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범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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범려

범려(중국어:范蠡fàn lí)는 중국 춘추시대 말기의 정치가. 월나라 왕 구천을 섬겼으며 오나라를 멸망시킨 공신이었다.

개요

범려는 자 소백(少伯). 초(楚)나라 완(宛-현재 하남성 남양현)에서 태어났다. BC 494년 월(越)나라 왕 구천(句踐)이 오(吳)나라 왕 부차(夫差)에게 패하였을 때 구천을 따라 오나라에 노부로 종사하였다가 그의 지략으로 목숨을 건져 구천과 함께 월나라로 귀국하였다. 이후 범려는 구천을 상담(嘗膽)하게 하고 월나라를 부흥시켜 20여 년 뒤 오나라를 멸망시켰다. 그러나 범려는 어려울 때가 아닌 맹주로서 구천을 더 이상 섬길 수 없는 군주라고 생각하여, 가족을 데리고 떠나게 되는데 범려는 월나라를 떠나면서 그의 친구에게 토사구팽(兎死狗烹)이라는 글귀를 남겼다고 전한다.

제나라에서는 그의 현명함을 듣고, 재상(宰相)으로 삼았다. 하지만 얼마 뒤 재물을 모두 친지·향당(鄕黨)에게 나누어 주고 재상자리를 버리고 떠났다고 한다. 당시 교통 ·상업의 중심지였던 도(陶:山東省 定陶縣)로 가서 도주공(陶朱公)이라 칭하고 상업에 종사하였다. 범려는 장사로 다시 거만(巨萬)의 재산을 모았다고 전해진다. [1]

범려와 구천

범려(기원전 517년 ~ ?)는 중국 춘추전국시대 월나라의 군인 겸 정치인이다. 초 평왕 20년인 기원전 517년에, 현 하남성 남양인 춘추전국시대 초나라 완지 출신으로, 초나라 초기 가장 유명한 정치인, 군사가, 경제학자였다. 월나라 왕 구천을 섬기고 구천을 춘추오패에 설 수 있기까지 기여한 공로가 가장 크다.

범려가 처음 등장한 것은 오나라와 월나라가 처음으로 맞붙었을 때인데, 당시 오나라의 상황을 살펴보자면 합려가 즉위한 이후 오자서와 손무의 활약으로 초나라의 도읍 영까지 강탈해서 멸망 직전까지 몰아세우고 있었다. 그러나 신포서의 간곡한 부탁으로 출병한 진나라의 지원군과 국가가 빈틈을 노린 월나라 왕 윤상의 기습 및 합려의 동생 부개가 일으킨 반란에 의해 후퇴해야 했으나 춘추오패의 하나였던 초나라를 멸망시킬 뻔하기도 했으니 그 기세만은 하늘을 찌를 듯했다. 거기에 오나라를 기습했던 윤상이 죽고, 구천이 즉위하니 나라가 안정적이지 못한 때에 월나라를 쳐야 한다며 전쟁을 일으켰다.

《사기》에 따르면 이때 범려가 월군 내에서 결사대(死士)를 선발하여 그들을 오군 진영 앞에 보낸 후, 일제히 목을 찔러 자살하기를 몇 번에 걸쳐 반복하다가 갑자기 오군을 공격하게 하는 기책을 내어 절대 우세에 있던 오군을 격파했다. 《삼국지》에서 태사자가 북해의 포위망을 뚫었던 것과 비슷한 느낌이 드는 계책. 이 과정에서 화살에 맞은 오왕 합려는 중상을 입고 아들 부차에게 복수를 다짐하게 한 후 죽음에 이른다.

구천은 이 전쟁에서 오나라를 격파한 것에 자만하여 장작 위에서 누워 자며 구천에 대한 복수를 다짐하고 있던 오왕 부차를 얕잡아봐 범려의 충고도 듣지 않고 정병 30,000명으로 오를 공격했다. 그러나 도리어 부초 전투에서 부차에게 대패한 후 회계산에서 포위되어 절체절명의 위기에 빠지게 되었다. 이에 범려는 구천을 구하기 위해 오나라의 대부 백비를 뇌물로 매수하고, 부차에게 미녀들을 바쳐 간신히 위기에서 벗어났다.

구천은 오나라로 건너가 부차를 섬기게 되었고 범려가 그를 수행했다. 부차는 구천을 석실에 가두고 치욕스러운 마부 노릇을 강요했다. 부차는 범려에게 자신의 신하가 될 것을 권유했지만 범려는 완곡하게 사양하고 구천에게 충성을 다했다. 그러던 중 부차가 병에 걸리자, 범려는 구천을 설득해 부차의 똥을 핥게 하는 엽기적인 행동까지 불사하게 한다. 부차의 병이 쾌차할지의 여부를 알아본다는 명분이었지만 부차의 환심을 사고 구천에 대한 의심을 풀게 하려는 속셈이었다. 부차는 자신의 변까지 핥아가며 아부하는 구천에게 넘어가 버렸고, 건강을 회복한 뒤 구천과 범려를 월나라로 돌려보내게 된다.

월나라로 귀국한 후, 구천은 부차에게 복수할 날만을 다짐하며 쓴 쓸개를 곁에 두고 맛보며 "회계산의 치욕을 잊었느냐!" 하며 복수를 다짐했다. 한편 범려는 구천에게 각종 부국강병책을 제안했고, 구천은 이를 받아들여 월나라는 점점 강성해지기 시작했다. 몇 년 후, 부차가 제나라를 공격하러 대군을 이끌고 북진한 틈을 타 구천은 오나라를 기습해 부차의 태자를 죽이고 오나라의 대부분을 장악했다. 결국 부차는 구천에게 전에 살려준 예를 들어 항복했다. 마음이 약해진 구천은 순간 망설였지만 "쓸개를 핥으며 복수를 다짐하던 일을 잊으셨습니까!"라며 진언하자 이를 받아들이지 않았다. 자신을 살려줬기 때문에 차마 죽일 수가 없었는지 100호의 장으로 봉하겠다고 제안했다. 부차는 자신이 늙어 군왕을 섬길 수 없다며 그 제안을 거절하고 저승에서 오자서를 볼 낯이 없다며 고소산에서 얼굴을 가린 채 자결했다. 구천은 부차가 죽은 후 여세를 몰아 북상하여 모든 제후들을 소집해 패자의 자리에 오르게 되었다.

이러한 부차가 아버지 합려의 원한을 갚겠노라고 장작 위에서 잠들면서 다짐하다가 기어이 성공시킨 것과, 또 구천이 그에 대한 원한을 쓸개를 핥아가며 잊지 않고 이뤄냈다는 복수의 연쇄에서 '와신상담'이라는 고사성어가 유래했다.

서시

서시는 중국 춘추시대 월국(越國)의 미녀이다. 중국의 4대 미녀 중 한 명으로 손꼽히며 부차에게 접근하여 오나라가 멸망하게 하였다. 평범한 집안에서 출생하였지만 뛰어난 미모를 타고났기에 많은 남자들이 그녀에게 연정을 품었다고 전한다. 그녀가 살았던 마을에서 절세의 미녀로 소문이 나 같은 마을에 사는 여자들은 무엇이든 서시의 흉내를 내면 아름답게 보일 것이라 생각했고 지병으로 앓던 심장병의 통증으로 찡그리는 서시의 얼굴까지 흉내를 냈다고 한다. 눈살을 찌푸린다는 의미의 서시효빈(西施效嚬), 서시빈목(西施嚬目) 서시가 가슴앓이를 한다는 의미의 서시봉심(西施奉心)이라는 말도 이러한 정황에서 유래되었다. 모두 본질을 망각하고 맹목적으로 남을 따라한다는 어리석음을 나타내는 말이다.

오(吳)나라에 패망한 월왕(越王) 구천(勾踐)의 충신인 범려(范蠡)가 서시를 데려다가, 호색가인 오왕(吳王) 부차(夫差)에게 바쳤다. 서시는 월왕 구천이 오왕 부차와의 전쟁에서 패배하자 월나라 왕 구천의 참모 범려의 전략에 따라 패전의 처리에 대한 공물로 오나라 부차의 여인이 되었다. 서시가 부차에게 총애를 받자 부차의 후궁 위희부인이 서시를 질투하여 서시를 비밀리에 제거하려 했던 적이 있었다. 서시에게 빠진 부차는 월나라를 끝까지 없애야 한다고 주장하던 오자서를 죽이면서까지 월나라 경계에 소홀하게 되고, 결국 국력을 키운 월나라에 패망하게 되었다. 오나라가 패망한 뒤의 서시는 월왕 구천의 후궁이 되어 총애를 받지만, 구천의 정부인인 월부인에게 비밀리에 제거 당했다. 또한 전하는데 의하면 오나라가 멸망하고 부차에 대한 죄책감으로 강에 빠져 자살했다고도 한다.

춘추전국시대

BC 8세기에서 BC 3세기에 이르는 중국 고대의 변혁시대이다. BC 770년, 주(周)왕조가 뤄양[洛陽]으로 천도하기 이전의 시대를 서주시대, 이후를 동주시대라고 한다. 동주시대는 춘추(春秋) 시대와 전국(戰國) 시대로 나누어 진다. 춘추시대는 주왕조가 도읍을 옮긴 때로부터 진(晉)나라의 대부(大夫)인 한(韓)· 위(魏)· 조(趙) 삼씨가 진나라를 분할하여 제후로 독립할 때까지의 시대를 말한다. 전국시대는 그 이후부터 진(秦)나라가 천하를 통일한 BC 221년까지이다. 춘추(春秋)는 공자가 엮은 노(魯)나라의 역사서인 《춘추(春秋)》에서 유래되었고, 전국(戰國)은 한(漢)나라 유향(劉向)이 쓴 《전국책(戰國策)》에서 유래되었다고 한다.

'제자백가(諸子百家)' 또는 '백가쟁명(百家爭鳴)'이라는 말처럼, 이 시대는 중국 사상사상(思想史上) 드물게도 그 활동이 활발했던 시대였다. 정치적·사회적 변동을 배경으로 하여, 어떻게 하면 질서를 회복할 수 있는가를 각자가 자기의 소신에 따라 적극적으로 발언하였기 때문이다. 공자·맹자·순자 등의 유가(儒家)는 효제(孝悌)·인의(仁義)·예(禮)를 바탕으로 정치를 해야 한다고 주장하였고, 묵자를 비조로 하는 묵가(墨家)는 가족이나 국가의 경제를 초월한 겸애(兼愛)의 정신을 역설하였으며, 상앙(商鞅) ·한비(韓非)와 같은 법가(法家)는 법의 일원적 지배, 군주권력의 절대화에 의하여 부국강병의 실현을 정치의 목표로 삼았다.

진, 한 제국의 성립을 전후하여 정통사상의 기준이 나타남과 함께 일부 사상(묵가 등)의 영향력이 쇠퇴하였고 그 대신 법가, 도가나 유가 등의 영향력이 높아졌다. 하지만 오히려 후대로 갈수록 사상과 학문이 좀 더 폭넓은 계층으로 확산되며 발전해나가게 되었다. 이는 춘추전국시대의 사상적 의의라 할 수 있을 것이다. 즉, 춘추전국시대는 사회 정치적으로는 혼란기였지만 중국 문화의 골격이 완성된 시기이기도 하다. 사(士) 계층이 문화의 주역으로 등장하며 그때까지 소수 귀족들에게 독점되던 지식과 학문이 일반 서민층에까지 확산되었다.

도주지부

도주지부(陶朱之副)는 큰 부자를 일컫는 말로 사기에 나오는 월나라 범려에 대한 고사이다. 월나라 구천(句踐)이 상담(嘗膽)하여 오나라를 멸망시키자 월나라의 책사이자 일등공신이었던 범려(范蠡)는 월나라를 떠나 제나라로 갔다. 그곳에서 범려는 장사를 하여 큰 재산을 모았는데 그의 명성과 부를 높게 평가했던 제나라의 왕은 범려는 재상으로 임명하고자 했다. 하지만 범려는 이 제안을 사양하고 모든 재산을 주변사람들에게 나누어 주고 제나라를 떠나 도(陶)라는 곳으로 갔다. 범려는 이름을 주(朱)로 바꾸고 그곳에서 장사를 해서 다시 큰 재물을 모으게 되었고 도주공(陶朱公)으로 불리게 되었다고 전해진다. 이런 고사로 인해 중국에서는 큰 부자를 도주지부(陶朱之副)라는 말로 부르게 되었다.

토사구팽

토사구팽(兎死狗烹)은 교활한 토끼가 잡히고 나면 충실했던 사냥개도 쓸모가 없어져 잡아먹게 된다는 뜻으로, 중국 춘추시대 월(越)나라 재상 범려(范蠡)의 말에서 유래된 고사성어이다. 범려는 중국 춘추시대 월나라 왕 구천(句踐)이 오(吳)나라를 멸하고 춘추오패(春秋五覇)의 한 사람이 될 수 있도록 보좌한 명신(名臣)이다. 월나라가 패권을 차지한 뒤 구천은 가장 큰 공을 세운 범려와 문종(文種)을 각각 상장군과 승상으로 임명하였다. 그러나 범려는 구천에 대하여 고난을 함께 할 수는 있지만 영화를 함께 누릴 수는 없는 인물이라 판단하여 월나라를 탈출하였다.

제(齊)나라에 은거한 범려는 문종을 염려하여 "새 사냥이 끝나면 좋은 활도 감추어지고, 교활한 토끼를 다 잡고 나면 사냥개를 삶아 먹는다(蜚鳥盡, 良弓藏, 狡兔死, 走狗烹)"라는 내용의 편지를 보내 피신하도록 충고하였으나, 문종은 월나라를 떠나기를 주저하다가 구천에게 반역의 의심을 받은 끝에 자결하고 말았다. 이 고사(故事)는 《사기(史記)》의 〈월왕구천세가(越王句踐世家)〉에 보이며, 토사구팽은 이로부터 유래되었다. 이 고사는 《사기(史記)》의 〈회음후열전(淮陰侯列傳)〉에 보인다. 여기서 유래하여 토사구팽은 토끼 사냥이 끝난 뒤 사냥개를 삶아 먹는 것과 마찬가지로 필요할 때는 쓰다가 필요 없을 때는 야박하게 버리는 경우를 빗대어 이르는 고사성어로 사용된다.

평가

범려는 스스로 이름을 치이자피(말가죽으로 만든 술 부대)로 바꾸고 사업에 종사하여 재물을 크게 모았는데, 이것을 모두 사람들에게 나누어 준 후 도(陶, 지금의 산둥성 딩타오(定陶)현) 땅에 가서 은거하며 호를 도주공(陶朱公)이라 하고 장사를 크게 하였다. 대부호가 된 그는 자신이 번 재물을 사람들에게 세 번이나 흔쾌히 베풀었는데, 여기서 '삼취삼산(三聚三散)'이란 고사성어가 나왔고, 오늘날 노블레스 오블리주의 대명사로 평가받기도 한다. 후대의 상인들이 그를 재신(財神)으로 받들었고, 사람들이 그를 존경하여 '상성(商聖)'으로 불렀다.

범려는 순양(順陽) 범씨(范氏)의 선조이며, 저서로 『계연편(計然篇)』, 『도주공생의경(陶朱公生意經)』이 있다. 병법을 남겼다고 하나 전하지 않는다. 범려는 시기와 시세를 잘 파악하여 적절한 행동을 취한 인물의 대명사로 꼽힌다. 세상의 모든 만물이 모두 변화하는 것처럼 시세의 흥망성쇠도 이와 같으니, 따라서 때를 기다려 행동해야 자연스러운 것이라 했다. 즉 그는 기다릴 줄 알아야 한다는 '대기(待機)'의 진정한 의미를 파악했던 인물이었던 것이다.

범려는 경제사상 면에서도 자연의 순환에 주목하여 '귀한 것이 극에 이르면 도리어 천한 것으로 바뀐다'는 원칙을 확고하게 인식하고 있었다. 그래서 가진 부를 스스럼없이 사람들에게 나누어줄 수 있었던 것이다. 범려와 관련된 유적으로는 저장성 주지(諸暨)에 조성되어 있는 범려의 사당인 범려사가 있다.

동영상

각주

  1. 범려(范蠡)〉, 《두산백과》

참고자료

같이 보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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