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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4년 12월 25일 (수) 10:45 기준 최신판
관중(중국어:管仲guǎn zhòng)은 중국 춘추시대 제(齊)나라의 재상이다. 춘추오패 중 첫 패자인 제환공을 보필한 공신이다.
개요[편집]
관중은 춘추시대 제(齊)나라의 정치가이다. 환공을 도와 군사력의 강화, 상업·수공업의 육성을 통하여 부국강병을 꾀하였다. 가난했던 소년 시절부터 평생토록 변함이 없었던 포숙아(鮑叔牙)와의 깊은 우정은 '관포지교(管鮑之交)'라 하여 유명하다. 환공(桓公)이 즉위할 무렵 환공의 형인 규(糾)의 편에 섰다가 패전하여 노(魯)나라로 망명하였다. 그러나 포숙아의 진언(進言)으로 환공에게 기용되어, 국정(國政)에 참여하게 되었다.
관중은 환공을 도와 군사력의 강화, 상업·수공업의 육성을 통하여 부국강병을 꾀하였다. 대외적으로는 동방이나 중원(中原)의 제후(諸侯)와 9번 회맹(會盟)하여 환공에 대한 제후의 신뢰를 얻게 하였으며, 남쪽에서 세력을 떨치기 시작한 초(楚)나라를 누르려고 하였다. 저서로 알려진 《관자(管子)》는 후세 사람들에 의하여 가필된 것으로 여겨지고 있다.[1]
생애[편집]
관중(기원전 725년 ~ 기원전 645년)은 중국 춘추 시대 초기 제나라의 정치가이자 사상가로, 자는 중(仲)이며 영상(潁上) 사람이다. 보통 성씨와 자를 합쳐 관중(管仲)으로 불리며, 제환공을 춘추오패의 첫 번째 패자로 만드는데 큰 역할을 했다. 그의 사상은 한서 예문지에서는 도가로, 수서 경적지에서는 법가로 분류되나, 이는 직하하파에 의해 편집된 관자를 후대의 관점으로 보았기 때문이다. 그러나 관중의 사상이 후대의 제자백가에 영향을 준 것만은 확실하다.
관중은 기원전 725년 제나라 영상(현재 안휘성 복양시 영상현)에서 태어난 것으로 알려져 있다. 영상은 영수 근처에 위치한 상업의 중심지로, 수운을 통해 교류하기 쉬운 곳이다. 경제를 중요시 했던 관중의 사상은 자신의 출생지로부터 영향을 받았을 것이다. 출신지인 영상의 특성과 관포지교의 내용 중 상업과 관련된 내용이 있는 것으로 보아, 한때 상업에 종사한 것으로 보인다. 관중과 포숙은 각각 제나라의 공자인 규와 소백을 모셨다. 제 양공이 관지보와 연칭에게 시해당하고 제나라의 군주 자리가 공석이 되자, 관중과 포숙은 각기 규와 소백을 모시고 제나라를 향했다. 중간에 관중이 소백을 죽이기 위해 배에 화살을 쏘자, 소백이 쓰러졌다. 하지만 소백은 허리띠에 있는 쇠고리에 화살을 맞았을 뿐 멀쩡했다. 소백이 먼저 제나라에 들어와 고혜와 국씨의 도움으로 제후에 오르니 그가 바로 제환공이다. 관중이 모시던 규가 죽고, 노나라로 망명했던 자신 역시 목숨이 위태로워졌으나, 포숙의 천거로 그는 하루아침에 제나라의 재상에 오르게 된다. 그는 환공을 도와 제나라의 국력을 키웠다.
관중이 제 환공에게 중용되어 재상이 되었을 때는 기원전 686년. 중원을 차지하고 있던 주 왕실의 통제력을 갈수록 약해지고 제(齊), 초(楚), 진(晉), 진(秦), 연(燕), 노(魯) 등을 비롯한 제후국(諸侯國)들이 차츰 중앙의 통제에서 벗어나 자국의 실리를 취하며 군웅할거하던 시절이다.
관중이 재상이 된 후 기원전 681년 노나라와의 전쟁에서 이겨 화의를 하던 과정에서 노나라의 장수 조말이 단도로 제환공을 위협하는 사건이 벌어진다. 조말은 제나라에서 가져갈 노나라 영토를 돌려달라고 했고, 위협에 못 이긴 제환공은 그러겠다고 했지만, 속으로는 영토를 돌려주지 않고 그를 죽이려 했다. 관중은 제환공을 말리며 군주가 한번 뱉은 말을 지키지 않으면 어떤 제후도 이후에 제나라를 믿고 따르지 못할 것이라며 '신의'에 대해 설명했다. 결국 노 나라의 영토는 다시 돌려줬지만, 이 사건으로 인해 제환공의 명성은 중원에 퍼졌다.
제환공 재위 7년(기원전 679년)에 위(衛)의 견(甄)에서 회맹을 열고 패자의 지위에 오른다. 관중의 도움으로 제환공 재위 43년간 (기원전 685년 ~ 기원전 642년) 제나라는 북쪽으로 하북성 북부, 서로는 태행산맥, 남은 하남성 중앙부 근처까지 영향력을 행사했다.
관중의 철학[편집]
관중의 사상은 사기(史記) 관안열전과 그의 저서로 알려진 관자를 통해 알 수 있다. 관중이 직접 작성한 부분과 후학들이 그가 했던 말을 집대성한 책으로, 엄연히 말하자면 온전히 그가 작성한 책이라고는 볼 수 없다.
관중의 사상은 기초적인 유물론적 개념을 갖고 있다. 관자(목민편)을 보면 다음과 같은 구절이 나온다. "나날의 생활이 즐거워지면 자연히 예의를 분별한다. 생활에 여유가 생기기만 하면 도덕의식은 저절로 높아진다." 또 (칠법편)에서 "물질이 풍부하기가 천하에서 제일이 아니면 정신적으로 천하를 이끌 수 없다."라는 구절이 있다. 이는 물질적 기초가 뒷받침이 되어야 사람의 정신,의식 또한 존재할 수 있다는 의미이다.
관중은 유물론적 개념을 바탕으로 이데올로기 정치체제를 구축한다. 이른바 목민이다. 백성을 기른다는 개념을 처음 도입한 인물이 바로 관중이다. 정약용의 목민심서에서의 목민도 관중의 사상에서 유래한 것이다. 목민의 주요 내용은 "사유(四維)"로 설명할 수 있다. 사유는 예(禮), 의(義), 염(廉), 치(恥)로 각각 예절, 의로움, 곧음, 수치심을 의미한다. 관중은 사유가 물질적으로 풍족해졌을 때 지켜진다고 보았다.
제환공은 제후들을 지배하고 싶어 했다. 그러나 관중은 오히려 주라고 말했다. 제나라는 이미 관중의 정책으로 강국의 반열에 올랐다. 하지만 개개의 국가들과의 경쟁에서는 우위에 있었지만, 모든 제후국을 아우를만큼의 국력은 없었다. 아직 전국시대 이전이고 아무리 강국이라 한들, 국력의 차이는 크지 않았다. 따라서 관중은 제후국을 무력으로 제압하려다 보면 다른 제후국들의 반발을 사게 될 것이라는 것을 알고 있었다. 그래서 관중은 주라고 했다. 빼앗은 땅을 제후국에게 돌려주고, 예물을 보내게 했다. 이는 제환공의 명성을 높이고 다른 나라들에게 제나라에 대한 신뢰를 주었다. 또한 천자를 받든다는 존왕양이를 바탕으로 한 "예(禮)"를 내세워 명분을 확보하였다. 이를 통해 제나라가 주도하는 질서에 대한 다른 나라들의 협력을 이끌어 내게 된다.
관중의 사후에도 그의 정치철학은 계속 제나라의 통치이념으로 활용되었고, 이는 제나라가 전국시대까지 전통적인 강국의 위치에 있을 수 있게 한 원동력이었다. 훗날 등장하는 도가는 물론 제자백가에 영향을 주었다. 논어 헌문편에서 공자는 관중의 사람됨이 인(仁)하지 못하다 평가했다. 그러나 동시에 관중이 아니었다면, 오랑캐로부터 주나라를 지켜내지 못했을 것이라 말한다. 이는 관중의 존왕양이의 과정이 옳다고 볼 순 없지만, 그러한 과정을 통해 화하족의 문명권을 공고히 할 수 있었다는 것을 의미한다. 공자는 관중에 대해 상당히 객관적인 시각의 평을 내렸다 볼 수 있다.
관중의 주요 업적[편집]
관중의 부국강병 정책. 관중의 가장 큰 목표는 제나라의 부유와 강성을 실현하는 것이었다. 관중은 백성의 물질적 풍요가 사회의 안정과 도덕적 삶의 기반이 된다고 믿었다. 이를 위해 농민에게는 세금을 부과하지 않는 무세(無稅) 정책을 실시했으며, 제나라의 풍부한 자원, 특히 해산물과 소금으로 얻은 수익을 바탕으로 경제를 발전시켰다. 관중의 경제 정책은 당시로서는 매우 혁신적이었다. 농업을 기본으로 하되 수공업과 상업이 균형적으로 발전하도록 장려했으며, 국가 재정은 무역에서 나오는 이익을 통해 충당하게 했다. 이로써 제나라는 농업국가에 머물지 않고 다방면으로 강성한 국가로 자리 잡게 되었다.
직업 분화와 사회 안정. 관중은 백성을 사농공상(士農工商)의 네 가지 계급으로 나누어 세습을 가능하게 하고, 각자가 맡은 일에서 전문성을 쌓도록 유도했다. 농부는 농부로서, 장인은 장인으로서 평생을 살며 경험과 기술을 축적하게 함으로써 사회 전체의 생산성을 높였던 것이다. 이는 사람들로 하여금 직업에 대한 자부심과 만족감을 가지게 하는 동시에, 국가의 자원과 인력을 효율적으로 활용할 수 있게 했다.
외교와 국방 면에서 관중은 제나라가 중심이 되어 주변 제후국을 하나로 묶는 외교 전략을 수립했다. '존왕양이', 즉 주 왕실을 존중하고 외적을 물리친다는 명분을 내세우며 여러 차례 제후 회맹을 이끌어냈다. 그 결과, 제나라는 정치적 중심지로 성장하며 패권국으로 자리 잡게 되었다.
환공[편집]
환공(桓公)은 중국 춘추시대 제나라의 군주(재위 BC 685∼BC 643). 포숙아(鮑叔牙)의 진언으로 공자 규의 신하였던 관중(管仲)을 재상으로 기용한 뒤 패자(覇者)의 자리를 확고히 하여 춘추오패(五覇)의 한 사람이 되었다. 성은 강(姜), 이름은 소백(小白)이며, 희공(僖公)의 아들이다. 희공을 이어 즉위한 형 양공(襄公)이 정치를 문란하게 하고 자기 마음에 들지 않는 사람을 죽이자 화를 피하기 위하여 거(莒) 땅으로 망명하였다. 이후 양공은 공손무지(公孫無知)에게 피살되었고 공손무지도 곧이어 암살됨으로써 제나라는 군주가 없이 혼란에 빠졌다.
환공은 노나라로 망명하여 노나라의 후원을 업은 이복형 공자(公子) 규(糾)와 후계 다툼을 벌여 공자 규를 몰아내고 즉위하였다. 즉위 후 포숙아(鮑叔牙)의 진언으로 규의 신하였던 관중(管仲)을 재상으로 기용한 뒤 관중의 도움으로 제후와 종종 회맹(會盟)하여 신뢰를 얻었으며, 특히 규구(葵丘:河南省)의 회맹을 계기로 패자(覇者)의 위상을 확고히 하였다. 밖으로는 산융(山戎)을 쳐서 연(燕)을 구하고, 노(魯)의 내란 평정에 힘을 기울였으며, 오랑캐의 침임으로 멸망한 형(邢)을 이의(夷儀:山東省)로, 위(衛)를 초구(楚丘:山東省)로 옮겨 부흥시켰다. 안으로는 군사력을 강화하고 상업·수공업을 육성하여 나라를 튼튼히 하였다. 만년에 관중의 유언을 무시하고 예전에 추방했던 신하를 재등용하여 그들에게 권력을 빼앗김으로써 그가 죽은 후 내란이 일어났다.
관자[편집]
관자(管子)는 중국 고대의 책. 춘추시대 제(齊)나라의 사상가 ·정치가인 관중이 지은 것으로 되어 있으나, 그 내용으로 보아 제나라의 국민적 영웅으로 칭송되던 현상(賢相) 관중의 업적을 중심으로 하여 후대의 사람들이 썼고, 전국시대에서 한대(漢代)에 걸쳐서 성립된 것으로 여겨진다. 전한(前漢)의 학자 유향(劉向)의 머리말에는 86편이라고 되어 있는데, 현재 보존되어 있는 것에는 10편과 1도(圖)가 빠져 있다. 법가적(法家的) 색채가 농후하고, 때로는 도가적(道家的)인 요소가 섞여 있기 때문에 《한서(漢書)》에서는 도가(道家)에, 《수서(隋書)》에서는 법가(法家)에 넣고 있다. 정치의 요체(要諦)는 백성을 부유하게 하고, 백성을 가르치며, 신명(神明)을 공경하도록 하는 세 가지 일이 있는데, 그중에서도 백성을 부유하게 하는 일이 으뜸이라고 하였다.
그 내용은 정치·법률·제도·경제·군사·교육·철학 등 다방면에 걸쳤고, 특히 시대의 변화로 인한 예(禮) 사상의 무력화에 대하여 그것을 무위자연(無爲自然)의 사상으로 구제하려는 도가와 권력에 힘입는 현실적인 법을 도입하려는 법가의 사상과의 관련이 이 관자(管子)에 보이고 있다. 그러나 그 외에 유가(儒家)·묵가(墨家)·병가(兵家)·농가(農家)·음양가(陰陽家) 등 여러 종류의 학설이 혼입되어 있어 이 점으로 보아도 이 책이 한 학파의 저술이 아닌 것을 알 수 있다.
포숙아[편집]
포숙아(鮑叔牙)는 중국 춘추시대 초기 제나라의 정치가이자 사상가로, "관포지교"로 잘 알려진 관중과 함께 영상(潁上) 사람이다. 포숙아는 제환공에게 제환공을 죽이려 했던 관중을 천거하였고, 제환공은 관중의 도움으로 춘추오패의 첫번째 패자가 되었다. 관중은 포숙아에 대해 "나를 낳아준 사람은 부모지만, 나를 이해해준 사람은 포숙아 뿐이다"라고 찬탄한 바 있다.
동영상[편집]
각주[편집]
- ↑ 〈관중(管仲,?~BC 645)〉, 《두산백과》
참고자료[편집]
- 〈관중(管仲,?~BC 645)〉, 《두산백과》
- 〈관중 (춘추)〉, 《위키백과》
- 〈관자〉, 《위키백과》
- 〈관이오〉, 《나무위키》
- 솔리다스터, 〈제나라 관중의 논리〉, 《네이버블로그》, 2023-06-19
- 위소협, 〈춘추전국시대 1대 제나라(강제) 이야기(관중과 포숙, 안영)〉, 《네이버블로그》, 2023-01-02
- 돌쇠, 〈제환공과 관중_실리주의로 제나라를 춘추 패자로〉, 《네이버블로그》, 2021-02-18
같이 보기[편집]