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익환"의 두 판 사이의 차이
Jinshi2068 (토론 | 기여) (새 문서: 썸네일|300픽셀|'''문익환''' '''문익환'''<!--문 익환-->은 대한민국의 한국기독교장로회 소속의 목사이며 남북통일 운동가...) |
(차이 없음)
|
2024년 12월 24일 (화) 16:48 기준 최신판
문익환은 대한민국의 한국기독교장로회 소속의 목사이며 남북통일 운동가, 시인이다.
개요[편집]
문익환은 한국의 목사이자 민주화 통일 운동가이다. 신구교 공동구약번역 책임위원으로 일했고 1989년에는 북한을 방문하기도 했다. 1993년까지 국가보안법 위반 등으로 총 6회에 걸쳐 투옥되었다. 1992년 노벨평화상 후보로 추천되었고, 저서에 《통일은 어떻게 가능한가》(1984), 《가슴으로 만난 평양》(1990), 《걸어서라도 갈테야》(1990) 등이 있으며, 시집 《새삼스런 하루》(1974)와 《난 뒤로 물러설 자리가 없어요》(1984) 등이 있다. 그 밖에 산문집과 옥중서한집 등 10권이 넘는 저서를 남겼다.[1]
생애[편집]
문익환(文益煥 1918년 6월 1일 ~ 1994년 1월 18일)은 중화민국 출생의 한국기독교장로회 목사이다. 민중신학을 주장한 통일운동가, 사회운동가이며 시인이었다. 장준하, 송몽규, 시인 윤동주와 절친한 것으로도 유명하다. 본관은 남평(南平)이고 호는 늦봄이다. 문익환 목사는 통일이 되지 않으면 온전한 민주화가 실현되기 어렵다는 진보적 기독교인들의 신념에 따라 통일운동과 민주화운동에 참여했기 때문에 기독교 사상에 근거한 사회운동을 한 정도로만 알려져 있지만, 실제로는 성서학자로도 활동하였다. 그 실례로 문익환 목사는 감리교 목사인 이현주 목사와 함께 공동번역성서 번역에 개신교 측 번역자로 참여했으며, 구약성서를 다윗, 사무엘 등의 영웅들에게 가려진 민중의 관점에서 알기 쉽게 설명한 《히브리 민중사》(삼민사 刊)를 저술하였다.
문익환은 1918년 중화민국 지린성 룽징시 명동촌(村) (현재의 중국 옌볜 조선족 자치주 룡정시 지산진(鎭))에서 문재린의 맏아들로 태어났으며, 룽징에서 소학교를 다녔으며 윤동주, 장준하와 절친한 동무였다. 평양신학교는 근본주의적이니, 일본신학교에서 공부하라는 부친의 권유로 1938년 도쿄의 일본 신학교에 입학했다. 일본신학교 입학 시 문익환은 신학적인 갈등을 겪는다. 당시 일본신학교에서는 성서비평학이 활발했는데, 축자영감설을 믿고 있던 문익환에게 성서를 학문적으로 비평하여 해석하려는 성서비평학은 받아들이기 힘든 학문이었다. 쉽게 말해서 성서의 문자적 해석에 익숙하던 문익환 목사는 성서를 학문적으로 비평하고 해석하는 성서비평학에 대해 거부감을 갖고 있었던 것이다. 하지만 "자신과 다른 생각을 경청하지 못하면 학문을 할 자격이 없다"라는 교수의 충고로 문익환은 성서비평학을 학문으로 존중하게 되었다. 1947년에 한국신학대학교(현재 한신대학교)신학과를 졸업하였다. 1954년 미국 프린스턴 신학교에서 구약성서신학 전공으로 신학석사학위를 받았다.
문익환은 한국신학대학교와 연세대학교에서 구약성서학을 강의하였으며, 구약성서를 민중의 입장에서 해석한 《히브리민중사》(삼민사)를 쓰기도 하였다. 1970년대에는 개신교와 천주교의 공동번역성서 번역사업에 개신교 대표로 참여하였다. 이후 신구교 공동구약번역 책임위원을 거쳐, 1976년 3월 "3·1민주구국선언" 사건으로 투옥되어 22개월 만에 출옥한 뒤, 1978년 10월 유신헌법의 비민주성을 비판해 형집행정지 취소로 다시 수감되었다.
1980년 5월 "내란예비음모죄"로 3번째 투옥되었다가 31개월 만에 출옥한 뒤, 1983년 1월부터 "고난받는 사람을 위한 갈릴리교회" 목사와 민주통일민중운동연합 의장(1985), 전국민족민주운동연합 상임고문(1989), 조국통일범민족연합 남측본부 결성준비위원회 위원장(1991), 제4차 범민족대회 대회장(1993) 등을 지냈다. 1989년 통일이 없으면 민주주의도 없다는 당시 진보 기독교인들의 인식에 따라 북한을 방문하여 김일성 주석과 회담하고 귀국하였으나, 정부와 사전협의 없이 독자적으로 방북했으며 평양 도착성명에서 '존경하는 김일성 주석'이라는 표현을 사용하고 한국정부를 일방적으로 비방했다는 이유로 국가보안법상의 '반국가단체잠입죄'로 투옥되어 1990년 10월 20일 형집행정지로 석방되었다. 그러나 이후 공안정국을 조성한 정부에 의해 1991년 6월 6일 재수감되었다. 이후 1993년 초 석방되었다.
문익환은 활발한 통일운동과 강연활동을 벌였다. 부인으로 박용길 장로, 형제로 역시 재야운동가인 문동환 목사, 아들로서 극작가 문호근과 배우 문성근이 있다. 1993년에는 통일맞이 7,000만 겨레모임 운동을 제창하는 등 민주화 운동과 통일 운동에 전념하다가 1994년 1월 18일 20시 20분에 향년 77세를 일기로 심장마비에 의해 별세하였다.
업적[편집]
문익환 목사는 통일 운동의 선구자이자 민주화 투쟁에 헌신한 인물로, 그의 업적은 그가 일생 동안 이루려고 했던 한반도의 평화적 통일과 민주주의 실현을 중심으로 하고 있다. 그는 1989년 남북한 대화를 위해 평양을 방문하여 김일성과의 회담을 시도했으며, 이를 통해 분단된 한반도에서 통일을 위한 실질적인 첫걸음을 내디디려 했다. 비록 이로 인해 국가보안법 위반 혐의로 구속되었지만, 그의 행동은 남북 간의 대화를 촉진하는 중요한 사건으로 기록된다.
민주화 운동 측면에서도 문익환은 매우 중요한 인물이다. 그는 유신 독재와 군사 정권에 맞서 민주주의를 위해 싸웠으며, 민주화 운동의 정신적 지도자로서 많은 사람들에게 영향을 주었다. 특히 1970-80년대 민주화 운동의 도화선이 된 여러 집회와 선언에서 중요한 역할을 했다.
문익환은 통일에 대한 열정을 기반으로 한 평화 사상을 강조했다. 문익환은 남과 북의 평화적인 통일을 이루기 위해서는 대화와 화해가 필요하다고 주장했으며, 무력 충돌이 아닌 비폭력적이고 상호 존중에 기반한 통일을 지향했다. 이러한 그의 평화주의적 사상은 성직자로서의 그의 역할과도 맞닿아 있다. 또한 그는 민주주의와 인권을 중시하는 사상가였다. 그는 권력의 억압을 비판하고, 모든 국민이 자유롭고 평등한 사회를 만들어야 된다는 믿음을 가지고 있었다. 이러한 철학은 그가 독재 정권에 맞서 싸운 원동력이 되었으며, 민주화 운동의 중요한 가치로 자리 잡게 되었다.
문익환과 비슷한 인물로는 넬슨 만델라를 들 수 있다. 만델라는 남아프리카 공화국에서 인종 차별 정책인 아파르트헤이트에 맞서 싸운 인물이자, 평화적인 대화와 협상을 통해 국가 통합을 이루려 했다. 문익환과 만델라는 모두 폭력보다는 대화를 통해 사회의 갈등을 해결하려 했다는 점에서 매우 유사하다. 또한, 모두 자유와 평등, 인권을 최우선으로 생각하고 행동했다는 공통점이 있다. 그는 대립이 아닌 협력을 강조했으며, 이 정신은 현대 사회에서도 매우 중요한 것이다. 갈등이 있는 상황에서 상대방의 입장을 이해하고, 평화적인 해결책을 모색하는 태도를 가져야 한다는 것이다.
문익환 목사의 삶은 통일과 민주주의를 위해 헌신한 상징적인 여정이었다. 그의 노력과 철학은 지금도 큰 울림을 주며, 우리 스스로가 평화롭고 민주적인 사회를 만드는 데 기여할 수 있도록 영감을 주고 있다.
문익환 목사 방북사건[편집]
문익환 목사 방북사건(文益煥牧師訪北事件)은 1989년 문익환 목사가 정부의 허가 없이 북한을 방문한 사건을 가리킨다. 전국민족민주운동연합(전민련)의 상임고문이었던 문익환 목사가 북한의 조국평화통일위원회의 초청을 받아 정부의 허가 없이 1989년 3월 25일부터 4월 3일까지 북한을 방문한 사건이다.
문익환 목사는 당시 통일민주당 당원이었던 유원호, 재일교포 정경모와 함께 개인자격으로 평양을 방문해 김일성 주석과 2차례의 회담을 갖고 통일문제 등을 논의하였다. 특히 이 회담은 분단 이후 최초의 반(半)공개로 진행되었다. 또한 조국평화통일위원회 위원장인 허담과의 회담을 갖고 1989년 4월 2일 인민문화궁전에서 기자회견을 열어 '자주적 평화통일과 관련된 원칙적 문제 9개 항'이란 제목의 합의성명으로 발표했다. 합의성명의 주요 내용은 자주·평화·민족대단결의 3대 원칙에 기초한 통일문제 해결, 정치·군사회담 진전을 통해 남북의 정치·군사적 대결상태 해소와 동시에 다방면의 교류·접촉 실현, 연방제 방식의 통일, 팀스피릿 훈련 반대 등이었다. 이 사건으로 문익환 목사는 지령수수, 잠입, 탈출협의가 인정되어 징역 7년을 선고받고 복역하다가 1993년 3월 6일 사면되었다.
동영상[편집]
각주[편집]
- ↑ 〈문익환(文益煥,1918.6.1.~1994.1.18)〉, 《두산백과》
참고자료[편집]
- 〈문익환(文益煥,1918.6.1.~1994.1.18.)〉, 《두산백과》
- 〈문익환〉, 《위키백과》
- 〈문익환〉, 《나무위키》
- 쫑이, 〈'문익환 통일의 집'에 다녀와서〉, 《네이버블로그》, 2024-11-05
- 사오정, 〈문익환평전〉, 《네이버블로그》, 2024-03-21
- 칼바람, 〈내 아버지 문익환 목사는〉, 《네이버블로그》, 2024-12-19
- 다산콘텐츠그룹, 〈문익환 탄생 100주년 기념 <문익환 통일의 집> 방문기〉, 《네이버블로그》, 2024-07-29
- 다름성채, 〈김정은의 적대적 2국가론 비판과 문익환 목사의 어처구니없는 꿈〉, 《네이버블로그》, 2024-09-22
- 골드만 싹쓰리, 〈민통련 의장 목사 문익환〉, 《네이버블로그》, 2024-10-25
같이 보기[편집]