초 장왕
초장왕(중국어:楚莊王chǔ zhuāng wáng)은 중국 춘추시대 초나라의 22대 군주이며 6대 왕이다. 춘추오패 중 한 명으로 꼽힌다.
개요[편집]
초장왕은 춘추시대 초나라의 왕(재위 BC613~BC591)이다. 즉위 후 부패한 신하를 몰아내고 내정을 다져 부국강병을 이루었으며, 진(晋)나라와 필(邲) 땅의 싸움에서 대승을 거둠으로써 중원의 패권을 장악하였다. 당시 가장 강력한 군사력을 지니고 중원의 패권을 장악하였으면서도 진(陳)나라와 정나라 등 오랜 전통을 지닌 나라를 공격하되 나라를 빼앗지는 않았다. 제나라 환공(桓公), 진나라 문공(文公)에 이어 춘추시대의 세 번째 패자(覇者)의 지위에 올랐으며, 춘추오패(春秋五覇) 가운데 유일하게 왕의 칭호로 불리는 인물이기도 하다. 이 밖에 장왕과 관련하여 "절영지연(絶纓之宴)" "초가벌진(楚可伐陳)" "우맹의관(優孟衣冠)" 등의 고사성어가 전한다.[1]
생애[편집]
초 장왕은 중국 초나라의 제22대 군주(재위: 기원전 613년 ~ 기원전 591년)이다. 성왕의 손자이자 목왕의 아들이고 공왕의 아버지이며 성은 웅(熊), 이름은 려(侶)이다. 즉위 초기에 귀족들의 발호와 주변 이민족의 도발을 다스리고, 내정을 개혁하고 상벌을 분명히 함으로써 군신이 화목하고 백성들이 평안하게 생업에 종사하였다. 즉위 후 신하들에게 "간언하는 자는 처형하겠노라"라고 공표하고 3년간 정사를 돌보지 않고 주색에 빠졌는데, 오자서(伍子胥)의 선조인 오거(伍擧)와 소종(蘇從)이 잇달아 간언한 끝에 황음한 생활을 끝내고 정사를 돌보았으며, 그동안 보아왔던 부패한 신하들을 몰아내고 죽음을 무릅쓰고 간언한 신하들을 중용하여 내정을 다졌다. "불비불명(不飛不鳴)이라는 고사성어는 여기서 유래하였다.
초 장왕은 BC 611년 용(庸)나라를 정벌하고 BC 608년 송나라를 굴복시켰으며, BC 606년에는 낙양(洛陽) 부근까지 쳐들어온 육혼(陸渾)의 융족을 토벌하였다. 이때 장왕은 중원을 제패할 야심을 품고 군대를 낙수(洛水)의 강변에 주둔하였는데, 주(周)나라 정왕(定王)이 대부 왕손만(王孫滿)을 보내 노고를 치하하자 장왕은 그에게 주나라 왕실에서 보관하고 있는 구정(九鼎)의 크기와 무게를 물었다. 구정은 천자국(天子國)에 대대로 전하는 9개의 솥을 가리키는데, 중원을 지배하는 왕권의 상징물이다. 장왕의 속내를 간파한 왕손만이 솥의 크기와 무게보다는 덕(德)이 중요하며, 천명이 아직 주나라에 있다고 답하였고, 이에 장왕은 군대를 철수시켰다. "문정경중(問鼎輕重)"이라는 고사성어는 여기서 유래하였다.
초 장왕은 이후 BC 601년 서(舒)나라를 정벌하였고, BC 598년 진(陳)나라를 공격하여 군주인 영공을 죽인 하징서(夏徵舒)를 잡아 거열형에 처하였다. 초 장왕은 진(陳)나라의 내란을 틈타 그 나라를 일시에 병합하고, 정(鄭)나라를 공격하여 진나라와 함께 속국으로 삼았다. 기원전 597년에 정나라의 원군으로 온 진(晉)나라군을 격파했다(필 전투). 이때 진나라군은 허겁지겁 배를 타고 후퇴했는데, 배가 뒤집힐 것을 두려워한 병사가 배에 매달려 있는 병사의 손을 잘라 떨어뜨렸고 배 안에는 손가락이 수북이 모였다고 한다. 대승한 뒤 신하들은 경관(京觀)을 만들 것을 상소했지만 장왕은 물리친다. '무(武)'라는 글자는 무기를 멈추어 쓰고, 난폭함을 막고 전을 세우고 대를 유지하며, 공을 정하고 백성을 생각하고 사람들을 화합하고 재물을 풍부하게 하기 위한 것이니 자신이 한 것은 이 무덕에 들어맞지 않으며, 자신들의 조국을 위해 충성을 다한 진나라 병사들의 사체로 경관을 만들 수는 없다는 이유에서였다.
진나라를 패퇴시키고 패업을 이룬 장왕은, 그다음에 진나라를 따르는 송나라를 표적으로 정했다. 장왕이 제나라에 보낸 사신이 송나라를 지나가다가 피살당하자, 전광석화 같이 송나라에 쳐들어가 그 수도 상구(商丘)를 포위했다. 이전에 노나라도 초나라의 맹하에 들어가는 등 착실하게 장왕의 패업은 완성에 가까워지고 있었다. 그러나 화원(華元)을 비롯한 송나라군의 저항에 의해 기원전 594년 5월에 이르렀음에도 불구하고 상구를 함락하지 못하여 초 장왕은 결국 퇴각했다. 후에 송나라는 초나라에게 항복했다. 기원전 591년에 장왕은 별세한다.
절영지연[편집]
장왕은 야심한 밤에 신하들을 연회에 불렀다. 많은 사람이 취한 가운데 갑자기 강풍이 불어 촛불이 꺼져 버렸다. 그때, 장웅(蔣雄)이라는 사람이 장왕의 총희를 껴안았는데 총희는 곧바로 장웅의 갓끈을 잡아 뜯고 장왕에게 이를 알렸다. 그러나 장왕은 신하들로 하여금 모두 갓끈을 끊게 하였고 장웅은 속으로 장왕에게 감사를 했다. 그 후 초나라가 진(秦)나라에게 공격당했을 때, 장웅은 선봉에 서서 큰 공로를 세웠다. 장웅은 당시 연회에서의 일을 이야기하여 자신이 그때 총희를 껴안은 자임을 말했다. 너그럽고 여자에게 휘돌리지 않는 훌륭한 군주로서의 장왕의 인격을 나타내는 고사이다.
투월초의 난[편집]
초 장왕 9년(기원전 605년), 투월초(鬬越椒)를 재상으로 임명했다. 어떤 이가 투월초를 모함했는데, 초 장왕에게 죽임을 당하는 것이 두려웠던 투월초는 반란을 일으켰다. 투월초가 반란을 일으켰을 때, 그의 활 솜씨는 신궁에 가까워서 전쟁 중에 초 장왕을 두 번이나 활로 위태롭게 한 적이 있었다. 그러자 병사들 사이에선 초 장왕이 투월초의 화살에 맞아 곧 죽게 된다는 소문이 나돌게 되었다. 이 말을 들은 초 장왕이 초나라에 보물로 내려오는 화살이 3발이 있는데, 그걸 투월초가 두 발을 훔쳐 가서 이제 두 발을 다 썼으니 다시는 장왕의 목숨을 노릴 일이 없다며 병사들을 안심시켰다. 이런 소문을 퍼트린 한편으로 장왕은 계략을 써서 투월초가 활을 쏘는 것을 못하게 막아내고, 병사들의 사기를 떨어트리는 일이 없게 하여 투월초를 물리칠 수 있었다.
여기서 '백발백중'(百發百中)이라는 고사성어가 유래하기도 했다. 이때 투월초와 대결한 사람은 양유기(養由基)였는데, 양유기는 버들잎을 100보 앞에서도 맞힐 정도로 실력이 뛰어난 장수였다. 이들은 활쏘기 시합을 하기로 했는데, 먼저 투월초가 3발을 쏘자 양유기는 활로 막고, 몸을 옆으로 기울이며, 화살을 이로 물어서 투월초의 공격을 막아냈고, 그다음에 한 발로 투월초를 쏴서 반란을 제압했다.
업적[편집]
제(齊)와 진(秦)은 각기 동방과 서방에 치우쳐 있었으므로, 중원 지역에서 장기간 패권을 다투었던 것은 진(晉)과 초(楚)였다. 성복(城濮)의 전투로 초(楚)는 잠시 좌절을 맛보았다. 6년 후 초 성왕(成王)이 태자 상신(商臣)을 폐위 시키려 하자, 태자는 궁중의 위사들을 매수하여 궁정 쿠테타를 일으켰다. 성왕은 결국 목을 매 죽고, 태자가 즉위하니 이가 초 목왕(穆王)이다. 목왕은 강(江), 육(六), 요(寥) 등의 나라를 멸망시켜 국력을 날로 증강시켰다. 목왕이 죽고 아들 여(侶)가 즉위하니 이가 곧 초 장왕(莊王)이다,
초 장왕은 북쪽의 육혼지융(陸渾之戎, 하남성 낙양시 서쪽)을 정벌하고 마침내 낙읍(洛邑)에 이르러 "주(周)의 교외에서 열병하고," 정(鼎)의 대소와 경중을 물어(당시 정은 주왕실의 국보이자 왕위의 상징이었다) 그것을 취하려는 의지를 보였다. 이후 초는 또 귀족 약오(若敖)의 반란을 평정하고 서(舒)를 멸망시켰으며, 진(陳)을 정벌하여 대대적인 승리를 거두고, 날로 국력이 신장되어 갔다.
기원전 598년 초가 정(鄭)을 포위하자 진(晉) 경공(景公)이 구원병을 보냈다. 599년 초는 비(泌, 하남성 정주<鄭州>부근) 회전하여 진군에 대승을 거두었다, 기원전 594년 초가 또 송(宋)을 정벌하였으나, 진(晉)은 감히 대적하지 못했다. 이로써 초 장왕은 말에게 황하물을 마시게 하고 중원의 패주가 되었다. 초 장왕은 《한비자(韓非子)》 <유도편(有度篇)>에 "형(荊) 장왕(莊王)은 26개 국을 병합하고 3천 리에 걸친 영토를 개척했다"라고 한 것처럼 전성기를 구가 하였다.
춘추 오패[편집]
춘추오패(春秋五覇)는 중국의 고대 춘추시대 제후 간 회맹의 맹주를 가리킨다. 춘추시대의 5대 강국을 일컫기도 한다. 이들 패자는 모두 존왕양이(尊王攘夷)를 내세웠다. 5의 수는 오행 사상(나무·불·흙·쇠·물의 다섯 물질의 운행에 의해 만물이 성립한다고 하는 사상)에 의한 것으로, 특별히 역사적으로 어떤 의미가 있는 것은 아니다. 춘추오패는 제(齊)나라의 환공(桓公), 진(晉)나라의 문공(文公), 초(楚)나라의 장왕(莊王), 오(吳)나라의 왕 합려(闔閭), 월(越)나라의 왕 구천(句踐)을 가리키며, 기록에 따라서 진(秦)나라의 목공(穆公), 송(宋)나라의 양공(襄公) 또는 오나라 왕 부차(夫差) 등을 꼽는 경우가 있다. 초 장왕은 역대 초나라 왕 중에 명분을 중시했던 첫 군주였으며 한때 진(陳)나라를 멸망시켰으나 명신 신숙시의 간언을 듣고 독립시켜 주었다.[2]
동영상[편집]
각주[편집]
- ↑ 〈장왕(莊王,?~BC 591)〉, 《두산백과》
- ↑ 〈춘추오패〉, 《위키백과》
참고자료[편집]
- 〈장왕(莊王,?~BC 591)〉, 《두산백과》
- 〈초장왕〉, 《위키백과》
- 〈초장왕〉, 《나무위키》
- 〈춘추오패〉, 《위키백과》
- 늘보나무, 〈초 장왕, 송나라 토벌〉, 《네이버블로그》, 2024-01-23
- 광야, 〈춘추오패(春秋五覇) - 초 장왕의 패업〉, 《네이버블로그》, 2023-01-20
- 생각, 〈장왕 (중국 삼국시대 인물) - 정보의 공유〉, 《네이버블로그》, 2023-07-19
- 고백신, 〈제 5 화 춘추 5패 세번째 패자 초 장왕 (楚 莊王)〉, 《네이버블로그》, 2022-01-30
같이 보기[편집]