어민
어민(漁民, fisherman)
어민(漁民, fisherman)은 수계에서 서식하는 수산자원을 채취, 포획하고 양식하는 것을 생업으로 하는 직업인을 말한다.[1]
상세
어민은 수산관계 법률이나 산업통계에서는 그 범위와 기준을 구체적으로 정하여 산업정책産業政策)의 대상으로 삼기도 하고, 한편으로는 다른 산업의 인구통계와 중복이 안 되도록 하고 있다.
첫째, 수산업법상의 규정을 보면 어민에 관한 용어 정의는 없으나 수산업법 제2조 8호에 어업자(漁業者)와 어업종사자(漁業從事者)에 대해서는 "어업자란 어업을 경영하는 자", "어업종사자라 함은 어업자를 위하여 수산동식물을 포획 · 채취 또는 양식에 종사하는 자"로 각각 정의하고 있다. 보다 상세한 설명을 필요로 하나, 여기서 어민이란 어업의 경영자로서의 어업자와 그 종사자로 구성된다는 사실을 전제로 하고 있는 것이라 볼 수 있다.
둘째는 수산업협동조합법상의 어민(어업인)에 대한 규정이다. 동법 제11조 3항에서 "어업인(漁業人)이란 어업을 경영하거나 이에 종사하는 자를 말한다"로 하고 있다. 수산업법보다 정의가 구체적이며, 어업경영자와 그 종사자로 구성됨을 분명히 하고 있다. 그리하여 수산업협동조합법은 어업경영자와 종사자 가운데서도 연간 60일 이상 여기에 종사하는 자를 진정한 어민이라 하여 그들에게만 수협의 조합원 자격을 부여하고 있다(동법 26조 1항).
셋째는 통계법상 어민에 대한 개념이다. 재정경제원 통계청은 14세 이상인 자로서 어업을 직업적으로 영위하는 어업의 종사자 전원을 어민으로 분류하고 있으며, 그리하여 다른 산업 종사자 인구와 중복되지 않게 하기 위하여 이들을 어업종사자라 칭하고 있다. 이 때 어업인구는 어업종사자가 이루는 어가(漁家)의 가구원 총수라고 규정하여 어민과 어업인구와를 구별한다. 수산기본통계나 수산시책에 밝히는 어민수는 이러한 통계법상의 어민 개념인 14세 이상의 직업적 어업종사자수를 의미하며, 보통 어민이라 할 때 이 종사자(경영자 포함)를 지칭한다. 이러한 어민을 일정 목적에 따라 구분해 보면
① 어업경업자와 어업종사자(협의의 뜻) ② 양식어업 어민과 어선어업 어민 ③ 전업어민(全業漁民)과 겸업어민 ④ 어민의 성별 · 연령별 구성 등으로 나누어지기도 한다.
1992년도의 어업종사자들이 이루는 어가호수(漁家戶數)는 총 11만 6165호이며, 이들 어가의 가구원수인 총어업인구는 42만 4939명이고, 총어업종사자수는 20만 6624명이다(농림수산통계연보 1993). 특기할 것은 이러한 어민의 수가 80년대와 비교하여 감소하며, 노령화되고 있다고 하는 점이다. 이러한 현상은 특히 젊은층의 이어(離漁)에서 비롯된 것으로 수산업의 장래에 문제점이 될 수 있다.[2]
특성
어업은 노동의 장소가 수계이고, 노동의 대상 또한 물 속에서 서식하는 수산 동 · 식물이므로, 육지 타산업의 종사자들과는 크게 다른 노동형태 · 임금제도 · 생활주기를 가지고 있다. 먼저 어업노동의 특성을 살펴보기로 하자.
첫째, 노동이 물 속 혹은 배 위에서 이루어지기 때문에 일에 많은 곤란과 조난의 위험이 따른다는 점이다. 수계는 계절 · 기후 · 기상 · 조수의 변화에 따라 항상 움직이고 변하기 때문이다.
둘째, 일반적으로 다수 노동자의 협력을 필요로 하며 공동노동조직을 채택하는 경우가 많다. 그러나 노동자간의 작업 분담과 전문화가 아직 확립되지 못 하여 분업 · 협업의 체계가 충분히 발달하지 못하고 있다.
셋째, 오늘날에는 어획작업의 기계화가 부분적으로 발달되어 있으나 아직도 개개 노동자의 경험과 숙련이 더 중요하다.
넷째, 위와 같은 사정으로 노동의 적용범위가 지역 및 어업의 종류에 따라 좁은 범위에 한정되게 마련이다. 따라서 전업하기가 어렵다.
다섯째, 어업노동은 어기의 제한을 받는 계절적인 노동일 뿐 아니라, 한 어기 중에도 바쁘고 한가한 차가 크고 자연조건의 변화에 의한 작업중단의 경우도 적지 않아서 작업의 진행이 불균등 · 불규칙 · 비연속적이다.
여섯째, 어업노동에서는 직접적인 작업에 들어가는 시간 못지않게 어장 왕복시간, 천재 대비 등 준비작업에 소요되는 시간이 상대적으로 길다는 점 등을 들 수 있다.
이상은 대체로 자연적 · 기술적 조건에서 발생하는 특질이다. 그런데 이와 같은 특질 때문에 어업노동의 생산력은 일반적으로 낮고 거기에다 임금형태마저 성과급(짓가림제 : 步合制)이라는 불안정한 제도를 주축으로 하고 있어서 어민의 생활정도가 전반적으로 낮아질 수밖에 없다.
어민의 생활구조상의 특질은 생업의 일정한 시간적 · 공간적 구조에 의해 규정된다. 즉 노동 시간에 따른 “생활 주기”와 그 공간에 따른 "생활 영역"이 그것이다.
어민의 생활주기는 어업의 조업형태 여하에 따라 차이가 없는 것은 아니다. 그러나 천후 · 해황(海況) 등의 이변이 심하고 물고기들의 움직임이 불규칙하므로 이조(異調:불규칙성·돌변성)를 띠는 수가 많다.
이와 같은 생활주기의 불규칙성은 어민의 생활을 초인간적 · 우연적 요인에 지배당하게 하므로 무계획적 · 비합리적 · 우연적인 어민의 심성(心性)을 조장하는 경향이 짙다. 어민의 생활 영역은 농민들과는 달리 생활장소와 노동장소가 물과 땅 위로 분단되어 있어서 대개의 경우 어민은 다른 가족과 떨어져서 일하게 된다.
원양어업의 경우에는 1년 이상을 가족과 떨어져 있어야 한다. 이와 같은 조건은 어민의 가족에 대한 애정을 격정적으로 만들고 나아가서 소비생활에도 낭비가 심해진다. 또한 노동장소는 "판자 한 장을 사이에 두고 지옥과 연접해" 있어서 생명을 걸고 노동하게 된다.
그리하여 어민의 생활주기의 밑바탕에는 항상 “죽음을 매개로 하는 생(生)의 기쁨과 불안”이 흐르고 있다. 이러한 생활감정은 가족간의 애정을 격정화함과 동시에 어민의 심성을 초인간적인 것에 귀의하게 하는 경향으로 이끌어간다. 어촌이 속신(俗信)의 세계에 의해 강력히 지배받고 있는 까닭이 여기에 있다.
어민의 생활구조와 관련해서 어민의 생활방식의 문화에는 어떤 특징이 있는가를 생각해 보자. 어민 내지 어촌의 생활방식의 일반적 특징을 한마디로 공동체적 행동양식, 혹은 넓은 의미의 제도적 행동양식이라 할 수 있다.
어떤 집단생활에 있어서든 개인의 행동은 제도에 의해서 규제받는 것이며, 그런 뜻에서 개인의 행동은 제도적 행동이라 할 수 있다. 그러나 어민의 경우는 특히 어업공동체가 그들의 생활과 행동을 강하게 규제하기 때문에 공동체 행동양식 내지 제도적 행동양식의 특색이 두드러지게 나타나고 있다.
예컨대 어촌의 생산활동을 살펴보면 어장의 해금(解禁)이 마을에 의해서 규제받음은 물론, 그 밖에 많은 경작강제(耕作强制)가 과해진다.
뿐만 아니라, 어항의 축조 · 정비, 어선 예인, 어장 관리 등 어촌에서는 공동노동의 기회가 극히 많고 그때마다 제도적 행동이 요구된다. 이와 같은 경향은 어촌의 어업의존도가 높고 어업의 동질성이 높을수록 강하게 나타나고 있다.
인류에 의한 수계의 개발 · 이용은 인류의 역사와 더불어 오랜 것임은 굳이 입증할 필요가 없다. 모건(Morgan,L.H.)은 어로생활의 시작을 "야만중위상태"로 보고 있다.
삼면이 바다로 둘러싸여 있고 어업에 천혜적인 조건을 갖추고 있는 한반도에 정착한 우리 민족은 일찍부터 하천 및 해안에 풍부한 어패류를 잡아 먹고 살았다. 따라서 어업은 그들의 중요한 생업의 일부가 되었으리라고 쉽게 추정할 수 있다.
그러나 어업이 농업에서 분화되고 전업 어민이 탄생하여 사회계층을 형성하기 시작한 것은 고려시대부터라고 짐작한다. 특산물의 생산지를 나타내는 소(所)가 어촌에도 붙여져 "어량소(漁梁所)" · "곽소(藿所)" · "망소(網所)" 등 주어종농(主漁從農) 내지 순어(純漁)의 생업형태를 갖는 촌락이 이때부터 나타나기 때문이다.
어민의 존재형태를 결정하는 중요한 요인은 어장의 소유형태와 어업기술, 국민들의 어업관이 아닌가 한다. 한국에 동력선이 들어온 것은 1919년의 일이다.
이것은 그 전의 우리 어업이 주로 배타적 관리(所有)가 가능한 수역에서 이루어졌음을 뜻한다. 원초적인 어장의 소유형태는 마을사람들이 공동으로 하는, 이른바 공동체 소유형태였다.
여기에 농지의 사유화와 더불어 어장도 점차 왕실 · 권문세가들에 의해 사유화되기 시작하였으나, 농지의 사유화가 확산, 정립된 뒤에도 어장은 여전히 공유가 지배적인 소유형태였다. 어장은 분할할 수 없고, 그 생산이 공동노동을 바탕으로 하지 않으면 안 된다는 특질 때문이다.
그리하여 마침내 세도가들은 이와 같은 공동체적 점유 · 이용 형태를 그대로 온존시킨 채 법형식상 소유권만을 갖고 어민을 지배하게 된다. 수산물은 공물(貢物) 성격이 강하기 때문에 오히려 그 수탈의 도는 훨씬 심했고, 거기에 어업 및 어민관(漁民觀)마저 낮아 천민시되고 있었다.
수산물은 아무리 풍족해도 그것만으로는 자족할 수 없는 산물이므로, 교환은 필수요건이다. 그런데 수산물은 상품 성격이 약하여 교환할 때 불리하기 마련이어서 전 근대 우리 어민은 천민으로서 빈곤의 악순환을 벗어날 수 없었다고 표현해도 과언이 아니다.
광복과 더불어 어민의 존재 또한 크게 변모한다. 먼저 “뱃사람”에 대한 관념이 바뀌기 시작하였고, 어장 또한 부분적이나마 세도가의 강점에서 벗어나게 되었으며, 어업기술의 향상으로 생산성이 올라갔기 때문이다. 수산물이 수출 주종상품 구실을 하자 어민의 존재도 빛을 보게 되었다.
그러나 공업화의 진전과 더불어 어업은 점차 몰락하기 시작하였는데, 젊은 노동력과 어장은 줄어들고 남은 어장마저 오염되기 일쑤였기 때문이었다.
그 결과 1965년 어민의 총수(어업종사자+가구원)는 127만 6000여 명이던 것이 1996년에는 33만여 명으로 31년 동안 1/4로 줄었으며, 실제로 어업에 종사하는 어업종사자는 같은 기간에 54만 6000여 명에서 17만 1000여 명으로 1/3로 줄고 있다.
더욱 중요한 사실은 어민의 고령화현상이다. 1970년 총어민 중 60세 이상의 고령자는 70만 4000명으로 전체 어민의 6%에 불과하던 것이 1996년에는 20.2%로 크게 늘고 있다. 한편 실제로 어업생산에 종사하는 어업종사자는 60세 이상의 고령자가 1970년에는 5.6%이던 것이 1996년에는 24.3%로 늘고 있다.
반면에 15세∼29세의 젊은 노동력은 같은 기간에 32%에서 3.5%로 격감하여 어촌에서 젊은 어민의 모습을 보기가 어렵게 되어가고 있는 실정이다. 어촌의 사회 · 경제 · 문화 · 교육 등 생활여건이 개선되고 밀려오는 값싼 외국수산물의 홍수에 대한 대책이 강구되지 않는다면, 이러한 현상은 더욱 심화되지 않을 수 없다는 데에 문제의 심각성이 있다.[1]
각주
참고자료
같이보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