얀마옌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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얀마옌섬(노르웨이어: Jan Mayen)은 북극에 있는 노르웨이령 화산섬이다. 길이 55km, 면적은 373km², 섬의 약 1/3인 114.2km²가 빙하로 덮여 있다. 얀마옌섬에는 상주 인구가 없고 노르웨이 군사시설 유지와 기상연구센터 인원의 상주로 14~30명의 인구가 거주하고 있다. 인구수의 변동은 계절적 영향, 연구진의 이동 등이 있다. 주요 도시는 올론킨비옌(Olonkinbyen)이다.[1]
개요
얀마옌섬은 아이슬란드로부터 북쪽 약 600km, 그린란드 중심부에서 동쪽 약 500km, 노르웨이 노스케이프에서 서쪽으로 1,000km 떨어진 지점에 위치해 있다. 얀마옌섬은 주로 산지지형으로 구성되어 있으며 가장 높은 지점은 북쪽의 베에렌베르크 화산(Beerenberg volcano, 2,277m)이다. 얀마옌섬은 지리적으로 2개의 부분으로 나뉘어져 있으며 북동쪽의 큰 지역인 노드-얀(Nord-Jan)과 폭 2.5km의 지협으로 연결된 서남쪽의 작은 지역인 사우스-얀(Sør-Jan)으로 구성되었다. 노드-얀은 베에렌베르크 화산이 위치한 북쪽의 둥그런 부분이며 수많은 빙하가 위치하는데, 이 중 가장 큰 것은 면적 15km², 길이 8.7km의 쇠브린 빙하이다. 사우스-얀은 노드-얀에 비해 좁고 평탄하며 빙하가 없다. 가장 높은 지점은 769m의 루돌프오펜 산이다. 얀마옌섬의 모든 기지는 이곳에 위치해 있다. 얀마옌섬은 쾨펜의 기후 구분에 따라 ET 또는 EM 기후로 나타난다. 얀마옌섬에는 트롱스카아레에 천연자원인 자갈이 있다. 얀마옌섬에는 대규모 어장이 있으며 그 주위에 큰 배타적 경제 수역을 형성하고 있다. 1988년 얀마옌과 그린란드 사이의 배타적 경제 수역에 관한 노르웨이와 덴마크 사이의 분쟁은 덴마크가 승리하면서 해결되었다. 지질학자들은 얀마옌섬의 주변 지역에 상당한 양의 석유와 천연가스가 매장되어 있는 것으로 추정하고 있다. 안마옌섬에 거주하는 유일한 인구는 노르웨이 군대와 기상관측소 인원들이다. 겨울에는 주로 18명 정도가 거주하지만 여름에는 35명 정도로 늘어나기도 한다. 노르웨이 군대는 2015년까지 얀마옌 Loran-C 송신기를 운영했다. 지원 물품 수송은 주로 얀마옌스필드 활주로에서 C-130 수송기로 이루어진다. 수송기는 1년에 8번 보되에 위치한 보되 중앙 공항에서 이륙한다. 기타 지원 물품은 선박을 통해 이루어지는데, 항구가 없기 때문에 선박을 연안에 정박 해야 한다. 얀마옌섬은 2010년부터 노르웨이 관할의 자연 보호구역으로 되었다.[2]
역사
얀마옌섬은 5세기에서 9세기 사이에 아일랜드에서 유래한 수도승들의 수많은 공동체가 가죽 보트를 타고 북대서양 전역을 항해하면서 탐험했고 때로는 그들의 수도사회가 다른 사람들과의 긴밀한 접촉으로부터 분리될 수 있는 먼 섬에 정착하기도 했다. 현대 대서양 횡단 여행은 초기 항해자들이 얀마옌보다 아일랜드에서 더 멀리 떨어진 북대서양의 모든 땅에 도달할 수 있는 능력을 입증했으며, 순풍이 불면 현대 요트의 속도와 거의 같은 속도로 도달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섬에는 중세의 상륙이나 정착지의 직접적인 물리적 흔적은 없다. 17세기에는 북극 포경지에서의 경쟁으로 인해 이 섬의 재발견에 대한 많은 주장이 제기되었고, 이 섬은 많은 이름을 얻었다. 17세기 초의 포경선장 토마스 엣지(Thomas Edge)에 따르면 윌리엄 허드슨(William Hudson)은 1608년에 이 섬을 발견하고 허드슨 터치(Hudson's Touches)라고 명명했다. 그러나 유명한 탐험가 헨리 허드슨(Henry Hudson)은 1607년 항해 중에야 들렀을 수 있었고 그의 일기에는 그것에 대해 언급하지 않았다. 윌리엄 스코어즈비(William Scoresby)에 따르면, 네덜란드가 1611년에 섬을 발견했다고 잘못 믿고 있는 것을 언급하면서 포경자들이 섬을 거의 비슷한 시기에 발견했고 섬을 트리니티 섬(Trinity Island)이라고 명명했다. 최초의 포경 탐험대는 1616년에야 섬으로 보내졌다. 토마스 엣지의 이전 주장과 마찬가지로 이 발견에 대한 지도적 증거나 서면 증거는 없다.
네덜란드 탐험과 발견
얀마옌섬에 대한 첫 번째 확인된 발견은 1614년 여름에 이루어졌는데 네덜란드인 포프 게리츠(Fopp Gerritz)는 던커크(Dunkirk)의 영국인 존 클라크(John Clarke)가 보낸 포경 탐험대를 지휘하면서 섬을 발견해 이사벨라(Isabella)라고 명명했다. 1월 네덜란드 동인도 회사를 모델로 한 노르트슈 컴파니(Noordsche Compagnie)는 북극에서의 네덜란드 고래잡이를 지원하기 위해 설립되었다. 암스테르담과 엔쿠이젠에서 온 상인들의 자금 지원을 받은 두 척의 배가 1614년 7월에 얀마옌에 도착했다. 양사 모두 얀마옌에서 고래잡이를 할 수 있도록 허용되었지만 뒤이은 분쟁은 1617년에야 해결되었다. 1615년 영국의 포경선 로버트 포더비(Robert Fotherby)가 상륙했다. 분명히 새로운 발견을 했다고 생각한 그는 그 섬을 토머스 스미스 경의 섬(Sir Thomas Smith's Island)이라고 이름 지었고 화산 이름을 하클루트 산(Mount Hakluyt)이라고 지었다. 1634의 지도에서 장 브롤릭크(Jean Vrolicq)는 섬의 이름을 슐레 드 리슐리외(Île de Richelieu)로 변경했다. 얀마옌은 코넬리스 도에츠(Willem Jansz Blaeu)가 1606년부터 출판한 유럽 지도의 1620판 지도에 처음 등장했다. 블래우(Blaeu)는 1623년 자신의 유명한 제스피겔(Zeespiegel) 지도책에서 이 섬의 첫 번째 세부지도를 만들어 현재의 이름을 확립했다.
네덜란드 포경기지
1615년부터 1638년까지 얀마옌은 1614년 국무장관에 의해 북극 지역의 고래잡이에 대한 독점권을 부여받은 네덜란드 노르트슈 컴파니(Noordsche Compagnie)에 의해 포경기지로 사용되었다. 1615년 노오르드슈 컴파니에서 온 배와 델프트 상인의 배 두 척만이 얀 마옌에서 출항했다. 1616년 많은 선박들이 그 섬으로 보내졌고 노르트슈 컴파니는 얀 제이콥스(Jan Jacobsz) 휘하의 전함 3척이 호위하는 8척의 선박을 보냈다. 200명의 남자들이 서북해안을 따라 퍼져 있는 6개의 임시 포경소에서 계절에 따라 이 섬에서 살고 일하고 있었다. 고래잡이의 첫 10년 동안, 매년 10척 이상의 배가 1월 얀마옌을 방문했고 1624년 이후에는 5척에서 10척의 배가 보내졌다. 1617년 섬으로 와서 네덜란드인에게 포획량의 3분의 1을 몰아주거나 강제로 빼앗긴 던커크에서 온 배 몇 척을 제외하면 1616년부터는 네덜란드인과 헐에서 온 상인만이 얀마옌에 배를 띄웠다. 1624년에 사우스 베이에 열 채의 목조 가옥이 지어졌다. 이때쯤 네덜란드인들은 돛천막과 조난로로 구성된 임시 기지를 버리고 이를 목조 창고와 주거지, 대형 벽돌로 된 두 개의 준영구적 정거장으로 교체한 것으로 보인다. 1628년에 역들을 보호하기 위해 두 개의 요새가 지어졌다. 얀마옌에서 활동한 선원 중에는 후기 제독인 미치엘 아드리아엔츠 드 로이테르(Michiel Adriaensz de Ruyter) 있었다. 1633년, 26세의 나이로 그는 처음으로 드 그로인 리우(de Groene Leeuw)의 장교로 등재되엇다. 그는 1635년에 같은 배를 타고 다시 얀마옌으로 갔다. 1632년에는 네덜란드 노르트슈 컴파니는 덴마크에 고용된 바스크 고래잡이 어부들을 추방했다. 복수로 후자는 네덜란드가 겨울 동안 떠난 얀마옌섬으로 항해하여 네덜란드 장비를 약탈하고 정착지와 공장을 불태웠다. 북극고래는 1640년경에 현지에서 거의 멸종될 정도로 사냥되었다. 약 1000마리가 섬에서 죽고 처리되었다.
19세기와 20세기
국제 극지년(1882–1883) 동안은 오스트리아-헝가리 북극 원정대는 1년 얀마옌섬에 머물렀다.그 탐험대는 해당 지역에 대한 광범위한 지도 제작을 수행했고 지도의 품질이 매우 좋아서 1950년대까지 사용되었다. 얀마옌섬에 있는 오스트리아 극지 관측소는 (윌첵)Wilczek 백작의 자비로 1882년에 건설 및 장비를 완전히 갖추었다.얀마옌에는 북극곰은 나타나며 비록 이전 시대에 비해 그 수가 줄어들었지만. 1900년에서 1920년 사이에 얀마옌에서 겨울을 보내며 북극여우와 북극곰을 사냥하는 노르웨이 사냥꾼들이 많이 있었다. 국제연맹은 노르웨이에 이 섬을 관할권을 부여했고 1921년 노르웨이는 최초의 기상관측소를 열었다. 노르웨이 기상연구소는 1922년 노르웨이를 위해 섬의 중부를 1926년 할버드 데볼드(Hallvard Devold)가 섬의 기상 관측 기지를 이끌 때 섬 전체를 합병했다. 1930년 2월 27일, 섬은 노르웨이 왕국의 한 부분으로 만들어졌다. 제2차 세계 대전 동안, 1940년 봄 노르웨이 본토는 독일에 의해 점령되었다. 얀마옌에는 4인조 팀이 제자리에 머물렀고 그들의 기상 보고서를 노르웨이 대신 영국으로 보내기 시작했다.영국은 얀마옌을 아이스랜드 X(Island X)라고 명명하고, 독일의 어떠한 공격에 대항하기 위해 군대를 동원하여 그것을 강화하려고 시도했다. 독일인들은 1940년 11월 16일 이 섬에 기상팀을 착륙시키려고 시도했다. 이 팀을 태운 독일 해군 트롤러는 순찰 중이던 영국 구축함이 그들을 레이더에 포착한 후 얀마옌 바로 떨어진 바위에 추락했다.
근대
연합군은 1941년 3월 10일 순찰선 호닝스바그(Honningsvaag)의 호위를 받은 노르웨이 선박 베슬카리가 이 섬에 노르웨이 기상관측소 요원 12명을 섬에 보내고 돌아왔다. 노르웨이에서 온 독일 비행기들은 날씨가 허락할 때마다 얀마옌을 폭격하기 시작했지만, 거의 피해를 입지 않았다. 곧 보급품과 증원군이 도착했고, 심지어 일부 대공포까지 동원되어 이 섬에는 수십 명의 기상병과 병사가 주둔해 있었다. 1941년이 되자 독일은 연합군을 섬에서 몰아낼 희망을 포기했고 끊임없는 공습도 중단되었다. 1942년 8월 7일, 아마도 정거장을 폭격하는 임무를 맏은 독일 폭격기가 안개 속에서 인근 산 중턱 다니엘센크레이트레트(Danielssenkrateret)에 추락하여 승무원 9명이 사망했다. 1950년 4명의 승무원이 탑승한 또 다른 독일 여객기의 난파선이 섬의 남서쪽에서 발견되었다. 1943년에 미국인들은 그린란드에서 독일 무선 기지를 찾으려고 북쪽에 애틀랜틱 시티라는 무선 위치국을 설립했다.
전쟁 후 기상대는 아틀란틱에 위치하였으나 1949년에 새로운 장소로 이전하였다. 라디오기지는 또한 북극해의 선박 교통을 위한 중요한 라디오 방송국 역할을 했다. 1959년에 북대서양동맹(NATO)은 대서양 지역에 무선통신 네트워크를 구축하기 시작했다. 1961년까지 새로운 비행장을 포함한 새로운 군사 시설들이 가동되었다. 한동안 과학자들은 비렌버그 화산이 활동할 것이라는 것을 의심했지만 1970년에 약 3주 동안 폭발하여 3km²의 육지가 섬에 추가했다. 1973년과 1985년에도 폭발했다. 화산 폭발 동안, 섬 주변의 해수 온도는 동결 바로 위에서 약 30°C까지 올라갈 수 있었다.[3][4]
지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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동영상
각주
참고자료
같이 보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