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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2년 12월 6일 (화) 14:48 판

사과 과수원

과수원(果樹園, orchard)은 토지 지목 중 하나로 일정한 구역을 정하여 과수류를 집단적으로 재배하는 토지와 이에 접속된 저장고 등 부속시설물의 부지를 포함한다. 흔히 먹을 수 있는 열매를 얻기 위하여 사과나무, 배나무, 감나무, 밤나무, 대추나무 따위를 가꾼다.

개요

과수원은 쉽게 말하면 과수를 재배하는 밭이며 , 과 같이 농지에 속한다. 과수원에서 주로 하는 과수재배의 목적품질 좋은 과실을 해마다 많이 생산하여 경제적으로 수익을 올리는 데 있다.

과수원은 품질 좋은 상품을 많이 생산하기 위해서는 울타리를 쳐서 사람 · 가축의 피해와 기상재해를 막아야 하며, 재배 된 나무의 건전한 발육과 결실, 그리고 알찬 수확을 위해서는 철저한 토양관리, 합리적인 시비, 알맞은 결실관리, 병해 · 충해의 방제 등의 작업을 집약적으로 실시해야 한다.

과수원 경영합리화를 위해서는 생물학적 최신 기술을 활용해야 하고, 생력재배(省力栽培)를 위해서는 살충제 · 살균제 · 제초제, 여러 호르몬제 등 많은 화학약제 사용과 경운(耕耘) · 약제 살포 · 운반 · 전정 · 수확 등에 각종 농기구개발 이용되고 있다. 그러므로 과수원이란 단순히 과수가 심어진 밭을 뜻하는 것이 아니라, 그 이상의 관리경영이 담긴 밭이어야 한다.[1][2]

역사

고대

고대 이집트에 과수원이 존재하였다는 기록이 남아 있으나 우리나라에서의 역사는 짧다. 『제민요술(齊民要術)』(중국 최고의 농서)에 의하면 우리나라의 과수재배는 삼국시대부터 시작되어 통일신라시대에 많은 종류가 재배되었다고 하며, 『고려사』 식화지(食貨誌)에 의하면 1188년(명종 18) 왕이 '밤나무 · 배나무 · 잣나무 · 대추나무 등을 많이 재배하여 이(利)를 얻도록 하라'라고 명하였다고 하니, 이때 어느 정도 과수원 형태를 갖추어 재배한 곳이 있었던 것으로 생각된다.

조선시대

조선시대는 감귤 · 능금 · 앵두 · 대추 · 배 · 감 · 유자 · 석류 등이 재배되었는데 품질이 좋은 것은 왕실에 진상도 하였다. 뒤에는 이런 진상을 기화로 지방 관속들의 행패가 심하게 되어 결과적으로 과수원의 확장이나 발전을 저해시켰던 것으로 생각된다. 1880년대 외국인 선교사들에 의하여 개량된 과수가 도입되어 여러 곳에 심어졌으나, 재배기술의 부족으로 관상수 구실을 하다가 끝난 것이 대부분이었다.

1900년대

1901년 함경남도 원산 근교에 윤병수(尹秉秀)가 10㏊에 달하는 대규모의 과수원을 조성하고 '학농원'(學農園)이라 이름을 붙여 주로 사과를 재배하였는데, 이것이 우리나라 최초의 경제성을 띤 민간인의 과수원이라고 할 수 있다. 이 과수원은 그 뒤 좋은 성적을 내면서 경영되어 오다가 제2차 세계대전의 발발로 비행장이 되었다. 1906년 우리나라 정부에서는 둑도(纛島, 뚝섬)에 12㏊ 규모의 원예 모범장을 설치하고 여러 가지 과수의 개량품종을 외국에서 도입하여 재배 시험을 실시하고 묘목을 생산, 보급하여 전국에 많은 과수원이 생기게 되었다.

1910~1940년대

1910년 이후 일본인들이 들어와 많은 과수원이 일본인들의 으로 경영되었는데, 1940년경부터 제2차 세계대전에 대비한 식량증산정책으로 많은 과수원이 제거되고 대신 식량작물을 심게 되니 과수원은 쇠퇴기를 맞이하게 되었다. 광복 후 과수원은 적산(敵産)으로 되어 우리나라 사람이 관리하게 되었으나, 농약 · 비료 등 여러 가지 생산자재의 고갈과 기술 부족으로 관리를 제대로 못하게 되니 자연히 황폐 일로에 처하게 되었다.

이 시기에 수원고등농림학교를 졸업하고 고향인 함흥에서 과수원을 손수 경영하면서 1938년 우리말로 『실험 조선 과수재배법』이라는 책을 출판한 바 있는 김성원(金聲遠)이 월남하여 농사원 원예과장, 경상북도 농촌진흥원 원장을 역임하면서 몸소 기술 지도를 하고 직접 과수원을 방문하는 등 활약을 함으로써 과수원 소생에 큰 힘이 되었다.

1950~1960년대

그 뒤 6·25전쟁으로 다시 황폐되었고, 수복 후부터 1950년대는 빈곤 속에 과수원의 명맥이 유지되어 오다가 1950년대 후반에 들어오면서 원예시험장에 과수과가 설립되고 이광연(李光然)이 과장으로 부임하면서 연구 인력을 대폭 강화하고 연구와 기술 지도에 역점을 두면서 큰 성과를 거두었다. 이 시기에는 과실의 품질은 고사하고 수량만 많이 내면 을 벌 수 있는 시대였으므로 감귤나무와 사과나무는 10여 그루만 있어도 대학 학비를 대줄 수 있을 정도로 수익성이 높았다.

1960년대 후반에는 왜성사과나무가 도입되기 시작하였으나 농가에 보급은 크게 이루어지지 못하였다. 이 시기에는 김종천(金鍾天)이 과수과장을 맡아 원예시험장 과수과를 현재 수원시 이목동으로 이전하였고 상당한 규모의 시험장과 실험실을 구비하여 우리나라 과수연구에 비약적인 발전을 이룩하게 되었다.

과수원 시대

그 뒤 과수과는 과수 육종과와 과수 재배과로 불리 개편되었다. 이때부터는 사과뿐 아니라 여러 가지 과수가 좋고 색깔 좋은 새 품종으로 갱신되는 새로운 과수원 시대를 이루게 되었다. 그동안 우리나라에는 기후 · 품질 및 소비지와의 거리 등에 따라 많은 과수주산단지(果樹主産團地)가 형성되었다. 서울의 유명한 먹골배, 대구 · 충주 · 예산 · 영동의 사과, 안성 · 대전 · 안양의 포도, 나주 · 울산의 배, 전주의 복숭아, 양주의 밤, 제주도의 감귤 등 수없이 많은 과수원들이 집단을 이루어 단지를 형성하게 되었다.

그중에서 서울의 먹골배는 백두산에서 전달되는 봉화(烽火)를 받아 최종 종착지인 남산에 전달하는 마지막 산이었던 서울 묵동에 있는 봉화산 주위의 과수원에서 생산되는 배를 지칭하는 것이다. 이곳은 옛날에 궁중에서 쫓겨난 내시들이 터를 잡고 잠업(蠶業)과 과수재배를 시작한 곳이다. 그때는 물론, 청실리(靑實梨)라고 하는 재래종 배를 재배하였고, 좋은 것을 골라 궁중에 헌공하기도 하였다.

먹골배 과수원

지금은 개량품종인 장십랑 · 신고 등으로 바뀌었지만, 이 지역의 배는 품질이 우수하여 지금도 먹골배라고 하면 알아주는 유명한 산지가 되었고, 그 명성 때문에 지금도 서울 근교에서 생산되는 배를 먹골배라고 하여 판매하고 있다.

한 가지 아쉬운 것은 서울 자하문 밖의 능금 재배이다. 능금이라는 이름은 임금(林檎)에서 유래된 것인데 전설에 의하면, 임금은 임금(王)과 발음이 같아서 귀중한 과일로 취급되어 고려 때는 수도인 개성에 재배를 장려하였고, 조선시대는 수도인 서울에서 재배가 장려되었다고 한다. 서울 자하문 밖 세검정에는 유명한 과수원이 많이 형성되어 재배되어 왔고, 능금은 말복(末伏) 때부터 처서(處暑) 때까지에 성숙되며, 비교적 맛이 좋고 더위를 식히는 데 좋은 과일이라 하여 노소를 막론하고 즐겨 먹었다.

대구의 능금 과수원

이렇게 유명하였던 능금은 개량품종이 보급됨에 따라 경제성이 없어져 서서히 그 재배 면적이 감소되어가다가, 지금은 극소수만이 재배되어 그 명맥을 유지하고 있을 뿐이다. 그러나 우리나라의 능금은 사과 육종에는 좋은 자료가 되므로 세계 여러 나라 학자들이 자하문 밖 능금나무를 찾아보고 귀중한 자료로 수집하기도 한다.

영동의 사과는 그 역사가 아주 짧은데, 전국적으로 국광과 홍옥이 재배되고 있던 1969년 일본의 원예 학자 가지우라(梶浦)가 한국원예학회 초청으로 우리나라에 왔다. 그때 당시 인천 원예협동조합 이사로 있던 김두칠(金斗七)의 요청에 따라, 유망한 것으로 예측되는 동북7호(지금의 후지 품종) 묘목 다섯 그루를 보내준 것을, 지금 영동군 심천에 사는 강구홍이 그 중 두 그루를 분양받아 처음으로 심은 것이다.

영동 사과 과수원

결실 후에 보니 크기 · 색깔 · 맛 등이 국광보다 월등히 우수하다는 것이 인정되어 서서히 보급되었는데, 이것이 이 지역에 가장 먼저 보급되고 결실되었기 때문에 영동의 사과 또는 옥천의 사과가 널리 알려지게 된 것이다. 이 과수원은 쓸모없는 하천 부지 자갈밭을 불하 받아 지게로 에 있는 을 져다 1m 이상 돋운 뒤에 거기에 과수원을 조성하였는데, 그 노력과 끈기는 보는 사람마다 탄복을 금치 못하게 하는 피나는 노력의 결실이었다.

그래서 그 대가로 인해 새로운 영동의 사과를 이룩하는 핵심이 되었을 것으로 믿어진다. 이때 물론 우리나라 여러 과수원에도 후지 품종이 몇 그루씩 심어져 있기는 하였지만 영동보다 늦었던 것 같다. 대구의 사과는 지금은 경북의 사과로 변하였듯이 경상북도 전역에 확장된 세계적인 사과 지대라고 할 수 있다. 품종도 좋은 것으로 갱신되었고 재배기술도 향상되어 좋은 과실을 많이 생산하고 있다. 최근 이 지방 사과를 선전하기 위하여 '능금의 날'을 제정하고 품평회를 개최하며 '능금 아가씨(미스 능금) 선발대회'도 매년 실시하고 있다.

제주도의 감귤 재배는 1960년대 초부터 급진적으로 발전되어 제주도의 수입을 높이는 큰 자원이 되고 있다. 기후적으로 우리나라에서는 제주도만이 재배할 수 있다. 서귀포에서 재배가 이루어지던 것이 지금은 남제주 · 북제주 전역에 보급되어, 국내 소비량을 초과하는 과잉생산 현상을 보여 감귤 가격이 하락되는 현상에까지 이르고 있으며, 여기에서도 매년 '감귤아가씨 선발대회' 등 푸짐한 축제를 열고 있다.

제주도 감귤 과수원

아쉬운 점과 향후 전망

1960년대는 과수원의 모든 작업이 인력으로 이루어지던 시기이고, 또 이때는 인건비가 싸서 과수원에는 매일 수십 명씩의 부녀자들이 과실을 솎아 주고, 그늘지는 잎을 따 주고, 봉지를 씌워 주는 을 하였다. 여러 과수원에서 트랜지스터라디오를 과실나무에 달아매어 놓고 구성진 가요 곡에 맞추어 콧노래를 부르며 흥겨워하던 광경은, 지금 우리들이 볼 수 없는 즐거운 과수원 풍경이었다.

과수원에는 원두막이 있어 낮에는 과실을 판매하고 밤에는 과수원을 지키는 구실을 하게 된다. 과수원 근처의 을 따라 젊은이들의 낭만이 있기도 하고, 원두막은 인근 주민들의 휴식처 구실도 하였다. 마을 어린이들이 과수원에 숨어들어 과실을 서리하다 들키면 그 주인은 큰 소리로 꾸짖기는 하지만, 이미 딴 과실은 빼앗지 않고 그대로 가지고 가게 하던 후덕한 과수원 인심도 많았는데, 요즈음에는 고발하고 변상시키는 것이 일쑤인 각박한 인심도 많아 대조적인 풍경이라고 하겠다.

과수원의 모든 작업을 기계약제를 써서 끝내버리는 지금의 과수원에서는 지난날의 낭만을 찾아볼 수 없으니, 한편 아쉬운 마음도 금할 길이 없다. 이렇게 기나긴 세월을 지나는 동안 우리나라의 과수원은 1996년 현재 17만㏊를 넘어섰으며, 생산량은 230만 톤(t)에 이르러 국민 1인당 연간 54㎏ 정도의 과일을 먹을 수 있게 되었으며, 1986년부터는 연간 1∼2만 톤(t)의 과실을 세계 20여 개국에 수출하여 상당한 외화를 획득하게 되었다. 앞으로도 우리나라 과수는 생산량 · 수출량 · 가공량 등이 꾸준히 증가될 전망이어서 유망한 산업이라고 할 수 있다.[3]

과수원 초기 재배 관리

정지 및 전정

정지 및 전정은 과수원의 관리 효율 향상과 고품질 과실의 안정생산을 위하여 목표로 하는 수형을 구성하는 작업이다. 정지(整枝)란 수관을 구성하는 가지의 골격을 계획적으로 구성 유지하기 위하여 유인, 절단하는 것을 말하고, 전정(剪定)은 과실의 생산과 직접 관계되는 가지를 잘라주는 것을 뜻한다.

정지 및 전정은 수고가 높아 관리가 불편한 나무는 수고를 낮추고 꽃눈 착생 상태를 고려하여 수관 전체에 목표로 하는 수량의 과실이 고루 배치될 수 있도록 결과지를 배치한다. 지난해 나무의 세력이 강했을 경우에는 약 전정으로, 수세가 약했을 경우는 다소 강한 전정으로 수세 안정을 도모한다.

전정방법은 개인의 판단에 의하여 이루어지기 때문에 서두르지 말고 각 나무의 생육상태를 천천히 관찰하면서 단계적으로 실시하여야 한다. 목표로 하는 수형과 수세, 생육에 대한 판단은 경영자의 시각에 따라 차이가 있으나 입지의 기상이나 토양, 지형 등의 환경조건과 품종의 특성, 전년도의 착과 정도, 과실 크기 분포, 착생 상태 등을 정확히 파악하고 전정에 임하는 자세가 필요하다.

광환경 개선

나무의 생육과 과실 품질, 화아 형성 등은 일조의 영향을 크게 받기 때문에 광환경이 좋은 수형을 목표로 하여야 한다.

가능한 주간 가까이에 결과지를 배치하고, 남쪽에 위치한 가지 중 그늘을 지우는 것은 절단 또는 유인하여 수관 내부에 광이 잘 도달될 수 있도록 하여야 수관 하부나 북쪽 부분에 꽃눈 수를 증가시킬 수 있다.

또 수관이 복잡한 과수원은 약제 살포에 문제가 많다. 상품성이나 수량 저하를 초래하는 병해충의 발생을 미리 방지하기 위하여 이 시기부터 연간 방제 작업을 염두에 두고 가지를 배치해야 한다. SS기(비료 농약 살포기)가 다니는 통로에 돌출된 굵은 가지는 약제 도달을 막는 장해가 되므로 제거하고 또한 주간 상단부에 큰 가지를 두지 말며, 결과지가 밀생되어 있는 부분은 솎아준다. 착가부위는 가능한 한 낮추어 주어야 생력화가 가능하다.

수세 조절

꽃눈이 적을 경우는 결실량 확보를 목표로 약하게 전정하여 꽃눈을 많이 남기고, 약하고 작은 꽃눈의 비율이 높을 때는 과실 품질이 불량해질 우려가 있으므로 생육상태가 좋은 꽃눈만 남겨 수를 줄여준다.

꽃눈이 많을 경우는 적정 착과를 염두에 두고 실시하며, 악간 강하게 절단하여도 반발을 하지 않으므로 큰 가지를 제거하거나 수고를 낮추는 작업이 가능하다.

또 수세가 지나치게 강한 나무는 솎음 정정 위주로 하고, 단근이나 환상박피 등을 실시하거나, 하계전정을 하는 등 일 년 내내 수세 안정을 위한 대책이 필요하다.

지나치게 약한 나무는 강전정과 절단전정으로 수세 회복을 꾀하되 그 원인이 무엇인가를 파악하여 근본적인 대책을 세워야 한다.

수세 판단은 지난해 자란 새 가지의 길이, 굵기나 색깔, 도장지의 발생 방향 등으로 관찰하고, 전년도의 결실량, 과실 크기, 착색 정도, 고두병 발생 상황 등을 종합적으로 고려하여 판단한다. 일반적으로 과실 품질은 수세가 강하면 착색 불량, 당도 저하가 초래되고, 수세가 약하면 착색이 좋아지고 과실 크기는 작아진다.

과원 정비 및 월동 약제 살포

전정이 끝나면 전정지를 제거함과 동시에 병해충 잠복 장소가 되는 이병지, 낙엽 등을 묻거나 태운다.

최근 일부 지역에서 잎말이나방류가 과실에 피해를 많이 주나, 잎을 말거나 잎을 붙여서 가해하기 때문에 방제가 곤란하므로 사전에 발생 및 밀도를 경감시키는 것이 매우 중요하다. 사과애모무늬잎말나방의 월동 유충은 사과나무의 부주의나 주지의 배면에 있는 조피 틈새에서 유충 상태를 월동하므로 조피를 제거하여 주면 사전 밀도를 낮출 수 있고 월동 약제 살포로 생육기 중 병해충 발생을 줄일 수 있다.

이 시기에 살포하여야 할 약제로는 기계유유제, 석회유황합제, 보르도액 등이 있지만 대부분의 농가에서 여러 가지 이유로 동계 약제는 무시한 채 생육기 약제 살포에만 의존하는 경우가 많다.

그러나 동계 약제 살포는 월동 병해충 알이나 성충 수를 줄임으로써 한해 농사를 좌우할 수 있는 중요한 작업이므로 빠뜨리지 않도록 한다.

기계유유제

기계유유제의 살충효과는 해충의 표면에 약액이 묻어 피막을 형성함으로 호흡작용을 막아 대사 가스의 축적에 의해 해충을 물리적으로 질식사 시키는 것이다.

따라서 약제가 직접 해충의 몸에 묻지 않으면 살충효과가 없다. 적용 대상 해충은 깍지벌레, 응애류, 진딧물류, 나방류의 애벌레와 알이다.

최근 우리나라 배 과원에 심각한 문제 해충으로 되고 있는 꼬마배나무이 월동 성충은 나무의 거친 껍질 밑에서 나무 위로 이동한 시기(2월부터 6℃ 이상 되는 날이 11.5회)에 기계유유제를 살포하는 것이 효과적이다. 꼬마배나무이 월동 성충이 이동 후인 3월 15일에 기계유유제 살포로 월동 밀도가 높았음에도 불구하고 발생밀도를 크게 낮출 수가 있었다.

2003년 동계의 해충의 월동 상태를 원예연구소에서 조사한 결과, 사과응애알은 2002년도 102개에서 776개/100 눈으로 크게 증가하였고 복숭아깍지벌레알 수도 전년에 비해 증가하였으므로 유의한다. 꼬마배나무이는 2002년도 6.9마리에서 4마리/25㎠ 조피로 감소되었는데 이는 작년에 추위가 빨리 닥친 관계로 월동에 들어가는 해충이 많이 증식하지 못하였기 때문으로 분석되지만 그래도 방제를 철저히 행해야 할 것이다.

석회유황합제

석회유황합제는 1881년 프랑스에서 포도 병해방제용으로 사용된 이래 살충력 및 살균력을 가진 저렴한 약제로 각종 과수 병해충 방제용으로 널리 사용되고 있다.

적용 대상 병해충으로는 동고병, 잿빛무늬병, 흑성병, 흰가루병, 잎오갈병 등의 병해와 깍지벌레, 응애 등의 해충을 방제하는 약제이다. 다황산칼슘(CaS5)이 공기 중의 산소반응하여 생기는 활성황의 작용에 의해 살균작용이 생기며 이 약제의 강한 알칼리성은 균체나 환부 조직을 부식시켜서 기계적으로 파괴시키고 황을 균체의 조직에 침입시켜 살균작용을 쉽게 한다.

균체 속에 들어간 황은 조직 내에서 탈 탄소 작용을 하고 이의 산화물과 황화수소 등에 의해 살균작용을 일으킨다.

응애나 깍지벌레에서 같은 과정으로 살충작용을 일으킨다. 특히, 복숭아의 잎오갈병(축엽병)은 석회유황합제에 의해 거의 방제가 되므로 나무 전체에 골고루 살포한다.

사용 시 주의할 사항은 약제 용구는 금속 제품을 피하고 분무기는 사용 즉시 암모니아나 초산 용액으로 씻은 다음 로 잘 씻어 준다. 약제가 공기와 접촉하게 되면 분해가 촉진되므로 저장 시는 용기를 꼭 막아 공기 접촉을 막는다.

시비관리

과수원은 주로 이 얼기 전인 전년 가을에 시비하는 것이 원칙이지만 전년에 시비를 하지 못한 농가는 땅이 풀리기 직전에 시비한다. 계돈(鷄豚), 돈분(豚糞) 등의 구비를 사용하는 농가는 사용량을 줄이는 것이 바람직하다.

나무 심기

  • 평탄작업은 과수원 전체를 적당한 방향으로 약간의 경사도를 두고 평탄화하여 자연배수가 되도록 한다.
  • 신규 개원 시 토양 개량을 위한 퇴비, 인산, 석회시용은 부숙이 잘 된 10톤/10a 이상의 퇴비와 고토 석회 300~500kg/10a, 용성인비 200~300kg/10a, 붕사 3~5kg/10a 정도를 시용한다.
  • 배수 시설은 넓은 면적이거나 물의 유입량이 많은 과원에서는 명거배수 위주로 배수시설을 정비하고 지하수위가 높거나 습해의 우려가 있는 과원은 명거배수와 함께 암거배수 시설을 하도록 한다.
  • 암거배수는 침출수의 배수뿐만 아니라 지하수위의 조절이 가능하기 때문에 열간 방향으로 3~5m 정도의 간격으로 배수관의 처음과 끝이 어느 정도 경사가 이루어지도록 하여 물의 고임이 없이 물 빠짐이 원활하도록 하는 것이 중요하다.
  • 배수관은 직경 100mm 정도의 다공 파이프로 설치하되, 설치 시에는 파이프 내 공극이 막히지 않도록 차광막 등을 씌운 후 경사를 유지시키면서 설치해야 한다.
  • 재식은 접목부위가 10~15cm 정도 노출되도록 일정한 높이로 하되, 재식 후 가라앉을 높이를 감안하여 5cm 정도 더 높여 심는다.

늦서리 피해 방지

늦서리는 분지곡간지, 냉기류의 유입이 많거나 정체되는 경사지 아랫부분, 냉기류의 이동통로가 되는 곳에서 기압고기압 권내에 들어 맑고 바람이 없는 날에 내리기 쉽다. 피해 발생 온도는 품종에 따라 다르지만 일반적으로 발아 시기는 –4~5℃ 정도이며, 전엽기는 -3℃, 개화기 근처에는 –1℃ 정도이다. 그러나 피해 온도 이상이라도 식물체 온도는 기온보다 최고 2℃까지 더 낮아질 수 있으므로 주의가 필요하다.

피해 방지 대책은 나무를 건전하게 관리하는 것이 가장 중요하고, 경사지인 경우는 과수원 상부에 방상림을 설치하여 냉기류의 흐름을 바꾸어 주거나, 연소법, 송풍법, 살수결빙법(물을 뿌려주는 방법) 등 적극적인 대책을 강구하여야 한다. 연소법은 중유, 폐유, 왕겨, 톱밥에 기름류를 스며들게 한 것, 폐타이어 등을 배치해 을 붙여 과원 온도 상승을 꾀하는 방법으로 조건에 따라 화점 수를 고려해야 한다.

스프링클러로 나무에 물을 뿌리고, 물이 얼 때 발생하는 잠열을 이용하여 서리를 방지하는 방법은 현재 실용화되고 있는 상해 방지 대책 중에서 효과가 좋아 기온이 상당히 내려가도 나무 온도를 0℃ 이상 될 때까지 연속적으로 물을 뿌려야 한다.

10a당 1시간에 약 4톤의 물이 필요하며, 이보다 많은 물량을 확보하고 있지 않으면 실시할 수 없다. 또한 시설비가 방사선과 같은 정도로 비싸고 토양이 너무 습해지는 문제가 있다.

늦서리 피해를 입은 과수원은 병해충 방제, 비배관리, 전정 등 사후 관리를 철저히 하고, 결실량 확보를 위해 인공수분을 실시한다. 사과에서 중심화가 피해를 입었을 경우는 측화에 인공수분하고, 대체로 나무 상단부에는 피해가 적으므로 이 부분에 중점적으로 실시한다.

적과는 동녹, 기형과 등 피해가 확인되는 시기에 하고, 상품성이 없는 과실이라도 수세 안정을 위해 최소한의 과실은 남겨야 한다.[4]

동영상

각주

  1. 과수원〉, 《네이버 국어사전》
  2. 과수원〉, 《네이버 지식백과》
  3. 과수원(果樹園)〉, 《한국민족문화대백과사전》
  4. 횡성농업기술센터, 〈과수분야〉, 《횡성군청》, 2016-03-04

참고 자료

같이 보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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