베네치아 본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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베네치아 본섬은 베네치아의 역사적 중심지로서, 이탈리아 북동부의 베네치아만에 위치한 섬이다. 베네토 지역의 수도이다. 이 도시는 약 126개의 작은 섬들로 이루어져 있으며, 이 섬들은 운하와 472개의 다리로 연결되어 있다.[1]
목차
개요[편집]
베네치아 본섬은 아드리아해 북서부에 위치하며 산 마르코 광장(Piazza San Marco), 리알토 다리(Ponte di Rialto), 두칼레 궁전(Palazzo Ducale) 등 많은 유명한 관광 명소가 위치해 있다. 베네치아 본섬은 중세와 르네상스 시대에 중요한 금융 및 해상 강국이었으며, 실크, 곡물, 향신료 등의 무역 중심지로 번영했다. '베네치아'라는 이름은 기원전 10세기까지 이 곳에 살던 '베네티인'들에게서 유래하였다. 베네치아는 옛 베네치아 공화국의 수도로서, 중세와 르네상스 기간 동안 유럽의 해상무역과 금융의 중심지였다. 또한 십자군 전쟁과 레판토 해전에 휘말리며 유럽의 중앙 정세의 한가운데에 서있었던 도시이기도 했다. 베네치아는 13세기부터 17세기까지 비단, 향료, 밀을 거래하는 주요 창구였고, 유럽에서 가장 부유한 도시들 중 하나였다. 나폴레옹 전쟁과 빈 회의 이후, 베네치아는 오스트리아에 합병되었고, 1866년에 이탈리아가 통일되며 이탈리아로 돌아오게 되었다. 베네치아는 또한 무라노(Murano), 부라노(Burano), 토르첼로(Torcello)와 같은 주변 섬들로도 유명하다. 무라노는 유리 공예로, 부라노는 수공예 레이스로, 토르첼로는 베네치아에서 가장 오래된 교회가 있는 곳으로 알려져 있다. 베네치아는 독특한 수상 도시로서, 매년 수많은 관광객들이 방문하는 인기 있는 여행지이다. 베네치아는 세계에서 가장 아름다운 도시들 중 하나로 꼽힌다. 베네치아의 아름다움은 중세부터 유명했고, 물의 도시, 아드리아해의 여왕, 가면의 도시 등 다양한 별명들을 가지고 있다. 베네치아는 또한 예술, 건축 분야에서도 매우 지명도가 높은데, 르네상스 시대에 문화 발전의 중심지 역할을 하였으며 유명한 작곡가 안토니오 비발디의 고향이다. 다만 지구 온난화로 인해 수면이 올라가며 도시가 물에 잠기고 있고, 관광객들이 밀려 들어오며 환경 오염 등에 시달리고 있지만 베네치아는 여전히 세계에서 가장 매혹적인 도시이자 상징으로 한 손에 꼽힌다.[2]
이름[편집]
'베네치아'라는 이름은 라틴어 단어 'Venetia'에서 유래했다. 이 단어는 로마 제국 시대에 해안 지방을 통칭하여 부르던 단어였다. 한편 이 라틴어 단어 'Venetia'는 이 곳에 살던 '베네티인'들의 이름에서 따온 것으로 추측된다. 인도에도 비슷한 이름을 가진 부족들이 존재하는 것을 토대로 하여, 몇몇 학자들은 '베네티'라는 뜻이 인도-유럽어에서 '사랑'을 의미하는 단어였고, 따라서 베네치아의 어원은 '매혹적인', '사랑스러운' 등의 뜻을 담고 있다고 주장한다. 다만 라틴어로 'Venetus'가 '바다처럼 푸르다'라는 뜻을 지니고 있는 것을 보아, 베네치아가 이 단어에서 음을 따왔을 가능성도 있다.
지리[편집]
베네치아는 이탈리아 북동부 베네토 지역에 위치한 도시이다. 이 도시는 118개의 작은 섬들로 이루어져 있으며, 운하로 나뉘고 438개의 다리로 연결되어 있다. 베네치아의 역사적 중심지는 카나레조(Cannaregio), 카스텔로(Castello), 도르소두로(Dorsoduro), 산 마르코(San Marco), 산 폴로(San Polo), 산타 크로체(Santa Croce)라는 여섯 개의 구역(세스티에리)으로 나뉘어 있다.
베네치아는 알프스에서 베네토 평원을 가로질러 동쪽으로 흐르는 강들에 의해 바다로 씻겨 내려온 충적토 위에 자리 잡고 있다. 이 충적토는 아드리아해의 머리 부분에서 동쪽에서 서쪽으로 흐르는 해류의 작용으로 길게 늘어선 제방(리디)으로 형성되었다.[3]
역사[편집]
베네치아의 설립[편집]
베네치아의 설립과 관련된 명확한 기록은 현재 남아있지 않지만, 역사학자들은 로마 제국이 쇠망하며 국경선이 무너지자 훈족들이 몰려왔고, 이들을 피하기 위해 로마인들이 6세기에 베네치아로 몰려와 대피했다는 설에 중점을 두고 있다. 이같은 주장은 베네치아를 세운 12개의 가문들이 모두 로마의 귀족들과 관련이 있는 혈통이라는 점에서 뒷받침되고 있다. 로마인들이 이곳으로 이주하기 전, 베네치아는 몇몇 섬들이 떠있는 습지대에 불과했으나, 로마인들이 이주하기 시작하며 대도시로 발돋움할 기반을 닦게 된다.
기원후 2세기, 로마 제국은 서서히 무너지기 시작한다. 게르만족들이 넘어와 이탈리아 본토의 도시들을 공격하기 시작하고, 고트족들이 로마를 거의 반파 직전으로 몰아갔으며, 아틸라가 이끄는 훈족들이 로마 내부로 들어오기 시작하며 로마 제국은 치명타를 맞게 된다. 로마 제국은 이와 같은 상황을 극복하기 위해 동서로마로 나누어 각자 통치하는 전략을 채택한다. 이때 베네치아는 동로마 제국의 관할 하에 들어가게 된다. 하지만 베네치아는 그 지역적 특수성 때문에 동로마 제국의 감독을 제대로 받지 못했고, 이는 베네치아의 독립성을 키우는 결과를 낳는다.
베네치아의 첫 총독(도제)은 697년에 선출된다. 726년에 동로마 황제가 성상 파괴 운동을 지시하고, 교황의 부추김을 받은 베네치아의 시민들은 이에 크게 반발하며 반란을 일으켰다. 당시의 동로마 총독은 이와 같은 사태에 책임을 지고 사형당했고, 지도자를 잃은 베네치아의 관료들은 큰 혼돈에 빠지게 된다.
베네치아의 시민들은 동로마가 임명한 지도자 대신에 그들만의 새로운 총독을 뽑기로 결심했고, 이것이 바로 117명에 이르는 베네치아 총독의 계보의 시작이었다. 다만 이와 같은 행동이 동로마 제국에 대한 반란 혹은 배신으로까지는 이어지지 않았다.
751년, 롬바르드인들이 점차 동로마 제국의 영토를 잠식해 들어가기 시작했고, 베네치아는 홀로 떠있는 동로마 제국의 전초기지처럼 고립되어갔다. 동로마의 총독은 안전을 위하여 물 한가운데에 떠있는 베네치아로 그 주거지를 옮겼고, 그를 따라 수많은 난민들이 몰려들며 베네치아는 점차 그 규모를 확장시켜나갔다. 성 마르코 대성당의 원형이 바로 이때 지어졌다.
샤를마뉴 대제는 베네치아를 정복하기 위해 노력했다. 교황을 시켜 베네치아에게 압력을 넣었으며, 6개월에 걸친 포위 공격을 통해 베네치아를 함락시키려 노력하였으나 비용, 기후, 전염병과 같은 문제로 후퇴해야만 했다. 결과적으로, 샤를마뉴 대제와 동로마의 황제 간의 강화가 이루어져 베네치아는 영구적인 동로마 제국의 영토로 인정받았고, 샤를마뉴 대제는 도시를 이용한 무역의 권리를 부여받았다.
828년, 베네치아의 상인들이 알렉산드리아에 보관되어 있던 성 마르코의 성물을 베네치아로 훔쳐오며 도시의 명성은 더더욱 증가했다. 이때 주교좌도 베네치아로 옮겨왔으며, 베네치아의 경제적, 정치적 권력이 커지며 결국 베네치아는 동로마 제국의 통치를 벗어나게 된다.
영광의 시대[편집]
9세기에서 12세기 동안, 베네치아는 강력한 도시 국가로 성장했다. 아드리아 해에 면해 있는 베네치아의 위치는 해상 무역에서 유리한 위치를 점할 수 있도록 도와주었고, 베네치아는 강대한 해군력을 바탕으로 상인들을 보호하며 유럽 해상 무역의 중심지로 떠오르게 된다.
베네치아 공화국은 해적의 위협을 막기 위해, 아드리아 해 동쪽의 여러 섬들을 점령하고 전초기지들을 지었다. 베네치아는 본국으로 흘러드는 밀의 안정적인 수입을 보장하고, 소금 무역을 장악하며 거대한 해상 제국을 건설하였고 지중해의 크레타, 키프로스 섬을 장악하며 에게 해의 대부분을 차지하였다. 당시 베네치아는 근동의 최강국들 중 하나였다.
베네치아는 비록 동로마 제국에서 독립해서 나오기는 했지만, 여전히 동로마 제국과 밀접한 관계를 맺기 위해 노력하였다. 베네치아는 동로마 제국을 지원하고 각종 공로를 세워서 동로마 제국으로부터 무역 특권을 부여받았다. 이와 같은 특권은 총 2번 수여되었는데, 첫 번째로 수여되었을 때는 베네치아가 동로마 제국에게 경의를 표했으나, 나중에 베네치아의 권세가 강대해지며 두 번째로 수여받았을 때에는 동로마 제국과 동등한 위치에 서려 하였다.
베네치아는 4차 십자군 전쟁에 참여하였다. 그들은 1204년에 콘스탄티노플을 점령하고 대약탈을 하였으며, 수많은 동로마 제국의 문화재들이 베네치아로 흘러들어왔다. 성 마르코 대성당 입구 위에 올려져 있는 청동으로 된 4마리의 말들도 이때 들어온 것이다. 콘스탄티노플이 함락된 이후, 동로마 제국은 라틴 제국과 베네치아가 각각 장악하는 형식으로 분열되었다. 지중해 세계에서 베네치아의 발언권은 갈수록 거세졌다. 한편, 동로마 제국으로서는 콘스탄티노플의 함락은 말 그대로 치명타였다. 이미 아나톨리아 반도를 잃음으로써 국력이 소진되었고, 50년 후 콘스탄티노플을 되찾음에도 불구하고 동로마 제국은 멸망할 때까지 과거의 영광을 다시는 재현하지 못했다.
아드리아해에 위치한 베네치아는 동로마, 이슬람 세계와 거래하며 막대한 부를 쌓았다. 13세기 후반, 베네치아는 유럽에서 가장 부유한 도시였고 33,000척에 달하는 배를 소유하고 있었다. 베네치아의 유력 가문들은 앞다투어 아름다운 궁전을 지었고, 재능있는 예술가들을 경쟁적으로 후원하였다. 도시는 대귀족들의 대표들로 구성된 의회가 통치하였다. 의회는 모든 공무원에 대한 인사권이 있었으며, 이 중에서도 선발된 10인 위원회가 도시를 총체적으로 경영했다. 의회의 의원들 중 가장 강력한 권력을 가진 자가 총독으로 선출되었으나, 이들이 절대적인 권력을 가진 것은 아니어서 약하거나 실패한 총독들은 사퇴하거나 수도원으로 칩거하도록 강요받기도 하였다. 베네치아에서 정치와 군대는 철저히 분리되어 있었고, 몇 안 되는 총독의 직속 근위병들을 제외하면 주로 용병들을 고용하여 국가를 방위하였다. 베네치아 역사상, 베네치아인들은 대부분 전쟁을 상업적 거래의 일부분으로 보았다.
베네치아인들은 전통적으로 로마 가톨릭 신자였으나, 실리에 충실했기 때문에 전 유럽이 신교와 구교로 나뉘어 싸울 때에도 크게 관여하지 않았다. 이와 같은 교황에 대한 지지 부족은 교황에게 큰 반발을 샀으며, 여러 차례의 종교 재판으로 위협을 당했다.
쇠퇴의 시작[편집]
15세기, 베네치아는 테살로니카를 점령하기 위해 오스만 제국과 전쟁을 벌였지만, 당시 국력이 승천하던 오스만 제국 군대를 상대로 패배하고 말았다. 이는 이후 베네치아의 오랜 쇠퇴를 알리는 신호탄이었다. 또한 오스만 제국의 메흐메트 2세가 콘스탄티노플을 점령하고 베네치아의 동부 무역로를 막아버림으로써 베네치아는 심각한 경제적 타격을 입게 된다. 게다가 크리스토퍼 콜럼버스가 신대륙을 발견하고, 바스코 다 가마가 베네치아를 거치지 않고 인도로 갈 수 있는 신항로를 개척하면서 중계 무역을 주로 했던 베네치아의 상업은 급격히 쇠퇴하기 시작한다. 프랑스와 영국, 스페인 등이 빠르게 해외의 식민지들을 개척하고 있던 도중, 유럽 동부에 갇혀 있던 베네치아는 식민지들을 거의 얻지 못하며 더더욱 국제적 경쟁에 뒤처지게 되었다.
14세기와 16세기에 흑사병이 대대적으로 유행하며 베네치아의 인구가 감소했고, 전염병이 돌아 5만 명의 시민들이 몰살당했다. 1630년, 이탈리아 전역에 전염병이 창궐하며 당시 시민의 3분의 1이 죽으며 베네치아의 쇠퇴는 더더욱 가속화되었다. 르네상스 후반에 이르러, 포르투갈이 국제 무역의 새로운 중심지로 떠오르며 베네치아는 점차 그 화려했던 명성을 잃어가기 시작했다. 다만 베네치아는 18세기 후반까지 농산물들을 대량 거래하며 제조업의 중심지로 남아있었다.
현대의 베네치아[편집]
18세기 내내, 베네치아는 유럽 전체에서 가장 우아하고 화려한 도시였다. 재능있는 예술가들이 베네치아에서 예술, 건축, 문학의 꽃을 피웠다. 하지만 나폴레옹이 1797년 5월 베네치아를 점령하며 오랫동안 베네치아가 누려왔던 독립도 그 종지부를 찍게 된다. 당시 베네치아에서 유대인에 대한 차별이 전 유럽에서 가장 적었음에도 불구하고, 도시의 유대인들은 나폴레옹을 일종의 구원자로 여겼고, 나폴레옹은 이를 화답하며 유대인 격리 구역을 없애버렸으며 차별을 철폐하였다.
1814년에 나폴레옹이 패망하며 베네치아는 오스트리아 제국에 속하게 된다. 1849년에 반란이 일어나 베네치아 공화국을 재수립하였으나, 1866년에 이탈리아 통일 전쟁이 일어나며 결국 베네치아는 통일 이탈리아로 흡수되게 된다.
제2차 세계대전 동안, 베네치아는 공습이나 폭격에서 거의 안전했다. 연합군 공군이 독일 잠수함을 요격하기 위한 포격이 베네치아에서 이루어진 거의 유일한 전투 사태였고, 그마저도 베네치아의 건물들에 피해를 주진 않았다. 다만 구도심 외곽의 철도, 산업 지대들은 지속적으로 공습을 받았다. 1945년 4월, 연합군이 진군하여 드디어 무솔리니 정권 하에서 신음하던 베네치아를 해방시킴으로써 다시 베네치아는 평화를 되찾게 된다.
현재의 베네치아는 이탈리아의 상징과도 같은 도시이다. 아름다운 운하와 항구들은 이탈리아인들이 세계에 자랑하는 문화유산들이고, 매년 엄청난 관광객들을 끌어들이고 있다. 다만 지구 온난화, 과도한 관광객으로 인한 환경 오염 등의 문제들도 있지만, 여전히 베네치아는 '아드리아 해의 보석’이라는 별명으로 불릴 만한 아름다움을 지니고 있다.[4]
관광[편집]
베네치아 세계에서 가장 아름답고 유명한 관광지들 중 하나이다. 하루 최대 6만 명에 달하는 관광객들이 이 도시를 드나들며, 연간 2천 2백만에서 3천만에 달하는 사람들이 베네치아를 방문한다.
도시의 아름다운 도시 풍경, 풍부한 문화유산, 축제들은 수많은 사람들을 끌어들였다. 19세기 베네치아는 수많은 카페들과 호텔들로 인해 유럽의 유행 중심지가 되었고, 20세기 들어 그 명성을 꾸준히 이어갔다. 베네치아는 베네치아 영화제, 다양한 국제 컨퍼런스 등 다양한 행사들의 개최지가 되었고, 예술과 문화, 경제, 영화 등과 같은 요소들을 사용해 전세계에서 사람들이 몰려오게 하고 있다.
오늘날 베네치아에는 산 마르코 대성당, 두칼레 궁전 등과 같은 수많은 문화유산들이 있다. 엄청나게 많은 수의 연예인, 비평가, 유명인들이 이를 보기 위해 베네치아를 방문하고 있으며 이 사람들이 베네치아에서 연 1억 5천만 유로 이상을 소비하고 있다고 한다. 다만 베네치아의 이같은 관광적 명성은 베네치아에게 악영향을 끼치기도 하는데, 베네치아에 거주하고 있는 사람들은 사생활을 현재 심각하게 침해당하고 있으며, 외국인들이 베네치아 도심의 주택을 구입하기 위해 몰려들며 정작 원래 살고 있던 베네치아인들은 자신들의 정착지를 떠나야만 했다.
지도[편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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동영상[편집]
각주[편집]
참고자료[편집]
같이 보기[편집]
서유럽 같이 보기[편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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