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둥비우(중국어:董必武dǒng bì wǔ)는 중화인민공화국의 혁명가이며 중국 공산당의 창립 멤버 중 일원이다.
개요[편집]
둥비우는 중국의 정치가이다. 중화 소비에트 중앙집행위원 등을 지내고 장정(長征)에 참가하였다. 중일전쟁 때 국민참정원으로 충칭에서 국공교섭에 관여하였고, 제2차 세계대전 후 화베이 인민정부 주석, 최고인민법원장, 중앙정치국위원, 국가부주석 등을 역임하였다. 1911년 우창봉기(武昌蜂起) 때 그곳에서 중국동맹회에 참가하고, 그 후 일본으로 건너가 쑨원(孫文) 밑에서 공작하면서 호세이(法政)대학을 졸업하였다. 1921년 중국공산당 창당대회에 참가하고, 1926년 제2회 전국대표대회에서 중앙후보집행위원이 되었다. 1927년 국공분열(國共分裂) 후 소련으로 도피하여, 1928~1932년 중산대학(中山大學)에서 공부하였다. 귀국 후 장시(江西) 소비에트 구당(區黨) 학교장, 중화 소비에트 중앙집행위원이 되고, 1934년 장정(長征)에 참가하였다.
둥비우는 중일전쟁 때 국민참정원(國民參政員)으로 충칭(重慶)에서 국공교섭에 관여하였고, 1945년 샌프란시스코회의에 유일한 중국대표로 참가하였다. 제2차 세계대전 후 정치협상회의 중국대표, 중국 상하이 주재원을 거쳐 1948년 화베이(華北) 인민정부 주석, 1949년 정무원 부총리 겸 정치법률위원회 주임, 1954년 최고인민법원장, 1956년 중앙정치국위원, 1959년 국가부주석, 1969년 국가주석대리 등을 역임하였다.[1]
생애와 활동[편집]
둥비우(1886년 3월 5일 ~ 1975년 4월 2일)는 중화인민공화국의 정치인이다. 그는 1968년 류사오치의 실각 이후, 중화인민공화국의 국가부원수(1959년 ~ 1972년)로, 국가원수 권한대행(1972년 ~ 1975년)으로서 중화인민공화국 국가원수의 권한 및 직무를 대리 수행했다.
둥비우는 후베이(湖北) 황안(黃安) 사람으로 원래 이름은 동현종(董賢琮), 동용위(董用威)이다. 자는 길여(潔佘)이고, 호는 벽오(壁伍)이다. 그는 1903년 수재 출신으로 후베이 문보통학당(文普通學堂)을 나왔다. 1911년에 신해혁명에 참가하고 중국혁명동맹회에 가입했다. 사립 일본대학에서 법률을 전공했고 일본에서 손문이 만든 중화혁명당에 가입했다. 그 후에 반청, 반독재, 반일제(反日帝) 운동을 전개했다. 그 후 2번에 걸쳐 일본에 유학하였다.
둥비우는 1921년에 우한지구 대표로 제1차 공산당 대회에 참가하였다. 1949년 중화인민공화국의 성립 이후에는 국무원 부총리, 최고인민법원 원장, 국가부원수, 국가원수 권한대행, 중국공산당 중앙정치국 상무위원 등을 역임했다. 제1차 당대회의 참석한 인물 중에서, 전후 중화인민공화국의 간부로 생애를 마친 인물은 마오쩌둥과 둥비우 2명뿐이다. 그는 마오쩌둥과 함께 중화인민공화국 수립 때까지 공산당에 남아있던 유이한 창당 멤버가 되었다.
둥비우는 국공내전 이후 1954년부터 1959년까지 최고인민법원장을 역임했으며, 1955년부터 1968년까지는 중국공산당 중앙기율검사위원회 위원장을 맡았다. 1968년 10월 31일에 문화대혁명의 여파로 류사오치가 국가주석직을 사임하고 국가주석직이 공석이 되면서 1968년 10월 31일부터 1972년 2월 24일까지 쑹칭링과 함께 국가부주석으로서 국가원수를 대리하였으며 1972년 2월 24일부터 1975년 1월 17일까지는 단독으로 국가원수를 대행하였다. 하지만 린썬이 1931년부터 1943년 사망할 때까지 국민정부주석직을 역임했지만 군사위원회 위원장이자 국민당 당수인 장제스에게 실권이 있었던 것처럼 중국공산당 중앙위원회 주석인 마오쩌둥이 절대적인 실권을 가지고 있었다.
둥비우는 1975년 1월 17일에 중국공산당 부주석직을 사임하면서 국가원수 대행도 끝났으며 1975년 4월 2일에 중화인민공화국 베이징시에서 사망하였다. 공교롭게도 3일 후 중화민국 총통 장제스 역시 사망하였다.
둥비우의 저서로 『둥비우선집(董必武選集)』, 『둥비우정치법률문집(董必武政治法律文集)』, 『둥비우시선(董必武詩選)』, 『둥비우연보(董必武年譜)』 등이 있다. 둥비우는 중국공산당 초기 지도자이자 공산당 정권 수립에 큰 공을 세운 인물이다. 무산계급혁명가이고, 중화인민공화국의 개국 원로이며, 공산당 지도자이다. 중국 사회주의 법제를 만드는 데 큰 공헌을 했다.
중국공산당[편집]
중국공산당(中国共产党)은 중화인민공화국의 집권 정당으로, 인도 인민당에 이어 세계에서 2번째로 거대한 정당이다. 중국공산당은 1949년 중화인민공화국 설립 이후 현재까지 일당제를 실시, 유지하고 있다. 중국공산당은 1919년 공산주의 조직의 5·4 운동의 결과로 1921년 7월 상하이에서 반제국주의, 반봉건주의, 반파시즘, 인민민주주의독재 등의 계급 투쟁 강령을 중심으로 창당되었다. 중국공산당의 조직은 문화 대혁명 기간 동안 극좌경 운동으로 인해 파괴되었다가 덩샤오핑 시대 이후 재건되었다. 이론적으로 중공의 최고 기구는 적어도 5년에 한 번 열리는 중국공산당 전국대표대회이다.
5년마다 한 번씩 중공은 전국대표대회를 연다. 공식적으로 이 대회는 두 가지 기능을 수행한다. 첫째는 당 헌장의 변경을 추인하는 것이고, 둘째는 중앙정치국 상임위원을 선출하는 일이다. 그러고 나면 중앙정치국 상임위원회는 이어서 중앙정치국 위원을 선출한다. 그러나 실제로는 상임위원회와 중앙정치국에서 차지하는 위치가 당의 전국 대표대회 이전에 이미 정해지며, 전국 대회의 주목적은 앞으로의 몇 년간 중화인민공화국의 방향을 결정지을 당의 정책과 비전을 널리 알리는 것이다.
중국공산당은 공산당 주도의 마르크스-레닌주의, 마오쩌둥주의 혁명 노선을 문화대혁명에까지 충분히 실행한 후, 덩샤오핑 집권 이후로는, 프롤레타리아 독재가 목표가 된 계급 투쟁 노선의 종결을 공식 선포하고, 개혁과 개방 노선을 취해오고 있으며, 덩샤오핑 이론, 장쩌민 《삼개 대표》로부터는 개혁과 개방 공산당 영도와 경제 건설을 중점적으로 추진하는 등의 정강 정책을 확립하면서, 1992년에는 대한민국과도 외교 관계를 수립하였다.
문화대혁명의 결말[편집]
1976년 10월 6일 장칭(강청·마오쩌둥 부인·중앙문혁소조 부조장·중앙정치국 위원), 장춘차오(장춘교·부총리·중앙정치국 상무위원), 야오원위안(요문원·중앙정치국 위원), 왕훙원(왕홍문·당 부주석·중앙정치국 상무위원) 등 이른바 '4인방'이 체포당했다. 이로써 1965년 11월 10일 야오원위안이 상하이 <문회보>에 마오쩌둥한테서 비판당한 펑더하이(팽덕회)를 변호한 우한(오함)의 희극 <해서파관> 비판문을 발표한 이래 전 세계적인 관심 속에 10여 년간 계속된 중국 '프롤레타리아 문화대혁명'은 엄청난 후유증과 역사적 과제를 남긴 채 막을 내렸다.
문화대혁명 주체세력은 인민공사·대약진정책의 실패 후유증, 사회적 불평등 확대와 사회주의 비전 쇠퇴, 마오의 실권 약화 등을 배경으로, 의식·문화혁명을 통한 전면적 사회개조, 곧 소련과는 다른 사회주의사회 건설을 지향했으나 통제불능 상황으로 치달으면서 숱한 피해와 희생자를 낳았다. 81년 6월 중국공산당 제11기 중앙위원회 제6차 전체회의가 채택한 '건국 이래 당의 약간의 역사문제에 대한 결의'는 문화대혁명을 '지도자가 잘 못 발동하고 반혁명집단에 이용돼 당과 국가, 인민들에게 중대한 재난을 가져다준 내란'으로 총괄 평가했다.
4인방 체포 약 한 달 전인 76년 9월 9일 마오가 82살의 나이로 세상을 떠났다. 그해 1월에는 저우언라이(주은래·78)가 타계했고 7월에는 홍군의 아버지 주더(주덕·90)가 숨졌다. 그에 앞서 75년 4월엔 중국공산당 창설 멤버 둥비우(동필무)가, 12월에는 마오의 측근으로 '중국의 베리아'로 불렸던 캉성(강생)이 세상을 떴다. 이들의 죽음으로 5·4세대의 중국 공산주의 혁명가들은 모두 사라졌다. 아주 빈약한 물질적 기반 위에서 그들은 중국을 근대적이고 통일된 국민국가로 변화시켰으며 근대산업경제의 기초를 놓았다.
중국공산당 제1차 전국대표대회 옛터[편집]
상하이시 노만구 흥업로 76호~78호, 원래는 망지로 106호~108호에 자리잡고 있다. 1921년 7월 23일 각지의 공산당 초기 조직은 마오쩌둥 · 둥비우 · 하숙형(何叔衡) · 진담추(陳譚秋) · 왕신미(王燼美) · 등은명(鄧恩銘) · 이달(李達) · 이한준(李漢俊) · 유인정(劉仁靜) · 장국도(張國濤) · 진공부 · 주불해(周佛海)를 진독수는 포혜승(包惠僧)을 파견하여 전국을 대표하는 50여명의 당원이 이곳에서 중국 공산당 제1차 전국대표회의를 열었다. 제3국 대표 마린 · 스콜스키도 회의에 출석했다.
대표들은 이곳에서 그때까지의 사업상황을 보고하는 한편 당 강령과 향후 실제 사업에 대해 토론했다. 회의는 프랑스 조계(치외법권지역) 경찰의 감시와 방해 때문에 대표들은 바로 다음날부터 자리를 옮겼고, 9일째이자 마지막 날(7월 31일) 회의는 남호에 유람선을 띄워 놓고 거행했다. 이 회의에서 당 강령과 당의 임무에 관한 결의가 통과되었고, 중앙지도부를 선거하여 중국 공산당 성립을 선언했다.
둥비우구쥐[편집]
둥비우구쥐(董必武故居)는 중국 후베이성(湖北省) 황강(黄冈)에 위치한 둥비우가 살던 집이다. 훙안현(红安县) 현정부 소재지의 민주제(民主街)에 있다. 하나의 건물에 7칸의 방이 있는 중국식 단층집으로, 정중앙에 있는 샤오탕우(小堂屋)에서 둥비우가 거주했다. 방 내부에는 그의 어머니가 사용하던 물레, 직기(織機), 등잔 등이 남아있다. 현존하는 건축물은 1977년에 복원된 것이다.[2]
동영상[편집]
각주[편집]
- ↑ 〈둥비우(董必武 동필무, 1886.3.5.~1975.4.2.)〉, 《두산백과》
- ↑ 〈둥비우〉, 《위키백과》
참고자료[편집]
- 〈둥비우(董必武 동필무, 1886.3.5.~1975.4.2)〉, 《두산백과》
- 〈둥비우〉, 《위키백과》
- 〈중국공산당〉, 《위키백과》
- 〈둥비우〉, 《나무위키》
- 김작가, 〈중공의 역대? 주석!〉, 《네이버블로그》, 2024-12-20
- 히라사와 유이, 〈국공내전 때 미군 내에도 숨어있던 공산당 간첩〉, 《네이버블로그》, 2023-10-11
같이 보기[편집]