평양시
평양시(平壤市)는 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의 수도이자 최대 도시이다. 평양직할시라고도 부른다. 평양의 중심으로 대동강이 흐르며, 넓은 충적평야가 발달하였다. 고려 때는 서경(西京)이라고 불렸다. 옛 소련의 건물 양식과 유사한 건물들이 지어졌다. 한국전쟁 때 유엔군이 잠시 점령한 적이 있다. 1967년부터는 인구 증가로 인해 신도시 건설을 추진하여, 다양한 건축물이 세워졌다.[1]
목차
개요[편집]
평양시는 한반도 서북부에 있는 북한의 직할시로, 북한에서 '혁명의 수도'라고 불리는 상징적인 도시이자 정치, 경제, 산업, 문화 등 모든 부문에서 가장 중요한 역할을 하는 도시다. 평양직할시의 면적은 1,849km²로 북한 전체 면적의 1.5%를 차지한다. 2010년 평양시에 속해있던 승호구역, 중화군, 상원군, 강남군이 황해북도로 편입되었고, 2011년에 강남군은 다시 평양으로 행정 구역을 재개편하였다. 동쪽은 평남·황북, 서쪽은 남포시·평남, 남쪽은 황북, 북쪽은 평남과 접한다. 8·15광복 당시에는 평양시로서 평남의 도청 소재지였으나, 1946년 9월 특별시로 승격되면서 평남에서 분리되어 5개 구역(중·동·서·남·북)을 가진 평양특별시가 되었고 후에 직할시가 되었다. 평양은 북한의 체제 유지를 위하여 도시로의 인구의 유입과 이동을 엄격하게 제한하고 있는데 출신성분(出身成分)과 직업 등의 심사를 거쳐 '평양시민증'을 발급받은 사람만 거주가 허용된다. 상징적인 건물들을 의도적으로 배치하였는데, 만수대 언덕의 김일성 부자의 동상과 주체사상을 선전하기 위한 전시적 구조물인 당 창건 기념탑, 주체사상탑 등이 대표적이다. 특히 김정은 정권 이후 대동강 기슭에 위치한 '미래과학자거리'와 김일성종합대학 교육자를 비롯한 과학자, 연구자들의 거주 목적으로 금수산태양궁전과 용흥사거리 사이에 '여명거리'를 조성하여 체제 선전과 경제적 치적을 홍보하여 주민들의 존경과 충성을 유도하는 정치적 도구로 활용하고 있다.[2]
지리[편집]
평양시는 서울에서 철도로 약 260km 거리에 있다. 대구광역시, 광주광역시보다 가깝다. 직선상 거리로는 약 190km 정도로 전북특별자치도 전주시나 경상북도 안동시, 김천시, 강원도 삼척시와 비슷한 거리에 있다. 휴전선에서의 최단 거리를 기준으로 한다면 휴전선에서 평양까지의 거리가 휴전선에서 세종특별자치시까지의 거리와 비슷하여, 서울 수준의 군사적 최전방도 아니지만 딱히 휴전선에서 멀다고 볼 수도 없다. 물리적 거리도 가깝지만 남북분단 이전 일제강점기 시점까지는 대륙과 서울 남쪽을 잇는 활발한 교류가 있었으며 분단이 되면서까지 평양에서 피난을 오거나 이미 서울에 자리를 잡았던 사람들이 북한과 가까운 서울 등 경기권에 자리를 잡기도 했다.
평양시는 낮은 구릉과 산으로 둘러싸여 있으며, 평야가 많아 농업이 발달했다. 주요 산은 만경대구역에 있는 룡악산(龍岳山), 중구역에 있는 창광산(蒼光山), 대동강구역의 문수봉(紋繡峰)이 있다. 대부분 산은 휴양지나 유원지로 만들어졌다. 중심지에 위치한 산은 모란봉(95m)이고, 그 동쪽 주변에 대성산(270m)이 있고, 그 북쪽으로 청운산(373m)과 용골산(400m)이 있다. 모란봉의 동쪽의 비교적 높은 산지가 시작하는 초입에는 제령산(498m)이 서 있다.
평양은 여름이 되면 홍수가 발생하여 농업이 어려웠으나, 김일성(金日成)이 직접 지시하여 보통강(普通江)의 관개공사를 실시함으로써, 홍수 피해가 적어지고, 농업이 발달하게 되었다고 한다. 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에서는 김일성이 보통강을 옥토, 살기 좋은 땅으로 만들게 하였다고 선전(宣傳)하며, 보통강구역에 기념탑이 건설되었다. 보통강 근처에는 보통강유원지가 있어서 시민들이 휴식을 취할 수 있도록 되어 있다. 대동강과 그 지류들인 보통강, 무진천 등 여러 하천들에 의해서 넓은 충적평야가 형성되어 있다. 서부와 북부 일대에는 오랜 기간 동안 침식작용을 받아서 낮은 구릉성 산지들이 많이 분포했다. 평양평야는 경작이 가능한 낮은 구릉지들이 많고, 근처에 안주평야와 재령평야가 있으므로 굉장히 넓은 평야를 주변에 가지고 있다.[3]
기후[편집]
평양시는 전형적인 대륙성 기후로 냉대동계건조기후(Dw)에 속하기 때문에 연교차가 서울보다 조금 큰 편이다. 연 평균 기온은 10.9℃, 1월 평균 기온은 -5.4℃, 8월 평균 기온은 24.9℃로 서울보다 겨울은 춥고 여름은 조금 시원한 편이다.[44] 대략 서울보다 겨울은 3도, 여름은 1도, 나머지는 2도 평균기온이 2도 정도 낮다고 생각하면 된다. 참고로 남한 철원군 시가지에서 측정되는 기온이 1월 평균 -5.7℃, 8월 평균 23.9℃이다. 물론 중강진이나 함경 지방보다는 당연히 따뜻하다. 같은 위도에 있는 스페인 이비자의 1월 평균 기온은 무려 12℃다. 북위 60도에 있는 상트페테르부르크, 헬싱키와 겨울철 평균 기온이 비슷하다. 연 평균 기온은 시카고와 비슷한 수준이다. 이것은 한반도 자체의 특성이기도 하여 중부 지방 기준 북위 45~50도는 가야 한다. 반면 상반기에는 온도가 정말 빠르게 올라가는 것인지, 아래에 나와 있듯 1~3월은 추움에도 불구하고 4~5월 평균은 서울보다 1~2도 낮고 6~7월 평균은 서울보다 조금만 낮다.8월 서울보다 1°C 정도 낮기는 하지만, 초고온이 왔던 2021년 7월 평균기온을 27.0도나 기록해 점점 여름도 서울을 따라가는 양상을 보이고 있다. 심지어 2019년 7월에는 26.2°C로 서울보다도 높다.
평양시 연평균 강수량은 936.4mm인데, 한반도의 강수량 특징이 그러하듯이 강수량의 70% 가량이 여름에 집중되어 내린다. 특히 7~8월에만 484mm가 내려 두 달 동안 한 해 강수량의 50% 이상이 집중되어 있다. 반대로 겨울에는 한국의 서울특별시보다도 강수가 적다. 실제로 12~2월의 평균 강수량은 각각 18, 9.6, 14.5mm로 서울의 60%에 불과할 뿐더러 세 달을 합쳐도 50mm가 채 안 된다. 남한 소우지인 대구와 비교해도 이곳은 1064.6mm라 더 적다. 다만 660mm 정도의 연강수량을 기록하는 베이징 수준은 아니다. 백령도의 825.6mm보다는 많다. 북한에서 베이징 수준의 강수량을 기록하는 곳은 청진시, 신포시 등 함경도 일대다. 다만 함경도라도 겨울 강수량은 평양 수준은 된다. 매년 눈은 오는 수준이라 북한 매체가 눈이 오는 평양을 다루며 제설차량이 돌아다니는 도시다. 대구, 부산 마냥 눈이 신기한 수준은 아니다. 김정일 영결식 때는 이례적이지만 폭설이 내렸다. 베이징의 12월~2월 강수량은 2.8mm, 2.7mm, 4.9mm로 평양의 절반에도 못 미치는 수준이다. 베이징 수준이면 겨울에는 한 두 번 눈 섞인 비가 간혹 오는 수준이다.
평양시 연평균으로 따지면 900mm가 넘으므로 세계 평균 정도는 되기에 적지 않은 강수량이지만, 6~9월의 우기를 제외한 나머지 8달 동안 내리는 비의 양은 271.3mm이다. 그래도 베이징조차 BSk가 아니라 베이징보다 40%가량 강수량이 많은 평양은 스텝 기후까지는 아니다. 겨울 가뭄이 더 문제되는 곳은 개마고원 일대의 수력발전소인데, 실제로 전력난이 발생하여 갈수기에 평양 중심구역조차 하루 10시간만 전력이 공급되는 사태가 있다고 한다. [3]
역사[편집]
고대 및 삼국 시대[편집]
평양은 옛 부터 평평한 땅, 벌판의 땅이라는 뜻을 가진 '부루나', '바라나'라고 불렀다. 평양은 고조선의 마지막 수도였던 왕검성이 있었던 지역으로 추정되는 지역 중 하나이다. 427년에는 장수왕이 고구려의 도읍을 국내성에서 평양으로 천도했다. 평원왕 시대였던 586년부터 고구려가 멸망한 668년까지 고구려의 마지막 수도였던 평양성이 위치했던 지역이기도 하다.
고려 시대[편집]
평양은 고려 시대(高麗)에는 서경(西京)으로 불려 중요시되어, 황폐해진 평양을 부흥시켰다. 947년 고려 정종(定宗)은 도참설에 따라 서경성(西京城)을 쌓고 천도하려 하였으나 귀족들의 불만과 백성들의 반발로 실현되지 못했고, 1136년에는 고려 인종(仁宗)에게 묘청(妙淸), 정지상(鄭知常), 백수한(白壽翰) 등이 서경천도론을 건의하여 추진되었으나, 김부식(金富軾)을 중심으로 한 문벌 귀족들의 반발과 민심의 이탈로 인종이 중지를 명함으로써 좌절되었다. 고려 말기 신돈(辛旽)은 공민왕(恭愍王)에게 평양으로 수도를 옮길 것을 건의했지만, 받아들여지지 않았다.
조선 시대 및 근대[편집]
조선 시대(朝鮮時代)에도 평양은 조선의 주요 도시 중 하나이자, 평안도(平安道) 감영 소재지로서 관서 지방의 행정 중심지였다. 1866년 제너럴셔먼호 사건이 일어나기도 했으며, 1894년 청일전쟁(淸日戰爭) 때는 청군(淸軍)과 일본군 사이의 격전지가 되어 큰 피해를 입었다. 1896(건양 1)년 평안도가 남북으로 분할되자 평안남도에 소속되었다. 구한말기에는 기독교가 크게 확산되었는데, 1901년부터 평양에서는 평양신학교라는 장로교 신학교가 문을 열었고, 최초의 장로교 목사들을 배출하였다. 평양을 비롯한 평안도는 오랜기간동안 지역차별에 영향을 받은 것들이 적지 않게 있어서 지역 향반(향리)와 일반 평민의 삶은 차이가 크게 없었다. 이 때문에 평양을 비롯한 평안도에서는 신분보다 능력을 중시하는 평민문화 및 상업문화가 일찍이 발달하였고, 기독교 신자가 상당히 많이 거주했었다. 1902년 대한제국 고종은 평양을 서경(西京)으로 육성하고자 하여 풍경궁을 설치하였으나, 러일전쟁으로 일본의 침략이 시작되면서 수포로 돌아갔다.
일제 강점기[편집]
1913년 조선총독부는 평양을 부(府)로 지정했으며, 1914년 평양부의 영역을 시가지 일대로 축소시키고, 교외 지역을 대동군으로 분리하였다. 1938년 대동군 대동강면, 서천면, 추을미면을 편입하여 영역이 확장되었다. 1920년 조만식을 중심으로 민족 운동의 일환인 물산장려운동이 일어났다. 만보산 사건(萬寶山事件)의 여파로 평양에서 1931년 7월 5일과 6일에 일어난 반중(反中)·반화교(反華僑) 폭동은 극심해, 중국인 수백 명이 사망, 부상 및 실종되었다.
현대의 평양[편집]
광복 후 38선 이북은 소련군정(蘇聯軍政)이 들어섰다. 1948년에 소련군이 철수하였다. 1946년 9월에는 북부 지역의 실질적인 정부인 '북조선임시인민위원회'의 결정에 따라 평양부는 평안남도에서 분리되어 중구역, 동구역, 서구역, 남구역, 북구역의 5개 구역을 포함하는 특별시로 승격되었다. 한국전쟁 당시 대한민국 국군이 1950년 10월 1일에 38선을 넘자 10월 9일 김일성의 부대와 정부, 조선노동당 등 주요 기관이 평양에서 모두 철수하였다.
1950년 9월 28일에 대한민국이 서울을 수복(收復)하자 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은 수뇌부와 주요 기관, 단체, 부대 등을 평양에서 후퇴시킬 준비를 시작하였다. 10월 1일에 대한민국 국군이 38선을 넘자 10월 9일부터 본격적인 평양 후퇴작전이 전개되었고, 10월 19일 대한민국 국군과 UN군이 평양을 수복하였다. 평양에서 후퇴한 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 정부는 강계를 임시 수도로 정하였다. 대한민국 국군은 10월 19일 평양을 탈환하였으나, 10월 24일 온정리 전투를 시작으로 중국인민지원군이 한국전쟁에 개입하였다. 1950년 10월 25일 1차 공세를 시작한 중국인민지원군은 11월 26일부터 본격적 공격을 개시하였고, 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은 12월 6일에 평양으로 재입성하였다. 남한의 국군은 12월 4일 평양에서 철수하였다.
1952년 행정 구역 체계를 기존의 4단계에서 3단계로 개편하면서 직할시로 변경되었고, 1956년에 만경대구역과 서성구역을 신설하였으며, 1967년부터[출처 필요] 본평양(本平壤), 서평양(西平壤), 동평양(東平壤)으로 나누고, 1972년에는 임시수도가 아닌 공식 수도가 되었다. 2006년 19개 구역 4개 군으로 나뉘어 있었다. 한편 평양은 한국 전쟁 때 미국의 폭격으로 공공건물과 공장건물들이 많이 파괴되었다. 소련으로부터 도입된 조립식 건축기법과 시멘트 가공공업의 발달로 동평양과 중구엔 5층 내지 15층짜리 고층 아파트가 건설되었으며, 천리마(千里馬)거리와 창광거리, 역전(驛前)거리를 비롯한 큰 도로들이 생겨나기 시작했다.
2010년 1월 평양에 속했던 중화군, 상원군, 승호구역과 강남군이 황해북도로 이관되었다가, 이듬해인 2011년 이 중 강남군만 평양시로 재편입되었다. 구 향산군 묘향산에서 모란봉구역에 편입되었다. 2018년 2월 10일 구 구성시 방현동이 평양에 편입되었다. 평양은 도농통합형 도시를 추구하고 있으며, 평양 전체의 토지 중 시가지 면적은 20% 이하이고, 농지 면적이 과반을 차지하고 있어 농산물의 자급 생산과 소비가 가능하도록 하였다.[1]
산업[편집]
평양 일대는 일제 강점기 무렵부터 이른바 서선공업지대(西鮮工業地帶)의 중심지 역할을 해 왔다. 평양시는 정권 수립 후 3.26전선공장과 대동강맥주공장을 비롯해, 선교구역편직물공장, 평양방직공장, 평양기계공업공장 등의 여러 공장들과 평양주택사업소와 백두산건설사업소 등의 주택, 건축기업소가 세워졌다. 이 곳은 지금도 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의 공업 중심지로 사리원시와 송림시를 합쳐 평양공업지구라고 부른다. 발전소는 평양화력발전소와 동평양발전소가 있다. 이 발전소에서 나오는 폐열과 온수로 평양 전역에 있는 가정의 난방을 공급한다. 제철소는 송림제철소가 있다[출처 필요]. 송림제철소는 청진시의 김책제철소 다음가는 대규모 제철소이다. 3.26전선공장은 평양시 평천구역에 자리잡고 있으며, 현대적인 설비와 제품의 질이 좋은 것으로 유명하다. 3.26전선공장은 김정일의 현지지도를 받았다. 기타 평양의 공장으로는 평양룡성담배공장, 대동강 맥주, 대동강텔레비전수상기공장, 평양화장품공장, 평양선교방직공장, 평양아동식료품공장, 교육도서인쇄공장, 평양종합인쇄공장, 평양자전거공장, 평양기계공업공장 등이 있다.
교통[편집]
평양시는 철도교통과 수송전선의 중심지로서, 평의선, 평부선(둘 다 본래의 경의선[京義線]), 평원선(平元線)이 지나며, 평양개성고속도로, 청년영웅도로, 평양순안고속도로, 평양원산고속도로가 지난다. 청년영웅도로는 평양시와 남포시를 연결하는 고속도로로서, 10차선으로 매우 넓다. 평양 순안 국제공항(順安國際空港: 평양비행장)과 미림비행장이 있다. 국제선은 순안공항에서만 이용할 수 있는데, 순안공항은 고려항공의 허브공항이다. 철도 시설로는 경의선, 평남선, 평원선(平元線)이 있다. 평양의 철도역으로는 평양역, 서평양역, 대동강역, 보통강역 등이 있다. 평양의 지하철은 서울특별시보다 1년 이른 1973년에 개통되었으며, 2개 노선이다. 1개 노선을 새로 신설할 예정이다. 평양의 지하철은 전시(戰時)에는 방공호 역할을 할 수 있도록 땅 속 깊이 건설되었다.[1]
문화[편집]
옛날부터 평양은 강계시, 진주시와 더불어 '미녀의 고장'으로 유명했다. 이와 관련해 "여자는 서울 말씨에, 평양 인물에, 강원도 살결이라야 한다."라는 속담도 있다. 평양 사람들이 대체로 인심이 좋다는 것을 나막신에 빗대어 "살갑기는 평양 나막신"이라는 속담도 있다. 함경도 계열 사람들과 달리 거절은 기분 나쁘지 않게 돌려말해야 한다는 완곡어법이 존재한다는 평이 있다. 북한의 문화 활동은 기본적으로 군중문화고, 또 모든 예술 단체가 국가 아니면 당, 혹은 군 같은 집단에 소속된 공립 단체다. 그리고 이것들의 중심지도 당연히 평양이라서 문화 인프라는 상당히 다양하고 대규모로 갖추어져 있다. 만수대예술단, 피바다가극단, 국립민족예술단, 조선인민군협주단, 조선국립교향악단, 영화 및 방송음악단, 은하수관현악단 등 북한 내 1급 예술단들은 모두 평양을 본거지로 하고 있고, 각자 전용 극장이나 콘서트홀을 갖고 있다. 2020년 기준 수년 전부터 빼빼로 데이를 기념하는 경우가 생겼으며, 현재는 지방의 일부 젊은이에게도 퍼진다고 한다. 중국이나 한국의 영향을 받아 경제력이 되는 계층을 중심으로 집에서 결혼식을 하던 풍습이 무너지고, '결혼식 전문식당'에서 결혼식을 올리고 음식도 이런 식당에서 해준다고 한다. 평양이 이런 추세가 가장 이르게 나타나고, 이런 문화가 지방에 퍼지는 중이라고 한다.[3]
교육[편집]
평양에는 김일성종합대학부터 김책공업종합대학, 평양의학대학, 김형직사범대학, 평양교원대학, 평양외국어대학, 한덕수평양경공업대학, 평양철도대학, 김원균명칭 음악종합대학, 평양무용대학, 평양미술대학 등 분과별 북한 최고의 대학교들이 몰려 있다. 재학생들도 어지간해서는 평양 시민이 대부분이고, 간혹가다가 지방에서 오는 학생들도 있지만 정말로 드물다. 2010년에는 평양과학기술대학이 개교되었다. 대학교 외에도 유치원과 소학교, 중학교 같은 교육 기관도 지방과는 비교할 수 없을 정도인데, 개중에는 김일성훈장이네 3대혁명붉은기훈장이네 하는 것들을 받고 엘리트 학교마냥 취급되는 학교도 있다. 당연히 평양 시민들 중에서도 웬만큼 빽있고 출신 성분 좋은 학생들만 다닌다고 보면 된다.[3]
통일후 전망[편집]
평양은 북한의 수도라는 어마어마한 상징성 때문에 낙관적인 관측이 우세하다. 특히 주요 거점을 개발하는 정책이 각광받고 있기 때문어 영남권, 호남권의 개발과 같이 개발할 가능성이 높다. 만약 현 대한민국 정부 주도의 남북통일이 이루어지고 광역시 제도가 유지된다면 평양은 광역시로 승계된다. 일단 평양은 이미 직할시로의 역할을 하고 있고, 자체적인 인구, 광역권 규모가 크고, 이북 5도 대표 중심지라는 위상 때문에라도 광역시가 될 수밖에 없을 것이다. 그렇지만 광역시 제도가 폐지되고 도와 광역시가 합치는 방법으로 행정구역 개편이 실시되면 이북 5도 위원회 기준인 평안남도 평양시 체계로 실시된다. 대신 인구가 100만이 넘기 때문에 다른 지자체보다는 자치권이 보장될 것이다.[3]
지도[편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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동영상[편집]
각주[편집]
참고자료[편집]
같이 보기[편집]
동아시아 같이 보기[편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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