인 가락으로 사용되고 있으며 가사는 대한민국 임시정부 시기에서 거의 그대로 전승되었다. 정확히는 대한민국 임시정부에서는 안익태가 작곡한 현재의 가락에 따른 애국가가 1940년 12월 20일부터 사용되었으며 1941년에 광복군 결성식에서 불려진 것을 계기로 그리고 일제의 탄압으로부터 자유로운 미주 등 해외에서는 한인계 라디오 방송에서 송출되는 등 적극적으로 보급되었으며 이후 공식적으로 국가로 명문화한 시점은 1942년이다.

해방 후 귀국한 해외 독립운동가들, 특히 대한민국 임시정부 계열 세력이 정국의 주도권을 쥐게 되면서 현재의 애국가가 한국 본토에도 퍼져나갔고 이 영향이 관습상으로 정착되어 현재에도 쓰이는 대한민국의 애국가가 되었다.

애국가는 4절까지 있으나 다 외우지는 못해도 대다수는 1절까지 암송을 할 수 있다. 가끔 4절에 후렴까지 받아쓰기 테스트를 하는 학교가 있다. 애국가 제창의 편의성을 고려하여 국가 주요 행사시에는 애국가를 1절만 제창한다. 군대에서는 애국가를 몽땅 4절까지 부르거나 요일별로 1절씩 돌아가며 제창한다.

국화

무궁화(無窮花)

법률상으로는 무궁화를 국화로 인정할 근거가 없지만, 행정안전부 홈페이지에서 대한민국의 국화라고 명시해두었고, 1963년 제정된 나라문장에서 무궁화 형태가 반영되는 등 보편적으로 무궁화가 상징적인 꽃으로 인식된다.

법률상 기준이 마련되어있지 않다보니 무궁화의 수많은 품종 중 어떤 것을 나라꽃으로 할지에 관한 논의도 미흡하다. 다만 흥미롭게도 1991년 산림청이 나라꽃의 범위를 '단심을 지닌 홑꽃'으로 제한 한 이력이 있다. 이는 즉 기본꽃잎 5장의 중심부에 단심과 우뚝 솟은 수술통을 갖춘 형태를 말한다. 꽃잎의 색에 대해서는 하나로 정하지 않고, '백단심계(흰 꽃잎)' 또는 '홍단심계(분홍 꽃잎)'라고 기술하였다.

국새

대한민국의 국새
국새규정 [시행 2020. 4. 1.] [대통령령 제30515호, 2020. 3. 10., 타법개정]
제1조(목적) 이 영은 대한민국의 국새에 관한 사항을 규정함을 목적으로 한다.
제2조(적용범위) 국새의 관리에 관하여는 다른 법령에 특별한 규정이 있는 경우를 제외하고는 이 영이 정하는 바에 의한다.
제3조(정의) 이 영에서 사용하는 용어의 정의는 다음과 같다.
1. "인면"이라 함은 국새중 글자가 새겨져 있는 부분을 말한다.
2. "인문"이라 함은 국새의 인면에 새겨진 글자를 말한다.
3. "인영"이라 함은 국새를 종이등에 찍었을 때 생기는 상을 말한다.

대한민국의 국새는 나라도장이라고도 하며, 국가의 권력과 정통성을 상징하고, 공문서에 날인함으로써 대한민국 정부에 의한 행정권의 발동을 표상적(表象的)으로 나타내는 도장이다. 이는 동아시아 제국(諸國)의 전통적인 '어보', '어새', '옥새'의 예를 따른 것이다. 국새는 행정안전부장관이 관리하며, 다음과 같은 경우에 문서 본문 첫째 면의 중앙에 날인한다.

  • 1. 헌법개정공포문의 전문
  • 2. 대통령이 임용하는 국가공무원의 임명장 및 「공무원임용령」 제5조제1항에 따라 대통령이 소속 장관에게 임용권을 위임한 공무원의 임명장
  • 「군인사법 시행령」 제37조의2제3항에 따른 영관급 장교의 임명장
  • 「군무원인사법 시행령」 제46조의3제3항에 따른 4급 이상 일반군무원의 임명장
  • 「소방공무원임용령」 제3조의2제3항에 따른 소방령 이상 소방공무원의 임명장
  • 3. 상훈법 제9조 ㆍ제19조 및 동법시행령 제17조의 규정에 의한 훈장증과 포장증
  • 4. 대통령 명의의 비준서등 외교부장관이 날인을 요청하는 외교문서
  • 5. 기타 행정안전부장관이 필요하다고 인정하는 문서

국새는 대통령령 제30515호 국새규정에 따라 '대한민국'의 네 글자를 인문으로 새기며, 원래는 한자 전서체로 새겼으나 제2대 국새부터는 한글로 새기는 것이 명문화되었다. 글자가 새겨져 있는 부분인 '인면'이 10.4센티미터의 정방형이어야 하며, 재질은 금을 주성분으로 은ㆍ구리ㆍ아연 및 이리듐의 합금으로 제작하여야 한다.

역사

기원

한반도에 두 발로 걷고 도구를 이용하는 사람들이 살기 시작한 시기는 기원전 약 70만 년 이전으로 추정되며, 현생인류는 후기 구석기 시대인 약 2만 5천 년 전부터 해안과 강가를 중심으로 거주하기 시작한 것으로 보인다. 인골 화석으로는 충청북도 단양군 상시굴과 두루봉동굴, 제천시 점말굴 등에서 현생인류로 추정되는 사람 뼈 화석이 발견된 바 있다. 이후 중석기 시대와 신석기 시대를 거치면서 여러 빗살무늬 토기인, 무문토기인등 여러 인종의 유입과 주변 세력들과의 상호작용을 통해 문명이 발전했다. 다만 초기 구성원들의 이동과 외부 세력 유입의 구체적 모습은 확실하지 않다.

한반도 일대의 최초의 국가는 고조선이다. 일연의 《삼국유사》에서는 현존하지 않는 《고기》를 인용하여 단군 왕검이 고조선을 세웠다고 기록하였고 《동국통감》에서 그 시기를 기원전 2333년이라 하였다. 날짜는 대종교에서 임의로 음력 10월 3일로 약속하고 개천절이라 불렀는데 대한민국 정부에서 그 날을 양력으로 고쳐 국경일로 지정하였다. 고조선 멸망을 전후하여 부여, 옥저, 동예, 진국, 삼한 등 여러 나라가 생겨났고, 이후 고구려, 백제, 신라의 삼국 시대로 이어졌으며 이 중 신라가 삼국을 부분적으로 통일하는 한편 북쪽의 발해와 함께 남북국 시대를 형성했다. 10세기 고려가 등장하면서 한민족 단일 국가의 시대를 시작했다. 14세기 조선이 이를 계승했다.

한국의 역사

한반도의 국가로는 전설적으로 단군이 건국한 단군조선이 있다. 4세기에는 고구려, 신라, 백제, 가야가 한반도 내에서 대립하였다. 6세기에는 가야제국이 신라 등에 병합되어 고구려, 신라, 백제 삼국이 패권을 다툰 후 당나라와 동맹한 신라는 663년 백촌강 전투에서 백제를 멸망시켰다. 668년 고구려왕을 투항시켜 고구려를 멸망시켰다. 그러나 당나라의 최종 목표는 신라를 이용해 한반도를 장악하려는 것이었다. 이러한 당나라의 야심에 신라의 문무대왕은 고구려와 백제의 유민과 연합하여 당나라와 정면으로 대결하였다. 676년 나당 전쟁이 발발 하였고 금강 하구의 기벌포에서 당나라의 수군을 섬멸하여 당나라의 세력을 한반도에서 완전히 몰아내었다. 그후 당나라의 지배력이 쇠퇴함과 동시에 677년 통일신라를 세웠다. 그후 북쪽의 발해와 함께 남북국 시대를 형성했다. 이후 통일신라의 약체로 892년 후삼국시대가 시작된 후, 918년 건국된 고려가 936년 전국을 통일하였다.

13세기 초 중국 대륙의 정세는 급박하게 변화하고 있었다. 오랫동안 부족 단위로 유목 생활을 하던 몽골족이 통일된 국가를 형성하면서 몽골 제국을 세웠다. 그 후, 1231년 고려에 왔던 몽골 사신 일행 저고여가 귀국하던 길에 국경 지대에서 거란족에게 피살되자 이를 구실로 몽골군이 침입해 왔는데, 이른바 고려-몽고 전쟁의 시작이었다. 그러나 당시 집권자인 최우는 강화도로 도읍을 옮기고, 장기 항전을 위한 방비를 강화하였다. 이후 고려는 7차에 걸친 몽골 침략을 끈질기게 막아 내며, 약 30년간의 장기 항전에 들어갔다. 장기간의 전쟁으로 국토는 황폐해지고 백성들은 도탄에 빠지게 되었다. 고려는 몽골 제국의 침공으로 약화되었고, 1392년 고려의 장수 이성계가 고려 공양왕을 폐위하고 국왕으로 즉위하면서 조선이 성립되었다.

조선(朝鮮)은 계속되는 세도정치로 왕족들은 힘을 쓰지 못했고, 왕권도 매우 약해져 있었다. 조선은 흥선대원군의 쇄국정책으로 외교를 하지도 보지도 않았고, 눈과 귀를 닫는다. 대원군은 1866년(고종 3)에 천주교에 대한 탄압과 당시 우리나라에 잠입한 프랑스 선교사를 처형한 사건으로 프랑스와 전쟁을 하였다. 잇따라 1871년에는 제너럴셔먼호(General Sherman號) 사건을 계기로 미국과 전쟁을 벌였다. 대원군은 "서양 오랑캐의 침입에 맞서서 싸우지 않는 것은 화평하자는 것이며, 싸우지 않고 화평을 주장하는 자는 매국노이다(洋夷侵犯非戰則和, 主和賣國)."라는 글을 새긴 척화비를 전국 각지에 세우고, 단호한 쇄국정책을 천명하였다. 19세기 근대화의 물결이 동아시아로 밀려오는 가운데 조선은 점차 약화해 갔으며, 19세기 중반부터 서구 열강들이 동아시아로 모여들었다.

대한민국 임시정부

대한민국 임시정부 국무원 기념 사진(1919년 10월 11일).

1919년 3월 1일, 한국인들은 민족대표 33인의 독립선언서 낭독을 시작으로 독립을 위한 3·1운동을 펼쳤다. 이 운동은 대체로 각 지역에서 정기적으로 열리던 장(시장)의 개장일에 맞추어 전국으로 퍼져 나갔다. 이는 국내외 독립운동의 새로운 전환점을 마련하게 된다.

4월 11일, 3·1운동의 정신을 이어받아 중화민국 상하이에서 대한민국 임시정부가 수립되었다. 임시정부는 대한민국 임시 헌법을 제정하여 대통령제와 3권 분립을 채택하고 한국의 독립을 위하여 외교·군사적으로 노력했다. 그러나 독립운동 노선의 갈등으로 여러 인사들이 빠져나가면서 국무령 중심의 집단지도체제로 전환하였다.

이후 김구를 주축으로 주석중심제로 재정비하고 조소앙의 삼균주의를 건국강령으로 채택하였다. 1942년에는 좌파 계열인 조선민족혁명당의 김규식, 김원봉 세력과 김성숙, 유림 등의 무정부주의자들이 임시정부에 합류하여 민족통일전선 형성의 기틀이 마련되었다. 미국 OSS와도 연계하여 1945년 9월을 기한으로 국내 진공 작전을 준비하였다. 현행 대한민국 헌법 전문에는 대한국민이 3·1운동에 따라 건립된 대한민국 임시정부의 법통을 계승한다는 문구가 삽입되었다.


한국의 군정기

1948년 대한민국 정부 수립 선포식

1945년 8월 15일, 한반도는 얄타회담에서 이루어진 비공식적 합의에 따라 소련미국의 신탁 통치하에 들어갔다. 1945년 9월에는 한반도의 북위 38도선을 경계로 남쪽은 미군이, 북쪽은 구 소련군이 포고령을 선포하여 각각 군정을 실시하면서 한반도는 남과 북으로 분단되었다. 이후 여운형, 안재홍 등은 1944년 설립한 지하조직인 건국동맹을 모태로 조선건국준비위원회를 개최하였고, 9월 여운형, 박헌영 등에 의해 조선인민공화국 내각이 수립되었다. 그러나 1945년 11월 중화민국 쓰촨성 충칭에서 개인 자격으로 귀국한 대한민국임시정부 요인들과 '임정정통론' 문제로 갈등이 벌어졌고, 미군정은 맥아더 포고령에 따라 인공 내각(조선인민공화국 내각)과 임시정부를 승인하지 않음으로써 인공 내각은 해산되었다.

1945년 12월에 모스크바 3상 회의에서 신탁통치안 문제를 놓고 한반도 내에는 좌, 우익 세력간 대립이 격화되었다. 곧이어 1946년 5월에는 미소공위가 개최되었으나 양측의 주장이 엇갈려 결렬되었다. 이때 김규식, 여운형, 안재홍 등은 통일 임시정부 수립을 위해 좌우합작운동을 개시하여 미소공위를 재개하고자 하였지만, 한민당과 남로당 등 좌우익세력간에 불참으로 중도파 세력만의 운동으로 축소되었다. 1945년 12월 송진우 암살, 1947년 7월에 여운형 암살 등 해방정국의 잇단 사건으로 좌우합작운동은 실패로 끝났다.

대한민국 정부 수립

미군정청이 1946년 7월 서울지역 1만여 명에게 실시한 '어떤 정부 형태를 원하는가'에 대한 여론조사에서 70%가 "사회주의를 지지한다"라고 밝힌 상황에서 화순탄광 노동자들의 생존권 보장을 요구하며 벌인 봉기에 대한 유혈 진압과 사회주의적인 인민 공화국을 인정하지 않고 자신의 뜻을 관철하고자 했던 미 군정은 온건파인 김규식, 안재홍, 여운형을 통해 좌우 합작과 협상을 주도하게 했다. 그러나 헤게모니 장악에서 제외된 것에 불만을 품은 이승만, 김구, 윤치영, 박헌영, 허헌 등의 반발에 봉착하게 되었다. 이후 제2차 미소공위 마저 결렬되어버리자 미국은 한반도 문제를 UN 총회로 이관했고, 총회에서 남한 내 단독정부 수립이 결정되었다. 이에 김규식, 조소앙, 김구 등은 통일 정부를 수립하기 위해 남북협상 등을 추진하여 노력하였으나 수포로 돌아가고, 남한에서도 선거 가능한 지역에 한한 정부 수립론이 제기되면서 (정읍 발언) 사실상 남북 단일 정부 수립은 불가능한 모양새가 되었다.

1948년 1월부터 한반도의 정국은 단독 정부 수립론과 남북 협상을 통한 정부 수립론을 놓고 의견이 갈라서게 되었다. 그러나 1948년 2월 38선 이북에서는 북조선인민위원회를 구성하고, 조선인민군을 창건하면서 분단은 사실상 불가피하게 되었다. 5월 10일 38도선 이남에서만 제헌 의원 총선거가 실시되어 제헌 국회가 탄생하였고, 같은 해 7월 17일에는 초대 헌법인 대한민국 제헌 헌법이 구성되었다. 7월 22일에는 국회의 간접 선거로 이승만이 초대 대통령, 이시영이 초대 부통령으로 선출되었고, 8월 15일에는 대한민국 정부 수립이 선포되었다.

12월 12일 "유엔 총회 결의 195(III) 한국의 독립 문제"에서 대한민국이 "한반도에서 유일하게 그러한 정부(the only such Government in Korea)"임을 선언하였다. 여기서 '그러한'은 대한민국이 임시위원단의 감시 하에서 주민들 대다수의 자유 의사에 따라 수립되었고, (분단상태를 고려할 때)선거가 가능했던 그 지역에 대한 유효한 지배권과 관할권을 가진 합법정부임을 뜻한다. 이미 48년 9월 9일에 한반도 이북에서는 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이 선포되었음에 미루어 그 해 12월의 결의는 대한민국만을 한반도에서 유일한 합법정부로 인정한 것이다. 이명박 정부에서 만든 새 교육과정에서 교과서 집필진이 학회에 자문한 결과 "1948년 12월 유엔 결의에서 대한민국은 '유엔한국임시위원단의 감시가 가능한 지역에서 수립된 유일한 합법 정부'로 인정됐으며, 남북한이 1991년 유엔에 동시 가입했기 때문에 '한반도 유일의 합법 정부'라 명시하는 것은 시비의 소지가 있다"고 하면서 '유일한 합법정부는 1948년 정부에 한정'되어 시비의 대상이 될 수 있는 '유일한 합법 정부'를 제외했으나 정부 측의 요구로 포함시켰는데 2019년 5월 2일 공개된 중·고교 역사교과서의 집필기준 시안에서 대한민국이 '한반도의 유일한 합법정부'라는 표현이 빠졌다.

6.25 전쟁

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의 김일성은 남침을 기도하여 공산주의화 하려는 야망을 실현하고자 준비하였다. 소련의 지도자인 이오시프 스탈린의 승인을 받자, 1950년 6월 25일 새벽 4시에 소련에서 지원받은 수십대의 소련제 탱크를 앞세워 대한민국을 침공했다. 당시 대한민국에는 탱크의 공세를 막을 수 있는 방어책이 전혀 없었고 야포와 전투기 등 모든 것이 압도적으로 열세였기 때문에 총만 가진 거의 맨 몸의 한국군은 순식간에 밀려날 수 밖에 없었다. 그렇게 대한민국은 조선인민군이 침략한 3일만에 수도인 서울을 인민군에게 빼앗기게 된다. 치밀하게 계획하고 무장한 인민군을 상대하는 것이 계란으로 바위치기였던 한국군은 결국 밀려나 낙동강 방어선을 최후의 배수진으로 정하고 버티었다. 이 과정에서 수많은 어린 학생들(학도병들)이 무고하게 죽어나갔으며 많은 사상자와 인명피해가 초래되었다.

하지만 유엔군이 파병으로 지원하고 유엔군 총사령관 더글러스 맥아더가 9.15일 인천 상륙 작전을 벌여 조선인민군에 반격을 시작하자 얼마 지나지 않아 대한민국은 9월 27일에 서울을 탈환해냈다. 10월 1일에는 38도선까지 수복해서 원점으로 돌아갔다. 이 때 유엔 내부에서 맺어진 새로운 결의로 유엔군의 목적이 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을 완전히 공략하려는 목적으로 변경되었다. 이후 한국과 유엔군은 거듭해서 10월 26일에는 압록강까지 올라갔으나 곧 이어 중화인민공화국이 인해전술을 펼치며 참전하고 소련이 군사를 지원하여 전세가 다시 역전되었고 전쟁은 장기화되었다. 이후 38도선 인근 중부 지방에서 교착을 거듭하던 1953년 7월 27일에 휴전협정이 오전 10시에 체결된 후에 효력이 발생한 22시에 완전히 전투가 종료되고 군사 분계선이 형성되면서 오늘날까지 휴전 상태가 이어지고 있다.

6.25 전쟁으로 20만 명이 과부가 되었고 10만여 명 이상이 고아가 되었으며 1천만여 명 이상이 이산 가족 신세가 되었다. 한반도 내 45%에 이르는 공업 시설이 파괴된 탓에 경제적, 사회적 암흑기가 도래하여 한국과 북한의 경제 수준이 떨어졌다. 무엇보다도 이 전쟁으로 인해 남북 간에 서로에 대한 적대적 감정이 극도로 팽배하게 되어 한국의 분단이 더욱 고착화되면서, 분단한 지 70년이 넘었다.

제1·2공화국

제2공화국 국무총리 장면

한국 전쟁이 휴전 협정을 맺은 후 1950년대는 미국으로부터 지원을 받아 전후복구사업을 실시하는 가운데 경제원조체제가 성립되던 시기였다. 제1공화국 정권의 고위 관료는 부패해 국민의 불만을 샀다. 의원 내각제였던 제1대 내각에서 재선이 불가능하다 판단한 이승만이범석장택상을 비롯한 측근들과 족청계, 백골단, 땃벌떼 등을 동원하여 부산정치파동(1952년), 사사오입 개헌(1954년)을 일으키고 장기집권을 추진했다. 그러나 이범석, 장택상 등의 성장을 두려워한 이승만은 이들을 제거하고 이기붕 계열을 등용한다. 이기붕 계열은 또한 친 자유당 성향의 이정재, 임화수, 유지광 등의 정치깡패들을 활용하여 야당 의원의 집회를 탄압, 제1공화국 후반기는 혼란을 거듭했다.

그 와중에 부통령 장면의 피격 사건(1958)과 조봉암 사법살인(1959) 등의 조치까지 겸해졌고 언론의 자유마저 통제당했다. 1959년 곳곳에서 정부의 독재에 저항하는 집회가 시작, 1960년 3월 15일 부통령 선거의 부정을 계기로 국민들의 불만은 극에 달해 4·19 혁명이 발생했고, 마산 앞바다에서 며칠 전 실종되었던 김주열의 주검이 떠오르면서 시위는 격화되었다. 4월 26일 이승만 대통령이 하야를 선언하여 제1공화국은 붕괴했다.

4·19 혁명 이후 허정 과도 내각을 거쳐 장면을 수상으로 하는 제2공화국이 수립됐다. 제2공화국은 3차 개헌을 통해 내각책임제와 양원제를 구성했고, 언론 자유와 혁신계 정치활동을 허용했다. 제2공화국 당시 각계 각층의 통일 운동과 민주화 요구가 분출되기도 했는데, 집권 여당인 민주당 사이에서 신파와 구파가 나뉘어버려서 개혁 의지가 미약한 탓에 이러한 요구들을 수용하지 못했다. 곳곳에서 데모가 연이어 벌어졌고, 장면이 단호한 조치를 계획하던 중 1961년 5월 16일 새벽 5·16 쿠데타로 내각 각료들이 체포되면서 장면 내각은 1년 남짓밖에 집권하지 못하고 무너졌다.

그 뒤 윤보선은 형식적인 민정을 실시하였으나 군사정변 세력에게 구정치인 정화법(1962)으로 정치활동을 정지당하자 여기에 불만을 품고 사퇴(1962.3.22)함으로써 1962년 3월부터 1963년 12월까지 5·16 군사정변 세력이 설립한 국가재건최고회의가 사법권·행정권·입법권을 모두 장악하고 군정을 실시했다.

제3·4공화국

1961년 5.16 군사정변 당시 박정희.

1963년 12월 5·16 군사 정변을 주도한 박정희 등에 의해 제3공화국이 수립됐다. 야당 후보인 윤보선과의 두 차례의 선거전에서 10만 표 안팎의 근소한 차로 집권하였다. 재임 초반 시위를 무력 진압하며 강행했다. 5.16부터 1979년까지 한국은 여러 차례 외환위기와 부도위기를 겪었고, 마이너스 성장만해도 1963년과 1964년의 2분기, 1961년, 1962년, 1965년, 1966년, 1979년의 각각 3분기, 1970년과 1978년 1분기, 1967년과 1968년의 4분기 등 1961~1979 박정희 집권 74분기 중 14분기(19%)에 이르렀으며, 1960년대 개발 독재의 일환으로 정부는 경공업 중심의 수출 주도형 발전과 베트남 전쟁, 한독근로자채용협정등을 통한 외화 획득으로 경제 발전을 꾀했다. 1970년대에는 중화학 공업과 전자산업을 집중적으로 육성했다. 하지만 도시와 농촌의 소득 격차, 저임금 노동과 빈부격차와 같은 문제도 남겼다.

이후 박정희 정부는 3선 개헌을 통과시키고 1971년 대선에서 3선에 성공한다. 그런데 대선에서 야당 후보가 돌풍을 일으키고 같은 해 총선에서 야당의 의석수가 2배로 늘어나는 선전을 이룬 데다가 제1차 석유 파동 등으로 경제성장도 한계를 보이기 시작하면서 정권 유지에 위기를 느낀 박정희 정부는 1972년 유신 헌법을 통과시키고, 제4공화국을 선포하였다.

1971년 대통령 선거에서 야당의 돌풍으로 불안감을 느낀 박정희는 1972년 7·4 남북공동성명을 발표하고, 통일을 준비한다는 명목으로 10월 유신을 선포해 유신체제를 수립했다. 이를 통해 대통령의 임기를 6년 연임제로 수정하는가 하면 국회의원을 대통령이 임명하게 할 수 있는 법안까지 통과시키는 등 대통령의 권한을 비정상적으로 확대시켰다. 이에 노동운동계, 재야와 학생 세력 등이 민주화를 요구하지만, 정부는 잇따른 긴급조치를 통해 억눌렀다. 하지만 민주화 운동 세력 및 노동운동가의 반발은 계속되었다. 미국이 한국의 '인권 침해'를 비판하기 시작하자 한미 간 외교적 마찰이 일어났다. 제2차 석유 파동까지 겪으면서 경제위기와 내부 혼란이 크게 가중되었다. 김영삼 의원 제명 파동과 YH 사건, 부마 항쟁 등의 사회적 저항이 지속되었다. 이러한 일들은 권력 내부의 분열을 초래하였으며, 1979년 박정희가 중앙정보부장 김재규에게 암살되면서(10·26 사건) 박정희의 17년 장기 집권은 막을 내렸다.

10·26 사건 이후 유신 체제 하에서 국무총리 최규하가 이끄는 정부가 출범했다. 유신 헌법 폐지를 통해 민주화를 추진하려는 움직임이 나타나던 시기, 최규하 정부는 긴급조치를 해제함으로써 일부 정치적 억압을 완화했고, 1979년 12월과 1980년 2월, 1980년 4월에 대사면령을 단행하였다. 그러나 전두환을 비롯한 이들이 12월 12일에 군사반란을 일으켜 실권을 장악하였고, 급기야 최규하 대통령에게 간섭하기 시작했다. 이들은 1980년 쿠데타를 일으키면서 최규하 정부는 1980년 8월 최규하 대통령의 사임으로 붕괴되고 말았다.

제5공화국

전두환하나회를 중심으로 한 신군부는 12·12 군사 반란을 일으켜 계엄 사령관을 체포하고 군부를 장악하여 실세로 떠올랐고, 민주화 일정을 지체시켰다. 1980년 초부터 국회와 정부는 유신 헌법을 철폐하기 위한 개헌 논의를 진행했고, 대학생과 재야 세력도 정치 일정 제시와 전두환 퇴진 요구를 바탕으로 민주화 시위를 벌였다. 이에 신군부는 5월 17일 비상계엄을 전국확대하면서, 이른바 "화려한 휴가"라고 불리는 포고령을 통해 "정치활동 금지", "보도검열 강화", "휴교령" 등을 선포하고 군병력을 동원해 국회를 폐쇄했다. (5.17 쿠데타) 이 과정에서 신군부는 5·17 쿠데타에 항거한 광주 민주화 운동을 공수부대 및 특전여단을 투입해 유혈진압을 하고, 5월 27일 국가보위비상대책위원회를 만들어 정국을 주도했다. 10월 27일에는 7년 단임의 대통령제를 골자로 한 제5공화국 헌법이 공포되고 이듬해 제5공화국이 출범했다.

제5공화국은 경제 안정에 매진하는 한편, 1981년에는 1986년 아시안 게임, 1988년 서울 올림픽 등을 유치하기도 했다. 또한 야간통행금지 해제 및 교복 자율화 등의 유화 조치를 내걸어 국민들의 불만을 잠재우기도 했다. 한편으로 임기 중반부터 3저호황으로 인한 수출 흑자를 기록했다. 그러나 다른 한편으로는 권위주의적인 독재체제를 성립하고 민주주의 탄압 및 고문·정치사찰·용공조작으로 대변되는 인권 유린행위를 자행했으며, 정경유착·부정축재·친인척 비리가 빈발했다.

1987년 1월 박종철이 고문으로 치사하는 사건이 터지자 정부 퇴진과 민주화 요구의 목소리는 더욱 커졌다. 이에 정부는 호헌조치를 취하며 "개헌할 의도가 없음"을 내세웠고, 국민들의 민주화 요구는 더욱 빗발쳐 6월 항쟁으로 이어졌다. 마침내 전두환 대통령은 민정당 총재 노태우를 통해 6·29 선언을 발표하면서 국민의 개헌 요구를 수용했다. 개정된 헌법에 따라 치러진 제13대 대통령 선거에서는 여당 노태우가 당선되었고, 1988년 2월 취임식과 함께 제5공화국은 막을 내린다.

제6공화국

= 노태우 정부와 문민정부

1987년 6월 29일, 당시 민주정의당 총재이자 대통령 후보였던 노태우가 대통령 직선제 등을 주 내용으로 하는 6·29 선언을 발표했다. 이후 여야가 합의하여 대통령 직선제 등을 골자로 한 개헌이 성사되었다. 이로써 야권의 정치 참여가 허용되었으며, 1988년 치러진 제13대 총선에서는 사상 최초의 "여소야대" 국회가 나왔다. 민주정의당은 불리한 여론을 극복하는 돌파구로 3당 합당을 추진해 민주자유당을 탄생시켰다. 또한 전두환 측근에 대한 사법조치를 단행(국정감사)하고 민간인들을 정계에 대폭 고용하기도 했다(과거와의 단절). 외교 면에서 노태우 정부는 북방정책을 추진해 구 소련을 비롯한 공산권 국가들과의 수교 등 관계 개선에 주력했다. 1991년 9월 유엔의 가맹국이 되었으며, 이어서 12월에는 남북기본합의서를 채택했다. 또한 1992년에는 지방 자치 제도를 실시하게 되었다.

그러나 노태우도 전두환처럼 군인 출신이었고, 12·12 사태를 주도하고 5공 성립 과정에 깊숙히 관여한 인물이라는 한계가 있었다. 노태우 정부도 정경유착은 물론 비자금 형성·민간인 사찰·고문 등 5공의 파쇼 정치를 그대로 답습했다. 이는 결국 민주화 시위(1991) 등으로 이어졌고, 노태우는 이른바 "6공 황태자"로 불리던 박철언을 후계자로 지명했지만 여당 내에서도 불만이 터져 나왔으며 끝내 김영삼을 후계자로 택할 수밖에 없었다. 1993년 문민정부가 출범함으로써 노태우 정부는 막을 내렸다.

1992년 치러진 제14대 대선에서 민주자유당의 김영삼 후보가 당선되어 1993년에 취임하면서 대한민국은 이른바 문민정부 시대로 접어들었다. 이로써 윤보선 정부 이후 30여년만에 민간인 정부로 회귀했다. 문민정부는 하나회 군부 숙청, 금융실명제, 표현의 자유 허용, 역사 바로 세우기 운동, 지방자치 단체장 선거 부활, OECD 가입 등의 업적을 남겼다. 특히 군사 정변을 주도할 위험이 있는 군 내 사조직을 숙청하고, 12.12 관련자 및 5.18 관련 정치군인들을 처벌하기도 했다. 하지만 대한항공기 괌 추락 사고, 우암상가아파트, 성수대교삼풍백화점 붕괴 사고 등의 대형 사고가 일어나 사회적인 혼란을 겪기도 했다. 또한 자유방임적 시장경제와 세계화를 추구하면서 준비없는 대규모 개방을 강행했고, 외환관리에 실패해 IMF 구제금융사건을 초래하였다. 결국 국민들의 높아진 요구를 충족시키지 못한 채 야당에게 정권을 이양할 수밖에 없었다.

국민의 정부와 참여정부

2002년 FIFA 월드컵의 붉은악마 거리응원

이 부분의 본문은 김대중 정부 및 노무현 정부입니다.

1997년 제15대 대선에서 새정치국민회의의 김대중 후보가 당선되면서 헌정 사상 최초의 평화적인 정권교체가 실현되었다. 국민의 정부가 들어서면서 당면한 가장 큰 과제는 IMF 위기의 극복이었다. 국민의 정부는 '자유주의' 경제정책 추진과 금모으기 운동 등을 통해, 2001년까지 외채를 조기 상환해 IMF 관리 체제에서 벗어났으며, 국제 기준에 맞춘 자율적인 구조조정 체제를 도입해 기업의 체질 개선 등을 단행했다. 국민의 정부는 한반도의 평화와 인권 신장에 기여했다. 특히 대북관계에 있어서 햇볕정책을 추진하기 위해 분단 이후 처음으로 평양을 방문, 김정일 국방위원장과 남북정상회담을 하였다. 그러나 남북정상회담을 위해 2000억 원에 달하는 현금을 북한 정권에게 불법 송금했다는 혐의가 사후 드러나 큰 비판을 받았다. 대북유화책을 추진했지만 연평해전, 핵실험 등 북한의 지속적인 도발이 계속되어 햇볕정책의 실효성에 의문이 제기되었다. 또한, IMF 위기 극복을 위해 국민의 정부가 추진했었던 신자유주의 정책은 승자 독식의 기형적 사회구조를 구축했다는 비판이 있으며, 지나친 구조조정과 기업 매각 등으로 대량의 실업자를 양산했다는 부정적 평가가 일부 존재한다.

2002년 제16대 대선에서는 새천년민주당의 노무현 후보가 당선되면서 참여정부가 출범하였다. 2004년 대통령 탄핵 소추를 겪으며 위기를 맞았으나, 여론의 반발과 헌법재판소의 탄핵 기각 결정으로 마무리되었다. 같은 해 열린 총선에서 여당인 열린우리당이 탄핵역풍을 맞은 야당을 누르고 과반수 의석을 차지하면서 국정 탄력을 받았다. 참여정부는 권위주의 타파, 균형 발전 등 개혁적이고 진보적인 정책을 수립했다. 진실 화해를 위한 과거사 정리위원회 설치를 통한 과거사 정리, 세종특별자치시 추진으로 균형 발전을 꾀했다는 평가를 받았다. 하지만, 참여정부는 보수진영의 반발이라는 현실을 고려하지 않은 이상주의적 개혁과 대통령의 과격한 발언 등으로 보수층과 중도층의 반발을 불러왔고, 노무현 대통령의 형인 노건평 씨의 측근 비리 등 각종 악재로 인하여 임기 중반에 지지율이 하락하기도 하였다. 진보진영에서 선출된 대통령이었지만 신자유주의와 친미 외교정책을 펼치는 등, 진영논리에 따른 정부가 아닌 보수, 진보를 넘어 합리적이고 실용적인 정치를 추구하였다.

이명박 정부와 박근혜 정부

박근혜 대통령 퇴진 운동

2007년 제17대 대선에서는 한나라당의 이명박 후보가 대통령에 당선되면서 보수진영의 정권교체가 이뤄졌다. 이명박 정부는 선진화 원년과 747 공약을 내세워 경제 활성화를 추구하였으나, 2008년 미국발 세계 금융 위기의 여파로 인한 경제적 위기와, 한미 FTA 체결 과정에서 광우병소 수입 반대 촛불집회로 인한 정치적 위기를 동시에 겪었다. 고환율정책으로 금융위기의 안정적 극복을 이뤄냈으며, 2010년 20 서울 정상회의 개최, 2011년 평창동계올림픽 유치, 2012년 핵안보정상회의 개최로 대표되는 외교적 성과를 거뒀다. 그러나 4대강 사업과 자원외교의 비리 의혹, 국정원 여론조작과 미디어법 개정으로 인한 언론 장악 논란, 세종시 수정안 등 재임 기간 동안 사회적으로 많은 비판과 논란을 불러일으키기도 했다.

2012년 제18대 대선에서는 새누리당의 박근혜 후보가 대통령에 당선되었다. 국정원 선거 개입 의혹으로 출범부터 논란에 휩싸였고, 이어 잇따른 인사 실패로 국정운영에 어려움을 겪었다. 더구나 2014년 4월 세월호 참사와 2015년 메르스 사태 등 국가적 재난 대책에 미숙한 모습을 드러내었으며, 창조경제와 노동개혁, 국정교과서 추진, 한일 위안부 합의 등 여러 정책에 대해 사회적 비판과 갈등을 겪었다. 2016년 제20대 총선에서 여소야대 국면에 처하면서 정치적 난관에 처한 박근혜 정부는, 같은 해 10월 민간인 신분인 최순실 씨의 국정 농단 사태가 폭로됨에 따라 박근혜 대통령 퇴진 운동이 시작되었고, 국회가 박근혜 대통령 탄핵 소추안을 가결시키며 박근혜 대통령의 권한이 정지, 황교안 대통령 권한대행 체제가 확립되었다. 2017년 3월 10일 헌법재판소의 탄핵 인용으로 박근혜 대통령은 헌정 사상 최초로 파면된 대통령이 되었다.

문재인 정부

2018년 남북정상회담

2017년 전임 대통령의 파면으로 조기에 치러진 제19대 대선에서는 더불어민주당의 문재인 후보가 대통령으로 당선되며 진보진영으로의 정권교체가 이뤄졌다. 문재인 정부는 탈권위주의 정책 및 적폐 청산 노선으로 임기 초 높은 지지율을 누리는 한편으로, 코리아 패싱과 한반도 긴장 고조로 인한 외교적 난관 속에서도 경색된 남북관계를 전환시키고자 노력하였다. 2018년 평창 동계올림픽의 성공적 개최와 맞물려 전개된 남북관계 화해 국면에 따라 판문점 회담과 평양 회담을 여는 동시에 북미회담을 통한 비핵화 협상 주선에 힘썼다. 이와 더불어 2020년 코로나19 유행의 방역에서 선방하면서 긍정적 평가를 받았고, 국정농단의 여파로 인한 야당의 입지 약화와 함께 2018년 지방선거와 2020년 총선에서 여당의 유례없는 압도적 승리라는 정치적 안정을 이루는 계기가 되었다.

문재인 정부는 소득주도성장론을 내세우며 최저임금 인상, 근로시간 단축을 추진하고 탈원전 추구, 가상화폐 규제 등의 경제정책을 펼쳐나가는 과정 속에서 사회적 찬반론을 불러일으켰으며, 계속되는 경기불황과 부동산 대책 실패로 비판 여론을 받았다. 또 2017년 더불어민주당원 댓글 조작 사건과 2018년 여권 인사의 미투 운동 연루, 2019년 조국 법무부장관 임명 논란 등 정부와 여당의 도덕성 논란이 부정적 평가에 일조함과 동시에, 2018년 남북 단일팀 추진과 대북 석탄 밀수 사건, 2020년 남북공동연락사무소 폭파로 인한 남북관계 경색 등에 있어서도 반발 여론이 끊이지 않았다.

윤석열 정부

윤석열 정부(尹錫悅 政府)는 대한민국 제6공화국의 여덟 번째 정부이다. 윤석열이라는 대통령을 수반으로 하는 대한민국 정부로서 2022년 5월 10일 대통령 임기 5년의 여정이 시작되었다. 윤석열 대통령은 2022년 3월 9일에 실시된 제20대 대선에서 당선되었다.

자연환경

면적

현대의 지역구분
  • 한반도 남부를 통치하는 국가로, 한반도 북부 지역의 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과 접하고 있다. 대한민국의 헌법상 영토는 '한반도와 그 부속 도서'이지만 실효 지배하는 지역은 휴전선 이남에 국한되며 면적은 100,432㎢로 한반도의 44.9%(약 45%)에 해당한다. 각자 남부와 북부를 분할 통치하고 있다는 점 때문에 대한민국 국내에서는 군사분계선 기준 남부를 남한, 북부를 북한이라 칭한다. 북부의 정권을 국가로 인정하지 않기에 더더욱 북한, 북측이라는 말을 많이 사용하는 편이다.
  • 대한민국 헌법 제3조에는 '대한민국의 영토는 한반도와 그 부속도서로 한다.'라고 명시하고 있다.
  • UN에 제출된 헌법상 면적은 223,646㎢이며, 실효지배 면적은 100,432㎢이다.
  • 대한민국의 극점은 다음과 같다. (이북 지명은 이북5도위원회 기준이다.)
구분 최북단 최남단 최동단 최서단
남한

(북한 미포함, 부속도서 포함)

강원도 고성군

현내면 대강리

제주특별자치도

서귀포시 대정읍 마라리

경상북도 울릉군

울릉읍 독도리

인천광역시 옹진군

백령면 연화리

남한

(북한 미포함, 부속도서 미포함)

강원도 고성군

현내면 대강리

전라남도 해남군

송지면 송호리

경상북도 포항시 남구

구룡포읍 석병리

충청남도 태안군

소원면 모항리

한반도

(북한 포함, 부속도서 포함)

함경북도 온성군

남양면 풍서동

제주특별자치도

서귀포시 대정읍 마라리

경상북도 울릉군

울릉읍 독도리

평안북도 용천군

신도면 모래동

한반도

(북한 포함, 부속도서 미포함)

함경북도 온성군

남양면 풍서동

전라남도 해남군

송지면 송호리

함경북도 경흥군

노서면 조산동

평안북도 용천군

용암포읍 진곶동

  • 대한민국(실효지배 영토)의 면적(100,432㎢)은 세계에서 109위로 작은 편이며, 전체 195개국 중에서 중앙값인 98위(118,484㎢)보다 조금 더 작다. 헝가리(110위)와 포르투갈(111위) 바로 앞이다.

본토

1945년~1948년 분단 당시에는 13도 체제를 유지하고 있었으나, 70여 년의 긴 세월 동안 분단되고 남북의 행정구역의 변동이 있었던 관계로 남북통일 시 광역급 행정구역이 더욱 늘어날 것으로 전망된다. 분단 당시 존재한 13도는 경기도, 강원도, 충청남도, 충청북도, 전라남도, 전라북도, 경상남도, 경상북도, 황해도, 평안남도, 평안북도, 함경남도, 함경북도이다.

부속도서

한반도 남쪽 바다(남해, 동중국해)에 있는 제주도는 대한민국에서 가장 큰 섬이다. 울릉도독도영종도, 서해 5도, 강화도는 전략상 요충지로 간주된다.

거제도, 남해도, 진도, 완도, 추자도, 거문도도 있다.

영토 변화

광복 직후만 해도 38선에 의한 실효지배 면적이 약 93,000㎢였으나, 6.25 전쟁으로 휴전선이 그어지면서 97,000㎢까지 영토가 확장되었고, 그 이후에 여러 간척사업이 활발하게 진행되면서 1980년에 98,000㎢, 1992년에 99,000㎢, 2010년에 100,000㎢를 넘어섰다. 1980년부터 2021년까지의 자료 대표 간척지로 새만금과 서산-당진의 대호방조제 일원, 인천경제자유구역 등이 있다.

북한을 수복할 경우 실효지배영토가 한반도와 그 부속도서 전체로 확장된다.

영해 및 해양 관할권

영해(좌), 대륙붕 한계・중간수역을 포함한 해양 관할권(우)
  • 영토분쟁 : 동해 한일중간수역 독도
  • 해양관할권 분쟁 : 황해 배타적경제수역 가거초・제2광구/ 동중국해 배타적경제수역 이어도・제7광구

한반도

지형

서쪽으로 중화인민공화국황해를 사이에 두고, 동쪽으로 일본동해를 사이에 두고, 북쪽으로 북한한반도 군사 분계선을 사이에 두고 맞닿아 있다.

한반도는 제3기 마이오세 이후에 일어난 단층과 요곡운동의 결과 동쪽으로는 높은 산지가 급경사로 동해안에 임박하고 서쪽으로는 서서히 고도가 낮아진다. 이를 동고서저의 경동지형이라 한다. 높은 산들은 대부분 동부 지방에 치우쳐서 한반도의 등줄기라 불리는 태백산맥에 자리한다. 태백산맥의 대표적인 산이 설악산이다. 태백산맥의 남서쪽으로 소백산맥이 이어지며 그중에는 지리산이 유명하다. 제주도에는 대한민국에서 가장 높은 산이자 사화산한라산이 있다.

하천의 유량은 극히 불규칙하여 여름에는 집중 호우로 연 강수량의 약 60% 이상이 홍수로 유출되며, 갈수기에는 강바닥을 거의 드러내는 하천이 많다. 대표적인 강은 위쪽부터 반시계 방향으로 한강, 금강, 영산강, 섬진강, 낙동강 등이다. 대다수의 강이 산지가 많은 동쪽에서 평평하고 낮은 구릉이 대부분인 서쪽으로 흐르며 중하류에 비교적 넓은 충적평야가 전개된다.

산맥은 교통에 적지 않은 제약을 주어, 산맥을 경계로 지역의 문화나 풍습이 크게 차이가 나기도 한다. 산맥으로 가로막힌 지방은 고개를 넘어 왕래했는데 영서 지방과 영동 지방을 연결하는 태백산맥의 대관령·한계령·진부령·미시령, 중서부와 영남 지방을 연결하는 소백산맥의 죽령·이화령·추풍령·육십령 등이 산맥을 넘는 주요한 교통로로 사용된다.

한반도의 서쪽은 황해, 동쪽은 동해, 남쪽은 남해와 맞닿아 있어 삼면이 바다로 둘러싸인 반도형이며, 가장 큰 부속 도서인 제주도 남쪽으로는 동중국해와 접한다. 황해와 남해 연안은 해안선이 복잡한 리아스식 해안으로 조수 간만의 차가 클 뿐만 아니라 해안 지형도 꽤 평탄하여 넓은 간석지가 전개된다. 또한 수많은 섬이 있어서 다도해라고도 불린다. 반면에 동해 연안은 대부분 해안선이 단조롭고 수심이 깊으며 간만의 차가 적다. 해안 근처에는 사구·석호 등이 형성되어 있고 먼 해상에 화산섬인 울릉도가 있으며 그보다 동쪽으로 약 87.4km 거리에 대한민국 최동단인 독도가 위치한다. 서쪽에는 평지가 발달됐다.

기후

북위 33도~38도, 동경 126~132도에 걸쳐 있어 냉대 동계 소우 기후와 온대 하우 기후, 온난 습윤 기후가 나타난다. 겨울에 북부 지역은 편서풍으로 인해 시베리아와 몽골 고원의 영향을 받아 대륙성 기후를 띠어서 건조하고 무척 추우나 남부 지역은 이런 영향을 적게 받아 상대적으로 온난한 편이다. 여름에는 태평양의 영향을 받아 해양성 기후의 특색을 보여서 고온다습하다. 계절은 사계절이 뚜렷이 나타나며 대체로 북부 지역은 여름과 겨울이 길고 남부 지역은 봄과 가을이 길다.

3월 초에서 5월 초에 걸쳐 포근한 봄 날씨, 5월경에서 8월 초에는 무더운 여름이, 8월 말에서 10월 말까지는 화창하고 건조한 가을 날씨가 이어지고, 11월에 기온과 습도가 점차 낮아지기 시작하여 12월에서 2월까지는 춥고 건조한 겨울 날씨를 보인다. 중부 산간 지방을 제외하고 대체로 연 평균 기온은 10 ~ 16℃이며, 가장 무더운 달인 8월은 23 ~ 36℃, 5월은 16 ~ 19℃, 10월은 11 ~ 19℃, 가장 추운 달인 1월은 -6 ~ 3℃이다.

비는 주로 여름에 많이 내리는데 연 강수량의 50 ~ 60%가 이때 집중된다. 이를 장마라고 하며 특히 6월 말에서 7월 중순까지를 장마철이라 한다. 각 지역의 연 평균 강수량은 중부 지방이 1100 ~ 1400mm, 남부 지방이 1000 ~ 1800mm, 경북 지역이 1000 ~ 1200mm이다. 경상남도 해안 지역은 약 1800mm이며 제주도는 1450 ~ 1850mm이다.

습도는 7월과 8월이 높아서 전국에 걸쳐 80% 정도이고 9월과 10월은 70% 내외이다. 태풍은 북태평양 서부에서 연평균 28개 정도가 발생하여, 이 중 두세 개가 영향을 미친다.

본래 4계절이 뚜렷한 기후 환경이었으나 지구 온난화 등의 영향으로 봄, 가을의 기간이 급격히 줄어들며 게릴라성 폭우로 특징되는 열대성 호우가 잦아 아열대화가 진행되면서 어업이나 농업에 변화가 있다.

생태

한반도 전역에 동식물 10만 여 종이 분포한다. 호랑이 중에서 가장 큰 종인 백두산호랑이가 과거 살았었으나 현재는 보이지 않는다. 그 밖의 맹수로는 반달곰과 표범이 있으며 소수 개체군이 생존한다. 그 밖에도 멧돼지, 고라니, 너구리 등의 포유류와 까치, 꿩, 참새, 비둘기를 비롯한 텃새, 두루미, 기러기 같은 철새가 서식하며 지네나 거미, 수많은 곤충류도 서식한다. 삼면이 바다여서 난류와 한류에 서식하는 다양한 어패류와 고래도 존재한다. 또 최근에는 지구 온난화로 한류성 어류가 감소하고 불가사리나 해파리가 급증해서 큰 문제가 되고 있다.

산삼이나 진달래, 소나무 등 많은 식물은 약용이나 기타 여러 용도로 쓰인다. 제주도에는 열대림과 비슷한 야자수가 번육하며 지리산이나 태백산맥에는 북방계형의 특산 식물들이 자생한다. 백두산에는 시베리아나 만주에서만 볼 수 있는 침엽수림과 같은 북방계 식물류가 자란다. 중부 지방에는 높은 산지로 말미암아 고산형 식물과 약용 식물 여러 종이 자생한다.

지도

대한민국 주변 지도

동아시아 국가 지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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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명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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