포청천
포청천(중국어:包靑天bāo jīng tiān)은 중국 송나라 때의 문신이자 유명한 정치가이다.
개요
포청천은 송나라의 정치가. 지방관으로서 부당한 세금을 없앴으며, 판관이 되어 부패한 정치가들을 엄정하게 처벌하였다. 청백리로 칭송되었으며, 병사 후 예부상서(禮部尙書)에 추증되었다. 관료생활을 하는 동안 공평하고 사사로움이 없는 정치를 펼친 것으로 유명하다. 지방관으로 있을 때는 부당한 세금을 없애고 백성들의 억울한 사건을 명쾌하게 해결해 주었다. 판관이 되자 부패한 정치가들을 엄정하게 처벌하였으며, 높은 벼슬에 오른 뒤에도 소박하고 검소한 생활을 하여 청백리로 칭송되었다.
1062년 병사하자 예부상서(禮部尙書)에 추증되었다. 문집으로 《포증집(包拯集)》《포효숙공주상의(包孝肅公奏商議)》 등이 남아 있다. 남송(南宋)과 금(金)나라 때부터 그를 주인공으로 한 문학작품이 등장하였다. 명나라 때는 수백 권으로 된 소설화본 《포공안(包公案)》 등, 청나라 때는 《용도공안(龍圖公案)》 《삼협오의(三俠五義)》 《칠협오의(七俠五義)》 등의 장편소설 등이 있다.[1]
생애
포증은 어려서부터 효자로 유명하였고 관직에 나선 이후로는 청렴한 관리로서 유명했다. 진종 함평 2년 4월 11일에 여주부(廬州府) 합비현(合肥縣: 지금의 안휘성 합비)에서 포원외의 셋째 아들로 태어났다. 본명은 증(拯)이고 자는 희인이며, 청천은 호였다. 위로 20여 세 연상인 친형 2명이 이미 출가해 있었다. 어머니는 며느리들과 비슷한 때 임신한 것을 부끄러워하여 그를 지우려 하였으나, 태몽을 꾸고 그만두었다 한다.
얼굴이 검었다고 하며, 드라마에서는 양 미간 사이에 초승달이 있는 것처럼 묘사되었으나, 실제 그에게는 초승달은 없었다. 어려서 포가촌의 일가, 하인의 자제들과도 스스럼없이 어울렸다 하며 아버지 포원외가 들인 독선생을 모시고 수학했다. 뒤에 음서로 관직에 올랐으나 1027년(인종 5년)에 정묘과(丁卯科) 진사(進士)시험에 응시하여 급제하였다. 건창현지현(建昌縣知縣) 등을 지내고 연로한 부모를 봉양하기 위하여 사임하였다.
포청천은 부모의 3년 상을 마친 뒤 1037년에 관직에 복귀하여 천장현지현(天長縣知縣), 지단주사(知端州使)를 거쳐 감찰어사대행(監察御史代行), 감찰어사(監察御史)로 있을 때 고관들의 부당한 처사를 간하여 탄핵시켰다. 이후 삼사호부판관(三司戶部判官), 하북로전운사(河北路轉運使) 등을 지냈다. 1050년에 삼사호부부사(三司戶部副使)를 거쳐 지간원(知諫院)으로 재직 중 권세를 휘두르는 귀인 장씨의 인척 장요좌(張堯佐)를 탄핵하였다. 이후 영주부윤(瀛州府尹)과 양주부윤(揚州府尹)을 거쳐 고향 여주(廬州)의 부윤으로 부임했으며, 이후 다시 지주(池州)·강녕(江寧)의 부윤을 거쳐 1057년 3월 동경 개봉부의 부윤으로 부임, 1060년 6월에 이임하였다.
포청천이 개봉부윤으로 부임 시 받았다는 용작두, 호작두, 개작두는 실제 카이펑에 현존하고 있다. 작두는 사형(死刑) 집행 시에만 쓰던 것으로, 용작두는 황족과 왕족, 호작두는 관리와 귀족, 개작두는 일반 평민과 천인에게 적용하던 사형기구였다. 포청천은 개봉 부윤으로 재직 중, 고관대작을 가리지 않고 공정한 판결을 내렸으며, 개봉 주변의 마적과 만리장성을 넘어오는 유목 민족 도적을 소탕하였다. 또한 권력과 지위를 이용한 부패와 비리를 추상같이 척결하여 이름이 높았다. 이후 삼사사(三司使)를 거쳐 1061년 추밀원부사(樞密院副使)가 되었다.
포청천은 1062년 5월 24일에 개봉에서 병으로 사망했다. 당시 포증은 향년 63세였으며, 이때 시중에는 그가 독살당했다는 설이 돌기도 하였다. 인종은 그에게 증 동해군개국후(東海郡開國侯)에 추봉(追封)하고 예부상서(禮部尚書)에 추증했다가 다시 이부상서로 가증(加贈)하였다. 시호는 효숙(孝肅)이다. 따라서 효숙공으로 부르기도 한다.
포청천에 관한 작품
포청천(999년 4월 11일 ~ 1062년 5월 20일)은 1027년에 진사시험에 합격하고 관직은 개봉부윤을 거쳐 추밀원부사에 이르렀으며 사후 예부상서와 이부상서에 추증되고 동해군개국후(東海郡開國侯)에 추봉 되었다. 사후 중국 무속에서 신으로도 숭배되며, 사후 지옥 중 5번째 지옥을 주관하는 심판관이 되었다는 전설도 나타났다. 별칭으로는 포룡도(包龍圖), 포흑자(包黑子), 포흑탄(包黑炭)이라는 별칭도 있으며 중국에서는 보통 포공, 포효숙, 포청천 등으로 부른다. 중국 여주 안휘성 합비 출신이다.
포청천은 사심 없는 판결로 유명하였으며 당파에 구애됨이 없고, 고관대작에게 아부, 타협하지 않아 청백리의 대명사가 되었으며 사후 백성들은 그를 그리워하였다. 사후 100년이 지나기도 전인 남송(南宋)과 금(金)나라 때부터 그를 주인공으로 한 희극과 시, 문학 작품이 등장하였다. 명나라 때는 수백 권으로 된 소설화본 《포공안(包公案)》, 《포룡도판백가공안(包龍圖判百家公案)》 등, 청나라 때는 《용도공안(龍圖公案)》, 《삼협오의(三俠五義)》, 《칠협오의(七俠五義)》 등의 장편소설 등이 나타났다.
1879년에 작가 석옥곤이 《포공안(包公案)》, 《용도공안(龍圖公案)》을 참고하여 120회 본으로 축약한 《삼협오의》(三俠五義)가 혼탁한 청나라 말기의 정세에 유행하면서 대중화되었다. 삼협오의는 쉬운 문자에 책 중간중간 그림을 삽입하는 등의 기법을 활용하여 일반 시민들이 쉽게 알아볼 수 있었다고 한다. 1900년대부터는 청나라, 중화민국의 라디오와 텔레비전 드라마로 방영되기 시작하여 이후 텔레비전 드라마, 영화, 연극화되었다. 한국에는 1993년 작 드라마 《판관 포청천》이 소개됨으로써 널리 알려지게 되었다. 중화인민공화국 수립 후 카이펑의 청심루에는 포청천의 대형 동상이 세워졌다.
포증은 흔히 포청천(包靑天)으로 많이 알려져 있는데, 중화민국에서 그를 소재로 한 드라마가 제작되었다. 《판관 포청천》과 시나리오를 공유하는 《칠협오의》라는 드라마도 같이 제작되었는데, 《칠협오의》에서 포청천은 주인공이 아니라 오의라 불리는 다섯 형제의 주변 인물로서 등장한다.
청백리 포청천의 관료 생활
포청천은 판관이지만 그의 직업은 법관과는 다르다. 당시 송나라는 전근대 동아시아가 다 그랬듯이 삼권분립 체제의 도입 이전이라 황제가 임명한 행정관료들이 수사와 재판, 처벌을 모두 담당했다. 포청천 역시 여러 곳에서 지방관을 역임하는 동안 고을 주민들의 재판도 함께 맡아 처리한 것이지, 현재의 판사처럼 재판 업무만 하는 사람으로 생각해서는 안 된다. 고려나 조선 시대의 수령, 즉 사또들이 행정을 담당하는 지방관인 동시에 직접 죄인들을 수사하고 처벌을 내리는 일도 맡은 것을 생각하면 이해하기 쉽다.
특히 오늘날의 서울특별시장에 해당되는 송의 개봉부윤을 지낸 것이 가장 유명하다. 그의 활약상을 보면 판사 + 검사 + 경찰의 콤비네이션이다. 포청천이 개봉부윤으로 활동한 기간은 가우 원년(1056년) 12월부터 가우 3년(1058년) 5월까지의 1년 6개월간으로 생각보다 짧은 편이지만, 개봉부윤에 취임하기 전에도 부패한 고관들을 탄핵하는 등의 활약도 하였다. 포증은 1037년에 관직에 복귀하여 천장현지현(天長縣知縣), 지단주사(知端州使)를 거쳐 감찰어사대행(監察御史代行), 감찰어사(監察御史)로 있을 때 고관들의 부당한 처사를 간하여 탄핵시켰다. 이후 삼사호부판관(三司戶部判官), 하북로전운사(河北路轉運使) 등을 지냈다. 1050년에 삼사호부부사(三司戶部副使)를 거쳐 지간원(知諫院)으로 재직 중 권세를 휘두르는 귀인 장씨의 인척 장요좌(張堯佐)를 탄핵하였는데 장요좌의 경우 인종의 외척이라 할 수 있기에 당대 정국을 흔드는 대형사건이었다.
포청천은 개봉 부윤으로 재직 중, 고관대작을 가리지 않고 공정한 판결을 내렸으며, 개봉 주변의 마적과 만리장성을 넘어오는 유목민족 도적을 소탕하였다. 또한 권력과 지위를 이용한 부패와 비리를 추상같이 척결하여 이름이 높았다. 이러한 포청천이라 불리는 포증이 송나라 수도를 책임지는 개봉부윤으로 임명된 이유는 송인종의 결단이 있었다. 당시 포증의 관직은 3사호부부사(三司戶部副使)였는데 5품에서 3품으로 초고속 승진을 한 것이다. 이때 처음 맡긴 직책이 개봉부윤(정확히는 권지개봉부사) 및 용도각직학사(龍圖閣直學士)였다.
추밀부사·간의대부는 정2품직이고 사망 후에는 제후로 격상되는데, 인종 치세의 사료를 봐도 공이 있는 신하가 죽었다고 저렇게 벼슬을 붙여준 경우는 포증이 유일무이하다. 이러한 그의 업적으로 포증은 오늘날 중국 사회에서 정의의 문화적 상징으로 존경받는다. 사람들은 그를 존경하여 묘를 만들고 거의 900년간 제사를 올렸으나, 1960년대엔 홍위병들에게 박살 나는 수난을 겪기도 했다.
평가
포청천(포증)은 999-1062년 63세 사망한 명판관이며 청백리이다. 송나라 인종의 카이펑부 최고 행정장관인 부윤을 맡은 것이 1056년 58세이다. 얼굴이 검고 양 미간 사이에 초승달이 있다고 하며 사형 집행 시 사용하는 작두로는 왕족용 용작두, 귀족 관리용 호작두, 평민용 개작두가 있다. 권력형 부정 부패 비리를 엄단하고 공평한 재판을 했으며 억울한 민중 편에 섰다.
포청천은 관료생활을 하는 동안 사적인 인연에 얽매이지 않고, 사심 없이 공평하고 사사로움이 없는 정치를 펼쳐 인망이 높았다. 중국 각지의 무림의 고수들이 자원해서 그를 신변보호를 해주기도 하였다. 지방관으로 있을 때는 부당한 세금을 없애고, 귀족과 황족, 외척 등에 의한 횡포로 고통받는 민중의 억울한 사건을 명쾌하게 해결해 주었고, 강도와 마적떼를 소탕하였다. 판관이 되자 부패한 정치가들을 엄정하게 처벌하였으며, 사치하지 않고 소박하고 검소한 생활을 하여 청백리로 칭송되었다. 그가 죽자 민중들은 그를 그리워하였고, 이후 민담과 전승의 대상이 되었다.
동영상
각주
- ↑ 〈포청천(包靑天,999~1062)〉, 《두산백과》
참고자료
- 〈포청천(包靑天,999~1062)〉, 《두산백과》
- 〈포증〉, 《위키백과》
- 〈카이펑시〉, 《위키백과》
- 〈포증〉, 《나무위키》
- 레드휘슬, 〈역사 속 청렴이야기(포증-1)〉, 《네이버블로그》, 2021-12-30
- 골드만 싹쓰리, 〈포청천 포증〉, 《네이버블로그》, 2024-12-02
- 사인암, 〈단주의 관사 벽에 쓰다 - 포증〉, 《네이버블로그》, 2022-06-04
같이 보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