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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 환공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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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 환공

제 환공(중국어:齐桓公qí huán gōng)은 춘추시대 제나라의 16대 군주이자, 춘추시대 최초의 패자이다.

개요[편집]

제 환공은 중국 춘추시대 제나라의 군주(재위 BC 685∼BC 643). 포숙아(鮑叔牙)의 진언으로 공자 규의 신하였던 관중(管仲)을 재상으로 기용한 뒤 패자(覇者)의 자리를 확고히 하여 춘추오패(五覇)의 한 사람이 되었다. 성은 강(姜), 이름은 소백(小白)이며, 희공(僖公)의 아들이다. 희공을 이어 즉위한 형 양공(襄公)이 정치를 문란하게 하고 자기 마음에 들지 않는 사람을 죽이자 화를 피하기 위하여 거(莒) 땅으로 망명하였다. 이후 양공은 공손무지(公孫無知)에게 피살되었고 공손무지도 곧이어 암살됨으로써 제나라는 군주가 없이 혼란에 빠졌다.

환공은 노나라로 망명하여 노나라의 후원을 업은 이복형 공자(公子) 규(糾)와 후계 다툼을 벌여 공자 규를 몰아내고 즉위하였다. 즉위 후 포숙아(鮑叔牙)의 진언으로 규의 신하였던 관중(管仲)을 재상으로 기용한 뒤 관중의 도움으로 제후와 종종 회맹(會盟)하여 신뢰를 얻었으며, 특히 규구(葵丘:河南省)의 회맹을 계기로 패자(覇者)의 위상을 확고히 하였다. 밖으로는 산융(山戎)을 쳐서 연(燕)을 구하고, 노(魯)의 내란 평정에 힘을 기울였으며, 오랑캐의 침임으로 멸망한 형(邢)을 이의(夷儀:山東省)로, 위(衛)를 초구(楚丘:山東省)로 옮겨 부흥시켰다. 안으로는 군사력을 강화하고 상업·수공업을 육성하여 나라를 튼튼히 하였다. 만년에 관중의 유언을 무시하고 예전에 추방했던 신하를 재등용하여 그들에게 권력을 빼앗김으로써 그가 죽은 후 내란이 일어났다. [1]

가계[편집]

제 환공(齊 桓公, 기원전 720년 ~ 기원전 643년)은 중국 춘추시대의 제(齊)나라의 제16대 임금이다. 성은 강(姜), 씨는 여(呂)·제(齊), 휘는 소백(小白), 강태공의 12세손이며, 시호는 환공(桓公). 춘추시대의 패자이다. 고혜와 포숙아의 활약에 의해 공자 규와의 군위 계승 분쟁에서 승리해 제나라의 군주가 되었다. 관중을 재상으로 삼고 제나라를 강대한 나라로 만들었으며, 실권을 잃어버린 중국 동주 왕실을 대신해 회맹을 거행했다.

제 환공은 적자는 없고, 다만 사랑하는 여인이 많아, 서자로 장위희의 아들 무궤, 소위희의 아들 원(혜공), 정희의 아들 소(효공), 갈영의 아들 반(소공), 밀희의 아들 상인(의공), 송화자의 아들 옹이 있었다. 환공은 관중과 함께 소를 세자로 세웠으나, 두 위희와 한 편인 옹무와 수초의 힘으로 무궤를 세우는 것을 허락했으며, 관중 사후 다섯 공자들이 전부 자신들을 세울 것을 구했다. 환공 사후, 역아와 수초가 여러 관리들을 살해하고 무궤를 군위에 앉혔으며, 소는 송나라로 도망했다. 이후 다섯 공자 간의 군위 분쟁을 통해, 제나라는 패권국의 지위를 잃었으며, 군위 다툼을 한 여섯 공자 중 다섯 공자나 임금이 되었다.

생애[편집]

제 환공의 아버지는 희공(僖公), 형은 양공(襄公)으로, 양공은 이복동생 문강과 내연 관계를 맺어, 문강이 노나라의 환공(桓公)에게 시집갔지만, 장공을 낳은 후에도 관계가 계속되었다. 화난 노 환공이 문강을 꾸짖자 문강이 양공에게 밀고하였고 이에 양공은 공자 팽생(公子彭生)에게 명령하여 노 환공을 죽이게 했다. 노나라에 소문이 돌자, 팽생을 죽여 변명을 하였다. 그 이외에도, 양공은 자기 마음에 들지 않는 사람을 차례차례로 죽였기 때문에 제나라는 혼란했다.

공자 소백은 거(莒)에, 형 공자 규는 노나라에 망명했다. 양공은 그 후, 사촌 공손무지에게 암살되었다. 양공이 죽은 후에, 공손무지가 제나라 임금에 즉위했다고 칭하고 국정을 관리하지만, 공손무지도 또 곧바로 암살되었다. 공손무지 사후, 소백과 같이 노에 망명한, 노를 후원자로 얻은 형 공자 규와의 사이에 군위 쟁탈전이 생겼다. 이때, 공자 규의 심복인 관중이 매복해 소백을 암살하려고 하고 있었다. 관중은 활을 쏘아 맞혔다. 화살은 소백의 배에 맞아, 소백은 쓰러졌다. 이에 관중은 기뻐하고, 공자 규에게 소백을 죽였다고 보고했다. 소백이 죽어 경쟁 상대가 사라진 공자 규는 노의 군사를 뒤로 천천히 제나라에 들어오려고 했다. 그러나, 고혜(高傒, 중국 고씨와 중국 노씨의 공동시조)는 소백과 친했으므로, 국(國)씨와 함께 비밀리에 소백을 제나라로 불러들여 임금으로 삼고자 했다. 소백이 노나라의 지원을 받는 공자 규를 따돌리고 먼저 입국하자, 고혜는 소백을 제나라 임금으로 세웠고, 공자 규가 제나라에 들어갔을때는 소백이 이미 먼저 제나라 임금이 되어 있었다. 공자 규는 기다리고 있던 소백에게 공격을 받고 노나라로 도망쳤다. 실은 관중의 화살은 소백의 배에 명중된 것처럼 보였지만, 실은 허리띠의 쇠고리에 꽂혔었던 것이었다.

제 환공은 관중이 자신을 죽이려고 한 사실에 화를 내어 관중도 죽이려 하고 있었다. 그러나 제 환공의 심복이며, 관포지교라는 말의 뿌리가 될 만큼 관중의 좋은 친구이기도 한 포숙아의 설득으로 환공은 관중을 살려주었으며 재상으로 임명했다. 제 환공의 생각은 현명했다. 재상이 된 관중은 개혁을 추진해, 국력, 군사력, 문화 향상에 성공했다. 벌써 주왕실은 쇠퇴하고 있어, 제후 사이의 대립을 억제하는 일도 마음대로 되지 않았다. 관중의 개혁을 받아들인 제 환공은 주변 국가에 그 명성이 전해져, 주변 제후는 제후 사이의 문제를 제 환공에게 묻게 되었다. 장강 유역의 현재의 호북성을 중심으로 한 지대를 지반으로 해 남방에서 세력을 늘려, 주왕실이나 제후를 위협하기 시작하고 있던 초나라를 환공은 제후를 인솔하고 초나라를 공격하였다. 기원전 651년 환공은 회맹을 거행해 춘추오패 중 제일 첫 번째 패자(覇者)가 되어 중국 천하를 호령하였다.

제 환공은 기원전 645년, 재상인 관중이 죽으면서, 국정을 돌아보지 않게 되어 방탕하게 되었다. 관중이 죽을 때에 등용을 하지 말라고 한 간신들도 등용해, 국정은 흐트러졌다. 제 환공이 병이 들자, 공자들의 후계자 싸움에서 숨을 거두어, 67일간 그 사체는 방치된 채로 있어, 그의 관이 구더기가 솟기 시작했다고 한다.

춘추오패[편집]

춘추오패(春秋五覇)는 중국 춘추시대 5인의 패자(覇者)를 일컫는 말이다. 중국에서 제국간(諸國間) 혹은 제후간(諸侯間)에 맺어지는 회합이나 맹약을 회맹(會盟)이라 하며, 회맹의 맹주(盟主)가 된 자를 패자라고 한다. 춘추오패는 춘추시대 5인의 패자를 일컫는 말로 오백(五伯)이라고도 한다. 《순자(荀子)》에 의하면 오패라 함은 제(齊)나라의 환공(桓公), 진(晉)나라의 문공(文公), 초(楚)나라의 장왕(莊王), 오(吳)나라의 왕 합려(闔閭), 월(越)나라의 왕 구천(勾踐)을 가리키는데, 한편 진(秦)나라의 목공(穆公), 송(宋)나라의 양공(襄公)이나 오나라 왕 부차(夫差) 등을 꼽는 경우도 있다. 춘추시대에는 대체로 진(晉) ·초(楚)나라 혹은 제(齊) ·진(秦)나라 등 대제후가 중심이 되어 서로 세력을 다투며, 회맹을 되풀이하였다.

관중[편집]

관중은 춘추시대 제(齊)나라의 정치가이다. 환공을 도와 군사력의 강화, 상업·수공업의 육성을 통하여 부국강병을 꾀하였다. 가난했던 소년 시절부터 평생토록 변함이 없었던 포숙아(鮑叔牙)와의 깊은 우정은 '관포지교(管鮑之交)'라 하여 유명하다. 환공(桓公)이 즉위할 무렵 환공의 형인 규(糾)의 편에 섰다가 패전하여 노(魯)나라로 망명하였다. 그러나 포숙아의 진언(進言)으로 환공에게 기용되어, 국정(國政)에 참여하게 되었다. 관중은 환공을 도와 군사력의 강화, 상업·수공업의 육성을 통하여 부국강병을 꾀하였다. 대외적으로는 동방이나 중원(中原)의 제후(諸侯)와 9번 회맹(會盟)하여 환공에 대한 제후의 신뢰를 얻게 하였으며, 남쪽에서 세력을 떨치기 시작한 초(楚)나라를 누르려고 하였다. 저서로 알려진 《관자(管子)》는 후세 사람들에 의하여 가필된 것으로 여겨지고 있다.

관중이 제 환공에게 중용되어 재상이 되었을 때는 기원전 686년. 중원을 차지하고 있던 주 왕실의 통제력을 갈수록 약해지고 제(齊), 초(楚), 진(晉), 진(秦), 연(燕), 노(魯) 등을 비롯한 제후국(諸侯國)들이 차츰 중앙의 통제에서 벗어나 자국의 실리를 취하며 군웅할거하던 시절이다. 제환공 재위 7년(기원전 679년)에 위(衛)의 견(甄)에서 회맹을 열고 패자의 지위에 오른다. 관중의 도움으로 제환공 재위 43년간 (기원전 685년 ~ 기원전 642년) 제나라는 북쪽으로 하북성 북부, 서로는 태행산맥, 남은 하남성 중앙부 근처까지 영향력을 행사했다.

제환공은 제후들을 지배하고 싶어 했다. 그러나 관중은 오히려 주라고 말했다. 제나라는 이미 관중의 정책으로 강국의 반열에 올랐다. 하지만 개개의 국가들과의 경쟁에서는 우위에 있었지만, 모든 제후국을 아우를만큼의 국력은 없었다. 아직 전국시대 이전이고 아무리 강국이라 한들, 국력의 차이는 크지 않았다. 따라서 관중은 제후국을 무력으로 제압하려다 보면 다른 제후국들의 반발을 사게 될 것이라는 것을 알고 있었다. 그래서 관중은 주라고 했다. 빼앗은 땅을 제후국에게 돌려주고, 예물을 보내게 했다. 이는 제환공의 명성을 높이고 다른 나라들에게 제나라에 대한 신뢰를 주었다. 또한 천자를 받든다는 존왕양이를 바탕으로 한 "예(禮)"를 내세워 명분을 확보하였다. 이를 통해 제나라가 주도하는 질서에 대한 다른 나라들의 협력을 이끌어 내게 된다. 관중의 사후에도 그의 정치철학은 계속 제나라의 통치이념으로 활용되었고, 이는 제나라가 전국시대까지 전통적인 강국의 위치에 있을 수 있게 한 원동력이었다. 훗날 등장하는 도가는 물론 제자백가에 영향을 주었다.

규구회[편집]

규구회(葵丘會)는 중국 춘추시대 제(齊)나라 환공(桓公)이 중원 제후(中原諸侯)의 패자(覇者)가 된 회맹(會盟)이다. 주실(周室)의 권력이 쇠약해진 춘추시대 초기에, 관중과 포숙아(鮑叔牙) 두 명의 어진 재상을 중용한 환공은 선정을 베풀고 국내를 평정한 후, 이적(夷狄)과 초(楚)나라의 중원 침입을 방어하고 전국의 질서 회복을 위해 노력하였다.

주(周)나라의 양왕(襄王) 1년인 BC 651년에 송(宋)나라의 규구(葵丘:河南省 開封의 동쪽)에 송(宋) ·위(衛) ·정(鄭) ·노(魯) ·허(許) ·조(曹) 등 제후를 모이게 하여 상호의 주권존중과 질서유지를 약속시켰다. 이 모임에 주나라 양왕의 사자로서 주공(周公)이 참석하여 환공의 패자로서 입장이 확립되었다.

동영상[편집]

각주[편집]

  1. 환공(桓公,?~BC 643)〉, 《두산백과》

참고자료[편집]

같이 보기[편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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