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크니제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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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크니제도(Orkney Islands, 스코틀랜드 게일어: Àrcaibh 아르카이브)는 영국 스코틀랜드 그레이트브리튼섬 북쪽에 있는 제도로 면적은 990km², 인구는 21,349명(2011년 기준), 인구 밀도는 20명/km²이다. 약 70개의 섬으로 이루어져 있으며 가장 큰 섬은 메인랜드이다. 영국의 행정 구역 중에서 16번째로 큰 면적이고, 오크니 제도의 중심 도시는 메인랜드에 있는 커크월(Kirkwall)이다.[1]
개요
오크니제도는 그레이트브리튼섬과 셰틀랜드제도 사이에 있으며 스코틀랜드의 산지가 바다로 잠겼다가 다시 해상에 모습을 드러낸 섬들로 본토와는 펜틀랜드만으로 격리되어 있다. 지명은 이곳에 살고 있는 오카데스족에서 유래되었다. 약 70개의 섬으로 이루어지며 그 가운데 26개 섬에 사람이 산다. 오크니는 북위 58°41~59°24도, 서위 2°22~3°26도 사이에 위치하며 북동쪽에서 남서쪽으로 80km, 동서로 47km에 걸쳐 있으며 면적은 975㎢이다. 최대의 섬은 메인랜드(일명 포모나: 518㎢)이고 그밖에 주요 섬으로는 호이(137㎢), 샌데이(67㎢), 웨스트레, 북(北)로널드세, 남(南)로널드세이며, 호이섬을 제외하고는 저평하고 수목이 거의 자라지 않는다. 메인랜드섬은 스코틀랜드에서 6번째로 큰 섬이자 영국에서 10번째로 큰 섬이다. 오크니제도에는 최소 8,500년 동안 거주해 왔으며, 원래는 중석기 부족과 신석기 부족이 차지했고, 그 다음에는 픽트족이 차지했다. 섬에는 습지가 널리 펼쳐져 있는데다가 서풍이 강하며, 주요산업은 양계와 어업이다. 일찍이 노르웨이의 바이킹이 브리티시 제도에 침입할 때 거점으로 삼았으며, 875년 하랄 1세가 점령하여 공령(公領)이 되었으나 1472년 이래 스코틀랜드령이 되었다. 몇몇 섬에는 선사시대의 유적이 남아 있다.[2][3]
유산
고대 유적
오크니 섬에는 유네스코 세계유산으로 등재된 태고적에 만들어진 유적이 몇 개 있다. 우선 해변가 정착지인 스카라 브레(Skara Brae)와 스톤 오브 스테니스(Stones of Stenness)라는 환상열석을 대표적으로 꼽을 수 있는데, 이 모든 것들이 지금으로부터 거의 5,000년 전의 선사시대에 만들어진 것이다. 스카라 브레 유적은 영국인들이 정착한 후에도 존재 자체를 몰랐지만, 1800년대 중반에 폭풍으로 인한 강한 파도가 해변을 덮쳐 바다 모래를 한꺼번에 휩쓸고 가버려 발견되었다. 원시인들이 살던 유적지 위에 해풍이 실어 온 모래가 차곡차곡 쌓여서 묻혀버린 유적이 다시 폭풍과 파도 때문에 드러난 것인데 오크니 특유의 거친 기후가 실감나는 일화이다.
1차 대전의 유산
오크니제도에는 1차 대전 발발 100주년을 기념해 런던탑 성벽과 바닥에 설치되어 4개월간 400만 명이 관람한 바 있는 888,246송이의 붉은 장미가 이곳으로 자리를 옮겨 전시되고 있다. 비록 런던 전시의 1/10 규모이긴 하지만 그래도 보는 이로 하여금 강렬한 시각적 충격을 준다. 창문에서 흘러내리는 듯한 피처럼 붉은 장미는 눈물 흘리는 창문(Weeping Window)이라고 불리는데, 마치 피를 흘리는 창문처럼 보인다. 커크월을 모항으로 하던 영국 해군과 빌헬름스하펜을 모항으로 둔 독일 해군은 1916년에 덴마크의 유틀란트 반도 근해에서 전함끼리 포격전을 주고 받는 유틀란트 해전으로 자웅을 겨루었다. 이 역사적인 해전에서 전사한 영국 해군과 독일 해군 장병 8,648명을 기리기 위해 같은 숫자의 장미가 자리를 옮겨와서 전시되고 있다. 스캐퍼플로 독일 대양함대 자침 사건이 일어난 곳도 이곳이다.
2차 대전의 유산
2차 대전 중 이탈리아에서 생포된 이탈리아군 포로들은 섬과 섬 사이에 강한 해류가 흐르는 스캐퍼 플로우를 막기 위한 방파제 건설에 동원되었다. 워낙 해류가 거칠어 침투가 불가능할 것이라 방심하고 있는 틈을 타서 잠입한 독일 해군의 귄터 프린 함장이 지휘하는 유보트 U-47에 의해 영국 해군의 전함 로열 오크가 격침당하는 등 큰 피해를 입자, 같은 기습을 방지하기 위해 방파제 건설을 하게 되는데 550명의 이탈리아 포로들이 1942년부터 동원되었다. 이탈리아 포로들은 미사를 드리기 위해 1943년부터 공사 현장에 버려진 자재를 모아 예배당을 짓기 시작했는데, 누가 시킨 일이 아니었다. 1945년에 전쟁이 끝나고도 건축을 책임졌던 도미니코 치오체티는 남아서 마무리를 맺었다. 결국 포로수용소도 폐쇄가 되고 이탈리아인들이 모두 본국으로 돌아가자 이탈리안 예배당도 문을 닫았고, 아무도 돌보지 않자 10여년 만에 오크니 특유의 거친 비바람에 무너질 지경이 되었다. 이를 보다 아깝게 여긴 오크니 주민들이 1958년에 보존위원회를 만들어 보수하면서 관리를 시작했다. 1960년에 이 소식을 전해들은 치오체티는 다시 돌아와서 보수를 도왔다. 이후 이 예배당은 오크니 최고의 관광지가 되었고 연간 10만명이 다녀 가는 섬의 명소가 되었다. 1964년에 치오체티는 다시 부인과 같이 돌아와서 예배당을 둘러보았다. 1992년에는 그 당시 예배당을 지었던 이탈리아 포로들이 자신들이 이 섬에 처음 온 50주년을 기념하기 위해 방문했다. 이때 치오체티는 노쇠해서 오지 못하고 아들과 부인만 대신 왔다. 2014년에는 전쟁 당시 만들어진 예수 수난 14처 목각상이 도난 당해 화제가 된 적이 있었는데 결국 찾지 못하고 아들이 원래와 똑같은 작품을 다시 만들어서 기증해 안치되었다.[4]
유네스코 세계문화유산
영국 스코틀랜드 그레이트브리튼섬 북쪽 앞바다 오크니 제도에 있는 BC 3000∼BC 2000년경의 신석기 유적으로 1999년 유네스코 세계문화유산으로 지정되었다. 오크니 제도의 신석기 유적(Heart of Neolithic Orkney)은 거대한 돌방무덤인 ‘매스 호웨(Maes Howe)’와 돌로 된 의식용 돌판인 ‘스테니스의 돌(Stones of Stenness)’과 ‘ 링 오브 브로드가(Ring of Brodgar)’, 그리고 정착지 ‘스카라 브레(Skara Brae)’ 외에 미발굴 무덤과 제례 장소, 거주지들로 이루어져 있다. 이곳의 선사 시대 문화 경관은 약 5,000년 전 스코틀랜드 최북단에 있는 외딴 군도의 삶을 생생하게 보여 주고 있다. 영국제도(British Isles)의 신석기 특징은 주로 기념비적 건축물과 의례가 강하게 발달되었다는 점이다. 집단 매장지와 의례용 인클로저(enclosures)는 당시 복잡한 사회 구조가 있었으며 공동 목표를 위해 개인의 많은 노력이 집약적으로 동원되었음을 나타낸다. 기원전 3000년경에 지어진 매스 호웨와 같은 돌방무덤은 고분의 바깥 가장자리에서 시신의 유해가 있는 방까지 돌을 정렬하여 통로를 만들어 놓은 대형 구조물이다. 이 고분에서 인간과 동물의 뼈, 토기와 기타 유물이 많이 출토되어 이 고분이 사회적으로나 종교적으로 중요한 중심지임을 알 수 있다. 전체적인 구조물의 방향은 이 고분을 지은 건축가들이 계절의 변동에 관한 지식을 가지고 있었음을 보여 준다. 예를 들어 매스 호웨의 통로 위치는 한겨울의 일몰에 가깝고 동지에 태양이 석실을 비춘다. 아직까지 과학자들이 결정적인 증거를 제시하지는 못했지만 60개의 키 큰 돌로 형성된 완전한 원형의 링 오브 브로드가(Ring of Brodgar)도 외곽에 원형 수로가 있는 점으로 미루어, 태양과 달의 움직임을 관찰하는 데 사용되었을 것으로 짐작한다. 브로드가가 발견된 동일한 곳에서 돌로 지은 가옥들이 통로(길)를 통해 연결되어 무리를 이룬 신석기 마을이 발굴·출토되었다. 기원전 3100년경에 처음 정착을 한 후 약 600년간 사람들이 이 마을에 살았다. 오늘날 보이는 건물은 기원전 2900년~기원전 2600년의 것이다. 가옥의 양식은 시기에 따라 다르지만 내부는 기본적으로 양쪽에 벽 안으로 침대가 있고 중앙에는 난로가 있으며, 뒤쪽에는 돌로 된 장식장이 있는 동일한 구조이다. 신석기 사회의 특징인 소와 양을 몰고, 어업과 곡류 농사 활동을 했다. 이 유적에서는 가족의 생활과 관련이 있는 의례활동에 대한 증거를 볼 수 있다. 이들 증거는 가옥과 가옥을 연결해주는 통로의 문과 칸 가까이에 어떤 것으로 긁힌 모양, 구슬과 펜던트를 숨겨둔 곳, 일부 가옥 안에 있는 사람을 매장한 증거 등을 통해 확인할 수 있다. 오크니 유적의 구조물은 기원전 3000년~기원전 2000년경에 지은 것이다. 구덩이에서 발견된 그릇을 보면 초기 철기 시대에 종교적 장소로 다시 이용했음을 알 수 있다. 그러나 정착지의 수명은 약 600년간으로 매우 짧았다. 기원후 12세기 중엽에는 노르만족과 바이킹 용사들이 이 섬에 발을 들여놓았다. 매스 호웨의 주 석실의 돌에 새겨진 룬 문자를 통해 이때 노르만족과 바이킹 용사들이 있었음을 알 수 있다. 그리고 이곳은 그 당시에 완전히 고립되어 있었지만 요즘에는 전원 경관 속에 있다.
오크니 유적은 500~1,000년이 넘게 번영하다가 기원전 2000년경에 사라져 버린 고유의 문화적 전통을 보여 주는 독특한 장소이다. 이 유적에는 최초로 대형 의식용 기념물이 만들어질 당시 인류의 역사 단계 중에 중요한 단계를 알려 주는 탁월한 건축물과 고고학적 경관이 있다. 이 유적은 기원전 3000년~기원전 2000년에 북유럽 신석기 인들이 이룩한 문화적 업적을 보여 준다. 오크니 제도는 스코틀랜드 해안 북쪽에서 15㎞ 떨어진 지점에 있다. 메인랜드(Mainland) 섬은 이 제도에서 가장 큰 섬이다. 브로드가 농촌 보존 지역(Brodgar Rural Conservation Area)은 동쪽으로 해레이 협만(Loch of Harray)과 서쪽으로 스테니스 협만(Loch of Stenness)을 가로지르는 지협 부근에 있다. 이 보존 지역에는 매스 호웨와 스테니스의 돌, 링 오브 브로드가 유적이 있다. 스카라 브레의 신석기 정착지는 스카일 만(Bay of Skaill) 남쪽 가장자리의 메인랜드 서해안에 있으며, 1850년까지는 거대한 모래 언덕으로 덮여 있었다. 오크니 제도 신석기 유적에서는 기념비적 건축물과 의례가 강하게 발달했다. 집단 매장지와 의례용 울타리가 나타나며, 이를 통해 사회적 구조가 더 복잡해지고 공동의 목표를 위해 개인들의 노력이 동원된 것을 알 수 있다. 기원전 3000년경에 지은 매스 호웨와 같은 돌방무덤은 고분의 바깥 가장자리에서 시신이 있는 방까지 돌을 정렬하여 통로를 만든 대형 구조물이다. 이 고분에서 인간과 동물의 뼈, 토기와 기타 유물이 많이 발굴되어, 이 고분이 사회적으로나 종교적으로 중요한 중심지임을 알 수 있다. 전체적인 구조물의 방향을 보면 이 고분을 지은 건축가들이 계절의 변동에 관한 지식을 가지고 있었음을 알 수 있다. 같은 곳에서는 돌로 집을 짓고 통로를 연결한 신석기 마을이 발견되어 발굴했다. 가옥의 양식은 시기에 따라 다르지만 내부는 기본적으로 양쪽에 벽 안으로 침대가 있고 중앙에는 난로가 있으며, 뒤쪽에는 돌로 된 장식장이 있는 동일한 구조이다. 신석기 사회의 특징인 소와 양을 사육하고, 어업과 농업 활동을 했다. 구덩이에서 발견된 그릇을 보면 초기 철기 시대에 종교적 장소로 다시 이용했음을 알 수 있다.[5]
지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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동영상
각주
- ↑ 〈오크니 제도〉, 《위키백과》
- ↑ 〈오크니〉, 《요다위키》
- ↑ 〈오크니제도(두산백과)〉, 《네이버 지식백과》
- ↑ 〈오크니 제도〉, 《나무위키》
- ↑ 〈오크니 제도 신석기 유적〉, 《유네스코와 유산》
참고자료
- 〈오크니 제도〉, 《위키백과》
- 〈오크니 제도〉, 《나무위키》
- 〈오크니〉, 《요다위키》
- 〈오크니제도(두산백과)〉, 《네이버 지식백과》
- 〈오크니 제도 신석기 유적〉, 《유네스코와 유산》
같이 보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