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동중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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동중서

동중서(중국어:董仲舒dǒng zhòng shū)는 동중서는 전한의 사상가, 정치가, 유학자이며 유교가 중국 문명의 핵심으로 자리 잡는 데 큰 역할을 했다.

개요[편집]

동중서는 중국 전한(前漢) 때의 유학자이다. 무제(武帝)가 즉위하여 크게 인재를 구하므로 현량대책(賢良對策)을 올려 인정을 받았다. 전한의 새로운 문교정책에 참여했다. 오경박사(五經博士)를 두게 되고, 국가 문교의 중심이 유가(儒家)에 통일된 것은 그의 영향이 크다. 허베이성(河北省) 광촨현(廣川縣) 출신. 일찍부터 《공양전(公羊傳)》을 익혔으며 경제(景帝) 때는 박사가 되었다. 장막(帳幕)을 치고 제자를 가르쳤기 때문에 그의 얼굴을 모르는 제자도 있었다. 3년 동안이나 정원에 나가지 않았을 정도로 그는 학문에만 정진하였다.

무제(武帝)의 인정을 받고, 전한의 새로운 문교정책에 참획(參劃)하게 되었다. 오경박사(五經博士)를 두게 되고, 한나라 문교의 중심이 유가(儒家)에 통일된 것은 그의 헌책(獻策)에 힘입은 바가 크다. 그러나 뒤에 자신의 학설로 말미암아 투옥되는 등 파란 많은 생애였다. 저서에 《동자문집(董子文集)》 《춘추번로(春秋繁露)》 등이 있다.[1]

생애[편집]

동중서(기원전 176년 ~ 기원전 104년)는 중국 전한 중기의 대표적 유학자로 신도국(信都國) 광천현(廣川縣)(현재는 허베이성 징 현 (헝수이 시))출신이다. 한나라 초기의 사상계가 제자백가의 설로 혼란하고 유교가 쇠퇴하였을 때, 도가의 설을 물리치고 유교 독립의 터전을 굳혔다. 무제(武帝)를 섬겨 총애를 받아 유교를 채용하고 교육 행정으로 공헌하였다. 이로써 뒷날 중국의 정신적 발전에 중요한 영향을 미쳤다. 동중서의 사상적 특징은 재이설(災異說) 즉, 인간(위정자)이 악행(실정)을 거듭하면 자연(하늘)이 재앙(천재지변)을 일으켜 이를 문책한다는 믿음이다.

동중서는 젊어서 《춘추공양전》(春秋公羊傳)을 배우고 경제 때 박사(博士)가 되었다. 무제는 즉위하면서 전국에서 현량(賢良)과 문학의 선비를 불러서 시무를 논하였는데 동중서도 현량의 자격으로 의견을 진술하였다. 그는 그때 성인(聖人)은 천명(天命)을 받아서 정치를 행하는 자로 교화(敎化)에 의하여 백성의 본성(本性)을 갖게 하고, 제도에 의하여 백성의 정욕을 절제케 해야 한다고 주장했다. 그러면서 교화에 있어서는 유학만을 정통적 학문으로 정해야 할 것이라고 하였다. 이 주장으로 한나라의 정부는 법가나 종횡가의 말을 물리쳐 채택하지 않고 오경박사를 설치하는 등 유학의 정신이 정책에 반영하게 되었다.

무제는 동중서를 강도(江都)의 재상으로 삼았다. 동중서는 젊어서 춘추를 공부하여 효경제 때에 박사가 되었는데, 나아가고 물러가며 받아들이고 그만두는 것에서 예가 아니면 행하지 아니하여 학자들이 모두 그를 스승으로 삼고 존경하였다. 강도국(江都國)의 재상이 되자 역왕(易王)을 섬기게 되었다. 역왕은 황제의 형이라 평소 교만하고 혈기 있으며 용감한 것을 좋아하였는데, 동중서가 예를 가지고 바르게 고쳐주니, 왕도 그를 존경하고 중히 여겼다.

동중서는 무제에 대한 상주 후에 강도왕(江都王)의 상(相) 대신으로 전출되었는데 《춘추》의 재이(災異)의 기사를 응용하여 비를 오게도 하고 그치게도 했다고 한다. 그러나 요동의 고조묘(高祖廟)의 화재 등에 대한 말 때문에 일단 사형까지 선고받았으나, 조칙에 의하여 용서되고 이후는 재이의 일을 입에 올리지 않게 되었다고 한다. 승상 공손홍은 같이 《춘추》를 익히고 있었으나 학력이 동중서에 미치지 못함을 시기하여 다시 그를 교만하기로 이름나 있는 교서왕 유단의 상(相)으로 전출시켰다. 그는 얼마 후에 신병을 이유로 사임하고 이후 집에 거처하면서 저술과 교수에 전념하였다. 그러나 조정에서는 처리하기 어려운 사건이 일어나면, 정위 장탕이 직접 그의 집에 찾아가 해결 방법을 물었다고 한다.

저서[편집]

기록에 의하면, 동중서가 최초로 집필한 저서로 동중서백이십삼편(董仲舒百二十三篇), 문거(聞舉), 옥배(玉杯), 번로(蕃露), 청명(清明), 죽림(竹林) 등 여러 저서가 있고, 공양동중서치옥십육편(公羊董仲舒治獄十六篇) 등이 있다. 문거(聞舉), 옥배(玉杯), 번로(蕃露), 청명(清明), 죽림(竹林)등 여러 저서는 주로 춘추의 득과 실을 저술한 것이다. 공양동중서치옥십육편은 춘추공양전의 글의 내용을 따라서 현실에서 일어난 사건을 단죄를 하였던 재판기록 모음집이다.[2]

삼강오륜[편집]

삼강오륜(三綱五倫)은 유교(儒敎)의 도덕사상에서 기본이 되는 3가지의 강령(綱領)과 5가지의 인륜(人倫)이다. 삼강은 군위신강(君爲臣綱) ·부위자강(父爲子綱) ·부위부강(夫爲婦綱)을 말하며 이것은 글자 그대로 임금과 신하, 어버이와 자식, 남편과 아내 사이에 마땅히 지켜야 할 도리이다. 오륜은 오상(五常) 또는 오전(五典)이라고도 한다. 이는 《맹자(孟子)》에 나오는 부자유친(父子有親) ·군신유의(君臣有義) ·부부유별(夫婦有別) ·장유유서(長幼有序) ·붕우유신(朋友有信)의 5가지로, 아버지와 아들 사이의 도(道)는 친애(親愛)에 있으며, 임금과 신하의 도리는 의리에 있고, 부부 사이에는 서로 침범치 못할 인륜(人倫)의 구별이 있으며, 어른과 어린이 사이에는 차례와 질서가 있어야 하며, 벗의 도리는 믿음에 있음을 뜻한다.

삼강오륜은 원래 중국 전한(前漢) 때의 거유(巨儒) 동중서(董仲舒)가 공맹(孔孟)의 교리에 입각하여 삼강오상설(三綱五常說)을 논한 데서 유래되어 중국뿐만 아니라 한국에서도 과거 오랫동안 사회의 기본적 윤리로 존중되어 왔으며, 지금도 일상생활에 깊이 뿌리박혀 있는 윤리 도덕이다.

해현경장[편집]

해현경장(解弦更張)은 '거문고의 줄을 바꾸어 매다'라는 뜻으로, 느슨해진 것을 긴장하도록 다시 고치거나 사회적·정치적으로 제도를 개혁하는 것을 비유하는 고사성어이다. 중국 한(漢)나라 때 동중서(董仲舒)가 무제(武帝)에게 올린 현량대책(賢良對策)에서 유래되었다. 개현경장(改弦更張)·개현역장(改弦易張)·해현역철(解弦易轍)·개현역철(改弦易轍)·개현역조(改弦易調)라고도 한다. 동중서는 이름난 유학자로 어려서부터 《춘추(春秋)》를 공부하였고, 경제(景帝) 때 박사(博士)가 되었다. 경제를 이어 즉위한 무제는 국사를 운영하면서 수시로 동중서에게 자문을 구하였다. 무제가 널리 인재를 등용하려 하자, 동중서는 〈원광원년거현량대책(元光元年擧賢良對策)〉이라는 글을 올렸다. 해현경장은 주로 사회적·정치적 개혁을 의미하는 고사성어로 사용된다. 조선시대 말기에 발생한 갑오경장(甲午更張:갑오개혁)의 명칭도 여기서 유래된 것이다.

인점의마[편집]

인점의마(仁漸義摩)는 백성을 옳은 방법으로 교육하는 것을 뜻하는 말로, 한(漢)나라 재상 동중서(董仲舒)의 고사에서 유래한다. 재상 동중서가 한무제(漢武帝)에게 한 말로, 한나라의 발전을 위한 제안 중에 위의 대목에서는 교화, 즉 교육을 강조하였다. 태학과 상서는 규모의 차이가 있지만 모두 학교나 교육기관이다. 나라 곳곳에 학교를 설치하여 백성들이 인·의·예를 체득하여 몸소 행하도록 해야 한다고 동중서는 말한다. 앞서 전국 통일을 이룬 진(秦)나라가 14년 만에 망한 것은 백성들이 이단의 학설을 믿고 제왕의 도(道)는 믿지 않아 풍속이 탐욕스러웠기 때문이라며, 한나라의 백성은 군주의 교화와 교육 아래 아름다운 습속을 따르도록 해야 한다고 하였다.

인점의마는 백성을 '인'에 점차 젖어 들게 하고 '의'로써 갈고닦는다는 뜻이다. 즉, 백성이 바른길로 향하게 하는 군주(또는 나라)의 교육을 의미한다. 백성이 스스로 어질고 자애로운 마음을 갖게 하고 올바른 도리로 가르치고 단련시킨다는 말로 점인마의(漸仁摩義)라고도 한다.

동중서의 통치사상[편집]

동중서는 통치사상으로서 삼통설(三統說), 대일통설(大一統說), 천인감응설(天人感應說), 재이설(災異說) 같은 이론을 제시하고 있다. 우선, 유가사상의 교화를 바탕으로 덕치를 강조하고, 삼통설을 통해 한나라의 정통성을 확보할 뿐만 아니라 제도개혁의 기준도 마련하게 되었다. 다음으로, 그는 대일통설을 통해서 천자는 하늘의 뜻을 따르고, 백성과 제후왕은 황제의 명령을 따르게 하는 중앙집권군주 통치체제를 제시했다. 이어서, 그는 천인감응설과 재이설에 관해서 천ㆍ인 양자의 기(氣) 사이에는 일종의 자연감응작용이 발생한다고 주장하고, 하늘은 재이로서 국왕에게 선정을 유도하는 동시에 악정을 경고하고 있다. 이것은 대일통설을 통해서 부여한 군주의 막강한 권한에 대한 견제장치로서, 이러한 군주의 권력을 올바르게 사용할 수 있도록 유도하는 것이라고 볼 수 있다.

동중서는 사회경제정책인 한전(限田)정책을 통해 빈부격차 해소를 주장했으며, 국가전매사업인 염철사업을 국민에게 환원하여 부역을 줄여야 한다고 강조도 했다. 동시에 그는 노비해방을 주장함으로써 인권존중사상도 일깨워 주었다. 이러한 동중서의 통치사상은 '음ㆍ양의 조화'와 '끝이 나면 다시 시작하고, 궁극에 이르면 다시 근본으로 돌아온다'는 이치에서 나온 것이라고 볼 수 있다.

천인감응설[편집]

동중서(董仲舒)는 중국 전한(前漢) 시대의 유학자이자 사상가로, 그의 천인감응설(天人感應說)을 주장했다. 천인감응설은 천(天, 하늘)과 인간의 관계를 설명하는 이론으로, 하늘과 인간이 서로 밀접하게 연결되어 있으며, 인간의 행위가 천에 영향을 미치고 천의 변화가 인간에게 반영된다는 사상을 담고 있다.

천(하늘)의 역할. 하늘은 우주의 최고 존재로, 도덕적 원칙과 자연 질서를 지배한다. 하늘은 인간 세상의 도덕적 상태를 감시하며, 인간이 하늘의 뜻에 따라 행동해야 한다고 주장하였다.

인간과 천의 상호작용. 인간의 도덕적 행위나 정치적 행위가 하늘에 영향을 미친다. 만약 군주나 백성이 도덕적이지 못하거나 올바르지 않은 행동을 하면, 하늘은 재앙(천변, 기후 이상, 지진 등)을 통해 경고를 보낸다.

정치와 윤리의 통합. 동중서는 천인감응설을 통해 유교의 정치 철학을 정당화하고자 했다. 천인감응설은 군주가 도덕적으로 통치해야 하며, 그의 행동이 곧 천의 뜻을 반영해야 한다는 근거로 사용되었다. 이는 덕치(德治)와 인치(仁治)의 필요성을 강조하며, 유교의 정치적 윤리를 강화했다.

천인감응설은 유교의 사상 체계에 하늘(천)의 권위를 부여함으로써, 유교가 단순히 윤리적·도덕적 사상에서 정치적 이념으로 자리 잡게 하는 데 기여했다. 천재지변을 단순히 자연적 사건으로 보는 것이 아니라, 정치적·윤리적 관점에서 해석하려는 경향을 형성했다. 동중서의 사상은 한 무제(漢武帝)에 의해 채택되어 유교가 국가의 지배 이념으로 자리 잡는 데 결정적 역할을 했다.

동영상[편집]

각주[편집]

  1. 동중서(董仲舒,BC 170 ?~BC 120 ?)〉, 《두산백과》
  2. 동중서〉, 《위키백과》

참고자료[편집]

같이 보기[편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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