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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만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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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만섬 위성사진
대만섬 위치
대만섬 지형

대만섬 또는 타이완섬(중국어 정체자: 臺灣島, 간체자: 台湾岛, tái wān dǎo, 영어: Tai Wan Island)은 중국 대륙의 동남부에 위치한 으로 1950년대부터 지금까지 중화민국(대만)의 영토 중 가장 큰 땅이자 중심지로 기능하고 있다. 별칭은 포르투갈어로 '아름다운 섬'이란 뜻을 가리키는 포르모사(Formosa)이다. 한국에서는 한자를 한국식으로 그대로 읽으면 대만섬이다.[1]

개요

대만섬은 대만해협을 사이에 두고 중국 푸젠성과 마주하고 있으며 중국 본토에서 약 150㎞ 떨어져 있다. 면적은 35,980km²로 경상도의 면적과 비슷하며, 시간대는 UTC+08:00이다. 대만섬은 1885년 하나의 성(省)으로 독립하였고, 청일전쟁 뒤 일본 최초의 해외 식민지가 되었으며, 1949년 중국공산당과의 내전에 패배한 국민당의 장제스 정권이 이전해 와 본섬과 부속제도인 펑후제도(澎湖諸島), 란위섬(蘭嶼) 등 79개 도서를 합하여 대만을 설입하였다. 이러한 정치적 상황으로 인해, 대만은 명목상 과거 중국 대륙의 영유권을 모두 주장하는 나라이지만 실질적으로는 대만섬이 곧 중화민국 그 자체로 인식되고 있다. 대만섬은 전체적으로 미국 플로리다주보다 남쪽에 위치하며 중국 윈난성 중남부 등과 비슷한 위도이고 중부, 남부의 경우 쿠바와 비슷한 위도이지만, 플로리다와의 위도 차도 크지 않으며 기후는 쿠바보다 플로리다와 비슷하다고 볼 수 있다. 대만섬에 있는 화산은 양밍산이 유일하며, 나머지는 대만섬 근해에 있는 화산섬 정도다.[2]

어원

대만이라는 말은 지금의 가오슝 일대에서 쓰였던 원주민 언어인 시라야어로 외지인이란 뜻의 '타요완'에서 나왔다고 하나 확실한 것은 아니다. 臺灣은 이 타요완을 음차한 것일 뿐으로, '타요완'은 중국어 유래 명칭이 아니기 때문에 본래 이에 대한 한자 음차로 大員, 大圓, 大灣, 臺員, 臺圓 등 여러 표기가 사용되었으며, 조선왕조실록(현종실록)에도 음차 표기로 보이는 대번국(大樊國)이라는 명칭(정씨 왕국을 이른다)이 보인다. 그러다가 청나라가 대만 섬을 지배하면서 여러 한자 음차 표기 중에서 臺灣(ㄊㄞˊㄨㄢ)을 택해 현재의 명칭이 확립되었다. 별칭은 Formosa 혹은 '아름다운 섬'이라는 뜻인 美麗島이다. 별칭인 포르모사는 포르투갈어로 아름다운 섬이란 뜻의 '일랴 포르모자(Ilha Formosa)'에서 나왔다고 하며, 메이리다오/비레떠는 이를 한자어로 의역한 별칭이다. 대만에서 '포르모사'를 한자 음차해 표기하고자 할 때는 福爾摩沙, 福爾摩莎(ㄈㄨˊㄦˇㄇㄛˊㄕㄚˉ) 등을 쓴다.

지리

면적은 약 35,195km²이고 인구는 약 2,300만 명대이다. 일본 오키나와현과 중국 대륙, 홍콩, 필리핀의 한 가운데 위치한 교통의 요지인 큰 섬이다. 대만섬의 지형은 대한민국의 지형과 비슷한 동고서저형인데, 높고 낮은 정도가 한반도보다 더 극단적이라 동쪽에도 부산, 울산, 함흥 같은 큰 도시가 여럿 있는 한반도와 달리 대만의 모든 대도시는 낮고 평탄한 서부 해안지역에 집중되어 있다. 대만섬의 동쪽에는 중양산맥과 하이안 산맥이 가로지르고 있다. 이 역시 한국의 태백산맥과 비슷하다. 대만 섬의 기후는 북회귀선을 기준으로 북부는 아열대성 온난 습윤 기후, 남부는 사바나 기후(열대기후의 한 종류)에 속한다. 그러나 중양산맥 기슭의 해발고도가 높은 곳(약 1,800~2,000m 이상)은 열대도 아열대도 아닌 그냥 온대기후에 속한다. 남한의 35%인 35,195km² 면적을 지니고 있지만 위산이라는 백두산보다도 훨씬 높은 산이 있다. 더불어 지진이 자주 일어나기도 한다. 이는 일본과 비슷하게 유라시아판과 필리핀판이 부딪히는 지점에 위치하기 때문인데, 그래서 일본처럼 대만도 유명한 온천 휴양지가 많다. 그러나 정작 화산은 찾아보기 힘들다. 1999년 9월 21일에 벌어진 지진으로 2,821명이 목숨을 잃었고 엄청난 피해를 당했던 바 있다.

자연과 기후

대만섬의 북부는 온난 습윤 기후에, 남부는 열대 사바나 기후, 열대 몬순 기후에 속한다. 한국보다 훨씬 남쪽의 북회귀선에 걸친 섬이다보니 북부 역시 한국에 비하면 일 년 내내 무더운 기간이 긴 편이다. 북부지역인 타이베이시 등지는 북회귀선 살짝 위에 있어 아열대기후에 속하며 남부지역인 가오슝시, 타이난시 등지는 전체적인 기후가 비슷한 위도에 있는 홍콩, 마카오와 비슷하고 최한월에도 한낮 기온이 20°C를 웃도는 날이 많다. 쌀쌀함에서 추움을 느낄 수 있는 날씨는 12월 중순에서 2월 사이에 집중되는데, 1월 날씨가 한국 기준 5월 초중순이나 10월 상순 수준이다. 3월부터 날씨가 온난해지면서 초여름 날씨를 보이기 시작해서 4월부터는 완연한 여름 날씨가 된다. 단, 섬 중부의 위산을 비롯한 산맥이나 그 근처 해발고도 높은 곳(2,000m 이상)은 냉대기후나 한대기후에 속한다. 여름엔 매우 덥고 습하다. 최난월 평균기온의 경우 1991~2020년 평균으로 타이베이가 30.1℃로 대구(26.7℃)보다 3℃ 이상 높다. 겨울철에도 기온이 영하는 커녕 10℃ 이하로 내려가지 않는다. 타이베이 1월 평균이 16.6℃로 한국과 비교할 수 없이 매우 따뜻하고 온난한 편이며, 서울의 1월보다 약 18°C, 서귀포보다도 10°C나 높다. 한국에서의 5월 초와 비슷한 기후이지만 현지인 기준으로는 꽤나 춥게 느껴지는지 쨍쨍한 날에도 패딩을 껴입고 다니는 사람들을 종종 볼 수 있다. 이유는 현지인들은 그 기후에 몸이 적응이 되어있어 추위에 약하기도 하고, 겨울이 건조한 한국과 달리 겨울에 비가 자주 내리는데다가 비가 오지 않더라도 상당히 습하며 실내 난방을 하지 않기 때문이다. 그래서 가정집 난방기기의 경우 개별적으로 구비하는 경우가 많으며 부엌도 없는 집이 허다하다. 큰 추위가 없고 기후 특성상 난방이나 음식 조리 등의 원인으로 실내 온도가 높아지면 곰팡이와 벌레가 창궐하기 쉬워지기 때문이며 대만에서 유달리 외식 문화가 발달한 이유 중 하나이기도 하다.

타이베이의 11월~2월의 월별 강수량은 70~100mm 정도이다. 지룽의 경우 여름보다 겨울에 비가 더 많이 온다. 겨울이 건조한 편이라 칼바람만 피하면 그럭저럭 아늑하게 느껴져셔 견딜만한 한국의 겨울 추위와는 다르게 습도 높은 추위인데다 실내에는 난방 시스템은 없고, 오히려 제습을 위해 에어컨만 풀가동되기 때문에 한국인들은 첫인상이 생각보다 안 춥다고 잘 다니다가 나중에 감기 걸리기 쉽다. 그래서 2021년 1월 동아시아 한파 속에 126명이 사망하는 참사가 일어났다. 태풍이 발생해 북상하는 주요 경로상에 있는데다가, 해안 근처에 바로 백두산보다 높은 산들이 즐비한 지형 탓에 태풍이 자주 오고 한 번 태풍이 오면 한국보다 훨씬 자주 강하게 비가 미친 듯이 퍼붓는다. 대표적으로 2009년 태풍 모라꼿이 대만에 상륙했을 때 무려 하루 강우량 2,777mm라는 기록이 있다. 대만 관광을 생각하고 있다면 태풍이 자주 발생하는 늦여름~가을 시즌은 웬만하면 피하거나 예보를 체크해보는 게 좋다. 또 태풍이 한반도 근처로 북상해오는 동안 대만을 거치게 되면 높은 산맥에 부딪혀 크게 약화되며 중국 대륙 바로 옆에 있다 보니 한국처럼 미세먼지 문제도 심각하다.[3]

역사

오스트로네시아어족 계통의 언어를 사용하는 사람들이 8,000년 전에 유라시아 동남쪽에서 대만섬으로 이동해 온 후 정착한 집단은 대만 원주민이고 다른 섬으로 진출한 집단은 폴리네시아인들이라고 한다. 대만섬이 처음으로 역사에 드러난 것은 230년 오나라의 손권의 명령에 의해 위온과 제갈직이 백성을 징발하기 위해 이 섬에 상륙하면서부터였다. 결과는 대실패. 데려간 1만의 병력 대부분을 잃고 얻은게 원주민 1천여 명이라 위온과 제갈직은 이에 대한 책임을 물어서 손권에게 교수형을 당했다. 그리고 중세시절에 대만섬 중서부에서 파포라족(巴布拉族)을 중심으로 바부자족(貓霧捒族), 파제흐족(巴宰族), 호아냐족(洪雅族), 타오카스족(道卡斯族), 카하브족(噶哈巫族)이 연합하여 원주민들의 부족 동맹 연합 왕국인 다두 왕국을 건국하였으며 원주민들은 대만에 정착한 한족들과 교역을 하기도 했지만 조선이나 일본은 물론 옆에 있는 오키나와섬의 류큐 왕국에 비해서도 외부의 영향과 교류가 적었고 체계적인 문명의 형성이 늦었다. 근세 시절 1624년 네덜란드가 타이난 지역에 상륙하여 대만 남부를 식민지화하고 뒤이어 1626년 스페인이 대만 북부를 식민지화했고 그렇게 남북에서 유럽의 두 국가 세력들이 중서부의 다두 왕국을 압박해왔다. 그러다 당시 견원지간이었던 스페인네덜란드가 대만섬에서 세력을 다투었고, 1642년 네덜란드는 스페인을 대만에서 몰아냈다. 이후 1644년 네덜란드 동인도 회사의 군대가 대만 북부의 케타갈란족(凱達格蘭族)을 공격해 무찌르는데 성공한 후 남쪽으로 진격하여 다두왕국을 공격하였지만 다두 왕국의 원주민 부족 동맹 연합이 네덜란드 군대를 성공적으로 격퇴시켰다. 그러나 1642년 8월 네덜란드는 한때 스페인이 식민지화 해서 차지한 대만 북부와 본인들이 차지한 남부를 연결하기 위해 서부 평원의 원주민 정복을 목표로 삼았다. 1644년에 네덜란드의 선장 피터 분(Piter Boon)은 북부 지역의 순종하지 않은 원주민 토벌을 위해 네덜란드 원정대를 이끌었고 그 다음해인 1645년 다시 다두 왕국에 두번째 공격을 감행하여 다두 왕국의 통치를 받고있던 반네덜란드 성향의 13개의 부족 마을을 파괴하자, 당시 18개의 다른 부족 촌락의 지도자였던 다두 왕이자 파포라족의 카마찻 아슬라미에(Camachat Aslamie)에는 즉위 말기에 파포라족을 이끌고 네덜란드 동인도 회사의 침입을 격퇴하였으나 결국엔 어쩔 수 없이 부족의 안전과 평화회담을 위해 사이먼 반 브린(Simon van Breen) 목사의 중재를 받아들일 수 밖에 없었으며 네덜란드에 무릎을 꿇고 네덜란드가 주최하고 있는 노스 로드 회의에 참석한다. 그리고 1645년 4월에 아슬라미에는 네덜란드 동인도 회사의 남부 지방 회의에 참석하였고 네덜란드는 무력으로 굴복시킨 아슬라미에한테 강제적으로 네덜란드 동인도 회사에 항복 조약을 서명 및 체결하게 만들어 다두왕국이 네덜란드에 항복하고 복종했음을 명시하여 다두왕국을 속국으로 삼고 한때 스페인이 지배했던 북부를 비롯한 대만 섬 전부를 점령하고선 본격적으로 모든 원주민 부족들과 오래 전에 타이완 섬에 정착하거나 수입한 한족들을 노예로 착취한다.

한편 정성공은 평생을 명나라 부흥운동에 바쳤고 명나라의 옛 도읍 난징을 거의 되찾을 뻔 하기도 했지만 결국 실패했다. 17세기 중반 대륙에서 명나라가 망하고 새로이 만주족이 세운 청나라가 들어서자 정성공은 청나라의 해안 봉쇄에 극심한 식량 부족에 시달렸고 명나라 부흥을 위한 근거지를 마련하기 위해 거점으로 네덜란드가 지배하던 섬을 노렸다. 1661년 4월 29일에 타이난을 공격하여 네덜란드령 대만의 반네덜란드파의 원주민들, 한족들과 함께 동맹을 맺고 봉기하여 네덜란드 세력을 공격해서 질란디아 요새를 점령하고 인도네시아에서 보낸 네덜란드 동인도 회사의 지원군도 격파하여 인프라를 통째로 빼앗아 네덜란드 제국 세력을 몰아내고 대만 남서부를 차지해 그곳에 근거지를 마련하고는 정씨 왕국을 건국하였다. 이때 포로로 잡은 수백명의 네덜란드 남성을 고문, 학살하고 여성들은 노예로 삼았다. 정성공은 그곳의 대만 원주민들과 한족들에게서 네덜란드의 압제에서 해방시킨 영웅으로 열렬한 환영을 받았다. 그렇게 한족들은 정씨 세력에 흡수되었으며 정씨 왕국은 융화정책을 실시하여 자신들의 세력권 안에 들지 못한 대만 원주민들의 관계에 신경을 많이 쓰며 다두 왕국을 통해 원주민들과 교역을 하고 이들에게 농사, 중국어, 사냥, 덫이나 옷 등의 물건제작을 가르쳐 주는 등 적당한 주변 관계를 맺어 이들의 협조를 통해 청나라에 대한 항쟁체제를 꾸렸다. 그러나 1661년에 세력을 넓히는 과정에서 원주민들의 영토까지 침범하여 그로 인해 정씨 세력과 남부의 평포족 간의 갈등이 생겨났고 원주민들을 좀더 세력권 안에 끌어들이기 위해 반항하는 원주민들은 탄압해 학살하거나 세력권 안에 있는 원주민들을 착취하기도 하였다. 또한 정성공은 정씨 왕국을 세우면서 청나라와는 독립적인 사회 제도를 구축했고 이를 통해 대만 원주민들에게도 한족의 유교 문화가 수입됨으로써 대만은 동북아시아사로 편입되었으며 이후 정성공이 병으로 사망하자 그의 자손들이 대대로 대만섬을 통치하게 되었다. 그리고 지속적으로 청나라에게 반기를 들어 청나라와 잦은 전투를 벌였다.

1683년 7월, 청나라와 정씨 왕조 사이에 벌어진 펑후해전(澎湖海战)에서 정씨 왕조의 해군이 괴멸적인 피해를 입으면서 정씨 왕조는 더이상 청나라에게 저항할 수 있는 동력을 상실하고 말았다. 결국 동년 10월 청나라에게 항복하면서 정씨 왕조는 종말을 고하게 된다. 1683년 강희제가 정씨 왕국을 멸망시킨 후에 청나라는 미개척된 대만섬 동북부에 진출하여 그곳을 정복했다. 한족들의 이주가 증가하면서 토지를 빼앗긴 원주민들은 계속 산악 지대로 밀려났다. 결국 1732년 옹정제 통치 때에는 다두 왕국의 마지막 후신들이 한족의 군사작전으로 인해 그대로 토벌당해 다두 왕국은 멸망한다. 이 사건을 대갑서사항청사건(大甲西社抗清事件)이라고 부르며 그렇게 다두 왕국의 영토는 청나라의 관할이 되었으며 청나라는 대만섬을 복건성 영토로 편입시키고 타이난을 중심으로 대만섬을 통치했다. 후에 청나라가 청일전쟁에서 패배하여 대만을 일본에 할양하자 대만 민주국을 세우며 치열하게 저항했지만 끝내 굴복하고 일본 식민지배가 1895년부터 1945년까지 정확히 50년이 있었으며, 그 이후로는 중화민국에 소속된 역사를 가지고 있다. 그러나 1949년 분단 이후로는 중화인민공화국이 이 섬을 자국의 영토로 주장해오고 있다. 대만섬에서는 대만에 속한 지역과 대만성에 속하지 않은 지역이 있는데, 대만성에 속하지 않은 지역은 타이베이, 신베이, 가오슝, 타이난, 타이중, 타오위안의 6대 직할시이며, 대만섬의 나머지 지역은 전부 대만성 소속이다. 단, 대만성에서도 대만섬에 속하지 않는 지역이 있으니 주의해야 한다. 대만섬에도, 대만성에도 속하지 않는 대만 영토도 있다.[4]

지도

동아시아 국가 지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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동영상

각주

  1. 대만〉, 《위키백과》
  2. 대만〉, 《나무위키》
  3. 타이완(두산백과)〉, 《네이버 지식백과》
  4. 타이완섬〉, 《나무위키》

참고자료

같이 보기

동아시아 같이 보기

동아시아 국가
동아시아 도시
동아시아 지리
동아시아 바다
동아시아 섬
동아시아 강
동아시아 주변 지역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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