농구선수
농구선수(籠球選手, basketball player)는 농구 기량이 뛰어나 많은 사람 가운데에서 대표로 뽑힌 사람. 또는 농구를 직업으로 하는 사람을 말한다.[1]
개요[편집]
농구는 다섯 명씩 이루어진 양팀이 상대팀 바스켓에 공을 넣는 경기로써 주로 실내에서 열리며 선수는 드리블이나 패스로만 공을 이동할 수 있다. 빠른 동작과 다양한 기술로 박진감 있는 경기가 매력적인 농구는 1891년 미국 매사추세츠주 스프링필드의 YMCA체육학교 교사 제임스 네이스미스(James Naismith)가 청소년들이 추운 겨울이나 비가 올 때 할 수 있는 구기 종목으로 고안하였으며, 벽에 바구니를 걸고 축구공을 던져 넣는 것으로 시작했기 때문에 바스켓볼(basketball)이라고 한다.
처음에는 한 팀당 9명으로 구성되었지만, 1895년에 5명이 한 팀으로 바뀌었다. 1905년 미국서부대학농구협회가 결성되었고, YMCA미국체육협회, 미국대학체육연맹이 협동하여 농구규칙위원회를 만들어 현재와 같은 규칙이 제정되었다. 1932년 국제농구연맹(FIBA)이 창설되었고, 1936년 제11회 베를린올림픽에서부터 정식 종목으로 채택되었다. 1976년 제21회 몬트리올올림픽부터는 여자부도 정식 종목이 되었다. 또한 1992년 제25회 바르셀로나올림픽대회 때부터는 프로 농구선수들의 올림픽 출전을 허용하면서 세계적으로 인기 있는 스포츠로 발전하였다. 현재 미국프로농구(NBA)는 미국 5대 프로 스포츠의 하나로 자리잡고 있으며, 대표적인 국제 경기로는 올림픽과 세계농구선수권대회가 있다.[2]
역사[편집]
- 110년 역사의 한국농구, 세계대회에서는 여자농구가 두각을 나타내
한국에 농구가 처음으로 소개된 것은 1903년 창립된 황성기독청년회(YMCA)의 초대 총무였던 선교사 필립 L. 질렛(Philip L. Gilett)의 지도에 의해서였다. 1907년 7월, 여름방학을 이용해 귀국한 일본 동경유학생과 서양인 연합팀의 대전을 처음 열린 농구경기로 볼 수 있는데, YMCA회원들은 도쿄 유학생들의 모습을 보고 농구복을 만들어 입고, 평양과 선천에서 원정경기도 열었다. 1916년 YMCA체육관이 설립되었고, 미국인 반하트(Barnhart Byron P.)가 YMCA의 간사로 오면서 YMCA내에 농구부를 창설했다. 1920년 서울에 거주하는 서양인팀과 YMCA회원 팀이 처음으로 공식경기를 가졌고, 이후 매년 대회를 열며 농구를 보급해 각 학교에도 농구부가 창설되었다. 같은 해 반하트와 현동완 감독의 인솔로 한국 최초의 해외원정 경기를 일본에서 가져 2승 3패의 전적을 남기기도 했다. 여자 농구는 1925년 서양여자팀과 이화학당 여학생들의 경기가 최초였다. 이듬해에는 중앙YMCA에서 일본 와세다대학팀을 초청해 경기를 가짐으로써 국제경기의 기틀이 마련되었다.
1925년 9월에 조선바스켓볼협회가 설립되었으며, 1931년 조선농구협회와 조선농구심판협회가 창설되었고, 같은 해 5월 27일 동아일보가 후원하고 조선체육회와 YMCA가 공동으로 주최한 제1회 조선농구선수권대회가 종로 YMCA 뒤뜰에서 열렸다. 13개 팀이 참가한 이 대회에서는 4일간의 열전 끝에 보성전문학교(지금의 고려대학교) 팀이 우승을 차지했다. 1936년에는 제11회 베를린올림픽에 이성구, 장이진, 염은현 등이 일본 대표 선수단에 끼어 처음으로 국제대회에 참가하기도 하였다.
1945년 12월에는 대한농구협회가 창립되었으며, 1947년 국제농구연맹에 정식으로 가입했다. 1960년 제1회 아시아농구선수권대회에서 2위를 차지하면서 아시아의 강자로 부상하였고, 1964년에는 아시아여자농구선수권대회가 서울에서 개최되었다. 세계대회에서 먼저 두각을 나타낸 것은 여자농구였다. 1967년 체코 프라하에서 거행된 제5회 세계여자농구선수권대회에서는 한국이 준우승을 차지하며 모두를 놀라게 했다. 특히 1984년 제23회 로스앤젤레스올림픽에서는 박찬숙 선수를 포함한 여자농구팀이 은메달을 차지해 올림픽에서 구기 종목 처음으로 메달을 획득하는 쾌거를 이루었다.
- 1990년대 '오빠부대'를 이끈 농구스타선수들 탄생
1983년부터 '점보시리즈'란 이름의 농구대잔치가 시작되어 큰 인기를 얻었다. 또한 대학생 농구선수들의 활약이 돋보였던 대학농구도 인기몰이를 했다. 1980년대 중반부터 1990년대 중반까지 대학농구의 전성기에는 중앙대의 한기범, 김유택, 허재, 강동희 등 전설의 '허동택 트리오'와 연세대의 이상민, 문경은, 우지원, 서장훈 그리고 고려대의 전희철, 김병철, 신기성 등이 '오빠부대'라는 신조어를 만들어내며 지금의 아이돌 스타 같은 인기를 누렸다. 이는 1997년 프로농구 출범의 계기가 되었다. 때맞춰 본격적으로 미국프로농구(NBA)가 국내에 소개되었고, 농구드라마 '마지막 승부'와 농구만화 '슬램덩크'가 폭발적인 인기를 얻으면서 농구의 인기는 급격히 상승했다.
1997년 2월 1일 출범한 대한민국 프로농구는 프로야구(1982), 프로축구(1983)보다 출발이 늦었지만, 기존 농구의 인기에 힘입어 흥행에 성공했다고 평가받고 있다. 출범 당시에는 8개 구단이다가 2017년 현재 10개 구단으로 늘었고, 외국인 선수도 뛰고 있어 팬들의 흥미를 더하고 있다. 1998년 11월에는 한국여자농구연맹이 출범하며 여자 프로농구도 시작되었다. 2007년에 한국농구 100주년 기념식을 치룬 농구는 현재 생활 체육으로도 널리 보급되어 많은 사람들이 즐기는 스포츠로 자리잡고 있다.
- 한국농구의 레전드 박찬숙과 허재
10년 한국농구사에 획을 그은 선수들이 많지만, 그 중에서도 여자농구의 박찬숙과 남자농구의 허재는 뛰어난 경기력으로 한국농구에 큰 기여를 했다. 먼저, 박찬숙은 1960년대에 활동한 박신자 선수와 나란히 대한민국 여자농구를 대표하는 인물이다. 1959년 생으로 190cm의 장신에 유연성을 함께 갖춘 박찬숙은 초등학교 5학년 때 농구를 시작하였고 1975년 숭의여고 1학년 때 최연소 국가대표로 선발되어 부동의 국가대표 센터를 맡았다. 박찬숙 선수가 활약하던 1970년대부터 1980년대까지 대한민국 여자농구 국가대표팀은 각종 국제대회에서 좋은 성적을 거두었다. 1979년 서울에서 열린 세계여자농구선수권 대회에서 은메달을 따냈으며, 1984년 로스앤젤레스올림픽에서는 대한민국 최초로 구기 종목에서 은메달을 획득하였다.
'농구 대통령'이라 불리던 허재는 1965년생으로 신장 188cm, 선수 시절 포지션은 슈팅 가드였다. '농구 천재', '농구 9단' 등의 별명에 걸맞는 탁월한 기량에 카리스마를 갖추고 화려한 플레이로 오랫동안 높은 인기를 누렸다. 1990년 세계농구선수권 대회 이집트전에서 62점을 기록하며 이 대회 사상 한 경기 최다득점 기록을 수립하였는데, 현재까지도 이 기록은 깨지지 않고 있다. 1995년 ABC 아시아농구선수권대회 MVP로 선정되었으며, 실업농구 기아자동차 팀에서 강동희, 김유택, 한기범 등의 중앙대학교 동문들과 함께 일명 '기아 왕조'를 구축하였고 농구대잔치 215경기 출장에 5,352점을 기록, 11시즌 통산 경기당 평균 득점 24.89점을 기록하며 농구천재의 진면목을 보여주었다. 농구대잔치 7회 우승을 달성했고, MVP도 3회 수상하였다. 프로농구에서는 1998년 정인교를 상대로 트레이드된 이후 TG 삼보 엑써스(당시 원주 나래 블루버드)에서 활약했다. KBL 8시즌 동안 통산 4,524 득점, 1,148 리바운드, 1,572 어시스트, 508 스틸을 기록했고, 허재의 등번호 9번은 영구 결번 처리되었다.[2]
프로 농구선수[편집]
주요업무[편집]
농구선수는 KBL프로농구연맹에 선수로 등록된 사람으로서, 좋은 성적을 거두기 위해 기술을 습득하고 전문적인 훈련을 받는다. 평소 경기에 필요한 육체적, 기술적 훈련을 하고 대회에 참여하여 좋은 기록과 성적을 내는 것이 프로선수의 역할이다. 따라서 경기 감독이나 코치의 지시에 따라 농구에 필요한 자세와 동작 등의 기술을 배운다. 또한 체력 테스트를 통해 부족한 부분이 있으면 별도의 개인 연습을 통해 체력을 보강한다.
대회 참가를 위해서는 체중관리, 체력관리가 필수이므로 평소 자기관리를 철저히 하고, 부상을 입지 않도록 조심해야 한다. 해외 및 지방의 전지훈련에 참가하여 대회 출전을 위한 적응 훈련과 체력 훈련을 받기도 한다. 농구선수들은 각종 경기에 참여하기 전에는 반복적인 훈련을 하게 된다. 전략적인 훈련을 위해 감독, 코치와 함께 과거 시합에 출전한 모습이 녹화된 비디오를 통해 자신 또는 소속팀, 시합 상대자 또는 상대팀의 강점과 약점을 분석하여 경기전략을 세우고 끊임없는 훈련을 반복한다.[3]
프로 농구선수가 되려면?[편집]
프로 농구선수는 운동에 소질이 있어 초등학교나 중학교 운동부 지도자에 의해 발굴되어 농구를 시작하는 경우가 많다.
프로선수가 되기 위해서는 체육 특기생으로 발탁되어, 초. 중. 고 시절 각종 대회에 참가하여 대회 실적을 쌓는 것도 도움이 된다.
고등학교 졸업 후 바로 팀에 입단하기도 하지만 대부분 중. 고등학교의 운동부를 거쳐 특기생으로 대학의 체육 관련 학과에 진학하여 졸업한 후 프로팀에 입단하는 경우가 많다. 보통 경기성적이나 개인 기록 등을 바탕으로 프로팀에서 스카우트 제안이 들어오기도 한다. 그리고 감독이나 코치, 학교 등의 추천이나 본인의 지원으로 테스트를 거쳐 입단하게 된다. 입단 테스트를 위해서는 먼저 대회 입상 실적 등을 통한 서류심사를 하며, 이후에 선수들을 한자리에 모아 실기 테스트를 하게 된다. 이 과정에서는 농구계의 유명 전문가들이 모여 선수의 기량을 평가하고 선발하게 된다. 선발된 선수들은 각 구단에 소속되어 프로선수로서 활동할 수 있다.
프로 농구선수는 강인한 체력이 요구되며 끊임없는 훈련을 겪어낼 수 있어야 한다. 이 과정에서 자기를 통제하고 심리적 평정을 유지할 수 있는 정신력과 상황 판단력이 필요하다. 또한 개인이 아닌 여러 명이 한 팀을 이뤄 활동하기 때문에 동료간의 단결과 협동심이 요구되며, 원만한 대인관계를 유지할 수 있어야 한다. 프로 선수는 경기결과나 개인의 기록을 통해 바로 바로 실력이 평가되기 때문에 스트레스를 많이 받는다. 그래서 스트레스에 잘 대처할 수 있는 능력 또한 필요하다.[3]
직업 전망[편집]
향후 5년간 프로 농구선수의 고용은 현 상태를 유지할 것으로 전망된다. 프로 농구선수의 고용은 프로농구 구단의 수와 밀접한 관계가 있는데 2011년 현재 남자 프로 농구선수가 활동하는 구단은 총 10개이나 가까운 시일 내에 새로운 구단이 창설될 계획이 없으므로 향후의 고용은 현 상태를 유지할 것이다.
스포츠 산업이 계속 성장하고 있고, 운동선수들의 처우도 개선되고 있으며, 선수들의 해외 진출도 활발히 진행되고 있는 등 다양한 요인이 운동선수의 고용 확대에 긍정적인 영향을 미칠 것으로 보인다. 그러나 운동선수는 혹독한 훈련을 매일 해야만 살아남을 수 있을 정도로 철저한 자기관리가 필요하며, 어렸을 때부터 끈기 있는 훈련을 잘 견뎌낼 수 있어야 한다.[3]
임금 수준[편집]
프로 농구선수 일년 평균 임금 4,669만원 (노동부 자료)[3]
각주[편집]
참고자료[편집]
- 〈농구선수〉, 《네이버국어사전》
- 남애리, 〈겨울 실내 스포츠의 대명사〉, 《국가기록포털》
- 〈프로 농구선수〉, 《중고등 비바샘》
같이 보기[편집]