비구니
비구니(比丘尼)는 불교에서 여자 승려 또는 여자 수도자를 가리키는 말이다.[1] 비구니는 구족계인 348계를 받고 수행하는 여자 승려이다. 여승(女僧)이라고도 부른다.
개요[편집]
비구니는 불교의 여성 수도자이다. 비크슈니(bhiksuni)·비쿠니(bhikkhuni)의 음역으로, 니(尼)로도 번역된다. 출가득도하여 비구니가 받아야 할 구족계인 348계를 받은 여자 승려를 뜻하며, 여자로서 출가하여 불교에 들어간 사람을 말한다. 정확한 호칭은 남자 승려는 비구, 여자 승려는 비구니이다.[2]
기원[편집]
슈도다나왕이 죽은 후, 석가모니의 이모이자 계모인 마하파자파티(Mahapajapati)가 자신도 출가하게 해달라고 3번 호소했으나 거절당하자, 샤카족 여인들 수백 명과 함께 화장과 장식을 치우고 삭발하여 노란 가사를 입고 맨발로 걸어와 눈물을 흘리면서 다시 호소했다. 그러나 석가모니는 묵묵부답이었다. 이를 지켜보던 아난다도 안타깝게 생각하여 석가모니에게 여성 출가를 허가해 달라고 청했으나 거절당했다. 아난다가 "이 길을 따르면 여성도 깨달을 수 있습니까?" 하고 묻자, 석가모니는 그렇다고 답하였다. 아난다가 마하파자파티가 석가모니를 키웠던 공로를 들며 다시금 출가를 허락해 달라고 간청하자, 석가모니는 오래 고민한 후 허락하겠다고 말했다. 이후, 야쇼다라 부인을 비롯한 샤카족 부인들도 이를 따라 비구니가 되었다고 한다.
석가모니가 비구가 되길 원하는 남자들에게는 신분계급을 따지지 않고 받아들였음에도 불구하고, 기존 비구 승단은 석가모니가 비구니를 받아들이는 데에는 굉장히 크게 반발했다. 경전의 기록에 따르면 마하가섭이 어떤 비구니에게 심하게 모욕받자 "악녀야! 나는 네가 아니라 아난다를 책망한다." 라고 답했다. 석가모니 열반 후 아라한이 된 승려들이 결집할 적에 아난다가 참석하자, 마하가섭은 아난다의 잘못 몇 가지를 공개적으로 책망하였다. 마하가섭이 아난다의 잘못 몇 가지를 책했는지는 기록에 따라 다르지만, 지목 당한 아난다의 잘못 중에는 석가모니에게 비구니를 받아들이도록 권유했다는 것도 있었다. 사실 석가모니도 아난다를 게송까지 읊으며 책망하는 내용이 아함경에 있다. 석가모니와 마하가섭의 이런 반응을 보아, 석가모니 시절 비구 승단의 상당수는 비구니 승단이 생김을 굉장히 꺼렸음을 알 수 있다. 또한 수계한 지 오래된 노비구니라 할지라도 갓 수계한 젊은 비구에게 예를 표하도록 하였다.
불교 여성차별의 대표적인 예로 인용되는 팔경법을 두고 논란이 존재한다. 팔경법을 석가모니가 만든 것이 아니라 부파불교 말기 시대 비구 중심의 승단에서 만들어진 것이라는 반박이 있다. 법보신문 2007년 1월 31일 자 또한, 팔경법이 당시 인도 사회에서 비구니 승단을 유지하기 위한 어쩔 수 없는 방편이었다는 주장 또한 있다. 당시 인도는 지금보다도 더 심각하게 여성차별적이었으며, 비구니는 기존 인도인들에게 기생처럼 여겨져 성희롱 · 성추행 · 성폭행 피해가 자주 나왔기 때문이라 말한다.[3]
역사[편집]
제1기는 초기단계로 기원전 6세기 후반부터 시작된다. 불교 교단이 확립되고 아소카 왕이 후원하면서 널리 전파되었다. 기록에 의하면 석가모니는 초기에 여성 교단을 허락하였다. 당시 기록에 따르면 비구니 교단이 번성하여 여러 다양한 계층 여자들이 출가하였다. 상좌부 불교에 전하는 게송집인 테리가타(Therigata)에 의하면 많은 뛰어난 비구니들이 자신들의 영적 자유를 찬탄했다.
제2기는 아소카 왕부터 기원후 250년 무렵까지로, 남쪽에 사타바하나 왕조, 북쪽에 쿠샨 왕조가 있었다. 이 시기는 인도 전역에 불교 교단이 있던 시기로, 비구니 승단도 많았다. 당시 세워진 비문들이 비구니 승단의 번성을 뒷받침한다.
제3기는 3세기 이후로, 인도에서 비구니 승단은 점차 축소되었다. 비구니뿐만 아니라 이 시기엔는 인도에서 불교 교단이 전체적으로 점차 쇠퇴했다. 이 무렵 비구니에 대한 기록은 거의 찾아볼 수 없고, 단지 비문 몇 개만 있을 뿐이다. 의정(義淨)의 기록에 의하면 비구니들은 사찰 밖에 다닐 때 2명씩 짝을 지어 다니고, 재가신도 집을 방문할 때는 4명씩 다니는 엄격한 생활을 하였다고 한다. 또한 중국의 비구니와 다르게 걸식하고 탁발하면서 몹시 가난하고 소박한 생활을 하였고, 사찰에서 특별한 공양을 받지도 못했다고 한다. 남자 승단에 비해 시주가 적어 경제적인 여러움에 봉착한 것이다.
이런 경제적인 어려움은 비구니 승단의 유지를 어렵게 하였고, 출가 수행자들은 곤란한 처지에 빠졌다. 더구나 불교가 번성한 여러 지역에서 힌두교, 이슬람으로 개종하는 사람들이 늘어나자 대중적인 기반이 쇠퇴했으며, 불교는 실질적으로 인도에서 소멸되어 비구니 승단의 맥 또한 단절되었다. 현대에 와서야 불교가 간신히 일어나서 여명을 이어나가는 중이다.[3]
한국[편집]
한국의 비구니들은 대다수가 머리카락을 삭발한다. 다만 천태종 비구니는 머리를 자르기만 해도 된다. 허리까지 기르는 것은 안 되고, 머리카락을 동그랗게 말아서 모자를 이용해 가린다. 사실 경전 때문에 그런 것은 아니고, 음양을 구분하기 위한 유교의 영향 때문에 그렇다. 천태종의 비구니가 머리를 자르는 정도에 그쳐도 되게 한 원인은 상월 스님이다. 공식 호칭은 상월원각대조사. 현대에 들어서 천태종단을 재건한 스님이다. 물론 현 천태종단이 고려 시대로부터의 맥을 그대로 이은 것은 아니고, 직접적인 맥은 일본에 가 있다. 그리고 현행 천태종단은 유교적 질서의 분위기가 강하게 풍기는 편이다. 불교에 관심 많은 외국인이 교환학생으로 와서 '저거 유교 아니냐?!' 고 따지기도 했다. 천태종 비구니는 머리를 자르기만 해도 되지만 불심이 깊다면, 혹은 자신이 원한다면 삭발하는 경우도 있는 듯하다.
비구니들 중에는 사찰 요리에 능통한 이들도 많다. 사람들에게 사찰 음식을 가르치거나, 책을 내거나, 방송에 출연하는 등의 활동을 하며 사찰 음식을 홍보한다. 사찰 음식으로 유명한 비구니로는 정관 · 대안 · 홍승 · 선재 등이 있다. 대안과 홍승은 사찰식 피자 조리 방법에서 차이를 보인다. 대안 스님은 마를 치즈 대용으로 사용하지만, 홍승 스님은 피자치즈를 그대로 사용한다. 선재는 <식객>의 저자 허영만이 사찰 음식에 관해 취재할 때 만났다.
보문종은 한국 유일의 비구니 종단으로, 모든 승려가 비구니다.[3]
외국[편집]
일본[편집]
일본의 경우 근대화 이전부터 비구니는 상황에 따라 머리를 일정 수준까지 기르는 것이 가능했다. 특히 귀족, 무가 출신 여성들이 출가하여 비구니가 되었다면 '아마소기'(尼削ぎ)라 하여 현대의 중발, 단발머리 수준으로만 잘랐다. 진지하게 불도 수행을 위한 것이 아니고, 남편이나 자식 등의 다른 가족들이 모두 죽어서 은거의 상징 혹은 사찰의 보호를 받고자 형식적으로 출가했기 때문이다. 그리고 일본의 승병이나 가톨릭의 수녀처럼 하얀 천을 둘러 머리카락을 감추었다. 이 때문인지 일본어로 비구니를 의미하는 '아마상'(尼さん)이나 '니소우'(尼僧)란 단어는 가톨릭 수녀를 뜻하기도 한다. 물론 완전히 삭발한 비구니도 많았다.
현대 일본에서도 종파에 따라 삭발 여부가 다르다. 정토종(정토진종)은 남자처럼 여자 승려도 머리를 기르는 것이 가능하나, 선종은 반드시 삭발해야 한다. 밀교 계열(천태종, 진언종)은 제한적으로 여자 승려가 머리를 기르는 것이 허용된다. 일례로 현대 일본에서 유명한 비구니인 세토우치 자쿠초(瀬戸内寂聴, 1922~2021)가 있는데, 겐지모노가타리를 현대 일본어로 번역한 사람이다. 이 사람은 출가 이래 꾸준히 삭발을 유지했다.
반면 영화로도 잘 알려진 《야쿠자의 아내들(極道の妻たち)》이나 《IT 버블과 같이 잔 여자》 등의 원작을 쓴 작가인 이에다 쇼코(家田荘子)는 고야산에서 출가한 진언밀교 승려이지만 짧게나마 머리를 기른다. 일본 불교는 승려가 부업을 할 수 있도록 허용하는 곳이 많은데, 비구니가 다른 직업을 겸한다면 평소에는 가발을 쓰고 다니다 절에서 법회 때만 민머리를 드러내는 경우가 많다. 근대화 이후 일본의 여자 승려들은 대부분 직업승려의 아내, 혹은 재가승으로써 남편과 자녀를 둘 수 있는 대부니(帶夫尼)로 엄밀히 말하면 비구니가 아닌 경우가 더 많으나, 관습적으로 비구니에 해당하는 칭호를 유지한다.[3]
티베트 불교계[편집]
티베트 불교에도 한동안 비구니가 없었다. 인도에서 티베트로 불교가 전해질 때부터 비구니 계맥이 전해지지 않았기 때문에, 티베트 불교 승단에는 초기부터 비구니 없이 사미니만 존재하였다. 현대에 이르러 일부 티베트 불교 여승들(특히 외국인 출신의 여승들)이 한국 · 대만 · 홍콩 등에서 비구니계를 받았고 티베트 불교 종단에서도 이들을 비구니로 인정한다. 하지만 티베트 불교 종단 자체적으로 비구니계를 전수하기란 아직 불가능하다.
제14대 달라이 라마는 티베트 불교 내부에 비구니계를 받아들이려고 꾸준히 노력했다. 티베트 비구니들의 교육수준을 향상시켜 비구니도 비구와 동등한 승가교육을 받고 불교 박사학위인 게셰마(Geshema)를 수여받을 수 있게 했다. 1987년부터 티베트 불교계는 달라이 라마의 주도 하에 "왜 붓다 재세 시에는 존재했던 비구니 승단이 티베트에는 없는지, 왜 티베트에서는 비구니 구족계를 주지 않는지" 에 대하여 본격적으로 연구를 시작했다.
만일 비구니 계맥을 유지하는 동아시아 비구니 승단에게서 비구니계를 받아들이려 한다면 몇 가지 문제가 생긴다. 첫째, 티베트 불교가 자체적으로 원로 비구니 12명을 배출할 때까지 이부승 수계식은 외국인 비구니들이 집전할 것이다. 둘째, 구족계 수계 때 동아시아 한문권 불교는 법장부의 사분율을 사용하는 반면, 티베트 불교는 설일체유부의 율경근본율을 사용한다.
이러한 이유로 티베트 불교 종단 내부의 반대 여론이 강하여, 달라이 라마 역시 비구니계 도입을 독단적으로 결정할 수 없는 상황이다.
하지만 2022년 부탄 지그메 케사르 남기엘 왕축 국왕과 부탄 최대 불교 종파인 드룩파 카규의 지도자인 제 켄포가 참석한 자리에서 사미니 144명이 공식적으로 수계를 받음으로서, 티베트 불교 종파에서 처음으로 비구니교단이 탄생하게 되었다.[3]
상좌부 불교계[편집]
상좌부 불교에도 비구니계가 중도에 단절된 탓에 비구니가 없어져 버렸다. 비구니계를 주기 위해서는 스승이 되는 다른 비구니가 필요한데, 전승하던 도중에 전멸(…)하는 바람에… 태국이나 미얀마 불교에는 정식 비구니는 아니지만, 그 대신이라고 할 수 있는 여성 불교 수행자는 있다. 미얀마에선 비구승과 여성 수행자 간 차별이 심하다.
현대에 들어 상좌부 불교에서 비구니 승단을 복구하려는 사람들이 있었다. 1996년 12월에 한국이나 대만 등 북방불교 쪽 비구니들이 불교 성지 중 한 곳인 인도의 사르나트(녹야원) 사원에서 상좌부 불교권 여자들에게 계를 전했다. 하지만 이때 수계한 비구니 대부분은 본국에 있던 비구 승단이 이를 영 인정하지 않거나, 혹은 사람들이 배척하여 어려움에 처했다.
정말로 상좌부 율장에 따라 비구니 승단을 복구하려면 반드시 남자 승단, 즉 비구 승단에게 인정받아야만 한다. 상좌부 율장에서 비구니 계맥에 대해 먼저 수계 여성이 선배 비구니로부터 비구니계를 받고, 비구 승단에 가서 다시 한 번 비구니계를 받아야 한다고 규정하기 때문이다. 즉 비구들이 비구니계를 전해주지 않는다면, 설령 대승 비구니 계맥을 받음 자체는 인정하더라도 반쪽짜리 전수가 된다.
게다가 상좌부 율장에 따르면 비구니 구족계를 전수하는 자리에 최소한 장로 비구니 5명이 참관해야 한다. 그런데 비구니 계맥조차 끊어진 마당에 어디서 장로 비구니 5명을 찾겠는가? 따라서 정말로 원칙적인 의미로는 상좌부 율장에 따른 비구니 복구는 불가능하다. 다만 최대한 율장을 덜 어기는 방향으로 특단의 조치를 할 수 있을 뿐이다. 대승 비구니 계맥을 받음을 인정하고, 상좌부 비구승단으로부터 재차 비구니계를 받을 뿐만 아니라, 시간이 지나 '장로 비구니' 가 생기면 다시 한 번 비구니계를 받는 식으로 하는 수밖에 없다. 게다가 이렇게 한다고 해도 '율장의 규정을 편법적으로 적용하였으므로 인정할 수 없다.' 는 반발 세력이 생길 수밖에 없다.
문제는 이뿐만이 아니다. 현존하는 상좌부 종단은 전부 분별설부의 율장을, 동아시아 불교계는 법장부의 사분율을 사용한다. 부파불교 시절에 각 부파들은 자파 이외의 계맥을 무시하였다. 오늘날 상좌부 불교계와 동아시아 대승 불교계가 사용하는 율장이 다르기에, 상좌부 비구니 희망자가 양쪽의 서로 다른 계맥을 전수받음을 과연 불교적으로 유효하다고 해야 할지는 당연히 논쟁이 생길 수밖에 없다.
이러한 문제로 주요 상좌부 불교권 국가 승단 중, 대승 비구니 계맥을 받음을 인정하여 승단으로 받아들인 나라는 스리랑카뿐이었다. 오직 스리랑카에서만 이렇게 받은 계를 인정하여 비구니 승단이 정착했다. 스리랑카에서도 원로 비구들 중에서 인정하지 못한 사람도 있었지만 그래도 전반적으로는 수용하는 쪽이었기 때문에 비구니 승단이 복구될 수 있었다고 한다.[3]
대중매체에서[편집]
한국에서는 1984년 김지미 주연으로 임권택 감독이 《비구니》라는 영화를 제작하려고 했으나, 영화 촬영 중 실제 비구니들이 영화 제작 반대 시위를 한다. 기생이 비구니가 된다는 스토리에 불교계가 들고 일어났다. 결국 영화 자체가 엎어지고 말았다. 아울러서 당시 촬영분도 결국 용도 폐기되어 필름이 소실되었다고 한다. 한동안 잊혀졌던 이 영화는 남아 있던 필름을 복원한 뒤 33년 뒤에 CGV 전주고사에서 공개되었다. 이제는 세월이 흐르고 불교계에서도 '단지 기생이 비구니가 된다는 것만으로 그렇게 반대할 명분이 아니다. 상처받은 이들을 살피던 게 종교의 모습 아닌가?' 라고 반발도 누그러들었다.
서브컬처 양판소, 만화, 라이트 노벨, 에로 동인지, 상업지, 에로게, 미연시, 야애니 등에서는 가톨릭의 수녀, 무녀, 신녀 등의 다른 여성 종교인들보다는 히로인으로서는 영 인기가 거의 없는 편이다. 아무래도 판타지 웹소설, 판타지 로맨스 및 판타지에는 그닥 잘 어울리진 않은 동양의 여종교인인 것도 있거니와 결정적으로 대머리라 색기담당 서비스신이 심히 빈약하다는 점이 치명적. 물론 앞서 말했듯이 비구니가 머리를 기르는 종파도 있긴 하다만.
서양의 판타지보단 동양 판타지에 걸맞는 무협 웹소설, 환협지, 무협 로맨스 등 무협지에서 더 많이 볼 수 있다. 아미파, 종종 보타문 등이 대표적인 여승의 문파로 나오는 등 존재 자체는 꾸준하지만 역시 히로인으로서는 영 좋지 않아 종교 문파일지라도 차라리 종교적 계율 제약에 덜 얽메이지 않을 재속 속가 출신 여인들이 히로인으로 나오는 경우가 더 많다. 그나마 여승 히로인을 등장시킨다면 대체로 명칭만 비구니인 무녀, 신녀와 비슷한 머리 기르는 여캐로 나오기 마련이다.
물론 에로 영화 금병매처럼 드물게 비구니 모에인 성적 페티시즘 작품이 나오는 사례도 있다. 사실 역사를 찾보면, 상위층 남녀 승려들이 여러가지 경로로 사원에 들어간 후 지루한 수련 생활을 견디지 못하고 온갖 사고를 쳤다는 기록들이 많다. 성직에 몸 담은 이들의 문란에 대한 야담은 고금을 불문하고 널렸으니까 딱히 특별한 일이 아니다. 오다 노부나가가 괜히 히에이산 엔랴쿠지를 박살낸 것이 아니다.
그나마 서유기의 일본 각색에서 삼장법사는 대체로 비구니로 해석되는 경향이 강해서, 최유기 정도를 제외한 일본 대중매체에서의 삼장법사는 사실상 비구니라고 봐도 무방하다. 그래서인지 일본에서 삼장법사의 스테레오타입은 흰색에 가까운 연한 노란색 옷을 입은 비구니의 이미지다.[3]
각주[편집]
참고자료[편집]
같이보기[편집]