자본가
자본가(資本家)는 자본금을 가지고 대부하여 이자를 받거나, 그것으로 노동자를 고용 ㆍ 사역하여 기업을 경영함으로써 이윤을 내는 사람을 말한다.[1]
개요
자본가는 자신의 자본금으로 영리활동을 수행하는 경영자이다. 기업가 · 경영자 · 사용자 · 고용주 · 부르주아라고도 한다. 통상적으로는 자본, 즉 생산수단을 소유하고 노동력을 구매하여 이윤을 얻기 위해 상품의 생산활동을 주관하는 산업자본가를 지칭한다. 넓게는 산업자본가를 비롯하여 상업자본가 · 대부자본가 · 금융자본가 등을 포괄한다. 광복 이후 대한민국 자본가계급의 역사는 재벌의 형성 · 발전과정으로 집약될 수 있다. 1990년대 이후 재벌이 중소기업을 하도급 계열구조로 종속시키면서 소수의 재벌자본가와 다수의 영세자본가 사이의 격차는 더욱 심화되어 우리 사회의 양극화를 낳고 있다.[2]
상세
자본가는 경영의 관리기능이라는 측면에서 정의되는 기업가나 경영자와는 다른 개념이다. 자본주의 사회에서 생산수단의 소유관계에 따라 계급을 규정할 때 자본가(bourgeoisie)는 생산수단을 소유한 계급적 범주로서 노동자(proletariat)계급과 대립되는 개념으로 사용된다. 이러한 의미에서 자본가에 대한 정의는 통상 자본주의적 생산양식과 관련지어 이해할 수 있다.
자본주의 생산방식은 이윤이나 잉여가치를 추구하는 상품생산의 형태로 이루어지는데, 잉여가치의 창출을 지향하며 이를 위해 끊임없는 자기증식의 운동을 수행하는 것이 바로 자본이다. 따라서 자본가란 자본의 자기증식운동을 구현하는 인격화된 존재를 의미한다.
자본가는 자기의 자본으로 기계나 원료를 사들이고, 노동자를 고용하여 상품을 생산하여, 생산된 상품을 시장에 내다 파는 활동을 수행한다. 이때, 상품의 생산과 판매를 통해 자본가는 자신이 투입한 자본금보다도 더 수익을 얻고자 하며, 투자 대비 판매수입의 차액으로 이윤 또는 잉여가치를 획득하게 된다.
자본가는 상품의 생산과정에서 노동자들을 고용하여 그들의 노동력을 지배하는 지위에 서게 되는데, 노동력의 통제와 그 성과의 배분을 둘러싸고 노동자와 자본가사이에 대립과 갈등이 내재하게 된다.
자본주의적 상품생산에서 자본가가 이윤이나 잉여가치를 획득하는 것에 대해 경제학이론에서는 상반된 입장이 제시되고 있다. 마르크스(Karl Marx)를 대표로 하는 급진적 정치경제학자들은 자본가가 노동자들에게 노동력 가치 이상의 잉여노동을 강요함으로써 이윤을 착취하는 것이라고 설명하고 있다.
반면, 근대경제학자들은 이윤이 자본의 제공자, 즉 자본가에 대한 정당한 보수라고 주장한다. 그들에 따르면, 상품의 가치는 노동과 생산수단과의 결합에 의하여 만들어지며 노동자와 자본가에게 각각 공헌정도에 따라 분배되는 것이므로, 이윤이 노동자를 착취한 것으로 발생한 것이 아니라 자본가의 기여와 노력에 대한 당연한 보상의 몫이다.
자본주의의 역사에 걸쳐 단계적으로 자본의 자기증식방식이 다양한 형태와 성격을 띠었던 만큼, 자본의 소유자인 자본가의 존재형태도 다양하게 변화되어 왔다. 자본주의 초기에는 그 이전부터 존재하였던 상업자본가와 대부자본가가 지배적인 위치를 차지하였으며, 산업화가 본격화된 국면이후부터는 상품생산을 수행하는 산업자본가가 사회경제적으로 주도적인 위상을 갖게 되었다.
금융세계화와 정보사회로의 이행으로 특징지을 수 있는 최근의 자본주의 경제체제하에서는 금융자본가와 지식자본가(知識資本家 : 창의적인 지식상품의 개발 · 생산 · 판매를 수행하여 이윤을 얻는 자본가)가 새롭게 막강한 영향력을 행사하고 있다.[2]
역사와 현황
18 ~ 19세기 무렵의 조선 말기에 상품화폐경제가 일정하게 발달하면서 상인의 활동이 활발해졌고, 상업의 발달을 통해 일정한 자본을 축적한 상인들이 농업 · 수공업 · 광업 부문에 직접 영리사업을 전개하였다. 이들이 한국에서 찾아볼 수 있는 맹아적(萌芽的) 형태의 자본가들로 간주될 수 있으나, 19세기 말엽 개항과 외세침략으로 자생적인 자본주의경제의 발전이 좌절됨에 따라 이들은 근대적인 자본가로 전환하지 못하였다.
개항과 더불어 일본제국주의의 침탈에 의하여 근대적 상품경제체제가 구축되기는 하였으나 일본 자본의 식민지 초과이윤을 실현하는 방향으로 자리잡게 되었다. 1910년의 한일합병에 의해 한국이 일제의 식민지로 전락함에 따라 1910년대에는 일본의 식량 · 원료공급지와 상품시장으로 편입되었으며, 1920년의 회사령 폐지를 통해 일본 자본가의 진출이 활발하게 이뤄지면서 이들이 주도하는 공업화가 일정하게 진행되었다.
1930년대 이후 일제가 한국을 군수산업의 병참기지로 삼아 공업화정책을 본격적으로 추진함에 따라 일본 자본의 국내 투자가 더욱 확대되기도 하였다. 1912년에 공표된 「토지조사령」이 농촌의 토지소유관계를 근본적으로 변화시키는 과정에서 대다수의 농민들은 소작농이나 도시노동자로 전락되는 가운데, 지주계층을 중심으로 재산축재가 이뤄짐에 따라 그 중 일부가 산업투자를 통해 근대적인 토착자본가로 탈바꿈하였다.
그런데, 토착자본가들은 경제활동의 양적 비중에서 매우 미미한 수준에 머물렀다. 구체적으로, 1941년 공업회사통계에 따르면 총불입자본금의 90.9%가 일본인 소유였으며, 한국인 소유는 단지 9.1%에 그쳤다. 또한 한국인 토착자본가 대부분은 독립적인 사업활동을 도모하는 민족자본이라기 보다는 일제 식민지당국에 결탁 · 의존하는 매판자본의 성격을 띠고 있었다.
1945년 광복 이후 미군정기를 거쳐 1948년의 정부 수립 후 취해진 일본인의 귀속재산 불하와 원자물자 배분 그리고 은행의 융자지원 등이 1950년대 자본가계급을 형성하는 데에 결정적으로 작용한다. 이 당시부터 자본가집단은 기업가적인 사업투자를 통해 국가권력의 특혜와 후원에 기반하여 성장함으로써 정경유착과 관료의존성이라는 특징적인 성격을 띠게 되었다.
1962년 이후 박정희 군사정권이 수출주도형 경제성장정책을 추진하는 과정에서 1950년대 3백산업(三白産業 : 제분 · 제당 · 면방공업) 등을 중심으로 기업경영의 경험을 갖춘 소수의 자본가에게 정책 지원을 집중하였다.
이들 자본가는 1960년대에 경공업을 중심으로 저임금노동력과 파격적인 정부지원에 힘입어 기업규모를 크게 확장할 수 있었으며, 1970 ∼ 1980년대에 정부의 중화학공업 육성정책과 부실기업 구조조정으로 지원받으며 소위 재벌이라는 대기업집단의 모습을 갖추게 되었다.
1987년의 민주화를 거치면서 권위주의적 국가권력의 경제개입이 약화되는 가운데, 경제에 대한 재벌의 영향력을 더욱 강고하게 자리잡아 갔다. 특히 1990년대의 세계화 물결에 편승하기 위해 재벌 기업들이 과당경쟁과 무모한 투자 등에 의해 부실화됨으로써 1997년의 외환위기를 초래하는 데에 주요 원인으로 작용하여, 그 당시 국민의 정부에 의해 기업투명성 제고와 재무구조 개혁 등을 포함하는 재벌개혁이 시도되기도 하였다.
2000년대에 들어서 삼성 · 현대 등을 중심으로 글로벌기업으로 발돋움하며 소유가족(owner family)의 2세 또는 3세로 분할 · 승계되는 과정을 거치고 있다.[2]
의의와 평가
광복 이후 한국 자본가계급의 역사는 재벌의 형성 · 발전과정으로 집약될 수 있다. 미군정시기부터 1960 ∼ 1970년대에 걸쳐 자본가의 성장은 국가권력의 특혜와 지원에 의존하였던 것이다. 특히 박정희정권이 수출주도적 경제개발을 추진하는 과정에서 대기업에 편중하는 지원정책을 전개함으로써 재벌의 대자본가집단을 낳는 한편 중소자본가들의 건전성을 매우 취약하게 만들었다.
1990년대 이후 재벌의 대기업들이 중소기업들을 하도급계열구조로 종속시킴으로써 소수의 재벌자본가와 다수의 영세자본가 사이의 격차는 더욱 심화되어 한국 사회의 양극화를 낳고 있다. 또한 족벌 자본가들이 기업경영에서 매우 권위주의적 태도를 보임으로써 노동조합과의 마찰 · 갈등을 빚으며 대립적 노사관계를 초래하고 있다.[2]
각주
참고자료
같이 보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