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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4년 6월 30일 (일) 11:21 기준 최신판
여의도(汝矣島)는 대한민국 서울특별시 영등포구 여의도동에 딸린 한강의 하중도(河中島)이다.[1]
목차
개요[편집]
여의도는 조선시대에 양화도·나의주 등으로 불렸다. 현재 국회의사당 자리인 양말산은 홍수에 잠길 때도 머리를 살짝 내밀고 있어서 나의 섬 너의 섬하고 말장난처럼 부르던 것이 한자화되어 여의도가 되었다고 한다. 여의도는 행정구역 상으로는 서울특별시 영등포구 여의도동(법정동)에 속하며, 여의동(행정동)이 관할한다. 여의도는 한강 건너 강북 일대와 서강대교, 마포대교, 원효대교 등으로 연결되어 있으며, 샛강을 사이에 두고 영등포 일대와 여러 작은 다리로 연결된다. 여의도공원이 섬 가운데를 가로지르며, 그 기준으로 서쪽에는 국회의사당과 KBS 사옥이 자리해 있고 동쪽에는 63빌딩, 서울국제금융센터 (IFC), LG트윈타워, 전경련회관, 파크원 타워 등과 같은 고층건물이 많다. 지하철역으로는 수도권 전철 5호선, 서울 지하철 9호선의 여의도역, 수도권 전철 5호선의 여의나루역, 서울 지하철 9호선의 국회의사당역, 샛강역 등이 있다.
지금은 섬의 정체성을 잃은 지 오래다. 섬과 육지 사이는 거의 개울 수준이라서 샛강이라고도 한다. 하지만 올림픽대로로 인해 시가지가 격리되어 있어 섬으로서 고립감은 어느 정도 유지되고 있다. 실제로 여의도 내에서는 (여의도 주민이든지, 여의도에 통근하거나 통학 등의 용무상 왔다갔다하는 타지 사람이든지 간에) '영등포'라 하면 샛강 건너편에 있는 '영등포구 본토(또는 영등포역 일대)'를 의미하는 경우가 많다. 국회의사당, 금융감독원, KBS 등 국가적으로 핵심 시설이 모여있는 섬으로서 한때는 한국 정치, 경제, 방송계 자체를 '여의도'로 일컫는 경우도 있었을 정도로 강한 상징성을 가졌었다. 다만 2004년 SBS의 목동 이전을 시작으로 KBS를 제외한 나머지 방송사들이 여의도를 떠나면서 방송의 경우에는 상징성이 떨어졌다. 정치는 여전하고,[2] 경제 부분은 예전만큼은 아니지만 여전히 국내 최대 금융가긴 하다. 여의도 금융단지는 부산의 문현금융단지와 함께 금융중심지로 지정된 바 있다. 또한 서울특별시의 2030도시계획에 의하면 3도심 중 하나로 CBD, GBD와 함께 YBD로 많이 언급된다. 한편, 2010년대 이후부턴 IFC몰이나 파크원의 현대백화점 건설도 시작되며 상업지구도 나름 발달하고 있다.[2][3][4]
역사[편집]
명칭의 기원[편집]
옛날 여의도는 잉화도(仍火島), 나의도(羅衣島), 여의도(汝矣島) 등으로 불렸는데, 이 명칭들의 유래는 '넓은 섬'이라는 뜻이다.
- 잉화도(仍火島): 잉(仍)은 고유어 '느' 또는 '너'를 한자 표기로 옮길 때 사용되는 글자이다. 또한 화(火)의 뜻인 '불'은 중세국어에서 '블'이라고 표기되었으며, 이를 종합해보면 '너블섬' 정도의 지명을 음차한 것임을 알 수 있다.
- 나의도(羅衣島): 나(羅)는 '너'를 음차한 것이고, 옷 의(衣)자는 '벌'을 훈차한 것으로 보인다. 결국 '너벌섬'이라는 뜻. 나의주(羅衣洲)라 불리기도 하였다.
- 여의도(汝矣島): 여(汝)자는 '너 여'자로 뜻을 빌린 것으로 보인다. 어조사 의(矣)자는 명쾌하게 해석되지 않으나 유래가 '너벌섬'이라는 관점에서 볼 때 기존 명칭 '나의도'를 '여의도'로 바꾸는 과정에서 기록자가 衣를 실수로 음차 표기로 해석한 것이 아닐까 추측된다.
구한말 이전[편집]
근대 이전에는 농사에 쓸모가 없던 별 볼 일 없는 모래 섬이었다. 그렇지만 섬 서북쪽에 가축을 키울 수 있을 정도의 수풀이 우거진 나지막한 산이 있었던 데다가 섬 지형 특성상 가축이 달아날 염려가 없어 방목하기 좋았기 때문에 동물을 키우는 목축지로 사용되었다. 조선왕조 이전의 여의도는 지금의 영등포, 금천, 광명 일대와 함께 잉벌노 땅이었을 것으로 비정하고 있다. 아쉽게도, 조선 초기까지는 여의도를 어느 군현(고을)이 관할했는지에 관한 공식적인 기록이 전해지지 않는다. 1421년 (세종 3년) 조선왕조실록에 따르면 수연(水碾)과 잉화도(仍火島)에서 양·돼지·닭·오리·기러기 등을 나누어 길렀다고 기록되어 있어 조선왕조 초기부터 이곳에 국립목장이 있었음을 알 수 있다. 1530년 (중종 25)년 편찬된 신증동국전지승람에는 '잉화도(仍火島)'라는 이름으로 소개되어 있어 "서강(西江) 남쪽에 있고 축목장(畜牧場)이 있다. 사축서, 전생서의 관원 한사람씩을 보내어 목축을 감독한다"고 기술되어 있다.
1556년 (명종 11년) 조선왕조실록에서는 잉화도에는 전생서와 사축서의 관노비들이 거주하면서 이들이 근친 간 통혼을 일삼고 물을 건널 때에도 함부로 옷을 벗으며 남녀 간에 손을 잡고 다니는 바 습속이 음란하므로, 섬의 인가를 모두 철거하여 서울의 본청으로 옮기도록 하고, 가축 기르는 일은 일체 남자만 하도록 하는 장면이 나온다. 그러나 이후에 다시 촌락이 형성되었는지 1751년 (영조 27년) '도성3군문분계총록'에서는 한성부 서부 연희방 내에 여의도계(契)라는 구역이 등장한다. 여의도라는 명칭이 최초로 등장한 것이다. 고종 대에 편찬된 '동국여지비고'에서 "나의주(여의도)는 예전에 목장이 있어서 사축서와 전성서의 관원을 보냈으나 이를 폐지하였다. 지금(고종 시절)은 사축서의 양 50마리, 염소 60마리 만을 놓아기른다"고 기술되어 있다.
일제강점기[편집]
구한말 한성부 서부 연희방 여의도계에서 경술국치와 동시에 경성부 연희면 여의도리가 되었고, 부군면 통폐합 때 밤섬과 합쳐 고양군 용강면 여율리가 되는 등 단기간 행정구역이 자주 바뀌었다. 일제가 1916년 간이 비행장을 건설하면서 본격적으로 개발되기 시작했다. 미국에서 비행기가 발명된 것이 1903년으로, 아직 항공기 역사의 극초반이었던 탓에 자연히 관심의 대상이 되었다. 1920년 이탈리아의 공군중위 페라린과 마지에로가 조종하는 공군기가 처음으로 여의도에 착륙하여 서울 시민의 열렬한 환영을 받는다. 당시 제1차 세계대전이 끝난지 얼마 되지 않은 시점에서, 이탈리아와 일본이 서로 우호관계를 상징하는 행사를 치르기로 한 것인데, 원래는 평안북도 신의주에만 기착하고 서울은 상공만 선회하고 가려 했으나, 서울 시민들이 간절히 원한다는 소식에 서울에 기착한다. 이때 수만 명의 인파가 비행기가 착륙하는 광경을 보기 위해 아침부터 여의도를 가득 메웠다고 하며, 착륙한 조종사들은 악단과 무용수 등 극진한 대접을 받고 어쩔 줄 몰랐다고 한다. 1922년 안창남의 고향 방문 비행으로 인하여 여의도 일대가 인산인해를 이루기도 한다. 1929년 4월에는 여의도비행장이 본격으로 정식비행장이 되고 중국(만주 일대)-한국-일본을 잇는 항공수송의 요지가 되어 비행장이 여의도 전체를 거의 다 뒤덮는 형태가 되었다. 하지만 여의도 비행장은 장마철마다 침수되는 문제로 인해 일제 당시인 1936년부터 이미 김포비행장(현 김포국제공항)과 투 트랙으로 운영되고 있었고, 갓 창설된 대한민국 공군은 장마철마다 짐을 싸서 옮겼다가 들어오고를 반복했다. 이윽고 1958년 김포국제공항으로 여객 업무가 이관되고 공군기지는 1971년까지 남아 있다가 경기도 광주군으로 이전하면서 완전히 폐쇄되었다. 이 즈음부터 밤섬 등의 면적을 줄이면서 제방을 쌓고 간척 사업이 시작되었다. 1936년에 경성부로 다시 편입될 때 여의도정으로 이름이 바뀌고, 이는 광복 때까지 지속되었다.
1970년대[편집]
여의도 비행장이 폐쇄되고, 김현옥 서울특별시장은 주택 공급 문제와 신시가지 개발 목적으로 여의도 개발 계획을 세운다. 초기 여의도 개발 계획. 현재와 비슷해 보이지만 디테일하게 보면 상당히 다르다. 당시 건축가 김수근은 그의 도쿄대학 은사였던 단게 겐조(丹下健三)의 '도쿄계획 1960'으로부터 많은 영향을 받아서 '여의도종합개발계획'을 세우게 되는데, 동서축이 유기적으로 연결되어 있고 1층은 차로, 2층은 보도데크로 구성해서 입체적인 도시를 표방하고 있다. 중앙부에 상업지구가 들어가 있으며, 좌측(서쪽)에는 국회의사당과 서울특별시청, 우측에는 법조단지가 예정되었다. 1970년 2월 10일 밤섬 폭파로부터 불과 110일만에 여의도 윤중제가 준공되었다. 그러나 윤중제 공사만으로도 서울시 재정에 무리가 가고, 김현옥 시장이 벌인 다른 동시다발적 공사 중 와우 아파트 붕괴사고가 일어나면서 김현옥 시장은 경질된다. 또한 동여의도에는 법원과 검찰청 등 법조단지가 계획되어 있었으나 이 부지가 시범아파트로 팔리며 김수근 사단의 여의도 개발 계획은 좌초되었다.
김현옥의 후임인 양택식 시장은 김수근 건축가의 입체도시 계획을 갈아엎고, 여의도를 평면계획으로 변경하여 일반인에게 분양하는 데 주력했다. 이어서 5.16광장이 여의도 한가운데를 떡하니 가르고 들어오면서 여의도 입체도시 계획은 완전히 박살나게 된다. 이어서 양택식 시장은 서울시청 이전 계획과 함께 여의도 지역을 전국 유일의 야간통행금지 해제 지역으로 만들겠다고 했으나 무산되기도 했다. 추후 여의도 택지 사업 대금은 실제로 빈사 상태의 서울시 회계장부를 겨우 숨통 트이게 만들었으며, 이 중 10억원이 전용되어 개통할 수 있었던 것이 바로 서울 지하철 1호선 종로구간이다. 1971년 첫 입주가 이루어진 여의도 시범아파트는 양택식 시장의 민자사업 중 첫 단추에 해당한다. 와우 아파트 붕괴사고로 인해 서울시는 민간으로부터 강한 불신을 받고 있었기 때문에, 시 입장에서는 이러한 인식을 일거에 해소하려는 전시효과도 노렸다고 한다. 처음에는 아무도 입주하려 하지 않아서 공무원 등에게 반강제로 입주케 하기도 했으나 1974년 삼익주택, 한양건설을 비롯한 당시 잘 나가던 민간 시공사들도 진출하여 고층 아파트 단지가 생겼으며 당시로서는 획기적인 엘리베이터, 중앙 집중식 난방 등이 설치되었고 특히 여의도를 특별 학군으로 분류하는 조치를 단행하여 소득 높은 고학력층들이 많이 이주했다.
1974년 9월 2일에 취임한 구자춘 시장은 서울의 도시계획을 여의도가 아닌 강남으로 초점을 맞추어서 여의도 개발에는 힘이 실리지 않게 된다. 결국 서울 지하철 2호선이 여의도를 지나가지 않게 되면서 여의도는 현재의 모습으로 남게 된다. 1975년 8월 15일, 1968년에 첫 삽을 뜬 국회의사당이 준공되었다. 1976년 KBS 신사옥이 준공되었다. 1979년 명동에 있던 한국증권거래소가 이전하였다. 이에 따라 명동, 을지로 등지에 흩어졌던 많은 증권업체와 금융기관도 여의도로 이전하면서 증권 중심지로 거듭났다.
1980년대 이후[편집]
- 1980년 TBC 여의도 신사옥이 준공되었다. 그러나 "동양 최대 스튜디오"를 표방한 이 건물은 준공되자마자 신군부의 언론통폐합으로 KBS가 접수해 현재 KBS 별관으로 쓰이고 있다.
- 1982년 MBC 여의도 사옥, 1990년 SBS 여의도 사옥이 각각 입주해 2000년대 초까지 '여의도 방송가'를 형성했다.
- 1996년 8월 여의도 첫 철도역인 수도권 전철 5호선 여의도역, 여의나루역의 개통으로 마포구, 종로구, 성동구, 광진구, 강동구 등 서울 강북권 지역과 연결되었다.
- 1999년 2월 아스팔트 활주로 형태로 유지됐던 여의도광장이 공원화 작업을 통해 여의도 공원으로 개편되었다.
- 2009년 서울 지하철 9호선 국회의사당역, 여의도역, 샛강역 개통으로 양천구, 동작구, 서초구, 강남구, 송파구 등 서울 남부권 지역과 연결되었다.
2020년대 이후[편집]
IFC, 전경련회관, 파크원, 교직원 공제회 빌딩, 여의도 포스트 타워 등 대형 오피스 개발 진행이 완료되었다. 사학연금 부지까지 개발이 완료된다면 스카이라인이 많이 기대될 것으로 보인다. 다만 이런 급속한 재개발 때문에 여의도의 공실률이 높아진 건 문제다. 파크원이 완공되고 동여의도 일대가 재개발되면 더욱 심화될 것으로 보인다. 2030년 달성 예정으로 작성된 서울도시기본계획에 따르면, 여의도는 한양도성, 강남과 함께 서울의 3도심 중 하나로 지정되어 육성될 예정이다. 지금도 3핵 중 하나의 지위를 차지하고 있지만 법정계획인 도시기본계획에 반영된건 처음이다. 여의도의 아파트들은 재건축을 추진 중이지만, 여러 복잡한 문제 때문에 언제 제대로 시작할지는 미지수다.[3]
축제 관광[편집]
축제[편집]
매해 4월 식목일 즈음에 벚꽃이 피기 때문에 이때 여의도 윤중로에서 벚꽃축제가 열리며, 10월의 첫 토요일에는 한강시민공원에서 세계불꽃축제가 열린다. 벚꽃축제 기간 동안에는 셔틀버스도 운행한다.
관광[편집]
여의도는 서울 주요 관광지(명동, 홍대 부근, 경복궁 등)로부터 30분 정도의 시간만 투자하면 쉽고 간편하게 찾아갈 수 있는 곳이다. 여의도 한강공원은 저녁이나 주말에 많은 사람들이 찾는 도심 속 휴식지로, 잔디밭에 앉아 휴식을 취하고 자전거를 타며 시원한 바람을 느끼며 자연을 느끼기에 좋다. 한강공원뿐만 아니라 육지와 섬 사이에 형성된 저습지인 샛강생태공원도 도심 속 자연을 즐기기에 좋은 곳이다. 또한, 이러한 자연과 멀지 않은 곳에 63빌딩, 더 현대 백화점, IFC 쇼핑몰이 위치해 쇼핑과 문화생활을 즐기기에도 좋다.[2]
교통 시설[편집]
환승센터[편집]
여의도환승센터
지하철[편집]
도로[편집]
남북축[편집]
- 국회대로
- 여의대로
- 여의대방로
- 63로
동서축[편집]
- 여의동로/여의서로 - 여의도 바깥을 한바퀴 돌 수 있는 일종의 여의도 순환로라고 볼 수 있다. 과거에는 이 길을 윤중로(輪中路)라고 불렀다. 섬의 외곽에 둑을 쌓고 그 둑 위로 자동차가 다닐 수 있게끔 도로를 닦은 것인데 길의 명칭이 된 '윤중'은 여의도 어디에도 유래가 없던 말이었다. 사실 윤중이라는 단어는 일본어다. 둑을 쌓았던 1968년 당시 이렇다 할 표현을 찾지 못했고 결국 방죽을 뜻하는 일본어 '와주테이(わじゅうてい[輪中堤]: 방죽)'의 한자 독음을 그대로 풀이해 '윤중'이 정식 길 명칭이 된 것이다. 그렇게 오랫동안 윤중로라는 표현이 쓰였다가 윤중로가 일본식 지명이라는 지적이 뒤늦게 나오면서 결국 2010년 남쪽의 서울교와 북쪽의 마포대교를 기준점으로 두고 동쪽의 도로는 여의동로, 서쪽의 도로는 여의서로로 개칭하게 된다. 2005년부터 매년 4월 초 이 거리에서 '영등포 여의도 봄꽃축제'(일명 '여의도 벚꽃축제')가 열린다.
- 의사당대로
- 국제금융로[3]
동영상[편집]
각주[편집]
참고자료[편집]
같이 보기[편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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