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비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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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비뇽(프랑스어: Avignon)은 남부 프랑스 남부 프로방스-알프-코트다쥐르 레지옹의 보클뤼즈 데파르트망에 속한 코뮌이다. 인구는 약 9만 명이며 중세의 흔적을 고스란히 간직하여 시가지 전체가 유네스코 세계문화유산으로 지정되었다.[1]
개요[편집]
아비뇽은 론강 좌안에 있으며 파리에서 677km 떨어져 있는 도시이다. 11∼12세기에 독립하여 이탈리아와 에스파냐를 잇는 도로의 요충지로서, 지방 상업의 중심지로 번영하였다. 1226년에 이단 알비주아파(派)가 남프랑스에 발호했을 때 가담했기 때문에 프랑스왕 루이 8세가 점령하였다. 그 후 툴루즈 백작, 프로방스 백작 등의 지배를 받았다. 1309∼1377년에는 로마에 들어가지 못한 교황(클레멘스 5세를 비롯하여 7명)이 체재하였는데, 그 기간 중에 시칠리아의 여왕 잔 1세가 이곳을 교황에게 팔았기 때문에 1791년 프랑스에 통합되기 전까지는 교황령(領)이었다. 교황청을 중심으로 한 구시는 11세기부터 교황이 건설한 성벽으로 둘러싸여 있으며, 중세도시의 전형적인 모습을 띠고 있다. 과일, 채소의 거래지이며 직물, 모자, 가정용품, 식품, 기계, 인쇄, 종이, 신발, 유피(鞣皮), 구리 세공, 보석 세공 등의 산업도 활발하다. 교구청이 있으며 교황궁전의 옛 부분(1334∼1342)과 새 궁전(1342∼1352), 로마네스크 후기의 대성당 등을 비롯한 14∼16세기의 교회, 17∼18세기의 성(城) 등 사적 건축물이 많다. 론강에는 민요 ‘아비뇽의 다리 위에서’로 유명한 생베네제교(橋)가 있는데, 12세기에 만들어진 후로 붕괴와 수리를 거듭하다가 1680년부터는 붕괴된 채 방치되어 지금은 좌안에 3개의 아치(arch)가 남아 있을 뿐이다. 아비뇽은 현재 성벽이 보존된 몇 안 되는 프랑스 도시 중 하나이다. 풍부한 중세 유적들과 연례적으로 열리는 아비뇽 축제 덕분에 이 도시는 프랑스의 관광 중심지로 자리 잡았다.[2]
지리 및 기후[편집]
아비뇽은 뒤랑스강과의 합류지점에서 약간 위에 있는 론강의 왼쪽 둑에 있으며, 파리 남동쪽 약 580km, 리옹에서 남쪽으로 229km, 마르세유에서 북서쪽으로 85km 떨어져 있다. 이 도시 인근에는 오랑주, 님, 몽펠리에, 아를, 살롱드프로방스 등이 있다. 동쪽과 북쪽으로 바로 인접해 있는 도시가 코몽쉬르뒤랑스와 모리에르레자비뇽, 르퐁테, 소르그 등이다.
아비뇽은 마르세유와 같은 해안 지역만큼 강하지는 않지만, 여름에는 지중해성의 뜨거운 날씨를 보인다. 일년 내내 비가 적당히 내리며 7월과 8월은 일 평균 최고 기온이 약 28°C로 가장 덥고, 1월과 2월은 일 평균 최고 기온이 약 9°C로 가장 추운 달이다. 가장 습한 달은 9월이며, 강수량은 평균 102mm, 가장 건조한 달은 월평균 강수량이 37mm인 7월이다.[3]
역사[편집]
아비뇽은 1309년부터 1377년까지 교황청의 수도였다. 건축의 아름다움과 역사적 중요성으로 인정받은 아비뇽의 중심지는 1995년 유네스코 세계문화유산으로 지정되었고, 2000년에는 유럽문화유산으로 지정되었다.
고대 켈트족 시기에 론 강 유역의 오피둠 아베니오에서 기원한 아비뇽은 이오니아계 고대 그리스의 도시였던 마실리아의 주요 식민지 중 하나였다. 이후 로마 제국의 속주인 갈리아 나르보넨시스에 속하였고 하드리아누스가 지금의 도시를 건설하였으나 이 시기의 유물은 거의 남아있지 않다. 5세기 이후 게르만족의 이동 시기 고트족의 영토가 되었으며 브르고뉴 왕국과 아를 왕국, 동고트 왕국등이 지배하였고, 동고트 왕국 멸망 후 프랑크족의 메로빙거 왕조가 이 지역을 지배하였다. 736년 사라센이 이 지역을 정복하였으나 737년 프랑크족의 카를 마르텔이 다시 정복하였다. 프로방스의 보소가 프로방스의 군주가 된 이래 879년까지 독자적인 왕국이 존재하였으나 이후 프랑크 왕국의 지배를 받았다.
1033년 콘라트 2세가 아를 왕국의 군주 지위를 상실하게 되자 프로방스 지역은 1135년까지 공화정을 이루어 선출된 집정관에 의해 통치되었다. 이후, 1135년부터 1146년까지 툴루즈 백작이 통치하기도 하는 등 주위 백작령에 속하였다.
12세기 말 아비뇽은 공화정으로 독립하였으나 알비 십자군의 카타리파 토벌에 휘말리게 되었고, 1226년 공화정은 십자군에 의해 붕괴되었다. 알비 십자군이 종결되자 루이 8세는 아비뇽을 프랑스 왕가의 속령으로 두었다.
아비뇽의 역사적 중요성은 주로 14세기에 시작된다. 당시 아비뇽은 프랑스 영토가 아니었고 교황의 신하인 앙주 공작의 영지에 속해 있었다. 1309년 클레망 5세에 의해 교황의 거주지로 선정되었다. 1348년 프로방스 여왕 조안으로부터 아비뇽 교황 7명 중 네 번째 교황인 클레망 6세가 아비뇽을 사들였고, 프랑스혁명 때까지 교황의 재산으로 남아 있었다. 이 시기에 아비뇽에서 교황의 영향력은 계속 확대되었다.
시에나의 생카트린 등이 교황들에게 로마로 돌아가라고 계속 요청했음에도 불구하고 아비뇽은 1377년까지 교회의 유일한 수도로 남아 있었다. 아비뇽과 로마에서 교황이 동시에 통치하던 대분열(1378~1417년) 기간 중 아비뇽은 교황의 거주지 중 하나로 남아 있었다.
이 도시는 교황 궁정의 이탈리아인들로부터 미움을 받았다. 교황을 모셨음에도 불구하고 처음에 아비뇽을 바빌론으로 지칭한 페트라르크는 ‘우주의 모든 배설물이 모이는 하수구’라고 묘사했다. 14세기에 이 도시와 교황은 악명을 떨쳤다. 교황에 오른 인물들은 종교적으로 경건한 경우가 거의 없었고, 주변의 최고위 측근들조차도 목회적인 책임보다는 법적·재정적 문제에 더 신경을 썼다. 그들은 무절제와 족벌주의, 부패 등으로 고발되었고 프랑스 왕들의 꼭두각시로 여겨졌다. 교황의 영토는 약탈자에 의해 파괴되었다.
이 도시는 유럽의 다른 지역들과 마찬가지로 페스트의 빈번한 발병에 시달렸다. 그러나 교황 클레망 6세는 페스트 창궐 기간 중 집단 학살을 당하는 유대인들을 보호했다. 교황은 1791년 아비뇽이 프랑스에 합병될 때까지 그곳을 계속 통치했다. 합병 과정에서 유혈사태가 일어났고, 팔레 데 파프(교황의 궁전) 내부가 파괴되었다. 해발 58m 높이의 바위 위에 8단으로 요새처럼 축조된 이 교황궁은 1822년부터 1906년까지 군대 막사로 사용되었다.[4]
경제[편집]
아비뇽은 아비뇽코몽 공항과 아비뇽르퐁테 항구를 관리하는 보클뤼즈 상공회의소가 있는 곳이다. 아비뇽에는 7,000개의 사업장과 1,550개의 협회, 1,764개의 상점, 1,305개의 서비스 업체 등이 있다. 아비뇽 노르의 상업지역은 유럽에서 가장 큰 상업지역 중 하나이다. 이 도시는 과일과 채소의 거래 중심지이며 직물, 가정용품, 기계, 인쇄, 구리 및 보석 세공 등의 산업이 발달해 있다.
교통[편집]
아비뇽은 두 개의 고속도로에서 가깝다. A7 자동차 전용도로(E714)는 남북 축이다. A9 자동차 전용 도로 (E15)는 스페인 북동-남서 축을 따라 오랑주 부근의 A7에서 갈라진다.
아비뇽에는 두 개의 열차역이 있다. 1860년에 건설된 역사적인 아비뇽상트르역은 도시 성벽 바로 밖에 위치해 있으며, 도시 남쪽의 쿠르틴 구역에 있는 아비뇽 TGV역에는 2013년 12월부터 두 역을 잇는 비르귈 노선이 생겼다.
남동쪽 국경에 있는 아비뇽코몽 공항에는 영국으로 가는 몇 개의 국제선이 있다. 국내외 여객 서비스를 갖춘 이 지역의 주요 공항은 마르세유 프로방스 공항이다.
론강은 수 세기 동안 아비뇽의 중요한 교통수단이었다. 아비뇽에는 두 개의 상업 항구가 있는데, 보트 순항용 정박시설과 다양한 강변 시설이 개발되었다. 성벽 근처의 부두와 반대편 둑 사이를 무료 셔틀보트가 운행한다.
도시의 공공교통서비스 시스템인 ‘TCRA’는 버스서비스와 자전거 공유, 카풀 서비스를 운영하고 있다. 전차 1호선은 2019년 10월에 개통되었다. 아비뇽은 자전거 도로가 110km에 이른다.[5]
관광[편집]
가장 인기 있는 관광 명소는 팔레 데 파프(교황의 궁전)이다. 교황의 궁전은 유럽에서 가장 크고 유명한 중세 고딕양식의 건물 중 하나이다. 한때 성곽과 궁전이었던 교황의 거처는 14세기 로마 가톨릭의 본산이었다.
국제회의센터가 1976년에 교황의 궁전 내에 설립되었고, 연중 내내 많은 행사를 주최한다. 컨벤션과 세미나, 회의 등을 위해 고안된 국제회의장은 교황궁의 양쪽 건물에 자리하고 있다.
론강의 수상 관광은 1994년에 3척의 수상호텔용 선박과 함께 시작되었다. 산책로를 따라 부두에 정박해 있는 유람선 6척을 포함해 21척의 수상호텔용 보트 선단이 있다. 무료 셔틀보트가 아비뇽과 바르틀라스 섬을 연결하고 있다.
아비뇽에는 역사적 기념물로 등록된 유적과 건물이 산재하고 있다. 성벽 안에 있는 도시의 건물들은 낡았지만 대부분의 지역에서 복원되거나 재건되었다. 중심가 레퓌블리크 거리의 건물들은 제2 제국(1852~1870년) 시절에 건설된 것들이다. 로르로누(중앙광장) 주변에는 신고전주의 양식의 시청이 있고 극장 지구 주변에 오스만 전시장 및 편의시설들이 있다.
매년 400만 명의 방문객들이 아비뇽을 방문하고 축제를 즐긴다. 아비뇽 페스티벌은 매년 열린다. 1947년에 출범한 아비뇽 페스티벌은 전통 연극 행사뿐만 아니라 춤, 음악, 영화 등 다양한 예술 형식으로 구성되어 있고, 도시의 역사적 기념물을 잘 활용한다. 매년 여름 약 10만 명이 이 축제에 참가한다. 아비뇽 페스티벌은 실제로는 두 개의 축제로 구성되어 있다. 교황궁 안에서 연극을 선보이는 격식을 갖춘 ‘페스티벌 인’과 대부분 아마추어 연극과 길거리 공연을 선보이는 보헤미아적인 ‘페스티벌 오프’이다.
쉬르 르 퐁 다비뇽(아비뇽 다리 위에서)은 아돌프 아당이 1853년 파리에서 처음 공연된 오페라 코미크 르 수르 우 로베르주 플렌에 포함시켰던 곡이다. 이 오페라는 데포르주가 1790년 희극을 각색한 것이었다. 이 곡에 나오는 다리는 론강을 가로지르는 생베네제 다리인데, 지금은 네 개의 아치만이 남아 있다. 이 다리는 1171~1185년 사이에 길이 약 900m로 건설되었으나, 1226년 프랑스 루이 8세의 아비뇽 포위 과정에서 파괴되었다. 그 후 몇 차례 재건되었지만 홍수가 나면 자주 붕괴되었고 1669년 다리로서의 기능을 상실하고 폐기됐다.
지도[편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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동영상[편집]
각주[편집]
참고자료[편집]
- 〈아비뇽〉, 《위키백과》
- 〈아비뇽〉, 《나무위키》
- 〈아비뇽〉, 《요다위키》
- 〈아비뇽(두산백과)〉, 《네이버 지식백과》
- 〈아비뇽(유럽지명사전)〉, 《네이버 지식백과》
같이 보기[편집]
서유럽 같이 보기[편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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