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리커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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리커창

리커창(중국어:李克强lǐ kè qiáng)은 중국의 정치인이며 제7대 국무원 총리이다.

개요[편집]

리커창(1955년 7월 3일~2023년 10월 27일)은 중화인민공화국의 정치인이다. 그는 후진타오 전 주석과 함께 공청단 계열의 일원이었다. 경제적으로 개혁과 자유화를 옹호 측면을 강조한 리커창은 중국 지도부의 더 실용적이고 기술적인 측면을 대표하는 인물이었다. [1]

리커창은 2012년 제18차 중국공산당 당대회에서 원자바오의 뒤를 이어 중국 국무원 총리로 지명된 사람이었다. 태자당인 시진핑과 달리 후진타오가 있던 공산주의 청년단 출신이며, 중국공산당 및 본인의 모교인 베이징대학(북경대 北京大)에서 많은 당원들의 지지를 받는 인물이었다. 원래 후진타오의 후임으로 중국 주석이 될 수 있었지만, 장쩌민의 상하이방의 격렬한 반대에 밀려 결국 태자당의 시진핑이 국가주석이 되고 본 인물은 총리가 되었다는 설이 있다. 하지만 공산당 서열 2위로 엄청난 권력을 갖고 있었다. 2013년 3월 15일 중국 양회(两会)에서 정식으로 국무원 총리가 되었으며, 10년 임기를 보낸 후 2023년 3월 11일 후임자 리창에게 총리직을 넘기고 물러났다. 정계 은퇴 7개월이 지난 2023년 10월 27일, 상하이시의 고급 호텔 수영장 등에서 휴식을 취하던 중 심장마비로 갑작스럽게 세상을 떠났다.

생애[편집]

리커창은 안후이성 추저우시 딩위안현에서 태어났다. 1976년 10월 화궈펑 권력기에 중국공산당에 입당하였으며 안후이성의 봉양 현 인민공사의 당지부 서기로 중국공산당의 공산주의 정치에 입문하였다. 리다자오, 취추바이, 마오쩌둥과 마인추, 덩리췬 등의 정치적 후계자이자 1977년 학번으로 베이징 대학 법률학과에 입학하였으며, 재학 기간 베이징 대학 중국 공산주의 청년단 서기를 맡았다. 뒤에 1994년에는 같은 대학에서 경제학 박사를 졸업하였다. 리커창의 부인 청훙(程虹)은 중국 공산주의 청년단의 지방 고위 간부 집안의 딸이다. 허난성 뤄양 인민해방군 외국어학원을 나왔고 중국공산당의 중국사회과학원에서 영문학 박사학위를 취득하였으며, 이후로 베이징 수도경제무역대학에서 영어 교수를 지냈다.

리커창은 1985년~1992년 중국 공산주의 청년단 중앙서기처 서기, 1993년 중국 공산주의 청년단 제1서기를 맡았다. 2004년 말, 중국공산당의 랴오닝성으로 옮긴 뒤, 2007년 중반까지 당시 동북공정의 랴오닝성에서 중국공산당 당서기로 재임하였다. 2007년 10월 이후로 중국공산당 중앙정치국 상무위원회, 2008년에 중국공산당에서 상무 부총리, 2013년부터 2023년까지 중화인민공화국 국무원 총리를 맡았다.

리커창은 2023년 10월 27일, 리커창은 휴가 중에 상하이에서 갑작스러운 심근 경색으로 사망하였다. 사우스차이나모닝포스트(SCMP)는 그가 상하이 동자오 영빈관 호텔에서 수영을 하던 중 심장마비가 발생했다고 보도했다. 더 스탠더드에서는 간 이식 후 항거부반응제의 장기간 사용이 기여 요인이라고 보고했다. SCMP는 그가 관상동맥 우회술도 받았다고 보고했다.

리커창의 유해는 2023년 10월 27일 베이징으로 이송됐다. 11월 2일 바바오산혁명묘지에서 추모식이 거행되고 화장됐다. 이날 행사에는 시진핑 주석과 부인 펑리위안 부인, 리창 총리를 비롯해 제20기 정치국 상무위원회 위원 전원, 한정 부주석 등이 참석했다. 국영 언론에 따르면 후진타오 전 주석은 꽃을 보냈지만 참석하지 않았다. 중국 정부 청사, 외교 사절단, 홍콩마카오에서는 국기가 게양되었다.

리커창의 시신은 2023년 11월 2일 베이징에서 화장되었다. 장쩌민 전 주석 사망 때와는 달리 별도의 국가애도 기간을 가지지 않았다. 2023년 10월 30일, 대한민국 정부는 한덕수 국무총리 명의로 조전을 보냈다. 정작 북한은 조전을 보내지 않았다.

리이닝[편집]

리이닝(厉以宁 1930년 11월 22일~2023년 2월 27일)은 중화인민공화국의 전 경제학자, 중국 공산당 당원이다. 중국 전 국무원 총리 리커창의 지도교수이다. 중국의 번영을 위한 전략적 선택(The Strategic Choice for China's Prosperity) 혹은 번영을 위한 전략적 선택(走向繁荣的战略选择)은 리커창과 리이닝, 리위안차오(리이닝의 석사 제자) 등이 쓴 책이다.

리이닝은 1951년 항미원조 운동이 한창일 때 베이징 대학 홍루에서 경제학과에 입학하였으며 1955년에 졸업했다. 1956년 이후로 동 대학 경제학과에서 자료정리원, 조교, 교수 등으로 재직하였다. 재학 기간 칭화 대학 교수 출신의 천다이쑨 등에게서 경제학 이론을 학업하였다. 1957년 4월 중국 민주 동맹 가입. 리다자오, 마인추, 판훙, 덩리췬 등으로 이어져간 베이징 대학의 경제학 학맥을 지켜가면서 중국공산당에도 입당하였다. 1994년 베이징 대학의 관리학원 원장, 2004년에는 동 대학 관리학원 명예 원장. 리커창, 위안춘칭, 보시라이, 샤바오룽, 리위안차오, 궈겅마오, 루하오, 후춘화 등 중국 공산당의 지방과 중앙 정치인들에게 영향을 주었고 경제, 금융 등 분야에서 정책 결정에 참여하였다.

시진핑과의 갈등[편집]

2020년 6월, 시진핑과 리커창 간의 갈등설이 불거졌다. 리커창이 제13기 전국인민대표대회 제3차 전체 회의 폐막 후 가진 내외신 기자회견에서 중국인 6억 명의 월수입이 17만 원에 불과하며 집세를 내기조차 힘들다고 토로한 것이다. 이게 특별한 상황인 게 중국은 지금까지 중국 경제 성장성만 전면에 내세웠는데 중국인의 거의 절반가량이 빈곤층임을 인정하는 대목이다. 또한 코로나19로 이 상황이 더 심각해졌다고 한 것이다.

리커창 총리는 노점상 경제를 언급했는데 중국 청두시에서 노점상으로 10만 명의 일자리를 해결했다고 언급했다. 임시로 노점상을 합법화해 영업시간과 지점, 영업 방식을 지정해 단기간으로 빈민층에게 일자리를 줄 수 있는 방법으로 노점상 경제를 제시한 것이다. 이후 중국 여러 도시에서 노점상들이 기하급수적으로 늘어났다. 하지만 갑자기 분위기가 바뀌었는데 바로 베이징시 도시관리국에서 노점상의 불법 행위에 대해 철저하게 단속하겠다고 밝힌 것이다. 여기에서 시진핑과 리커창의 갈등설이 불거지기 시작했다.

리커창 총리는 내외신 기자회견에서 빈곤층이 6억 명임을 토로했는데 시진핑은 샤오캉 사회 건설을 전면에 내세우고 있었다. 시진핑은 오래전부터 반부패와 빈곤 탈피로 2020년에 샤오캉 사회를 건설하겠다고 밝혔다. 하지만 리커창 총리가 공개적으로 국민 중에서 6억 명이 빈곤층임을 밝혔기 때문에 사실상 샤오캉 사회 건설은 실패라고 볼 수 있다. 이 6억 명 빈곤층 발언은 중국 내 언론들도 보도했는데 이후에는 갑자기 이와 관련된 기사가 지워지거나 더 이상 올라오지 않는 것을 보면 언론을 통제하고 있다고 한다. 또한 리커창 총리가 언급한 노점상 경제에 대해 비판적인 기사들이 나오기 시작했으며 이는 리커창 총리의 6억 명 빈곤층 발언이 시진핑의 심기를 건드렸다고 보여지며 중국공산당 내 1인자와 2인자 사이의 갈등설이라는 것이다.

홍콩 빈과일보에 따르면 시진핑은 당이 통제하는 경제를, 리커창은 자유 경제를 강조해왔다고 한다. 즉, 경제 측면에서 전혀 다른 견해를 가지고 있는 상황에서 갈등이 축적됐다는 것이다. 명색이 국무원 총리가 수해 피해 현장에 방문했음에도 중국의 관영 매체에서 이를 보도하지 않는 것도 이러한 설의 근거가 되고 있다. 전임인 원자바오 총리 시절 재난 현장에 방문했을 때의 보도량과는 비교 자체가 불가능할 정도다. 2022년 6월 기준으로 리 총리는 제로 코로나 정책을 밀어붙이는 시진핑 주석의 정책에 반하는 발언을 계속하였다. 베이징에서 개최된 10만인 대회에서 대놓고 "현재 중국 경제는 2020년 우한 사태 당시보다 더 심각한 위기"라며 "방역이 더 이상 경제를 망쳐서는 안 된다"고 발언했다.

2022년 가을에 열릴 제20차 당대회를 통한 시진핑 주석의 3연임은 거의 확정적인 반면, 리커창 총리는 시진핑이 무시하고 있는 10년 이상 재임 제한 원칙을 지키기 위해 2023년을 마지막으로 퇴진하겠다는 점을 분명히 하면서 또 한 번 대비되는 모습을 이뤘다. 다만 시진핑의 영도 지위 자체에는 이의를 제기하지 않고 전략적 제휴관계를 이어가면서도, 경제분야에서 조심스럽게 자기 목소리를 내는 전략이 통했는지 시진핑의 임기 후반기에는 존재감 없는 총리 신세를 벗어나고 나름대로 입지를 구축한 모습을 보여주고 있다고들 생각했지만, 퇴진과 사망으로 모두 무용한 예측이 되었다. 그리고 정부 부처를 돌면서 고별인사를 하는 리커창을 촬영한 영상은 소셜미디어에서 검열 삭제되기까지 했다.

평가[편집]

생전의 리커창 중국 전 총리를 만난 이들은 중국 현실을 꿰뚫고 있는 그의 정확한 지식과 지적인 탁월함에 감탄하곤 했다. 리커창은 중국 역사상 가장 학식 높은 총리였다. 문화대혁명 10년 동안 닫혀 있던 대학이 다시 문을 열면서 경쟁이 역대 최고로 치열했던 1977년 대입 시험을 통해 베이징대학에 입학한 리커창은 경제학 석사와 박사 학위를 받고 경제학 논문상까지 받은 경제 전문가였다. 그는 중국공산주의청년단(공청단)을 기반으로 주목받는 차세대 지도자로 급성장했다.

2007년 리커창과 시진핑이 중국 최고 지도자 자리를 두고 경쟁했을 때, 당시 최고 지도자였던 장쩌민과 그의 최측근 쩡칭훙이 시진핑을 선택했다. 이들은 리커창에 비해 특권층 인맥으로 자신들과 연결된 시진핑이 더 통제하기 쉬울 것으로 오판했던 것으로 알려져 있다. 이후, 시진핑 국가주석은 1인 권력을 강화했고, 리커창은 중국 역사상 가장 실권 없는 허수아비 총리가 되었다. 시장과 민영기업에 더 많은 권한을 주고, 세계와 연결을 확대하겠다는 '리코노믹스'의 청사진은 무용지물이 되었다. 2023년 3월 리커창은 업적이 아닌 회한만 남긴 채 총리 자리에서 물러났다. 리커창 전 총리의 갑작스러운 사망 소식이 전해진 뒤 거대한 애도와 추모의 물결이 일고 있는 것은 그의 업적에 대한 것이 아니라, 리커창이 가지 못한 길, 중국이 잃어버린 가능성에 대한 안타까움에서 나온 것이다.

리커창의 죽음은 시진핑 1인 권력에 대한 견제가 사라진 시대를 상징한다. 리커창과 후진타오 전 주석 등 '공청단파'로 불렸던 이들은 평범한 가정 출신으로 능력과 경쟁만으로 최고위직에 오른 전문가 관료들이었다. 하지만, 시진핑주석을 비롯한 지금 공산당의 핵심 세력은 전직 최고 권력자들의 자손들인 '훙얼다이'( 紅二代·홍이대)다. 이들은 '지도자의 자제인 우리만이 중국을 제대로 통치할 수 있다'는 특권의식을 가지고 있으며, 지난 10년 동안 리커창을 비롯한 평민 출신 관료집단인 공청단을 철저히 무력화시켰다.

2023년 10월 중국공산당 20차 당대회에서 후진타오가 '강제로' 퇴장당했고, 리커창이 퇴임 연령이 남았는데도 지도부에서 밀려났고, '공청단의 황태자'로 여겨지던 후춘화는 25인의 정치국위원에서도 탈락했다. 리커창의 죽음은 시진핑이 잘못된 결정을 내려도 이견을 말하고 견제할 세력은 없어진 현실을 다시 한번 확인하게 했을 뿐이다. 리커창이 2020년 '아직도 6억 명은 월수입이 1000위안(약 19만 원)에도 미치지 못한다'고 말해, '중국이 빈곤에서 완전히 벗어났다'는 시진핑의 선언에 반론을 제기했던 것을 많은 이들이 기억하고 있다.

동영상[편집]

각주[편집]

  1. 리커창〉, 《위키백과》

참고자료[편집]

같이 보기[편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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