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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약용[[전문가]] 박석무가 다산의 시 '봄날 백련사에 노닐면서'(春日 游 白蓮寺)를 보여줬다. 우리말로 옮긴 끝 세 줄은 이렇다. '황량한 시골 벗 없자 중이 좋음 깨달았네 / 먼 산만 바라보고 도연명의 뜻 알 만해서 / 한 두 편 산경을 놓고 중과 함께 얘기했네'(窮海逢春知老至 / 荒村無友覺僧賢 / 且尋陶令流觀意 / 與說山經一二篇)
 
정약용[[전문가]] 박석무가 다산의 시 '봄날 백련사에 노닐면서'(春日 游 白蓮寺)를 보여줬다. 우리말로 옮긴 끝 세 줄은 이렇다. '황량한 시골 벗 없자 중이 좋음 깨달았네 / 먼 산만 바라보고 도연명의 뜻 알 만해서 / 한 두 편 산경을 놓고 중과 함께 얘기했네'(窮海逢春知老至 / 荒村無友覺僧賢 / 且尋陶令流觀意 / 與說山經一二篇)
한학의 대가도 이렇게 '僧'을 '중'으로 풀었다. 이어 "다정한 스님이 더욱 반가웠음을 토로한 시"라고 해설했다. 픽션에서는 중, 리얼 라이프에서는 스님이라고 해야하는 게 현시점의 정답일 수도 있겠다.<ref>〈[https://www.newsgn.com/news/articleView.html?idxno=9312 <신동립의 잡기노트> '중'이 스님의 낮춤말?…실제로는 아니다]〉, 《뉴스경남》, 2011-05-09</ref>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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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학의 대가도 이렇게 '僧'을 '중'으로 풀었다. 이어 "다정한 스님이 더욱 반가웠음을 토로한 시"라고 해설했다. 픽션에서는 중, 리얼 라이프에서는 스님이라고 해야하는 게 현시점의 정답일 수도 있다.<ref>〈[https://www.newsgn.com/news/articleView.html?idxno=9312 <신동립의 잡기노트> '중'이 스님의 낮춤말?…실제로는 아니다]〉, 《뉴스경남》, 2011-05-09</ref>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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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참고자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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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김종한, 〈[https://m.cafe.daum.net/BANSEOK/6GTA/294 중과 스님의 차이]〉, 《다음카페》, 2010-11-30<
 
*  김종한, 〈[https://m.cafe.daum.net/BANSEOK/6GTA/294 중과 스님의 차이]〉, 《다음카페》, 2010-11-30<

2024년 8월 8일 (목) 13:30 판

(衆)은 국어 사전적 의미로는 절에서 살면서 불법(佛法)을 닦고 실천하며 포교에 힘쓰는 사람을 의미 한다. 하지만, 원래 '중(衆)'의 의미는 한자로 무리 중(衆)으로서 산스크리트어의 상가(僧伽 승가:samgha)를 한자로 의역한 것으로서 4인 이상의 모임, 후에는 3인 이상의 무리로 바뀌였다. 즉 대중(大衆)이라는 뜻 이였다. 줄여서 중(衆)이라고 하지만, 그 원래의 의미가 변형되어 현재 일반적으로 '스님의 낮춘 말'쯤으로 인식되어 오고 있다. 중(衆)의 본래적 의미는 '대중(大衆)'이였다.[1]

중 / 스님

경험이 이룩한 공감논리가 속담이다. '중은 중이라도 절 모르는 중이라' '중의 양식이 절 양식' '중이 미우면 가사도 밉다', 그리고 유명한 '중이 제 머리를 못 깎는다'에 이르기까지 언중은 '스님'보다 '중'을 더 좋아한다.

중은 그러나 졸납, 졸승 따위의 낮춤말로 수용되고 있다. 스님이라고 해야 당사자가 만족한다. 상인, 화상, 선사, 선실, 명장, 사주, 사승과 대동소이한 높임말이다. 사문, 도자, 상문, 부도, 법신, 산인, 치려, 치류, 치의, 노납, 선려 등 스님이나 중을 일컫는 건조한 호칭들도 있기는 하다. 사실상 죽은말들이다. 지나치게 어렵다. 어감 차는 엄연하되 이해관계자가 아니라면 스님이나 중이나다. 그렇다고 스님을 중으로 되돌리려는 시도는 무망하다. 때가 너무 늦었다. '마누라'가 보기다. 19세기까지는 존칭이었다. 궁중의 높은 인물을 지시하는 데 쓰이던 '마노라'가 호칭으로 전용된 듯하다.

'승 + 님'에서 ㅇ이 탈락해 스님, 또는 '스승 + 님'에서 스님이 왔다고 한다. 승(僧)은 승가(僧伽), 즉 부처의 가르침을 믿고 불도를 실천하는 집단의 줄임말이다. 순우리말 같은 중(衆)은 뜻 그대로 무리를 가리킨다. 승려(僧侶)는 본디 복수명사이지만 단수로 더 많이 쓰이고 있다.

스님이든 중이든 대개 본명 말고 법명으로 불린다. 법명은 일종의 호(號)다. 호는 이름이 아니므로 '님'으로 마무리하지 않아도 된다. '미당'(서정주) 하면 그만이지, '미당님'이라고 발언하면 이상하다. 그런데 불교계는 이 관례를 거부한다. 예컨대 '법석'이라는 간부 승려명 표기는 '법석 총무원장 스님'이어야 한다. '장'에 '님'까지 경칭 인플레이션이 당연하다. 절미하고 법석이라고만 쓰면 야단난다.

'님'은 2갈래로 나뉜다. 의존명사 '님'은 '씨'보다 높다. 이 경우에는 띄어 써야 한다. 그럼 '스 님'이 된다. '님'이 높임 접미사라면 '따님'처럼 붙여 쓴다. 스님은 둘 중 어디에 해당하는지 모르겠다. '님'자에 몹시 인색해 그냥 '스'라고 칭하는 이웃종교 신자도 봤는데, 그건 개그다.

'님'을 붙여서 자연스러운 것은 '선생님'과 종교색을 제거한 '하느님' 말고는 없다시피 하다. 교사학생들에게 "자, 선생님이…" 어쩌고저쩌고 해도 어색하지 않다. "국민여러분, 대통령님이…" 하고 연설하는 대통령이 있다면 코미디다. "스님이 법문하는데 왜 떠드느냐"고 말해놓고 고승대접 기대란 난망일 수밖에 없다. "소승이 말하는데" 정도라야 존경받겠다.

영어로는 (부디스트) '몽크'다. '싱글' '혼자서도 잘 지낸다'는 그리스어에서 왔다. 미국 TV드라마 '몽크'의 주인공도 불가의 몽크 같다. 타인과 적당한 거리를 둔다. 남의 영역으로 침입하는 법이 없다. 언제나 단정하다. 사소한 것에서 핵심으로 치닫는 연역법의 대가다. 불교 몽크가 화두를 붙들고 깨우치는 것과 일맥상통이다. 이 몽크가 그 몽크요, 저 몽크는 여기 있도다.

정약용전문가 박석무가 다산의 시 '봄날 백련사에 노닐면서'(春日 游 白蓮寺)를 보여줬다. 우리말로 옮긴 끝 세 줄은 이렇다. '황량한 시골 벗 없자 중이 좋음 깨달았네 / 먼 산만 바라보고 도연명의 뜻 알 만해서 / 한 두 편 산경을 놓고 중과 함께 얘기했네'(窮海逢春知老至 / 荒村無友覺僧賢 / 且尋陶令流觀意 / 與說山經一二篇) 한학의 대가도 이렇게 '僧'을 '중'으로 풀었다. 이어 "다정한 스님이 더욱 반가웠음을 토로한 시"라고 해설했다. 픽션에서는 중, 리얼 라이프에서는 스님이라고 해야하는 게 현시점의 정답일 수도 있다.[2]

각주

  1. 김종한, 〈중과 스님의 차이〉, 《다음카페》, 2010-11-30
  2. <신동립의 잡기노트> '중'이 스님의 낮춤말?…실제로는 아니다〉, 《뉴스경남》, 2011-05-09

참고자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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