쌀
쌀은 벼의 낟알에서 껍질을 벗겨 낸 알곡이다. 메벼의 쌀은 멥쌀, 찰벼의 쌀은 찹쌀이라 부른다. 도정한 정도에 따라 모습이 달라지는데, 왕겨만 살짝 벗겨내면 현미(매조미쌀)가 되고, 곱게 쓿으면 백미(흰쌀)가 된다. 식혜 같은 음료나 소주, 청주, 막걸리 등 술의 원료가 된다. 쌀밥 또는 떡으로 해 먹을 수도 있다.[1]
목차
개요[편집]
쌀은 세계 3대 작물의 하나인 벼의 열매로 주로 아시아 지역에서 오랫동안 경작하여 왔다. 벼는 외떡잎식물로 열대 지방에서는 여러 해를 살지만 온대 지방에서는 한해살이풀이다. 벼는 강수량이 높은 열대 지역에서 잘 자라지만, 물 공급이 원활한 온대 지역에서도 광범위하게 재배되고 있다. 자포니카벼에서는 일반쌀이 생산되어 한국과 일본에서 주식으로 사용되며, 인디카벼에서 생산되는 긴 쌀은 동남아시아 등 기온이 높은 지역에서 주로 소비된다. 향미쌀 등 다양한 쌀과 야생쌀이 존재한다.[2]
상세[편집]
예로부터 한국 사람들은 쌀을 중심으로 한 식생활을 계속하여 왔으며 이를 열량원으로 삼아왔기 때문에 가장 중요한 곡물이라고 할 수 있다.
벼는 벼과에 속하는 식물로서 20여 종의 품종이 있으나, 세계적으로 가장 흔하게 재배되고 있는 것은 오리자 사티바(Oryza sativa)이다. 이 오리자 사티바는 일본형 · 인도형 · 자바형의 3형으로 분류하고 있는데, 자바형은 인도형에 가까우므로 일본형과 인도형의 2형으로 분류하기도 한다.
벼의 원산지는 종래 중국 남부, 미얀마, 타이, 인도 동부 등이라는 설이 제기되어 있었다. 중국 남부 호남성 옥섬암 동굴유적에서 B.P. 1만 1천년(서기전 9000년)의 볍씨가 출토된 바 있으며, 미얀마에서는 B.P. 1만 년의 유적에서 벼가 재배되었다는 형적이 나타났다고 한다. 그러나 근래 한국 청주 소로리유적에서 구석기문화층과 함께 약 1만 5,000년 전에 형성된 것으로 추정되는 토탄층에서 볍씨가 출토되었다. 소로리유적에서 출토된 볍씨는 지금까지 세계에서 가장 오래된 것이며, 현재 충북대학교 박물관에 소장되어 있다.
쌀은 벼 열매의 껍질을 벗긴 알갱이로 장립형과 단립형이 있다. 구조는 왕겨 · 과피 · 종피 · 호분층 · 배유 및 배아로 되어 있고, 종류로는 멥쌀과 찹쌀처럼 아밀로오스의 함량의 차이에 따라서 나누고, 또한 도정(搗精)의 정도에 따라서 현미 · 5분도미 · 7분도미 · 백미 등으로 분류한다. 산지에 따라서는 경기미 · 호남미 · 인천쌀 등으로 나누고 가공별로 강화미와 알파미 등으로 분류한다.
멥쌀과 찹쌀은 일본형과 인도형이 모두 메벼와 찰벼가 있으므로 생산이 되는 것이며, 이들 벼의 차이는 아밀로오스와 아밀로펙틴 함량의 차이이다. 육안으로 보았을 때에 멥쌀은 반투명하고 찹쌀은 유백색이다.
찹쌀은 수분함량이 많으면 반투명해져서 멥쌀과 구별하기 힘들지만 건조하면 유백색이 된다. 찹쌀은 배유세포 내의 전분함량이 낮아서 건조하면 배유 내부에 미세한 간격이 생기므로 유백색을 띠게 된다.
찹쌀의 비중은 1.08이고 멥쌀의 비중은 1.13으로 멥쌀이 약간 무겁다. 멥쌀은 약 80%가 아밀로펙틴이고 나머지가 아밀로오스인 데 비하여, 찹쌀은 아밀로오스를 거의 함유하고 있지 않다. 전분(澱粉:녹말가루)의 호화(糊化:물과 함께 열을 가함)온도는 찹쌀은 70℃ 이상이고 멥쌀은 65℃이며, 요오드반응은 멥쌀은 청자색을 띠지만 찹쌀은 적갈색을 나타낸다.
가공쌀의 일종인 알파미는 정백미를 물 또는 묽은 초산에 충분히 담근 뒤 100℃ 이상에서 밥을 지어서 온도를 내리지 않은 채로 상압 또는 감압하에서 급속으로 탈수시켜서 5% 정도의 수분함량으로 만든 것이다. 따라서 여기에 물을 가하면 호화상태가 재현되어서 소화가 잘 되는 것이 특징이다.
또한, 강화미는 정백미에 소요량의 비타민 B1을 초산용액 중에 침투시켜서 증자(蒸煮:증기로 찌는 것)하여 호화시키고 건조시켜 만든 것으로, 쌀을 씻을 때에 손실되기 쉬운 비타민 · 칼슘 · 아미노산 등의 영양소를 첨가시킨 쌀을 말하는 것이다.
이는 백미에 대하여 200분의 1 비율로 혼합이 되어 있어서 100g중에 비타민 B1이 보통 100 ∼ 150㎎ 정도 강화되어 있으며, 비타민 B2는 착색의 목적으로 3 ∼ 7㎎ 정도 첨가되어 있다.[3]
쌀의 구성 성분[편집]
쌀은 전분을 주성분으로 하고 단백질은 약 7%를 함유하며, 지질(脂質)과 회분(灰分:석회질 성분)은 적게 함유하고 비타민류도 약간 함유하고 있다.
쌀의 단백질은 글루텔린이 주이고 알부민과 글로불린도 소량 함유하고 있다. 아미노산의 조성은 리신 · 트립토판 · 메티오닌 등이 적게 함유되어 있는 것이 결점이기는 하지만, 단백가 78로 식물성 단백질 중에서는 영양적으로 우수한 편이다.
지질은 호분층(糊分層:세포 속에 있는 단백질층)이나 배아에 많으며 무기질로서는 인이 많고 칼슘이 적은 것이 특징이다. 쌀의 중요한 비타민 성분은 비타민 B1 · 비타민 B2 · 니아신 · 비타민 E 등이며 비타민 A와 비타민 C는 함유되어 있지 않다.
쌀밥과 빵의 영양가를 비교해 볼 때에 가장 두드러지게 나타나는 것은 단백질이다. 빵의 단백가는 44에 불과하므로 쌀의 단백가 78에 비하면 많이 떨어진다. 따라서 쌀의 단백질이 우수하다고 할 수 있다.
또한, 빵의 아미노산 중에 함유되어 있는 리신은 쌀의 아미노산 중에 함유되어 있는 리신보다 훨씬 적다. 호분층 · 배유(胚乳:배젖) 및 배아의 영양가를 비교해 보면 호분층에는 당질이 주성분이므로 전분이 가장 많이 함유되어 있으며, 그 다음으로 수분 · 단백질 · 지질 그리고 회분 등의 순이다. 무기질로는 인이 가장 많고 칼륨 · 마그네슘과 칼슘의 순으로 칼슘의 함량이 매우 적은 것이 또한 특색이다.
배유에도 역시 당질이 주성분으로 그 다음은 단백질 · 지질 · 회분 등의 순이다. 무기질로서는 인 · 칼륨 · 마그네슘과 칼슘을 함유하고 있고, 호분층과 마찬가지로 비타민 B1을 함유하고 있다. 배아미는 배아가 붙어 있는 쌀로서 최근에는 배아정미라고도 불리며, 소화가 잘 되고 배유에 비하여 2, 3배의 비타민 B1 · 비타민 B2 · 비타민 E를 함유하고 있는 것이 특징이다.
쌀의 영양가는 또한 묵은쌀과 햅쌀에 따라서 다르며, 묵은쌀은 햅쌀에 비해서 맛이 떨어지는 것 외에 비타민의 함량이 현저하게 감소된다. 쌀에 적당한 양의 물을 가하여 가열 · 조리를 하게 되면 쌀전분이 호화, 즉 알파(α)화됨으로써 소화가 잘 되고 맛이 좋아지게 된다. 조리시에 따른 성분의 변화는 도정시와 쌀의 조리 전의 수세정도에 따라서 비타민 B1·비타민 B2 및 지방과 단백질의 손실이 생긴다.[3]
재배 역사[편집]
우리 선조가 쌀을 먹기 전에는 지금 말하는 잡곡과 맥류를 주식으로 하였다. 인류가 농업을 시작한 것이 약 1만 년 전이라고 하는데, 이 무렵에 세계 각 지역에서 곡식을 재배하여 식량으로 삼기 시작한 것이다.
보리와 밀 그리고 잡곡류(피 · 기장 · 조 · 수수 등)의 재배는 각기 중동 · 인도 · 아프리카 등의 지역에서 시작되어 중국을 거쳐 한국에 전파되었다.
쌀의 재배가 처음으로 이루어진 곳은 인도 동북부 지역인 아삼(Assam)에서 중국 윈난(雲南)지방에까지 걸친 넓고 긴 지대라고 보고 있다. 연대는 약 6,000 ∼ 7,000년 전으로 추정되고 있는데, 이 지대에서 방사형으로 아시아 각 지역에 전파되어 간 것이다. 그 한 경로는 양쯔강 하류로 뻗어나가 다시 북으로 올라가 황하 유역으로 퍼졌으며 또 다시 동으로 꺾어져 한국으로 통하였다.
1977년에 경기도 여주군 흔암리에서 발굴된 탄화미(炭化米), 그리고 그 뒤 평안남도 평양에서 출토된 탄화미는 그 동안 발견된 고대미(古代米) 유물로서는 가장 오래된 것이다.
연대는 다 같이 3,000여 년 전으로 측정되었으므로 청동기시대에 이미 이들 지역에서 쌀을 생산하였다는 증거가 된다. 이 두 군데에서 다같이 쌀과 함께 조 · 기장 · 수수 · 보리도 출토된 것을 보면 그 당시의 식량의 모습을 알 수 있다.
이렇게 북쪽을 통하여 들어온 쌀 재배는 한국 남부로 파급되면서 기후와 지세 그리고 수원의 편리 등 유리한 조건으로 인하여 영남지방과 호남지방에서 특히 활발하게 되었다. 삼국시대에 있어서 백제 · 신라의 쌀 생산이 국가규모로 장려되었고, 특히 통일신라시대에는 쌀이 주곡 중에서 제1위를 차지하게 되었다.
조세(租稅)의 주대상이 쌀이었으니 조(租)가 벼의 뜻으로 전용된 것으로도 알 수 있다. 쌀농사에 관련된 세시풍속도 많이 생겼고 논을 뜻하는 답자(畓字)도 창제되었다. 쌀도 처음 들어왔을 때에는 다른 곡식들과 같이 분식(粉食)을 하였을 것으로 보이나, 점차 밥을 지어 먹는 입식(粒食)으로 변하였을 것이다.
분식으로는 시덕(떡의 원형)을 거쳐 떡의 형태로 오늘날까지 내려오고 있으나, 삼시(三時)의 주식으로는 입식하는 밥으로 변하였다. 쌀로 밥을 짓는 틀은 처음에는 시루로서 오늘날 고대의 시루가 많이 출토되고 있다. 황해도 안악의 고분에 나타난 벽화에 부엌에서 시루로 밥을 짓는 광경이 있는 것으로 보아 고구려의 귀족들은 쌀밥을 주식으로 하였던 것 같다.
통일신라 때에 주식의 기반을 굳힌 쌀은 고려시대에 들어오면서 더욱 일반화되어 쌀 증산에 모든 힘을 기울였다. 수리 강화, 재배법 개량, 경지면적 확대, 쌀창고 증설 등 미곡증산에 박차를 가하였다. 쌀을 화폐로까지 사용한 때가 있을 정도였다. 인구가 증가하고 쌀 선호도가 높아짐에 따라 쌀의 증산은 더욱 필요하게 되었다.
조선시대로 내려오면서 미곡생산 제고의 노력은 다각도로 베풀어져 재배면에 있어서는 모내기법의 전국화, 함경도 변경지대의 개답(開畓) 시도 등 여러 가지 정부노력의 예를 들 수 있다. 일상 식탁의 주식으로서의 쌀의 대종적위치(大宗的位置)는 물론 여러 가지 가공식품을 개발할 수 있는 소지를 가지고 있었다.
어느 쌀제품이 어느 때 생겼는지 현재로서는 추적할 수 없으나, 조선시대에 이르러서는 쌀 이용이 절정에 달하였다고 볼 수 있다. 순서 없이 보기를 들면 우선 떡류를 생각할 수 있는데, 이는 한국의 독특한 식품으로 엄밀히 말하여 병(餠:중국의 소맥제품)도 아니며 과(菓)도 아니다. 떡에는 시루떡 · 백설기 · 절편 · 계피떡 · 송편 · 흰떡 등 여러 종류가 있고, 각 종류에는 수없는 가짓수가 있어 떡의 총 가짓수는 100가지가 훨씬 넘을 것이다.
쌀은 발효과정을 거쳐 탁주 · 약주 · 소주를 제조할 수 있는데, 한국에서는 수백 가지 주류를 양조할 수 있었다. 또, 쌀은 엿기름으로 삭혀 감주(또는 식혜)와 엿을 만들고 또 탁주 밑으로 증편을 만들었다.
쌀을 쪄서 말린 휴대용 비상식품도 있고 쌀을 벼의 상태로 쪄 정백한 찐쌀도 만들었다. 전자는 뜨거운 물에 담가 인스턴트식 밥을 만들 수 있는 것이고, 후자는 영양식품(비타민 B1이 백미 속에 침투되어 있음)으로 알려진 것이다. 또, 약밥 · 미숫가루 등을 비롯하여 죽(粥) 종류도 다양하다.[3]
도정 과정[편집]
완전히 성숙한 벼이삭에서 흰쌀이 될 때까지 여러 단계를 거치게 된다. 우선 탈곡(脫穀)이라 하여 벼이삭을 터는 일에서 시작하여, 이 벼열매에서 껍질(왕겨)을 벗기는 탈각의 작업이 있다.
탈각으로 나온 낟알을 현미(玄米)라 하며 이것을 찧어 백미로 만드는 과정을 정백(精白)이라 한다. 옛날에는 개상에 볏단을 태질하거나 또는 벼훑이 · 그네[千齒]를 써서 탈곡하였고, 탈각은 매통으로 하였다.
그러나 탈각과 정백은 여러 가지 방아류를 사용하였는데 디딜방아 · 물방아 · 물레방아 · 연자방아 등을 썼던 것이다. 이들 방아는 벼에서 흰쌀까지의 전과정을 일관하여 할 수 있었으며, 정백한 곡식을 가루내는 데도 사용하였다. 가장 간단한 도정은 절구 속에 벼를 넣어 공이로 오래 찧는 것이다.
현재 기계화에서는 탈곡은 논에서 콤바인(combine)으로 수확할 때 볏집단의 묶음과 함께 이루어지고 있고, 벼에서 정백미에 이르는 과정은 도정기계에서 이루어진다. 도정은 마찰분풍식(摩擦噴風式: 낟알에 압력을 가하여 마찰작용으로 도정) 또는 연삭식(硏削式: 고속회전으로 깎아냄)의 기계를 쓴다.
도정도에 따라 5분도미 · 7분도미 · 백미로 나누는데 현미에 대하여 각각 92% · 94% · 96%의 정백률이 된다. 도정과정에서 왕겨 · 속겨 · 배아(胚芽) · 싸라기 등이 나오는데 왕겨는 연료 · 과일포장제 · 벽돌충전제 등에 쓰이고, 속겨는 미강유(米糠油)라는 좋은 식용유를 짜낼 수 있으며, 배아는 영양제로, 싸라기는 과자류 제조에 쓰인다.[3]
저장 방법[편집]
수확한 벼나 쌀을 저장하는 방법과 규모는 여러 모로 달랐다. 논에 임시로 볏단을 쌓아놓는 노적가리에서부터 국가 공공의 곡창(穀倉)에 이르기까지 여러 가지 쌀의 저장시설이 있었다.
비교적 소규모 목조 소창(小倉)은 판벽(板壁)을 쌓아올린 곳간으로 땅에서 한자 가량 떨어진 거리에 마루를 깔았다. 토벽(土壁)으로 된 곡간(穀間)이 있는 대규모의 곡창은 토벽과 판벽이 상하단을 차지하고 있고 위에는 창구(窓口)들이 있다.
이러한 미곡창고 속에는 뒤주나 곡갑(穀匣) 같은 저장용기가 있어 이 속에 쌀이 저장되었다. 곡갑은 나무상자를 쌓아올린 층갑(層匣)으로 되어 있어 운반과 저장곡식 덜어내기에 편리하게 되어 있다. 이 두 가지 용기는 다른 곳에 둘 수 있음은 물론인데 뒤주의 크기에는 제한이 없다. 창고를 쓰지 않고 집 밖이나 방안 · 마루 등의 집안에 저장해두는 용구로는 섬 · 가마니 ·중태 · 나락두지 · 멱서리 등이 있고 나무독 · 오지독이 쓰였다.
대로 만든 소쿠리, 그리고 박으로 만든 뒤웅박도 사용되는데 뒤웅박은 종자용 곡식을 넣어두기 위하여 쓴다. 현재는 온습도가 조절되고 환기가 잘 되는 미곡창고가 쓰이며 살균살충제의 사용도 겸한다. 일반가정에서는 현대식 쌀통이 쓰이고 있다.
저장중에 있는 쌀은 쌀의 수분함량, 저장중의 온도와 습도 등 여러 가지 조건하에서 다소간에 바람직하지 않은 변화가 일어나 품질이 떨어지고 심하면 썩게 된다. 쌀의 변패(變敗)를 일으키는 주요 원인은 쌀의 효소 · 호흡 · 산화에 의한 화학적 변화와 쌀(벼나 현미상태)의 생리적 변화에 있다. 쌀에 변질 · 변패가 일어나면 밥맛이 나빠지고 영양분도 떨어지며 양도 줄어든다.
그러나 이상과 같은 화학적 · 생리적 변화에 의한 쌀의 손실보다 오히려 해충 · 곰팡이 · 쥐에 의한 피해가 더 많다고 한다. 특히 해충에 의한 피해는 1년에 5% 이상으로 보고 있다. 여러 가지 점으로 보아 벼로서의 저장이 제일 효과적이며(그러나 부피가 현미의 배나 되어 공간이 더 필요하다), 또 저온저장, 해충과 미생물방제, 들쥐방제에도 힘을 써야 한다. 이를 위하여 살충제 · 훈증제(燻蒸劑) · 살서제 또는 쥐의 기피제 같은 것을 쓴다.[3]
이용[편집]
오곡 또는 그 이상의 종류를 헤아리는 곡식들 중에서 쌀이 마침내 아시아민족들의 주식이 된 이유는 여러 가지로 생각할 수 있다. 애당초에는 다른 곡식들과 같이 분식으로 이용하였으리라고 생각되지만, 얼마가지 않아 밥으로 지어먹는 입식으로 변하여 오늘날까지 내려온 것으로 생각된다. 입식으로의 쌀밥 맛은 싫증이 나지 않는 매력적인 것으로 알려져 있다.
쌀은 밥으로 짓는 이외에 가공식품으로서 이용성이 매우 다양하다. 우선 혼식(混食)이 있는데, 그 중에서도 죽에는 여러 종류가 있다. 다음에 쌀은 가루로 또는 찐밥으로 수없이 많은 종류의 떡과 과정류(菓飣類)를 만들 수 있다. 발효시켜 만든 증편도 있다.
쌀밥은 엿기름으로 발효시켜 감주와 엿을 만들 수 있고 누룩으로 여러 가지 술을 빚을 수 있다. 쌀을 이용한 이러한 음식들은 민속식 또는 세시식 · 제례식 등과도 관계가 깊다.
그리고 쌀을 주곡(主穀)으로 선호하게 된 이유로서 경제적인 면을 빼놓을 수 없다. 쌀은 수확량이 밀이나 보리보다 배 이상으로 많고, 열대지방에서는 한해에 두 번 이상을 재배하여 거두어들일 수 있다. 더구나 쌀은 가격이 다른 곡식들보다 비싸다.
쌀과 관계가 있는 세시식을 살펴보기로 한다. 설날 아침에 지내는 차례에 진설하는 음식에서 빼놓을 수 없는 것이 떡국이다. 떡국에 넣는 흰떡은 햅쌀을 가루내어 쪄서 떡판에 놓고 메로 찧은 다음에 손으로 길게 원주형으로 떡가래를 만든 것을 썰어서 국에 넣어 끓이는 것이다. 떡국은 차례상에도 오르지만 설날 아침에는 반드시 먹는 것으로 되어 있다.
정월대보름에는 오곡밥과 약밥을 지어 먹었는데, 오곡밥은 다섯 가지 이상의 곡식(쌀 · 조 · 수수 · 보리 · 콩 · 팥 등)을 섞어 밥으로 지은 것이다. 약밥은 찹쌀 · 대추 · 밤 · 잣과 꿀을 섞어 쪄서 만든 것으로 오래 두고 먹을 수 있으며 정월뿐만 아니라 잔치상에도 늘 오르는 것이다. 동지 후 105일째 되는 날인 한식에는 조상의 묘 앞에 과일 · 적(炙) · 병(餠) 등을 차려놓고 차례를 지내는데, 옛날에는 중국의 고사(故事)에 따라 한식날에는 더운 밥을 먹지 않고 찬밥을 먹었다 한다.
음력 4월에는 찹쌀가루를 반죽하여 꽃을 놓아 기름에 지진 화전(花煎)과 증편을 시식(時食)으로 먹었다. 5월 단오에는 쑥을 뜯어넣은 수리취떡을 해 먹었는데 그 모양이 수레모양과 같았다. 8월 한가위에는 햅쌀로 밥을 지으며 떡을 하고 술[新稻酒]을 빚는다. 떡으로는 특히 오려송편이라 하여 송편 속에 햇콩 · 햇동부 · 햇밤 등을 넣는다.
음력 10월(상달)에는 시제(時祭)와 고사(告祀)가 있다. 10월 15일을 전후하여 6대 이상의 조상의 제사를 시제라 하여 조상의 묘 앞에 모여 지낸다. 이때에 반(飯) · 병 · 주찬(酒饌)을 진설한다. 10월의 말날[午日] 또는 길일을 택하여 시루떡을 쪄놓고 집안의 평안을 바라는 고사를 지냈다.
고사는 신령에 바치는 제사로 주부가 지냈으며 성주신(城主神:집전체 관장) · 제석신(帝釋神:곳간을 맡음) · 산신(産神:안방) · 수문신(守門神:대문) · 터줏신 등 여러 군데에 떡을 놓고 고루 절하며 감사하고 무사를 기원한다. 고사떡에서 빠질 수 없는 것이 팥시루떡으로서 악귀를 물리친다는 붉은색의 팥과 햅쌀가루로 만든 것이다.
동짓날에는 어느 가정에서나 팥죽을 만들어 먹었다. 팥을 으깨거나 체에 걸러서 그 물에다 찹쌀로 만든 새알심을 넣어 죽을 쑨다. 동지팥죽은 먼저 사당에 차례하고 다음 방 · 마루 · 광 등에도 한 그릇씩 떠다놓으며 대문에는 죽을 뿌리고 나서 사람이 먹는다. 팥죽이 액을 막고 잡귀를 쫓는다는 것이다.
다음에는 경사에 쓰는 쌀이나 쌀음식을 살펴보기로 한다. 돌상에는 돌쟁이 바로 앞에 쌀 · 실 · 국수 · 붓 · 책 · 활 등을 놓아 돌쟁이가 잡는 대로 장래를 점치며, 상 앞쪽에는 과일들과 더불어 백설기 · 인절미 · 수수경단 · 송편 등을 놓는다. 특히 백설기는 돌쟁이의 순수함을 의미하고 수수경단은 팥과 수수의 붉은색이 어린아이의 재앙을 막아준다는 것이다.
아기를 낳을 임신부의 가정에서는 해산달 3 ∼ 4개월 전부터 해산 후에 먹을 미역과 산미(産米)를 좋은 것으로 정하게 보관하였다. 쌀은 돌이나 뉘를 골라낼 뿐 아니라 조각난 쌀까지 골라 버리고 완전한 형태의 쌀만을 썼다.
임신부의 진통이 시작되면 정한 상에 깨끗이 고른 산미를 한 그릇 담고 정한수 한 그릇 떠놓고, 또 산곽(産藿:해산하고 먹는 미역)을 상 위에 길게 얹고 삼신에게 안산(安産)을 빌었다.
혼례식을 막 끝낸 신랑신부를 위한 입맷상에는 국수장국 등의 음식 외에 찰떡 · 엿 · 깨죽 · 잣죽 등이 놓였는데, 끈질기고 사이좋게 오래 살고 깨가 쏟아지게 잘 살라는 뜻이라 한다. 제상에 올려놓는 밥은 메라 하고 불단에 놓는 밥은 마지(摩旨)라고 한다. 명복을 빌기 위하여 부처에게 드리는 공양을 재(齋)라고 하는데, 밥인 경우에 잿밥이라고 한다.
상례(喪禮)에 있어서 시체에 옷을 다 입히면 염하기 전에 반함(飯含)을 한다. 반함은 쌀을 물에 불려서 사발에 담아 버드나무 숟가락으로 시체의 입을 벌리고 떠넣는 것이다. 죽은 사람이 저승까지 갈 때 먹는 식량이라고 믿는 데서 왔다고 한다.
한국 향토신앙에 속하는 굿에서도 제상에 올리는 메와 흰떡이 있다. 예를 들면 제주도의 산간촌에서는 당굿 제상에 곤쌀(美米)과 곤밥(美飯)을 차리는데, 이는 평소에 구경하기 어려운 귀물인 것이다.
동해안의 별신굿에서는 놋동이굿이라 하여 쌀을 담은 놋대야를 무녀가 입에 물고 신령스런 힘을 나타내기도 한다. 또, 어느 굿에서는 염주 · 엽전 · 쌀 등으로 점을 치며, 점 결과에 따라 여러 가지 굿을 하기도 한다.
이상과 같이 각도의 음식을 통해 쌀의 이용을 민속 및 신앙적인 면에서 간단히 살펴보았는데, 끝으로 건강식품으로서의 쌀의 이용면을 살펴보기로 한다. 쌀로서는 배아미(胚芽米)가 영양적으로 가장 우수하며, 백미의 단백질도 밀가루의 그것보다 나은 것으로 되어 있다. 그러나 백미에는 비타민 B류가 부족하여 이를 보탠 것이 강화미라 하여 미국과 필리핀에서는 일찍부터 보급되어 왔다.
강화미와 비슷한 것을 예로부터 동양에서도 만들고 있었는데 이것이 바로 파보일드 라이스(parboiled rice)라는 것이다. 한국에도 이와 비슷한'찐쌀'이라는 것이 있다. 이것은 벼를 수확한 뒤에 왕겨가 붙은 채로 볍씨를 쪄서 말려두었다가 필요할 때 도정하여 백미형태로 한 다음 밥을 지어 먹는 것이다. 비타민 B류가 모두 백미 속으로 옮겨간 것을 먹게 되므로 보통 백미밥과 다른 것이다.
제2차세계대전 후 인도에서 민간이 하던 파보일드 라이스가 영양학자의 주목을 받아 그 뒤 공업화가 되었다 한다. 현미는 영양성분을 충분히 갖추고 있으나 맛과 소화율이 좋지 않은 단점이 있다. 현미효소는 현미에 발효를 일으킨 영양식품이다. 옛날에는 비상식품으로 볶은 쌀을 빻아 미숫가루를 만들었는데, 지금은 청량음료에 넣는다.
또, 밥을 말려두었다가 먹을 때 뜨거운 물을 부으면 다시 밥이 되는 것도 있었는데 그것은 지금의 인스턴트식품에 해당한 것으로 옛날에 군용(軍用)으로 썼던 것이다. 또, 동남아시아에서는 쌀국수가 있어 밀국수보다 더 잘 먹는데, 기이하게도 한국에는 이것을 만들어 먹었다는 기록이 없다. 인조미라 하는 것은 밀가루를 반죽하여 쌀모양으로 만들어 말린 것으로 쌀과 섞어 밥을 짓는데, 쌀이 부족할 때 썼던 것이다.[3]
생산[편집]
한국에서 쌀농사가 시작된 것은 신석기시대 후기, 즉 서기전 2000 ∼ 3000년경이라는 기록이 있다. 그 뒤 삼국시대까지 쌀농사는 아주 원시적인 방법에 의하여 이루어졌으며, 수도 기술이 전면적으로 파급된 것은 삼국정립 이후 1, 2세기경으로 알려져 있다.
『삼국사기』에 백제의 쌀농사에 관한 기록이 많은 점으로 미루어 삼국시대에 쌀농사가 상당히 발전하였음을 짐작할 수 있다.
그러나 쌀이 실제 국민들의 주식으로 등장하게 된 것은 조선시대부터라고 한다. 물론, 그 이전에도 쌀농사는 상당히 보급되었지만, 고구려만 하더라도 콩이 주된 식량작물로 재배되고 있었다.
조선 창업 이후 치산치수에 역점을 두고 많은 권농정책이 추진된 결과, 쌀생산은 꾸준히 증가함으로써 수백년을 이어오는 동안 쌀은 우리의 주식으로 뿌리를 내리게 된 것이다.
쌀생산량의 추이를 보면 국권상실 직후인 1910년에는 149만 톤이었는데, 그 뒤 화학비료의 사용과 개간 등에 힘입어 해마다 증가하여 1930 ∼ 1934년에는 평균 243만 톤으로 크게 증가하였다. 그러나 이와 같은 쌀증산에도 불구하고 1인당 연간쌀소비량은 1910년의 101㎏에서 1934년에는 52㎏으로 약 절반 가량 감소하였다.
이와 같이 쌀소비량이 크게 감소한 이유는 쌀수출량이 1910년의 8만 톤에서 1930 ∼ 1934년에는 연평균 121만 톤으로 무려 15배나 증가하였기 때문이다. 당시 일본에 막대한 쌀이 수출된 것은 한국 내에 쌀이 남아서가 아니라 일본의 쌀부족을 충당하기 위하여 강제로 수출된 것이다.
광복 후 한국의 쌀생산량은 북한에서 생산되던 비료공급의 중단, 6·25전쟁으로 인한 생산의 부진, 그리고 토지소유제도의 미정착 등으로 1950년 전반기에는 연평균 200만 톤에도 미달하였다. 그러나 1960년대에 들어오면서 다각적인 증산시책에 힘입어 연평균 쌀생산량은 300만 톤을 넘었다. 1970년 초부터 통일벼의 신풍종이 개발, 보급됨에 따라 획기적인 쌀증산이 이루어져 1976년 이후 쌀생산량은 500만 톤을 상회하였다.
1988년에는 사상 최고수준인 605만 3000톤을 기록하였다. 쌀생산량은 1955년 295만 9000톤에서 1988년에는 605만 3000톤으로 33년 동안에 약 2배로 증가하였다. 이 기간 동안에 벼의 식부면적은 109만 8000톤 정보에서 126만 정보로 불과 15% 증가한 반면, 단수(10a당 수량)는 같은 기간에 79%나 증가하였다. 따라서 이 기간중에 쌀생산량의 증가는 주로 품종개발과 재배개발기술 등을 통한 단위면적당 수량의 증가에 기인함을 볼 수 있다.
그러나 쌀생산량은 1988년의 605만 톤을 정점으로 해마다 감소하여 1998에는 509만 7000톤에 이르렀다. 이와 같이 쌀생산량이 감소한 것은 쌀소비의 감소와 쌀가격의 상대적 하락 등으로 벼 식부면적이 감소하였기 때문이다. 벼의 식부면적은 1991년까지만 하더라도 120만 정보를 유지하여 왔으나 1992년부터 감소하기 시작하여 1998년에는 105만 9000정보로 크게 감소하였다.
이 감소 면적의 대부분은 상대적으로 수익성이 높은 시설채소, 과수 및 특용작물 등으로 전환된 것으로 보인다. 벼의 식부면적은 연도간에 약간 기복은 있으나 1965년 이후 약 120만 정보 수준을 유지하고 있다. 그러나 쌀을 포함한 식량작물의 식부면적은 1965년에 295만 정보나 되던 것이 1985년에는 178만 정보로 무려 40%나 감소하였다.
이와 같이, 식량작물의 식부면적이 감소한 것은 맥류 · 두류 · 서류 등 쌀을 제외한 곡물의 식부면적이 크게 감소하였기 때문이다. 특히, 맥류의 식부면적은 1965년에 93만 3000정보나 되던 것이 1985년에는 24만 2000정보로 약 4분의 1로 감소하였으며, 서류의 식부면적 역시 같은 기간에 21만 3000정보에서 6만 5000정보로 약 3분의 1로 줄어들었다.
쌀을 제외한 곡물의 식부면적은 크게 감소한 반면에 쌀의 식부면적이 별로 변동이 없는 것은 쌀의 수익성이 다른 곡물에 비하여 상대적으로 높고, 논에는 쌀 대신 심을 대체작물이 별로 없는 데 주로 기인된다. 벼의 식부면적은 1987년에 최고수준인 126만 2000정보에 달한 이후 계속감소하여 1998년에는 105만 9000정보에 이르렀다.
특히, 1991 ∼ 1995년에 벼 식부면적은 연평균 3만 7000정보씩 감소하였으며, 이는 쌀재고량이 늘어나고 쌀의 상대가격이 낮아진데 주로 기인한다. 그러나 1996년 이후 벼 식부면적은 쌀재고량의 감소에 따른 쌀가격의 회복과 휴정지에 대한 적극적인 경지장려, 농지전용 억제에 힘입어 105만 정보 수준에서 안정세를 유지하고 있다.
한편, 쌀의 단수는 1955년의 269㎏에서 1970년에는 327㎏으로 15년 동안에 약 20% 증가하였다. 그러나 1970년 초부터 새로운 벼품종인 통일계 품종이 개발되어 농가에 보급됨에 따라 쌀의 단수는 1970년의 327㎏에서 1977년에는 488㎏으로 7년 동안에 무려 50%나 증가하였다. 이 결과 1976년부터 1978년까지 3년간 쌀이 자급되었고 1977년에 쌀생산량은 사상 최고수준인 약 600만 톤을 기록하였다.
1977년에 획기적인 쌀 증산을 이룩한 것은 기상조건이 양호한 데도 원인이 있겠으나 통일계 벼의 확대재배에 힘 입은 바 크다. 1977년 통일계 벼의 식부면적은 66만 정보로 전체 벼 식부면적의 54%를 점하였고, 같은 해 통일계 벼의 단수는 553㎏으로 일반계 벼의 단수(423㎏)보다 31%나 높은 수준이었다.
그러나 소득향상에 따른 소비자의 일반미 선호 등으로 통일계 벼의 식부면적이 감소함에 따라 쌀의 단수는1977년의 4494㎏에서 1981년에는 416㎏으로 감소하였다. 1980년의 쌀 단수는 여름철의 냉해로 전년 대비보다 31%나 감소한 289㎏에 불과 하였다. 그러나 1982년 이후 쌀 단수는 증가추세에 있다.
특히 1990년대에 들어서면서 품종개발, 기반정비, 기계화 등에 대한 재정투융자 확대에 힘입어 일반계 벼의 단수증가의 속도가 빨라지고 있다. 쌀의 10a당 수량은 1990년 446㎏에서 1997년에는 518㎏으로 크게 증가하였고, 1998년에는 기상조건의 불량으로 전년보다 7% 감소한 482㎏에 머물렀다.[3]
유통[편집]
쌀을 자급자족하던 원시사회에서는 자기가 생산한 쌀은 자기가 소비하게 되므로 쌀의 유통은 아주 단순하였다. 그러나 쌀생산이 증대됨에 따라 농가에서 소비하고 남는 잉여분이 생기게 되자 쌀과 다른 재화간의 물물교환이 이루어지게 되었다. 물물교환은 주로 공동체 내에서 생산자와 소비자 간에 직접거래 형태가 일반적이었으며, 쌀의 운반은 인력에 의하여 행하여졌다.
그 뒤 사회구조가 발전함에 따라 생산지와 소비지가 구분되었고 도시화의 진전에 따라 생산지와 소비지 간의 거리가 확대되었다. 이에 따라 생산자와 소비자를 연결시키는 중간상인조직이 형성되었으며, 이 결과 쌀의 유통과정은 점차 복잡한 양상을 띠게 되었다.
또한, 종전의 쌀의 물물교환은 화폐를 매개로 하는 상품거래로 전환되었고, 쌀의 수송수단은 인력→우마차→자동차 또는 기차의 순으로 발전하기에 이른 것이다.
조선 말기까지만 하더라도 쌀 유통은 국가의 직접적인 통제가 없는 자율시장 형태를 취하고 있었다. 그러나 1910년에 한국을 강점한 일본은 1939년경부터 쌀 유통에 강력한 통제를 가하기 시작하였다.
처음에는 공출제도를 실시하였으며 드디어 1943년에는 「조선식량관리령」을 내려 양곡자유시장을 폐쇄하고 양곡배급제도와 공출제도를 더욱 강화하였다.
이 강제공출에 의하여 1941년에는 1126만 섬, 1942년에 876만 섬, 1943년에는 1195만 섬, 1944년에는 935만 섬이 수집되어 대부분 일본으로 반출되었다. 이 결과 한국 내에서는 극심한 식량난으로 만주산 비료용 대두박까지 식용으로 배급하게 되었고 초근목피로 연명하는 농민이 허다하였다. 이러한 일제의 쌀 수탈에 대항하여 농민들의 소작쟁의는 끊임없이 일어났고 이 투쟁은 일본배척운동으로까지 연결되었다.
한 통계에 의하면 1930 ∼ 1932년 사이 총 소작쟁의 건수는 3,590건으로 나타났다. 광복 후 1950년대 쌀 유통과정을 보면 수집단계로서 생산자→되장이→수집상을 거쳐서, 중계단계인 지방도정업자→대중계상인으로 유통되었고, 분배단계로서 대중계상인→위탁상 또는 도매상→산매상을 거쳐 소비자에 도달되는 복잡한 유통체계를 가지고 있었다.
1960년대 이후 정부와 농업협동조합조직이 양곡시장에 적극 개입함에 따라 쌀의 유통경로는 크게 세 가지로 구분되었다. 즉, 쌀의 유통구조는 자유시장을 통한 유통경로와 정부조직을 통한 유통경로로 크게 구분할 수 있으며, 또 자유시장을 통한 경로는 다시 상인조직을 통한 경로와 농협조직을 통하는 경로로 구분된다.
상인조직을 통한 쌀의 유통경로는 생산지시장의 수집, 반출단계에서 반출상에 의하여 소비지시장에 반출되는 경우와 수집반출상 혹은 도정업자가 수집과 반출기능을 동시에 수행하는 경우로 크게 나누어진다. 또, 소비지시장의 분산단계에서 볼 때 도매시장을 경유하여 유통되는 경우와 산지시장에서 소매상으로 직접 유통되는 경우가 있다.
1970년대에서 1980년대에 이르기까지 쌀의 총유통량 중 수매에 의한 정부미 비중이 증대됨에 따라 자유시장 유통량은 크게 감소하게 되었고, 상인조직에 의한 유통단계가 축소됨에 따라 그 동안 소비지시장에서 중추적인 역할을 담당하던 도매시장의 기능이 상당히 약화되었다. 1990년대에 들어서면서 미곡유통환경이 변화함에 다라 쌀의 유통구조는 크게 변화하고 있다.
산지단계에서는 미곡종합처리장(RPC)이 산지 및 소비지 미곡유곡에 직접 참여하게 됨으로서 과거 산지미곡유통의 주류를 이루었던 5일 시장이나 수집반출상의 유통기능은 점차 약화되고 있다. 한편, 도매단계에서는 산지와 소비지 소매업체 간에 직거래 물량이 늘어남에 따라 양곡 도매시장의 기능이 약화되고 있다.
그리고 소매단계에서는 양곡관리법의 개정(1993년)으로 양곡판매점이 종전의 허가제에서 신고제로 전환됨에 따라 소포상 쌀의 판매가 자유화되면서 대형 유통업체, 편의점, 슈퍼마켓 등 양곡취급 소매업소의 취급물량이 급격히 증가하는 추세에 있다. 또한, 유통경로별 유통물량의 구성비에도 큰 변화가 일어나고 있다.
시장출하량 중에서 농협계통조직을 통하여 판매되는 물량이 크게 늘어나고 있는 반면에 민간상인에 의한 유통물량은 줄어드는 추세를 보이고 있다. 1990년의 농협계통미 취급실적은 30만 7000톤으로 상품화량 중에서 농협계통미가 차지하는 비중이 6.9%에 불과하였으나 그 뒤 해마다 늘어나 1996년의 농협계통미 사업실적은 172만 9000톤으로서 전체 상품화량 중 40.2%에 달하고 있다.
이와 같이 농협의 비중이 높아진 원인은 정부의 수매, 방출산업의 일부를 농협이 담당하도록 하는 등 양곡관리정책이 민간유통 위주로 변화되었고, 최근 농협을 중심으로 미곡종합처리장의 전설, 운영이 확대된 데 주로 기인한다.
반면에 민간 상인에 의한 유통비중은 1990년의 67.8%에서 1996년에는 30.3%로 절반 이하로 감소하였다. 이와 같이 민간 상인에 의한 유통 비중이 줄어들게 된 것은 정부수매가와 산지미가간의 가격차이가 거의 없거나 미가의 계절진폭이 적어 민간상인에 의한 쌀 취급수요가 감소하였기 때문이다. 그리고 1993년 이후 정부수매량의 비중은 양간 줄어들고 있는 반면에 시장출하량은 상대적으로 늘어나는 추세를 보이고 있다.[3]
소비[편집]
쌀밥이 보편화된 것은 삼국정립 이후 3 ∼ 4세기경으로 추정된다. 삼국 중에서 고구려와 신라에 비하여 백제에서 쌀밥의 보편화가 먼저 이루어졌고, 이때가 대강 백제 중엽이라고 한다. 이와 같이 쌀은 오래 전부터 우리 민족의 주식으로 정착되어 우리 민족 생활의 토대가 되어온 것이다. 그러나 쌀은 예로부터 생산량이 수요량에 크게 미달되었으며, 곡물 중에서는 가장 귀중한 식량으로 취급되어왔다.
그리하여 쌀은 지배계급 또는 소득이 높은 계층에서 주로 소비되었고, 피지배계급 또는 저소득층은 전적으로 대체식량인 보리쌀 · 잡곡 등을 주로 소비하는 경향이 있었다. 조선 말기까지만 하더라도 쌀은 주로 지배계급인 양반에 의하여 소비되었고, 농민들을 포함한 피지배계급은 명절 때나 제사 때 등 특수한 날에나 쌀밥을 지어 먹을 뿐 보통날에는 잡곡을 주로 소비하였다.
일제강점기 때에는 농민들은 환금작물이라 하여 전량판매 또는 공출당하고 맥류 · 조 등의 잡곡을 주식으로 하였다. 1960년 초까지만 하더라도 보리고개라 하여 쌀은 고사하고 보리쌀마저 부족하던 시절이 있었다.
그러나 1970년 말 녹색혁명으로 쌀이 풍부해지자 국민 대부분이 쌀밥을 먹을 수 있게 되었고, 소득향상에 따라 최근에는 양보다는 미질이 좋은 쌀을 찾는 경향이 두드러지게 나타나고 있다.
쌀의 1인당 연간소비량 추이를 보면 1910년에 101㎏에서 1965년에는 122㎏으로 증가하였고 그 뒤에는 계속 증가하여 1970년에는 최고수준인 136㎏을 기록하였다. 그러나 1970년에 쌀생산량은 한국 내수요에 미달되어 약 54만 톤에 달하는 외미(外米)를 도입하기에 이르렀다. 그리하여 정부는 쌀도입을 줄이기 위해 보리혼식장려 등을 포함한 쌀소비억제 정책을 적극 추진하게 되었다.
그 결과 쌀소비량은 1973 ∼ 1977년 사이 비교적 낮은 123 ∼ 129㎏ 수준을 유지할 수 있었다. 1977년에 획기적인 쌀증산을 이룩하게 되자 정부는 쌀막걸리의 제조를 허용하는 등 이제까지 추진해 오던 쌀소비 규제를 전부 해제하였다. 그 결과 쌀소비량이 증가하기 시작하여 1979년에는 136㎏에 달하였으나 이를 전환점으로 하여 계속 감소추세에 있다.
1988 ∼ 1998년 사이 1인당 쌀소비량은 122.2㎏에서 99.2㎏으로 연평균 1.9%씩 감소하였다. 즉, 1980년 이후 쌀은 소득향상에 따라 소비가 감소하는 열등재가 된 것이다. 이러한 쌀소비의 감소경향은 경제성장에 따른 소득수준의 향상과 사회구조의 변화에 따른 식품소비구조의 고급화 내지 다양화, 그리고 편이성 · 선호성 등에 기인한다.
소득향상으로 축산물, 수산물, 과일, 채소 및 유지류 등의 소비량이 증가함에 따라 식용곡물의 소비가 감소하는 것은 자연적인 추세이며, 이와 같은 추세는 쌀을 주식으로 하는 아시아의 일본, 대만, 싱가포르, 말레이시아 등에서도 볼 수 있는 현상이다.[3]
경제적 의미[편집]
벼는 한국 · 중국 · 일본 · 동남아시아 등 계절풍의 영향을 받는 지역에 적합한 작물로서 단위면적당 수량이 가장 높은 작물의 하나이다. 한국과 같이 농지가 협소한 나라에서 급증하는 인구를 부양하는 데는 벼와 같이 토지의 생산성이 높은 작물의 재배가 경지의 효율적인 이용면에서 유리하다.
이러한 이유 때문에 쌀은 예로부터 주식으로서 한국 민족 생활과 불가분의 관계를 맺어왔으며, 한국 민족의 육체적 · 정신적 힘의 원천이 되어온 것이다. 뿐만 아니라 쌀의 생산 · 유통 및 소비 등 쌀의 경제는 국민경제의 초석이 되었다 해도 과언이 아니다.
고대사회 때 쌀은 주식일 뿐만 아니라 한국 전통문화와도 밀접한 관련을 맺어왔다. 예컨대, 조상의 영(靈)을 섬기는 가제(家祭)에서 신주단지에 봉납되는 나락이 주로 쌀이었으며, 풍년의 기원, 햇곡에 대한 감사, 자손의 번영과 안녕, 만복을 비는 매체로서의 신주단지 속에 들어가는 내용물 역시 쌀이 큰 비중을 차지한 것으로 알려져 있다.
또한, 화폐가 발생하기 이전에는 쌀은 화폐의 대용품인 물품화폐로 사용되기도 하였다. 원시사회에서 씨족간에 재화의 교환은 물물교환이었는데 이는 가치의 비교와 수량의 분할 등에 불편이 많아 생활필수품인 쌀이 화폐로 널리 이용된 것이다. 신라 소지왕 2년에 물품화폐로서 쌀과 포백(布帛)이 주로 사용되었다는 기록으로 보아 삼국시대에도 쌀이 화폐로 사용된 것으로 추측된다.
그 뒤 화폐가 생기게 되자 쌀의 화폐기능은 점차 상실되었으나 농촌지역에서는 아직도 노임과 소작료 등의 지불은 현금보다는 쌀로 직접 지출하는 것이 관행으로 되어 있다. 1965 ∼ 1981년 사이 소작료지불의 경우 쌀로 지불한 현물지출 비율이 70 ∼ 94%로서 현금지출을 크게 상회하였다.
쌀은 예로부터 국민의 생존과 직결되는 주곡인 관계로 단순한 곡식이 아니라 정치적 · 경제적으로 중요한 의미를 지니고 있다. 그래서 쌀의 생산과 유통과정에서는 크고 작은 여러 가지 역사적인 사건이 발생하기도 하였다.
예를 들면, 부여에서는 물과 가뭄이 조화를 이루지 못하고 농업생산이 풍요롭지 못할 때는 그 책임을 왕에게 돌려, 신하들이 왕을 바꾸거나 죽이는 풍속이 있었다는 기록이 있다.
또한, 1833년(순조 33) 3월에 서울의 쌀값은 상인의 매점매석으로 크게 앙등한 바 있으며, 이 결과 쌀 공급이 원활하지 않아 시민들은 여러 날 식생활에 곤란을 겪게 되었다. 그리하여 형조에서 그 진상을 조사한 뒤 쌀을 매점매석한 7명을 모두 사형에 처한 사건도 있었다. 쌀생산량이 증대되고 화폐경제가 발전함에 따라 쌀은 현금작물로서 중요한 구실을 하게 되었다.
심지어 쌀생산량이 자가소비량에 미달되는 농가도 현금소득을 얻기 위하여 쌀을 시장에 내다 팔고 대신 저렴한 잡곡을 소비하는 경향마저 있었다. 특히, 경제발전의 초기단계에 있어서 쌀은 농가의 주소득원이었으며 쌀의 경작규모는 바로 농가의 부(富)를 나타내는 하나의 척도가 되기도 하였다.
경제발전과정에서 농업의 상대적 비중은 점차 감소하고 있으며 이에 따라 쌀의 경제적인 중요성 역시 상대적으로 감소하였다. 그러나 쌀은 아직도 주식으로서 농가소득면은 물론 가계비 면에서 큰 비중을 차지하고 있다. 1998년 현재 전체 농가의 81%가 쌀농사에 종사하고 있으며, 전체농업 조수입액 중 쌀이 차지하는 비중은 40%에 달한다.
또한, 쌀은 우리의 가장 중요한 주식으로서 국민의 영양공급면에 있어서도 큰 비중을 차지하고 있다. 1997년 현재 한국 국민의 1인 1일당 에너지와 단백질 섭취량의 34%와 19%가 쌀에서 공급되고 있다는 사실은 국민영양면에 있어 쌀의 중요성을 입증하고 있다.
뿐만 아니라 쌀은 국민의 기본식품으로 가계비에서 차지하는 비중도 높기 때문에 쌀값의 상승은 도시 근로자의 가계비에 큰 압박요인이 되며, 나아가서는 노임 인상요인으로 작용하여 결국 일반물가의 상승을 유발하게 된다.
따라서 쌀값이 너무 비싸 소비자, 특히 서민층의 가계를 위협하는 일이 있어서는 안 될 뿐만 아니라 그 값이 농민의 생활비를 보장해줄 수 없을 정도로 낮아져도 안 된다는 양면성을 가지고 있다.
그러나 쌀은 수요와 공급이 비탄력적이기 때문에 수급의 불균형은 격심한 가격변동을 초래한다. 실제의 예로 1949년 정곡 한 섬당 196환(1환=100원) 하던 것이 1950년에는 906환으로 약 4배가 올랐고, 1951년에는 2,570환으로 다시 3배 상승하였으며 1952년에는 9,300환으로 거듭 3배 이상의 상승률을 나타내었다. 곡가파동의 예는 1960년대 초에도 찾아볼 수 있다.
1962년 쌀의 대흉작으로 쌀값이 폭등하기 시작하였으며, 1963년 보리의 계속된 흉작으로 식량공급이 더욱 악화되었다. 이에 따라 쌀값은 1963년도 6월 한달중에 20%, 그리고 7월중에 무려 40%라는 유례없는 상승률을 나타내어 6·25전쟁 이후 최악의 곡가파동을 겪게 되었다. 이와 같은 쌀값의 상승은 전체물가를 자극할 뿐만 아니라 전체사회의 불안을 조성시키는 요인이 된다.
따라서, 정부는 1950년 「양곡관리법」의 제정을 계기로 양곡의 수급 및 가격안정을 도모하기 위하여 양곡시장에 적극 개입하여 왔다. 1950년 이후 1960년까지 정부의 쌀 수매가격은 거의 매년 생산비보다 낮게 책정되어 정부양곡의 확보는 농민의 자유의사에 의한 판매에 의해서가 아니라 지방행정계통을 통한 강제수집에 의하여 이루어졌다.
이와 같은 저곡가제(低穀價制)의 지속은 생산농가의 증산의욕을 감퇴시켰고, 쌀 소비를 조장함으로써 식량부족은 더욱 심화되었다. 또한, 식량부족의 만성화는 국제수지를 악화시켰으며 이는 공업화를 저해하는 요인이 되었다. 뿐만 아니라 저농산물 가격정책은 도농간의 소득격차를 심화시켜 사회불안의 주요인이 되기도 하였다.
이러한 여러 문제점을 해소하기 위하여 정부는 1969년부터 이중곡가제(二重穀價制)를 실시하여 왔다. 즉, 수확기에 곡가안정을 위하여 시중가격보다 비교적 높은 가격으로 수매하였다가 단경기에 소비자보호와 곡가안정을 위하여 시중가격보다 저렴한 가격으로 방출하여 왔다.
1970년대에 들어서면서 정부는 주곡의 자급을 위하여 다수성 신품종의 개발 · 보급과 수매가격의 인상 등을 통한 쌀 증산에 총력을 기울여 획기적인 쌀 증산을 이룩하였으며 수확기에 쌀값 안정을 위하여 쌀수매량을 계속 확대하였다. 1970년까지만 하더라도 쌀의 정부 수매량은 많아야 35만 톤 정도였다.
그러나 통일벼의 보급과 이중곡가제가 본격적으로 추진되기 시작한 1973년에 쌀수매량은 48만 톤이였고, 그 이후 꾸준히 증가하여 1970년대 말에는 130만 톤을 넘었다. 1980년에 냉해로 쌀생산량이 전년도에 비하여 36%나 감소하게 되자 수매량은 생산량의 약 15% 수준인 55만 톤으로 격감하였다. 그 뒤 쌀작황이 호전됨에 따라 수매량은 점차 증가하여 생산량에 대한 수매비율은 1981년 ∼ 1988년 사이 14 ∼ 23%를 유지하였다.
1988년에는 1972년에 폐지된 국회동의제가 부활됨에 따라 쌀수매 비율은 1989년에 28.7%로 대폭 증가하였고, 1990 ∼ 1998년 동안 18% ∼ 30%로서 비교적 높은 수준을 유지하고 있다. 한편, 통일벼의 식부면적이 늘어나면서 일반벼 생산량은 줄어드는데 반해 소비자의 일반미 수요는 늘어나게 되었다.
이렇게 되자 일반계 품종의 시장 쌀값은 점점 올라갈 수밖에 없었고, 정부가 방출하는 일반미, 즉 통일계 쌀은 소비자로부터 인기를 얻지 못했다. 정부는 올라가는 일반미 가격을 억누르기 위하여 정부미 방출량을 늘려야 했고, 방출가격도 될 수 있으면 낮게 유지하였다.
예를 들어 1975년의 경우 쌀가마당 수매가격은 1만 5760원이었고, 조작비를 가산한 판매원가는 1만 7248원이 되는데, 쌀방출가격은 불과 1만3000원인 결과 가마당 4,248원의 적자가 발생하였다. 쌀의 가마당 적자는 1975년 이후 매년 증가하여 1985년에는 2만 5912원에 달하였다. 보리쌀의 경우 가마당 적자 역시 1975년의 3,603원에서 1985년에는 1만 8251원으로 크게 증가하였다.
이와 같이 양특적자는 눈덩이처럼 늘어나 1970년부터 1990년까지 21년 동안 양특적자의 누적액은 4조 5천억 원에 달한다. 그러면서도 이처럼 시장의 일반미 가격이 정부의 의도와는 달리 올라가기만 했던 것이 1970년대부터 1980년대 중반까지 일반적인 현상이였다. 결국 통일벼 품종을 위주로 한 쌀수매정책은 정부의 재정부담을 늘이면서 곡가조절능력은 오히려 약회시키는 결과를 초래하였다.
또한 정부의 시장개입이 확대되면서 양곡의 민간유통기간은 눈에 띄게 쇠퇴할 수밖에 없었고, 이는 다시 정부의 더 많은 개입을 가져오는 악순환의 원인이 되었다.
뿐만 아니라 미질 차이를 고려하지 않은 수매방식은 농가로 하여금 양질미 생산을 유도하지 못하고 소득증가에 따른 소비자들의 고품질 쌀 수요를 충족시키지 못하였기 때문에 양정은 농가, 소비자, 정부를 만족시키지 못하는 상황이 되었다.
이에 따라 정부는 1989년부터 통일계와 일반계 품종에 대한 수매가격을 차별화하는 차등수매제도를 도입했고, 1992년부터는 통일계 품종을 정부수매에서 아주 제외를 시켰다. 1988 ∼ 1992년까지 연이은 풍작과 쌀소비의 감퇴로 정부보유 재고미가 급격히 증가하여 정부의 재정부담을 가중시키고 있다.
한편, 우루과이라운드(UR)타결과 1994년 세계무역기구(WTO)의 출범에 따라 쌀은 2004년까지 관세화에 의한 수입자유화가 유예되고 최소시장접근을 1 ∼ 4%까지 연차적으로 확대키로 결정된 바 있으며, 이에 따라 쌀시장의 개방압력이 가중되고 있다.
이러한 한국 내외 양정여건의 변화에 대응하기 위하여 정부는 1993년 8월에 종전의 직접 시장개입방법에 의하여 운영을 해오던 양곡관리제도를 시장기능을 존중하는 방향으로 개혁하고자 「양정개혁방안」을 마련하였다.
이 개혁안의 기본방향은 미곡시장에 정부개입을 최소화하고 민간유통 기능을 활성화시켜 쌀 생산농가의 실직소득 향상을 도모하는 동시에 수매 · 방출제도를 시장원리에 맞는 효율적인 제도로 전환시킴으로서 소비자가 원하는 양질미가 유통될 수 있도록 유도하는데 있다.
이 개혁안이 발표됨에 따라 1992년부터 농협 수매곡에 대하여 부분적으로 실시되어 오던 조곡매출제는 정부 곡가조절용양곡(조곡)도 농협이 인수하여 공매방식을 통하여 방출되고 있다.
1997년부터 정부의 수매제도는 약정수매제로 전환이 되었다. 이 제도는 생산농가들이 파종 전에 지역농협과 출하약정을 체결하면 정부는 약정농가에 약정가격의 일부(1997년에는 40%)를 선도금으로 지급하고, 수확 후 출하약정 이행 여부는 농가의 자유 의사에 의하여 결정하도록 하였다.
앞으로 쌀시장의 개방에 대응하여 우리 쌀 농업이 국제경쟁력을 갖기 위해서는 열악한 생산구조를 근본적으로 개선하는 동시에 미곡의 유통구조와 수매 · 방출제도를 효율적으로 개선함으로서 생산성을 획기적으로 제고시킬 수 있는 종합적인 대책이 수립되어야 할 것이다.[3]
종류[편집]
- 백미
- 현미에서 과피, 종피, 호분층을 이루는 쌀겨층을 한 차례 더 깎아낸 것이 우리가 흔히 밥으로 먹는 백미다. 현미와 백미는 눈으로 보아도 쉽게 구별이 될 정도로 빛깔과 크기가 다른데, 왕겨만 벗겨낸 현미에 비해 백미로 지은 밥은 뽀얗고 기름기가 자르르 도는 것이 훨씬 먹기 좋다. 쌀의 지방분은 대부분 쌀겨층과 배아에 함유되어 있어 도정한 백미는 지방의 함유량이 적어지지만 비록 1.3%의 적은 양일지라도 쌀의 지방질은 매우 우수하다.
- 현미
- 현미는 벼알의 껍질만 벗겨내어 쌀의 생명인 쌀눈과 쌀겨가 그대로 남아 있게 한 것이다. 따라서 지방과 단백질 외에도 비타민 B, 미네랄, 필수지방산 등 쌀의 영양 성분을 고스란히 섭취할 수 있다. 그러나 옅은 황갈색 빛이 돌고 입안에서 까슬까슬한 느낌이 드는 현미밥은 백미 밥보다 밥의 질감은 훨씬 떨어진다. 또 현미는 단단한 쌀겨층으로 싸여있으므로 소화하는데 긴 시간을 요하며 흡수 이용효율이 떨어지는 단점이 있다. 이러한 단점을 보완하기 위해서는 밥을 제대로 지어야 하는데, 우선 현미는 물을 잘 흡수하지 않으므로 밥을 짓기 전에 한나절 정도 물에 담가두어야 한다. 솥도 압력솥을 쓰는 것이 속까지 고루 익고 뜸을 제대로 들일 수 있다. 압력솥이 없을 때는 두꺼운 솥을 쓰면 된다. 이때는 백미로 밥을 지을 때보다 물을 30% 정도 더 붓고, 뜸을 들일 때도 10분쯤 시간을 더 들인다. 전기밥솥을 사용할 때는 쌀과 물의 비율을 1대 1.5(백미는 1대 1.2)로 하여 뜸을 들인 다음, 다시 물을 자작하게 부어 뒤섞고 처음부터 다시 밥을 짓는 식으로 하는 것이 좋다.
- 찹쌀
- 찹쌀은 멥쌀보다 색이 뽀얗고 둥글게 생겼으며 씹히는 맛이 끈끈하다. 이러한 끈기는 아밀로펙틴 성분에서 비롯되는데 소화는 잘 되는 반면 칼로리가 높기 때문에 과식하지 않는 것이 좋다. 찹쌀의 전분은 주로 아밀로펙틴으로 구성되어 있어서 점성이 강하지만, 멥쌀은 아밀로스 함량이 15 ~ 30%로 점성이 약하다.
- 현미 찹쌀, 현미 쑥쌀
- 현미와 마찬가지로 찰벼의 왕겨만 벗긴 찹쌀을 말한다. 일반 찹쌀에는 없는 섬유소와 비타민, 무기질 등이 들어있어 건강식으로 좋다. 쌀 40%에 현미 13.9%, 쑥 26%, 그 밖에 밤, 콩, 보리, 수수가 섞여 있는 현미 쑥쌀도 있다. 쑥의 성분을 그대로 추출하여 일곱 가지 잡곡에 쌀에 부족한 칼슘까지 강화시켰기 대문에 편식을 막을 수 있다는 장점이 있다.
- 흑미(黑米)
- 일반미에 소량씩 섞어 밥을 지으면 맛과 향이 특이하며 식욕을 증진시켜 준다. 독특한 맛과 향, 색깔때문에 술, 식혜, 과자, 떡 등의 단맛이 나는 음식이나 푸딩 등에 쓰인다. 밥을 지으면 보라색으로 변하는데 이 색소 성분은 심장에도 좋고 혈관의 노화를 방지하는 기능도 있다. 따라서 흑미에서 천연색소를 추출하여 각종 식품의 첨가물로도 사용하기도 한다.
- 적미(赤米)
- 동남아시아 등지에서 나는 귀한 쌀로 뽀얀 핑크빛에 독특한 냄새가 난다. 흑미와 마찬가지로 붉은색의 천연 색소가 심장에 좋다고 한다. 밥을 지을 때 흰쌀과 섞어서 짓는다.
- 장립쌀
- 낱낱이 떨어진 보플보플한 밥을 만드는데 필요한 쌀이다. 장립쌀에는 흰쌀과 갈색 쌀 두 종류가 있는데 쌀알이 길고 가늘수록 질이 좋은 것이다. 최상품은 히말라야의 산기슭에서 자라는 '바스매티(Basmati)'라는 장립형 향미로 밥알이 길쭉하게 늘어나는 특성이 있다. 밥을 지을 때는 물의 양을 쌀 부피의 2배 조금 못되게 넣어 준다. 예를 들어 150g에는 물 275㎖가 적당하다. 물은 항상 뜨거운 물이나 육수를 사용하고 소금을 넣는 것을 잊지 말아야 한다. 소금은 쌀 150g 당 1 작은술이 좋다.
- 멥쌀
- 멥쌀의 탄수화물은 20% 정도의 아밀로오스와 80% 정도의 아밀로펙틴으로 구성되어 있다. 아밀로 펙틴은 밥의 차진 맛을 내게 하는 성분으로 이것 때문에 찹쌀이 멥쌀보다 끈기가 강하다.
- 찹쌀
- 찹쌀은 멥쌀에 비해 겉모양이 더 희고 부드러워 보이며, 탄수화물은 아밀로펙틴으로만 구성되어 있다. 찹쌀로 지은 찰밥은 소화가 잘 되며 씹히는 맛이 좋아 약식 만들 때 많이 쓰인다.
- 같은 이름을 가진 각기 다른 쌀
삐죽하고 까만 것, 통통하고 하얀 것, 기다라면서 분홍빛을 띠는 것까지 '쌀'이라는 같은 이름을 가진 각기 다른 쌀, 토양과 기후에 따라 모양은 물론 맛도 향도 다른 다채로운 세계의 쌀 품종들이다.
- 안남미
- 쌀알이 가늘고 길쭉한 장립종이다. 흔히 '안남미'라고 통칭하는데, 베트남뿐 아니라 인도네시아, 태국, 필리핀 등 동남아 일대에서 두루 재배한다. 전 세계에서 생산하는 쌀의 90%를 차지한다. 찰기가 없어 밥을 지어놓으면 밥알이 푸슬푸슬 날리지만, 맛이 가뿐하고 개운하다. 볶음밥이나 카레, 스튜같은 요리에 적합하다. 소화가 잘 돼 위장장애가 있는 사람에게 좋다.
- 고시히카리
- 자포니카 품종 가운데서 가장 사랑받는 쌀이다. 쌀알이 맑고 투명해 일본뿐 아니라 한국에서도 인기가 높다. 1944년 일본 니가타현의 농사시험장에서 개발을 시작해 1953년 후쿠이현 농사시험장에서 개발 완료, 1956년 '고시히카리'란 이름을 붙여 장려품종이 되었다. '히카리(ひかり, 빛)'라는 이름처럼 밥을 지으면 유난히 희고 광택이 우수하다. 찰기가 강하고 밥맛이 진한 편이라 밥 자체의 맛을 즐기기에 적합하다.
- 칼로스
- 칼로스(Calrose)는 '캘리포니아의 장미(California Rose)'를 줄인 말에서 유래했다. 미국 캘리포니아일대에서 생산하는 자포니카 계열의 쌀이다. 대부분의 자포니카가 짧고 차진 단립종인 반면 칼로스는 쌀알이 상대적으로 긴 중립종이다. 찰기나 구수함이 덜해 잠발라야나 캘리포니아롤, 김밥 등을 만드는 데 좋다.
- 재스민 라이스
- "태국에서 재배하는 인디카 장립종계다. 재스민 꽃을 연상시키는 그윽한 향이 난다. '프래그런트 라이스(Fragrant Rice)'라고도 부르지만, 원산지인 태국에서는 '타이 홈 말리(Thai hom mali)' 또는 '카오 둑 말리(Khao dawk mali)'라고 부른다. 햅쌀일수록 특유의 향미가 진하게 난다. 끈적한 찰기는 없지만 찌거나 밥을 지으면 낱알끼리 살짝 달라붙을 정도로 부드럽다. 쌀겨를 남겨 도정한 재스민 라이스는 섬유질, 비타민E, 마그네슘 등이 백미보다 풍부하다.
- 마다가스카르 핑크 라이스
- 분홍색보다 빨간빛에 가까운 색을 띤다. 핑크 라이스는 현미 일종이다. 벼의 왕겨는 벗기고 붉은색이 도는 쌀겨를 그대로 두어 특유의 색을 내는 것이다. 식감이 깔깔하지 않고 부드러운 편이다. 압력밥솥으로 조리하면 더욱 부드러운 질감의 밥을 즐길 수 있다.
- 바스마티
- 라이스 인도에서 주로 생산하는 장립종계다. 인도어로 바스마티(Bas-mati)는 '향긋한 것'이라는 뜻으로, 그 이름처럼 특유의 꽃내음이 나는 것이 특징이다. 바스마티 라이스는 '당뇨쌀'이라고도 부른다. 당지수가 60 안팎으로, 당뇨 환자도 걱정 없이 먹을 수 있다. 열량이 낮아 다이어트에도 도움이 된다. 갓 수확한 신선한 햅쌀이 맛있는 여느 쌀과 달리 바스마티 라이스는 12 ~ 18개월 묵혔다 먹으면 풍미가 더 좋아진다.
- 와일드라이스
- 흑미를 길쭉하고 뾰족하게 만들어놓은 것 같은 생김새가 특이하다. 인디언이 즐겨 먹어서 '인디언라이스'라고도 불린다. 와일드라이스는 엄밀히 말해 쌀이 아닌 줄풀의 씨앗이다. 추운 호숫가 주변에서 야생으로 자라기에 생산량이 적다. 곡물에 부족한 단백질 함량이 높으며 필수 아미노산, 비타민, 미네랄, 섬유질이 풍부하다. 수분을 잘 흡수하지 않아 일반쌀보다 밥을 짓는 데 시간이 오래 걸린다. 톡톡 터지면서 쫀득쫀득한 식감이 일품이다.
- 아보리오 라이스
- 이탈리아에서 생산하는 리소토용 쌀만 40여 종에 이르는데, 가장 대표적인 것이 아보리오 라이스(Arborio Rice)다. 일반 쌀보다 길이가 짧고 통통한 단립종이다. 글루텐과 녹말이 많이 함유되어 있어 밥알이 단단하고 끈기가 높다. 식감이 부드럽고 다른 재료와 조리하면 시너지 효과가 좋다. 깨끗이 씻은 아보리오 라이스는 체에 밭쳐 물기를 뺀 후 사용한다. 냄비에 기름을 두르고 살짝 투명해질 때까지 볶다가 육수를 한 국자씩 넣어가며 부드럽게 익힌다.[4]
각주[편집]
참고자료[편집]
- 〈쌀〉, 《위키백과》
- 〈쌀〉, 《식물학백과》
- 〈쌀〉, 《한국민족문화대백과》
- 농업용산소오존발생기, 〈쌀의 종류와 품종에 대하여〉, 《네이버 블로그》, 2018-05-25
같이 보기[편집]