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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 | 관체족 이후 처음 카나리아 제도에 도달한 민족은 북아프리카 각지에 [[카르타고]]를 비롯한 식민도시를 건설하고 헤라클레스의 기둥을 넘어 항해한 [[페니키아인]]들이었다. 기원전 40년경에는 [[로마인]]들도 이곳에 도달했다. 그러나 당시의 로마 공화국 정부는 물론이고, 이후의 [[로마제국]] 역시 군대를 보내 정복하려는 시도를 하지 않았기에, 카나리아 제도는 고립된 [[원주민]]들의 섬으로 남을 수 있었다. | |
− | + | 로마제국 이후로 [[지중해]]의 패권을 장악한 [[우마이야 왕조]]는 카나리아 제도까지 세력을 뻗진 못했고, 그 이후의 이슬람 왕조들은 알 이드리시의 지도를 통해 늦어도 12세기에는 카나리아 제도를 인지하고 있었음을 알 수 있으나, 정복해서 지배하려는 시도는 하지 않아서 가끔씩 길을 잃은 선박들이 [[표류]]했다가 원주민들과 접촉을 하는 정도에서 그쳤을 만큼 오랫동안 외부 세계와 단절되어 [[고립]]된 지역이었다.<ref>〈[https://namu.wiki/w/%EC%B9%B4%EB%82%98%EB%A6%AC%EC%95%84%20%EC%A0%9C%EB%8F%84 카나리아 제도]〉, 《나무위키》</ref> | |
− | + | 14세기 들어 [[제노바 공화국]] 출신 탐험가들이 재발견하면서 [[유럽인]]들의 주목을 받기 시작했는데, 정작 제노바인들은 지중해 무역에 집중하고 있었으며, 제노바 본국에서 함대를 보내 카나리아 제도를 정복하고 지배하기엔 무리가 있었기에 식민지화를 시도하지 않았다. 이후 15세기 초 노르만인 탐험가 [[장 드 베텡쿠르]](Jean de Bethencourt)가 [[카스티야]]의 [[엔리케 3세]]로부터 지원받아 본격적인 정복을 수행했고, 이후 [[교황]]에게 인정받아 카나리아 왕국의 왕으로 즉위했다. 장 드 베텡쿠르가 죽고 왕위를 이어받은 조카 [[마시오 드 베텡쿠르]](Maciot de Bethencourt)는 통치를 제대로 수행하지 못하고 섬들을 [[포르투갈]]에 팔았다. 하지만 이미 이주해 와 있던 카스티야인들이 이런 상황을 인정하지 않고 반란을 일으키면서 포르투갈이 섬들을 접수하는데 실패하고 이후 알카코바스 조약(1479)에 따라 포르투갈은 카나리아를 [[카스티야]]의 땅으로 인정했다. 이후 카스티야의 원정대는 다른 외부 세력의 방해를 받지 않고 신석기 수준의 기술을 가진 원주민 [[관체족]]을 정복해나갔고, 1496년에 마지막 관체족 저항 세력을 [[테네리페섬]]에서 격파함으로써, 카나리아 제도 전체를 [[카스티야]], 그리고 [[스페인]]의 영토로 확정지었다. | |
− | 현재 카나리아 제도의 법적 지위는 EU 내 최외곽 지역(Outermost Regions)으로써 EU 법 규정의 예외가 존재하고 EU 관세조항과 부가가치(VAT) 조항이 적용되지 않는 특수한 지역이다. 비슷한 지위로 프랑스령 기아나, 과들루프, 마르티니크, 레위니옹 등이 있다. 스페인인이 최초로 정복한 식민지이자 마지막까지 보유한 식민지인 | + | 스페인의 정복이 완료되면서 원주민인 [[관체족]]은 [[스페인인]]의 노예로 전락하여 [[스페인어]] 사용을 강제당해서 그들의 언어인 [[관체어]]는 사어가 되었고, 고유 [[종교]]마저 [[가톨릭]]으로 대체되어 독자적인 민족으로서의 정체성을 완전히 상실하고 말았다. 다만 유전적인 절멸은 아니라서 오늘날 카나리아 제도의 스페인인 상당수가 관체족 유전자를 물려받았고, 스페인 왕실의 지원을 받은 이탈리아인 탐험가 [[크리스토퍼 콜럼버스]]의 아메리카 도달 이후에 [[카리브해]]의 스페인 식민지로 끌려간 관체족 노예들이 타이노족 등 현지의 원주민들과 혼혈되면서 [[아메리카]]에도 [[관체족]] 혈통이 퍼지게 되었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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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원주민]]들의 비참한 상황과는 별개로, 카나리아제도 자체는 [[범선]]의 전성기인 [[대항해시대]]에 스페인 본토와 아메리카 식민지를 연결하는 기착 항로로서 번영했다. 위도 20도 부군에서 부는 북동풍인 [[무역풍]]의 혜택으로 인해 스페인령 카나리아와 [[카리브해]]를 잇는 항로가 각광받았으며, 그 반대 방향으로는 위도 30도 부근 [[편서풍]]을 이용했는데, 이는 현대에도 유지되고 있는 유서 깊은 [[항로]]이다.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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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1710년에는 [[테네리페섬]]의 산 크리스토발 데 라 라구나에 라 라구나(La Laguna) 대학이 창립되었고, 1833~34년에는 유럽과 미국 간에 설치된 해저 전선의 중계지가 되었다.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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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1936년 [[스페인]]의 프란시스코 프랑코가 카나리아 제도에서 반란을 일으켜 스페인 내전을 시작했다.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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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현재 카나리아 제도의 법적 지위는 EU 내 최외곽 지역(Outermost Regions)으로써 EU 법 규정의 예외가 존재하고 EU 관세조항과 부가가치(VAT) 조항이 적용되지 않는 특수한 지역이다. 비슷한 지위로 [[프랑스령 기아나]], [[과들루프]], [[마르티니크]], [[레위니옹]] 등이 있다. 카나리아제도는 스페인인이 최초로 정복한 식민지이자 마지막까지 보유한 식민지인 셈이다. 이들이 정복하여 세운 도시인 산 크리스토발 데 라 라구나는 [[아바나]], [[멕시코시티]], [[리마]]와 같은 중남미 정복도시들의 원형이 되었다.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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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4년 7월 28일 (일) 23:03 기준 최신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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카나리아제도(Canary Islands, 스페인어: Canarias)는 북아프리카의 서쪽 대서양, 마카로네시아에 있는 스페인령의 군도를 말한다. 면적은 7,493km², 인구는 약 220만 명이다. 7개의 주요 섬으로 이루어져 있고, 제도의 수도는 산타크루스데테네리페와 라스팔마스 두 개다. 스페인은 1479년에 맺어진 알카소바스 협정에 따라 카나리아제도를 차지했다.[1]
개요[편집]
카나리아제도는 아프리카 본토에서 가장 가까운 지점인 모로코에서 서쪽으로 100km 떨어져 있다. 엘 이에로, 라 팔마, 라 고메라, 테네리페, 그란 카나리아, 푸에르테벤투라, 란사로테 등 7개 주요 섬이 있다. 그 외에도 큰 섬에 딸린 작은 부속 섬들도 있다. 카나리아제도 자체는 자치지방(comunidad autónoma)의 지위를 가지고 있고 제도는 라스팔마스주(그란 카나리아, 푸에르테벤투라, 란사로테 외에 3개의 섬과 약간의 무인 암초)와 산타크루스데테네리페주(테네리페, 라 고메라, 엘 이에로, 라 팔마)로 나뉜다. 제도에서 가장 높은 산은 높이 3,718m인 테이테산이며 스페인뿐만 아니라 대서양에서도 가장 높은 봉우리로 카나리아 제도 테네리페섬 중앙에 솟아 있다. 무역풍의 영향을 받아 기후가 온난건조하며 지역 향토종도 다수 존재한다. 스페인 전체의 13개 국립공원 중에 4곳이 카나리아제도에 존재하기 때문에 어떤 곳보다도 가장 많은 자연적 유산이 존재하는 셈이다. 1990년대 초에는 5개뿐이던 국립공원 중 4곳이 카나리아 제도의 것이었다. 원양어업의 전진기지로도 이용되며 수도 라스팔마스에는 한국 영사관도 있다. 현재도 스페인령 카나리아 근해는 지브롤터 해협과 함께 세계에서 가장 붐비는 항로 중 하나이다. 아메리카를 연결하는 중앙 대서양 항로와 남대서양 항로, 아프리카와 희망봉 남단을 돌아오는 거대 선박들이 이용하는 항로가 지나며 물동량도 만만치 않다. 다시 말해 전 세계에서 중요한 지정학적 요충지 중 하나이다.[2]
역사[편집]
카나리아 제도에 처음으로 거주한 민족인 관체족은 베르베르 계통의 민족이며 기원전 1,000년경에서 기원전 600년경 사이에 북아프리카에서 이주해온 것으로 추정된다. 대륙에서 섬으로 이주해왔으니 처음 이주할 당시에는 항해술을 갖고 있었으나 이후에는 항해술이 실전되어 섬에 갇힌 신세가 되었다. 또한 이들은 곡물을 재배하고 가축을 기르는 농경민이었으나 금속을 다루는 기술은 없어서, 흑요석 등을 도구로 사용하는 신석기시대 수준에 머물렀다.
관체족 이후 처음 카나리아 제도에 도달한 민족은 북아프리카 각지에 카르타고를 비롯한 식민도시를 건설하고 헤라클레스의 기둥을 넘어 항해한 페니키아인들이었다. 기원전 40년경에는 로마인들도 이곳에 도달했다. 그러나 당시의 로마 공화국 정부는 물론이고, 이후의 로마제국 역시 군대를 보내 정복하려는 시도를 하지 않았기에, 카나리아 제도는 고립된 원주민들의 섬으로 남을 수 있었다.
로마제국 이후로 지중해의 패권을 장악한 우마이야 왕조는 카나리아 제도까지 세력을 뻗진 못했고, 그 이후의 이슬람 왕조들은 알 이드리시의 지도를 통해 늦어도 12세기에는 카나리아 제도를 인지하고 있었음을 알 수 있으나, 정복해서 지배하려는 시도는 하지 않아서 가끔씩 길을 잃은 선박들이 표류했다가 원주민들과 접촉을 하는 정도에서 그쳤을 만큼 오랫동안 외부 세계와 단절되어 고립된 지역이었다.[3]
14세기 들어 제노바 공화국 출신 탐험가들이 재발견하면서 유럽인들의 주목을 받기 시작했는데, 정작 제노바인들은 지중해 무역에 집중하고 있었으며, 제노바 본국에서 함대를 보내 카나리아 제도를 정복하고 지배하기엔 무리가 있었기에 식민지화를 시도하지 않았다. 이후 15세기 초 노르만인 탐험가 장 드 베텡쿠르(Jean de Bethencourt)가 카스티야의 엔리케 3세로부터 지원받아 본격적인 정복을 수행했고, 이후 교황에게 인정받아 카나리아 왕국의 왕으로 즉위했다. 장 드 베텡쿠르가 죽고 왕위를 이어받은 조카 마시오 드 베텡쿠르(Maciot de Bethencourt)는 통치를 제대로 수행하지 못하고 섬들을 포르투갈에 팔았다. 하지만 이미 이주해 와 있던 카스티야인들이 이런 상황을 인정하지 않고 반란을 일으키면서 포르투갈이 섬들을 접수하는데 실패하고 이후 알카코바스 조약(1479)에 따라 포르투갈은 카나리아를 카스티야의 땅으로 인정했다. 이후 카스티야의 원정대는 다른 외부 세력의 방해를 받지 않고 신석기 수준의 기술을 가진 원주민 관체족을 정복해나갔고, 1496년에 마지막 관체족 저항 세력을 테네리페섬에서 격파함으로써, 카나리아 제도 전체를 카스티야, 그리고 스페인의 영토로 확정지었다.
스페인의 정복이 완료되면서 원주민인 관체족은 스페인인의 노예로 전락하여 스페인어 사용을 강제당해서 그들의 언어인 관체어는 사어가 되었고, 고유 종교마저 가톨릭으로 대체되어 독자적인 민족으로서의 정체성을 완전히 상실하고 말았다. 다만 유전적인 절멸은 아니라서 오늘날 카나리아 제도의 스페인인 상당수가 관체족 유전자를 물려받았고, 스페인 왕실의 지원을 받은 이탈리아인 탐험가 크리스토퍼 콜럼버스의 아메리카 도달 이후에 카리브해의 스페인 식민지로 끌려간 관체족 노예들이 타이노족 등 현지의 원주민들과 혼혈되면서 아메리카에도 관체족 혈통이 퍼지게 되었다.
원주민들의 비참한 상황과는 별개로, 카나리아제도 자체는 범선의 전성기인 대항해시대에 스페인 본토와 아메리카 식민지를 연결하는 기착 항로로서 번영했다. 위도 20도 부군에서 부는 북동풍인 무역풍의 혜택으로 인해 스페인령 카나리아와 카리브해를 잇는 항로가 각광받았으며, 그 반대 방향으로는 위도 30도 부근 편서풍을 이용했는데, 이는 현대에도 유지되고 있는 유서 깊은 항로이다.
1710년에는 테네리페섬의 산 크리스토발 데 라 라구나에 라 라구나(La Laguna) 대학이 창립되었고, 1833~34년에는 유럽과 미국 간에 설치된 해저 전선의 중계지가 되었다.
1936년 스페인의 프란시스코 프랑코가 카나리아 제도에서 반란을 일으켜 스페인 내전을 시작했다.
현재 카나리아 제도의 법적 지위는 EU 내 최외곽 지역(Outermost Regions)으로써 EU 법 규정의 예외가 존재하고 EU 관세조항과 부가가치(VAT) 조항이 적용되지 않는 특수한 지역이다. 비슷한 지위로 프랑스령 기아나, 과들루프, 마르티니크, 레위니옹 등이 있다. 카나리아제도는 스페인인이 최초로 정복한 식민지이자 마지막까지 보유한 식민지인 셈이다. 이들이 정복하여 세운 도시인 산 크리스토발 데 라 라구나는 아바나, 멕시코시티, 리마와 같은 중남미 정복도시들의 원형이 되었다.
인종 구성[편집]
아프리카 대륙과 매우 가까워서 사하라의 베르베르족 계통인 관체족이 건너와 살고 있었지만 15세기 이후 이주한 스페인인들과 섞이면서 거의 동화되었다. 그래도 카나리아제도 주민 사이에서 베르베르족의 흔적은 남아 있는데 실제로 유전자 등을 검사해보면 인구의 20% 정도는 베르베르계의 후손이다. 카나리아제도 주민들을 카나리아인들이라고 하는데 이들은 2009년 기준 카나리아 제도 인구의 73.7%를 차지한다. 관체어는 17세기 이후에는 소멸되었지만, 관체어는 스페인어에도 영향을 줘서 카나리아 제도 스페인어에는 관체어의 영향이 일부 남았다. 그 외에는 스페인 본토에서 이주해온 스페인 사람들이 인구의 12%를 차지하고 영국, 독일, 이탈리아 등의 타 유럽 국가에서 이주한 사람들이나 콜롬비아, 베네수엘라 같은 라틴아메리카에서 이주해 온 사람들도 많다. 또한 1970년~80년대에는 원양 어업의 전진 기지로 각광을 받아 한국의 선원 가족들이 많이 유입되어 현재 교포들이 꽤 거주 중이다. 21세기 들어 원양 어업이 쇠퇴하며 지금은 규모가 많이 줄었다만, 라스 팔마스 쪽에는 여전히 상당수의 한인이 살고 있다. 종교는 85%에 달하는 대부분이 가톨릭 신자이다.[4]
경제[편집]
카나리아 제도의 경제는 전체 생산의 32%를 차지하는 관광에 전적으로 의존한다. 해마다 1천만 명 이상의 관광객이 카나리아 섬을 찾는다. 그 외에 건설업이 생산의 20%를 차지하며 유럽이나 미주로 수출하는 바나나나 담배를 키우는 열대 농업도 번성하고 있다. 2001년 GDP 수치를 보면 250억 유로였다. 제도 전체는 매년 약 5% 대의 성장률을 20년간 유지해왔으며 대개 외국의 직접 투자가 성장 동력이다.
카나리아제도는 유럽 연합에 스페인으로 속해있지만 경제적으로는 번외이다. 따라서 카나리아 지자체 정부가 별도의 부가가치세를 받을 수 있도록 유럽 연합이 허용하고 있다. 때문에 스페인 본토에서 들여온 잡지 따위의 것들이 본토와 비교하면 조금 더 비싸고 관광객들이 해당 소비세를 지불해야 하기도 한다. 섬 전체의 국제 전화 코드는 +34이며 인터넷 국가 코드는 스페인 본토와 같은 .es를 쓰고 있다. 유로화를 사용한다. 카나리아 제도의 시간대는 서유럽 기준 시간대(WET)를 쓰며 따라서 스페인 본토보다는 1시간이 느리고 영국, 포르투갈, 아일랜드와 시간대가 같다.[5]
카나리아제도 지도[편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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카나리아제도 주변 지도[편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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동영상[편집]
각주[편집]
- ↑ 〈카나리아 제도〉, 《위키백과》
- ↑ 〈카나리아 제도(두산백과)〉, 《네이버 지식백과》
- ↑ 〈카나리아 제도〉, 《나무위키》
- ↑ 〈카나리아 제도〉, 《요다위키》
- ↑ "Canary Islands", Wikipedia
참고자료[편집]
- 〈카나리아 제도〉, 《위키백과》
- 〈카나리아 제도〉, 《나무위키》
- 〈카나리아 제도〉, 《요다위키》
- "Canary Islands", Wikipedia
- 〈카나리아 제도(두산백과)〉, 《네이버 지식백과》
같이 보기[편집]
북아프리카 같이 보기[편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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