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위안스카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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위안스카이

위안스카이(중국어:袁世凱yuán shì kǎi)는 중화민국의 군벌인 북양군벌의 수장, 중화민국 북양정부의 초대 총통이다.

개요[편집]

위안스카이는 중국의 군인 ·정치가이며 총리교섭통상대신으로 조선에 부임하여 국정을 간섭하고 일본, 러시아를 견제했다. 청일전쟁에 패한 뒤 서양식 군대를 훈련시켜 북양군벌의 기초를 마련하고 탄쓰퉁 등 개혁파를 배반하고 변법운동을 좌절시켰다. 이후 의화단의 난을 진압했으며 신해혁명 때 청나라 조정의 실권을 잡고 임시총통이 되었고, 이어 스스로 황제라 칭하였다.

위안스카이는 황제가 되려는 야심을 품고 1915년 5월 일본의 21개조 요구를 받아들였으며, 황제추대운동을 전개시켜 1916년 1월 스스로 황제라 칭하고, 연호를 홍헌(洪憲)으로 개원(改元)한다고 선언하였다. 1915년 윈난(雲南)봉기를 계기로 도처에서 일어난 반원(反袁)운동의 확대(제3혁명)로 인하여 영국·러시아·일본 등 주변 강대국도 황제제도 취소를 권고, 1916년 3월 황제제도 취소를 선언하였다. [1]

생애[편집]

위안스카이(1859년 9월 16일~1916년 6월 6일)는 중국 청나라 말기의 무관(武官), 군인이며 중화민국 초기의 정치인이자 중화제국의 황제이다. 그의 자(字)는 웨이팅(慰庭)이며 호(號)는 룽안(容庵)이다.

위안스카이는 1859년 9월 16일 중국 허난성(河南省) 샹청(項城)에서 출생하였다. 그의 부친은 원보중이었으나 삼촌인 원보경이 아들이 없어 양자가 되었다. 그의 가문은 정2품의 고관을 지낸 명문가였으며 샹청(項城)현에서는 제일가는 권세가였다. 1876년 하남 향시에 낙방하고 1879년에도 응시하였으나 또 낙방했다. 과거에 실패한 뒤 경군통령(慶軍統領)인 우창칭(吳長慶:오장경)의 휘하에 들어가 군사적 재능을 인정받고 영무처(營務處)의 일을 맡았다.

1882년 조선에서 임오군란이 일어나자 조선의 정세를 안정시킨다는 빌미로 오장경을 따라 조선에 부임하였다. 임오군란의 주동자로 지목된 흥선대원군을 납치하여 청나라로 압송, 연금하였고 임오군란을 일으킨 군사들과의 전투에도 참전하였다. 1884년 조선에서 개화파 김옥균이 주도하는 갑신정변이 일어나 고종이 납치되자 원세개는 일본군과 전투에서 승리하여 고종을 구출하였다. 그는 중국으로 돌아갔다가 1885년 8월 연금에서 석방된 흥선대원군과 함께 다시 조선으로 건너왔다. 위안스카이는 그동안 조선에서의 공적을 인정받아 1885년 11월 21일 이홍장(李鴻章)의 명을 받아 조선 주재 총리교섭통상대신(總理交涉通商大臣)에 취임하여 서울에 주재하게 되었다. 이때부터 위안스카이는 두각을 나타내기 시작했는데, 그는 조선의 내정·외교를 조정·간섭하고 청나라 세력을 부식(扶植)하면서 일본, 러시아와 경쟁하였다. 1894년 청일전쟁에 패퇴한 뒤 직례안찰사(直隷按察使)가 되었고, 톈진(天津) 부근에서 서양식 군대를 훈련시켜 돤치루이(段祺瑞) ·펑궈장(馮國璋) 등의 부하를 양성하여 북양군벌(北洋軍閥)의 기초를 마련하였다. 이것이 훗날 위안스카이의 정계 진출의 초석이 되었으며 이곳에서 양성된 부장(部將)이 민국(民國) 성립 후의 북양군벌의 수뇌가 되었다.

1898년 무술변법(戊戌變法:百日改革) 때에는 탄쓰퉁(譚嗣同) 등 개혁파의 부탁을 받았으나 그들을 배반하여 변법을 좌절시키고, 서태후(西太后)의 신임을 얻어 산둥순무(山東巡撫)로 승진하였다. 1900년의 의화단(義和團)의 난 때에는 산둥성에 있으면서 난을 진압하고 외국인을 보호함으로써 열강의 신임을 얻었다. 1901년 이홍장이 죽은 뒤 그의 뒤를 이어 직례총독(直隷總督) ·북양대신이 되어 자기 세력을 확대시켜 나갔고, 직속의 신식군대, 즉 신건(新建) 육군을 증강시켜 일종의 독립된 정권을 형성하였다. 그러나 청나라 귀족들의 시기를 받아 외무부 상서(尙書), 군기(軍機) 대신으로 전보되었고, 1908년 선통제(宣統帝)가 즉위한 뒤 섭정이던 순친왕(醇親王)의 명령으로 정계에서 물러나 있어야만 했다.

1911년 신해혁명 발발로 다시 군사의 전권을 장악하게 되었고, 11월 내각 총리대신이 되어 청나라 조정의 실권을 잡았다. 그는 청나라의 무력(無力)과 혁명군의 약체를 간파하고 혁명군과 연락하는 한편, 황제를 퇴위시켰다. 마침내 그는 혁명파의 임시 대총통 쑨원(孫文)을 사임시키고 1912년 3월 임시총통에 취임함으로써 중국을 정식으로 조직하였고 수도를 난징(南京)에서 베이징(北京)으로 옮겼다.

1913년 3월 국민당 당수 쑹자오런(宋敎仁)을 암살하고 다수파인 국민당을 탄압하였으며, 열강과 차관협정을 맺어 그 힘으로 리례쥔(李烈鈞) ·보원위(柏文蔚) 등의 토원군(討袁軍)을 진압하였다. 이것을 제2혁명이라고 부른다. 1913년 10월에 정식으로 초대 대총통에 취임, 국민당을 해산시키고 대총통선거법을 개정하여 독재체제를 확립하였다.

1916년 3월 22일에 위안스카이는 홍헌제제를 취소하고, 3월 23일에는 중화민국 대총통 자리로 복귀한다. 이는 군주가 '자의'로 군주국에서 공화국으로 전환한 유일무이한 사례였다. 허나 이미 민심은 위안스카이를 떠난 뒤였다. 위안스카이는 펑궈장을 시켜 난징회의를 개최, 중국의 안정을 명분으로 위안스카이가 총통 자리에 임시로라도 있어야 한다는 결론을 내려 했으나 각성 대표들이 모두 위안스카이 하야를 요구하였다. 결국 위안스카이는 실망 속에서 분노와 울화를 이기지 못하고 리위안훙에게 총통 자리를 물려주라고 유언한 후 1916년 6월 6일에 요독증이 악화되어 급사하면서 허망하게 세상을 떠났다.

홍헌[편집]

홍헌(洪憲)은 중국의 위안스카이가 사용한 연호(1916년)이다. 1916년 1월부터 3월까지 3개월 동안 사용되었다. 1911년 10월 10일 우창(武昌) 봉기를 시작으로 신해혁명이 발발하자 청나라 조정으로부터 혁명군의 진압에 관한 전권을 위임받은 위안스카이(袁世凱)가 실권을 장악했다. 위안스카이는 난징(南京)에서 수립된 중화민국(中華民國) 임시정부와 협상을 시작해 1912년 2월 12일 선통제(宣統帝) 푸이(溥儀)를 퇴위시켰다. 그리고 2월 15일 중화민국 임시대총통으로 취임했다.

중화민국의 실권을 장악한 위안스카이는 군주제를 부활시켜 자신이 황제로 즉위하려는 계획을 세웠다. 그리고 1915년 12월 12일 베이징(北京)에서 황제 즉위를 선포하고, 연호를 '홍헌(洪憲)'으로 정하고 1916년을 원년으로 하였다. 그리고 총통부(總統府)를 '신화궁(新華宮)'으로 명칭을 바꾸었다. 그러자 각지에서 반대운동이 거세게 일어났다. 윈난(雲南)은 독립을 선포했으며, 각지에서도 봉기가 일어났다. 이렇듯 반발이 거세지자 위안스카이는 1916년 3월 22일에 퇴위를 선언하고, 중화민국 기원(紀元)을 회복시켰다.

신해혁명[편집]

신해혁명(辛亥革命)은 1911년 청나라를 멸망시키고 중화민국을 성립시킨 중국의 혁명이다. 이 혁명은 중국사에서 처음으로 공화국을 수립한 혁명이라서 공화혁명(共和革命)이라고도 불린다. 1900년의 의화단 운동 이후 열강의 침입이 한층 강화하는 가운데 청나라 조정은 정치 개혁을 꾀하는 소위 '신정' 운동을 일으켰으나 납세 거부와 기독교 배척을 위시한 대중 운동이 전국으로 번져 입헌군주제를 향한 운동으로 발전하였다. 혁명 주체의 단결력과 세력이 굳건하지 못한 탓에 청조에게 대권을 부여받은 위안스카이(袁世凱)와 타협, 선통제(宣統帝)의 퇴위로 청을 멸망시키는 데는 성공한 대신 쑨원이 사임하고 위안스카이가 대총통이 되었다. 쑨원은 이후에도 혁명 정책을 맡았으며 서양열강과 같이 노비해방을 필요성을 가지고 당시 중국 인구 80% 이상을 차지하던 농노비 백성들을 해방시켜 소수 귀족들에 의한 노역과 소작농에서 벗어나게 하였다.

1911년이 신해년(辛亥年)이라서 신해혁명이라고 명명하였다. 이 혁명(제1차 혁명)으로 공화정이 수립됐지만, 곧 위안스카이가 대총통이 되면서 이후 제제(帝制)의 야심을 품고 혁명파를 탄압하는 일편 위안스카이의 독재정치가 시작되었는데 1913년 7월 국민당에서 '원세개를 타도'하려는 운동하면서 혁명을 호소하여 봉기했다. 이를 제2차 혁명이라고 하나 위안스카이는 군대를 동원해 이를 진압했다. 이후 위안스카이는 1915년 일본의 '21개조 요구' 수락을 위시해 매판성을 드러내어 이런 위안스카이의 독재정치에 민중은 극심하게 반발했는데 이를 '제3차 혁명'(호국전쟁)이라고 부르고 1916년 위안스카이 사후 내전과 군벌의 할거로 혼란이 계속되었다. 우창에서 최초로 봉기한 10월 10일을 중화인민공화국에서는 '신해혁명 기념일'로, 중화민국에서는 중요 국경일인 '중화민국 국경일'로 기념한다. 신해혁명은 20세기 아시아에서 일어난 정치사에 관계된 중요한 사건으로 간주된다.

신해혁명 후 새로운 공화국의 임시대총통이었던 쑨원은 무엇보다도 평화스럽게 청 황제를 퇴위시키면서 중국 통일이라는 대명제를 실현하고자 스스로 그 자리를 위안스카이에게 양보한 결과 위안스카이를 중심으로 한 구 관료가 그대로 권력을 장악할 기회를 주었고 혁명세력 약화를 초래해 '반쪽짜리 혁명'으로 전락해서 신해혁명이 봉건제도를 무너뜨리고 공화제도를 이룩하였다 하여도 중국 사회와 경제에 어떤 변화가 일어나지는 않은 한계가 있다. 즉, 신해혁명은 제국주의와 봉건 통치를 반대하는 기치를 내걸어 아시아 각국 민족 해방 운동에 지대한 영향을 미쳤으나, 실상은 반식민지, 반봉건 사회성을 근본으로 바꾸지 못했다.[2]

평가[편집]

위안스카이의 사망과 함께 중국은 아무 일반적으로 인정된 중앙적 권위 없이 놔두어졌고, 육군은 빠르게 경쟁하는 독군들에 의하여 통제된 군대들로 분해되었다. 이 이유들로 위안스카이는 가끔 "독군들의 아버지"로 불렸다. 하지만 일본식에 기반으로 현대식 육군을 창조하는 데 그가 시도한 군사 개혁은 정확하다. 자신의 일생을 통하여 그는 장교 인사들의 작업, 군사 교육과 정기 환승이 현대식 군사 조직을 세우는 데 어떻게 이용될 수 있는 것에 관하여 이해를 증명하였다. 하지만 자신이 1911년 권력으로 돌아온 후, 그는 초기 공화주의 운동의 관념을 파괴한 폭력과 뇌물의 조합에 의하여 대신 통치된 자신의 제국주의 야망들을 위한 이 이상을 기꺼이 희생하는 것 같이 보였다. 위안스카이를 반대한 자들이 영토적 군사 기지에서 그렇게만 할 수 있었던 이래 총통과 황제로서 위안스카이의 경력은 중국의 후속 정치 분열로 거대하게 공헌하였다.

동영상[편집]

각주[편집]

  1. 위안스카이 袁世凱(원세개), 1859.9.16~1916.6.6〉, 《두산백과》
  2. 신해혁명〉, 《위키백과》

참고자료[편집]

같이 보기[편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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