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국무총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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국무총리(國務總理, Prime Minister)는 대통령을 보좌하며 대한민국의 행정을 통괄하는 정무직 공무원이다. 국무총리는 국회의 동의를 얻어 대통령이 임명한다. 권력분립원칙에 따른 대한민국의 3부요인 중에서 국가원수 겸 행정부수반인 대통령을 대신하여 행정부를 대표한다.[1]

개요

국무총리(國務總理)는 대한민국 대통령의 제1위 보좌기관으로 대통령의 명을 받아 행정부를 통할한다. 아울러 국무회의 부의장을 겸한다. 현직은 제48대 한덕수이다.

실권을 가진 대통령과 총리가 공존하는 나라는 대부분 이원집정부제로 분류되는 국가들이며 대한민국과 같은 대통령중심제에서는 그리 많지 않다. 한국은 대통령과 총리가 병존하는 나라이지만 장관에 대한 인사권을 대통령이 행사하고 행정부의 수장을 대통령으로 규정하기 때문에 대통령중심제 국가로 분류되며, 한국처럼 대통령 중심제하에서 총리가 있는 경우는 상당히 드물다. 때문에 위치만 보면 사실상 총리가 아닌 미국부통령국무장관을 섞어놓은 것에 가깝다 봐야 한다. 단지, 대한민국의 대통령제가 의원내각제적 요소를 부분적으로 받아들였다 뿐이지, 실제로 총리로서 인정된다면 여소야대 상황에서 내각에 대한 불신임권도 인정되는, 이원집정부제를 뛰어넘는 또 다른 정치체계가 발생하게 된다.

2024년 기준으로 봉급은 1억 9763만원을 받으며, 업무추진비로 9억 1,000만원 정도(2019년 기준)를 추가로 받는다.[2]

도입 과정

역사적으로는 갑오개혁 이후 영의정이 총리대신이 된 것을 시초로 본다. 이후 대한제국 내각총리대신, 의정, 의정대신을 거쳤다. 대한민국 임시정부에서 1919년 9월 11일 1차 개헌 이후 대통령 밑에 국무총리를 둔 사례도 있었다.

통상 대통령제 국가에서는 대통령 밑으로 부통령을 두지만 헌법에 의원내각제적 요소가 가미된 대한민국은 대통령 밑에 국무총리를 둔다. 이렇게 된 이유는 제헌의회에서 유진오, 조봉암, 김준연 등이 작성한 대한민국 헌법 초안에 따르면 대한민국은 '국무총리' 가 실권을 쥐고, 대통령은 상징적 국가원수에 머무르는 의원내각제 국가가 될 예정이었기 때문이다. 그러나 초대 대통령으로 사실상 내정되었던 이승만은 대통령이 강한 권력을 쥐길 원했기 때문에 대통령 중심제를 강력하게 주장하였다. 그래서 부랴부랴 의원내각제 기반 위에 대통령 중심제를 덧붙이는 것으로 마무리된 것이 대한민국의 제헌 헌법이다. 그러다 보니 대통령도 내각제처럼 의회에서 선출하는 것으로 정해졌다. 이후 이승만은 유명무실한 총리를 사사오입 개헌으로 날려버렸으나 국무총리를 없애는 대신 외무부 장관이 겸하는 '수석국무위원' 제도를 신설했다. 외무부장관 - 내무부장관 - 재무부장관 순으로 임명될 수 있었다. 그래서 총리의 역할을 하던 사람이 아예 없어진 것은 아니었던 것이었다.

4.19 혁명으로 성립된 제2공화국이 의원내각제를 채택하면서, 다시 국무총리가 부활한다. 이 시기의 장면 전 총리는 내각수반으로서 상징적 국가원수인 윤보선 대통령 대신 실제 국정을 총괄하는 실권을 가졌었다. 이후 박정희 대통령은 제3공화국 헌법을 만들면서 부통령을 두지 않고 대통령에 의한 임명직인 국무총리직을 만들었고, 이것이 오늘날까지 이어진 것이다.[2]

임명

절차

대한민국 헌법 제86조

① 국무총리는 국회의 동의를 얻어 대통령이 임명한다.
③ 군인은 현역을 면한 후가 아니면 국무총리로 임명될 수 없다.

국회법 제119조

정부는 국무총리와 국무위원 및 정부위원인 공무원을 임면하였을 때에는 이를 국회에 통지한다.

국무총리는 대통령이 지명한 후 국회의 동의를 얻어 임명한다. 현역 군인은 전역하지 아니하면 국무총리가 될 수 없다. 국무총리 임명에는 재적 의원의 과반수 출석과 출석 의원의 과반수 찬성이 필요하다. 현직 국회의원은 국무총리를 겸직할 수 있어 의원직을 사임할 필요가 없다.

국회는 국무총리 지명동의안을 표결하기 전에 국무총리로서 적합한 인물인가를 심사하는 인사청문회를 거쳐(국회법 제65조의2 제1항) 동의안을 국회 본회의에서 의결하여 처리한다.

대통령 당선인도 대통령 임기 시작 전에 국회의 인사청문 절차를 거치게 하기 위하여 국무총리 후보자를 지명할 수 있으며(대통령직 인수에 관한 법률 제5조 제1항 전문), 국무총리 후보자를 지명한 경우에는 국회의장에게 인사청문의 실시를 요청하여야 한다(같은 조 제2항).[2]

총리 서리제

대통령이 국회의 동의 이전에 임명하는 총리를 총리 서리라 한다. 어원은 1894년 대한제국에서 각 도의 관찰사의 유고시 궐위 방지를 위해 사용했던 서리직에서 유래하였다. 총리 서리제는 대한민국 헌법에 단 한번도 규정된 바 없다. 그 기원은 국회 내 세력이 약했던 이승만 전 대통령이 국회의 의결을 거치지 않고 국무총리를 임명하고자 실시한 것이다.

제헌헌법 제69조: 국무총리는 대통령이 임명하고 국회의 승인을 얻어야 한다. 국회의원 총선거 후 신국회가 개회되었을 때에는 국무총리 임명에 대한 승인을 다시 얻어야 한다.

해당 조문의 문언상 대통령의 임명이 국회의 (사후) 승인보다 선행되는데, 임명으로부터 국회의 승인에 이르는 기간 동안 국무총리 서리라는 직함으로 국무총리의 권한을 행사하게끔 한 것이다.

현실적인 문제로 하위법에 총리직이 궐위되었을 때 후임자를 바로 지명하는 대신 총리 서리를 임명하여 정식 총리가 취임하기 전까지 그 직을 수행하도록 했는데, 법에는 국무총리가 신병 등의 이유로 그 직을 수행할 수 없을 경우 대통령이 국무위원 중 한 사람을 총리 직무 대리로 지정할 수 있다고 되어있을 뿐, 총리 궐위 시 총리 서리를 임명할 수 있다는 내용은 없었으므로 총리 서리 임명에 대한 적법성 여부를 두고 논란이 컸다. 이승만 정부에서 총리 서리를 지낸 인사로는 신성모(1950년 4월~11월), 허정(1951년~1952년), 백한성(1954년)이 있었는데, 신성모는 제2대 총선까지의 궐위만을 대행하는 역할인데 졸지에 국방부장관 겸 전시 총리 서리를 지냈으며, 허정과 백한성은 각각 장면과 변영태의 해외 체류기간에 한국 대행으로서 서리직을 지냈을 뿐이다. 그래서 그들의 임기는 장면과 변영태의 임기 기간에 포함되는데, 엄밀히는 변영태는 해외에 있던 중에 국무총리직이 폐지되어 거기서 임기를 마쳤다.

제2공화국에서는 총리제가 부활하였으나, 총리 서리제는 활용되지 않았다. 2공화국은 내각책임제 체제로 총리가 정부수반이었으므로 정부수반을 서리로 두는 것이 말이 안 되는 만큼 당연한 일이었다.

제3공화국 헌법은 국무총리가 국회의 동의를 얻지 않고 대통령에 의해 임명되는 유일한 헌법이었다. 이에 따르면 국회는 국무총리와 각료의 해임 건의만을 할 수 있었다. 그래서 이 시기엔 총리 서리가 없었다. 그런데 10월 유신으로 등장한 제4공화국에서는 도로 국회의 동의를 얻는다는 내용이 부활하였고 총리 서리직도 재등장하였다.

국무총리 서리에게 국무위원 제청권이 있는지는 시대에 따라 해석이 바뀐다. 민주화 이전이나 노태우 정부 시절에는 총리 서리들이 국무위원 제청권을 수차례 행사했으며, 그때마다 위헌 논란이 불거졌다. 결국 김대중 정부 들어 김종필 총리 서리까지만 제청권을 행사하고, 그 다음 이한동 총리 서리부터는 제청권을 행사하지 않았다. 지금은 총리 서리에게 제청권이 없다고 보는 시각이 주류로 자리잡았다.

2003년부터는 대통령 당선인이 취임 전에 총리지명자를 지명한 뒤 국회에 청문 및 인준을 요청하는 대통령직 인수법이 제정되었고, 이를 근거로 참여정부부터는 동의를 받은 후에야 임명하는 형식을 취하게 되었다. 이에 따라 총리 서리는 있을 일이 없게 되었다. 다만 지금도 국무총리직이 궐위될 시 그 직무대행은 국무위원 임명제청권을 사용할 수 있다. 강경화 전 외교부장관이 총리직무대행의 임명제청으로 국무위원이 된 케이스다.

총리 서리가 사라져가는 과정에서 대표적인 사건으로 바로 직전 해인 2002년 국민의 정부에서 장상, 장대환 서리가 국회에서 인준이 부결되는 사태가 있었다. 이때 청와대에서는 공백 방지를 위해 부결된 후에도 얼마든지 서리로 있을 수 있다는 논리를 제기했다. 헌법에서 근거가 모호했던 총리 서리 자체가 '자리' 가 되어버렸기 때문에 일어난 촌극이다. 사실 이 부결이 된 게 1960년 국무총리직의 부활 이래 42년 만이라 이런 논란은 충분히 일어날 수 있었다. 국민의 정부를 제외하고는 야당이 제1정당인 정국이 있던 적이 없었기도 하고, 한나라당의 지연책과 국회 공방으로 총리 서리로 5개월을 대기한 김종필 전 총리의 사례도 있었기 때문이다.[2]

역대 국무총리

대한민국 국무총리
이름 임기 기간 정부
1 이범석 1948년 07월 31일 ~ 1950년 04월 20일 1년 262일 제1공화국
서리 신성모 1950년 04월 21일 ~ 1950년 11월 22일 215일
2 장면 1950년 11월 23일 ~ 1952년 04월 23일 1년 152일
서리 허정 1951년 11월 06일 ~ 1952년 04월 09일 155일
서리 이윤영 1952년 04월 24일 ~ 1952년 05월 05일 11일
3 장택상 1952년 05월 06일 ~ 1952년 10월 05일 152일
서리 백두진 1952년 10월 09일 ~ 1953년 04월 23일 196일
4 1953년 04월 24일 ~ 1954년 06월 17일 1년 54일
5 변영태 1954년 06월 27일 ~ 1954년 11월 28일 154일
임시서리 백한성 1954년 11월 18일 ~ 1954년 11월 29일 11일
수석국무위원 변영태 1954년 11월 30일 ~ 1955년 07월 28일
수석국무위원 대리 김형근 1955년 07월 29일 ~ 1956년 05월 19일
수석국무위원 김현철 1956년 05월 19일 ~ 1956년 05월 26일
이익흥 1956년 05월 27일 ~ 1956년 12월 31일
조정환 1956년 12월 31일 ~ 1959년 12월 21일
수석국무위원 대리 최인규 1959년 12월 22일 ~ 1960년 03월 23일
수석국무위원 홍진기 1960년 03월 24일 ~ 1960년 04월 24일
허정 1960년 04월 25일 ~ 1960년 06월 14일 51일
6 1960년 06월 15일 ~ 1960년 08월 18일 64일 제2공화국
7 장면 1960년 08월 19일 ~ 1961년 05월 17일 272일
내각수반 장도영 1961년 05월 20일 ~ 1961년 07월 02일 43일
송요찬 1961년 07월 03일 ~ 1962년 06월 15일 347일
내각수반 직무대행 최덕신 1962년 06월 16일 ~ 1962년 06월 18일 4일
내각수반 박정희 1962년 06월 18일 ~ 1962년 07월 09일 21일
내각수반 김현철 1962년 07월 10일 ~ 1963년 12월 16일 1년 159일
8 최두선 1963년 12월 17일 ~ 1964년 05월 09일 144일 제3공화국
9 정일권 1964년 05월 10일 ~ 1970년 12월 20일 6년 225일
10 백두진 1970년 12월 21일 ~ 1971년 06월 03일 164일
11 김종필 1971년 06월 04일 ~ 1975년 12월 18일 4년 198일 제4공화국
서리 최규하 1975년 12월 19일 ~ 1976년 03월 12일 84일
12 1976년 03월 13일 ~ 1979년 12월 05일 3년 268일
13 신현확 1979년 12월 13일 ~ 1980년 05월 21일 160일
서리 박충훈 1980년 05월 22일 ~ 1980년 09월 01일 102일
서리 남덕우 1980년 09월 02일 ~ 1980년 09월 21일 19일
14 1980년 09월 22일 ~ 1982년 01월 03일 1년 103일 제5공화국
서리 유창순 1982년 01월 04일 ~ 1982년 01월 22일 18일
15 1982년 01월 23일 ~ 1982년 06월 24일 152일
서리 김상협 1982년 06월 25일 ~ 1982년 09월 20일 87일
16 1982년 09월 21일 ~ 1983년 10월 14일 1년 23일
서리 진의종 1983년 10월 15일 ~ 1983년 10월 16일 1일
17 1983년 10월 17일 ~ 1985년 02월 18일 1년 125일
직무대행 신병현 1984년 11월 17일 ~ 1985년 02월 18일 103일
서리 노신영 1985년 02월 19일 ~ 1985년 05월 15일 85일
18 1985년 05월 16일 ~ 1987년 05월 25일 2년 9일
서리 이한기 1987년 05월 26일 ~ 1987년 07월 13일 48일
서리 김정렬 1987년 07월 14일 ~ 1987년 08월 06일 23일
19 1987년 08월 07일 ~ 1988년 02월 24일 201일
서리 이현재 1988년 02월 25일 ~ 1988년 03월 01일 5일 노태우 정부
20 1988년 03월 02일 ~ 1988년 12월 04일 277일
서리 강영훈 1988년 12월 05일 ~ 1988년 12월 15일 10일
21 1988년 12월 16일 ~ 1990년 12월 26일 2년 10일
서리 노재봉 1990년 12월 27일 ~ 1991년 01월 22일 26일
22 1991년 01월 23일 ~ 1991년 05월 23일 120일
서리 정원식 1991년 05월 24일 ~ 1991년 07월 07일 44일
23 1991년 07월 08일 ~ 1992년 10월 07일 1년 92일
24 현승종 1992년 10월 08일 ~ 1993년 02월 24일 139일
25 황인성 1993년 02월 25일 ~ 1993년 12월 16일 294일 문민정부
26 이회창 1993년 12월 17일 ~ 1994년 04월 21일 125일
27 이영덕 1994년 04월 30일 ~ 1994년 12월 16일 230일
28 이홍구 1994년 12월 17일 ~ 1995년 12월 17일 1년
29 이수성 1995년 12월 18일 ~ 1997년 03월 04일 1년 77일
30 고건 1997년 03월 05일 ~ 1998년 03월 02일 363일
서리 김종필 1998년 03월 03일 ~ 1998년 08월 17일 167일 국민의 정부
31 1998년 08월 18일 ~ 2000년 01월 12일 1년 147일
32 박태준 2000년 01월 13일 ~ 2000년 05월 18일 126일
직무대행 이헌재 2000년 05월 18일 ~ 2000년 05월 23일 5일
서리 이한동 2000년 05월 23일 ~ 2000년 06월 28일 36일
33 2000년 06월 29일 ~ 2002년 07월 10일 2년 11일
서리 장상 2002년 07월 11일 ~ 2002년 07월 31일 20일
서리 장대환 2002년 08월 09일 ~ 2002년 08월 28일 19일
서리 김석수 2002년 09월 10일 ~ 2002년 10월 04일 24일
34 2002년 10월 05일 ~ 2003년 02월 26일 144일
35 고건 2003년 02월 27일 ~ 2004년 05월 24일 1년 87일 참여정부
직무대행 이헌재 2004년 05월 24일 ~ 2004년 06월 29일 36일
36 이해찬 2004년 06월 30일 ~ 2006년 03월 15일 1년 258일
직무대행 한덕수 2006년 03월 16일 ~ 2006년 04월 19일 34일
37 한명숙 2006년 04월 20일 ~ 2007년 03월 06일 321일
직무대행 권오규 2007년 03월 08일 ~ 2007년 04월 02일 26일
38 한덕수 2007년 04월 03일 ~ 2008년 02월 28일 334일
39 한승수 2008년 02월 29일 ~ 2009년 09월 28일 1년 212일 이명박 정부
40 정운찬 2009년 09월 29일 ~ 2010년 08월 11일 315일
직무대행 윤증현 2010년 08월 11일 ~ 2010년 09월 30일 50일
41 김황식 2010년 10월 01일 ~ 2013년 02월 26일 2년 148일
42 정홍원 2013년 02월 26일 ~ 2015년 02월 16일 1년 356일 박근혜 정부
43 이완구 2015년 02월 16일 ~ 2015년 04월 26일 70일
직무대행 최경환 2015년 04월 27일 ~ 2015년 06월 17일 53일
44 황교안 2015년 06월 18일 ~ 2017년 05월 11일 1년 328일
직무대행 유일호 2017년 05월 12일 ~ 2017년 05월 31일 19일 문재인 정부
45 이낙연 2017년 05월 31일 ~ 2020년 01월 14일 2년 228일
46 정세균 2020년 01월 14일 ~ 2021년 04월 16일 1년 94일
직무대행 홍남기 2021년 04월 16일 ~ 2021년 05월 13일 27일
47 김부겸 2021년 05월 14일 ~ 2022년 05월 11일 361일
직무대행 추경호 2022년 05월 12일 ~ 2022년 05월 20일 9일 윤석열 정부
48 한덕수 2022년 05월 21일 ~ 현재

대한민국의 국무총리는 2024년 현재 48대째다. 그러나 임기가 1년을 넘긴 사람은 20명 남짓하다. 임기 2년을 넘긴 사람으로 치면 장면, 정일권, 김종필, 최규하, 노신영, 강영훈, 고건, 이한동, 한덕수, 김황식, 이낙연 11명 뿐이다. 이 가운데 대통령이 된 인물은 권한대행을 맡은 후 다음 대선에서 간선제로 선출된 최규하 한 명뿐이다. 의원내각제 하 행정수반의 직무를 수행한 총리는 허정과 장면 둘 뿐이다.

국무총리 중 대통령 권한대행을 지낸 인물은 허정, 최규하, 고건, 황교안이다. 고건과 황교안은 각각 노무현 전 대통령 탄핵 소추와 박근혜 대통령 탄핵에 따른 권한대행이었다.

대통령 후보가 된 인물은 허정, 변영태, 김종필, 이수성, 이회창, 이한동이고, 이 가운데 유력 대선후보였던 인물은 이회창 1명 뿐이다. 경선 과정에서 있었던 인물은 박태준, 장상, 이해찬, 한명숙, 이낙연, 정세균이며, 대통령 후보로 거론되었던 인물은 장면, 노신영, 이홍구, 고건, 황교안, 이낙연, 정세균이다. 그 밖에 1995년 첫 민선 서울특별시장 선거에 정원식이 나왔고, 김황식 역시 2014년 서울시장 경선에 참여했다. 서울시장을 지낸 국무총리 허정과 고건은 둘 다 대통령 권한대행을 맡았다는 공통점이 있다.

이헌재 재정경제부 장관은 2000 - 2001년 2차례의 권한대행과 부총리 등으로 여러 차례 총리로 거론되었으나 부인의 위장전입 의혹으로 끝내 총리가 되지 못했다. 제1공화국 시기에 이윤영 전 총리 서리는 무려 네 번에 걸쳐서 한국민주당에 의해 총리 인준이 부결되었다.

역대 총리는 장면, 백두진, 김종필, 고건, 한덕수 총리가 중임했기 때문에 총 43명이다. 출신은 관료, 그 가운데서도 경제관료가 압도적으로 많으며 그 외 정치인, 법관, 장군, 대학 총장 출신 등이 있다. 출신 대학은 서울대학교가 20명으로 압도적으로 많고, 육군사관학교 5명, 와세다대학 3명, 성균관대학교 3명, 연세대학교 2명, 고려대학교 2명], 도쿄대학 1명 , 히토쓰바시대학 (도쿄상과대학), 이화여자대학교, 국민대학교, 쓰쿠바대학, 국방대학교, 구 만주건국대학 등이 각각 1명씩 배출했다.

현재 살아있는 전직 국무총리는 이현재(1929년생), 김석수(1932년생), 이홍구(1934년생), 이회창(1935년생), 한승수(1936년생), 이수성(1937년생), 고건(1938년생), 정홍원(1944년생), 한명숙(1944년생), 정운찬(1947년생), 김황식(1948년생), 정세균(1950년생), 이낙연(1952년생), 이해찬(1952년생), 황교안(1957년생), 김부겸(1958년생) 총 16명이다. 모두 대한민국 제6공화국 이후에 국무총리를 역임한 사람들이다.

최장 재임은 제3공화국 정일권 전 총리의 6년 225일이고, 그 다음은 제3공화국과 제4공화국, 6공화국에서 국무총리를 역임한 김종필의 6년 147일로서 현행 제6공화국 헌법상의 대통령 임기 5년보다도 긴 진기록을 남겼다. 대통령 중임제나 내각제, 이원집정부제를 도입하지 않는 이상 앞으로도 깨지기는 어려울 것으로 추정된다.

최단 재임은 제2공화국 허정의 65일이나 이는 과도내각 시기(허정 내각)의 기록인 데다, 취임 직전까지 총리직의 대체 직책인 수석국무위원을 지내다가 총리직이 부활할 때 제2공화국 헌법 조항에 따라서 자동 임명된 케이스이기 때문에 두 임기 합산 시 100일이 넘는다(114일). 그래서 실질적 최단 재임 총리는 박근혜 정부 이완구 전 총리의 70일이며, 노재봉 전 총리의 121일이 3위로 뒤를 잇는다.

가장 장수한 국무총리는 2020년 5월 25일 사망한 현승종이며(101년 4개월), 그 다음으로는 2016년 5월 10일 사망한 강영훈이다(94년 11개월). 반면에 가장 단명한 국무총리는 1966년 6월 4일 사망한 장면이며(66년 9개월),[64] 그 다음으로는 2021년 10월 14일 사망한 이완구이다.(71년 2개월)

가장 젊은 나이에 취임한 국무총리는 1953년 4월 24일 취임한 백두진이며(44년 5개월), 그 다음으로는 1971년 6월 4일 취임한 김종필이다(45년 4개월). 반면에 가장 노년에 취임한 국무총리는 1992년 10월 8일 취임한 현승종이며(73년 8개월), 그 다음으로는 2022년 5월 21일 취임한 한덕수이다(72년 11개월).

김종필 전 총리는 10월 유신 전후로 모두 자리를 지켜, 제3공화국/제4공화국에서 제11대 국무총리로 4년 6개월 14일간 자리를 지켰다. 뒤이어 제6공화국 국민의 정부에서도 제31대 국무총리로 1년 147일 (+ 총리 서리 167일) 간 재임하였다. 총 6년 147일로 역대 국무총리 재임기간 중 2위의 기록이고 6공화국만 1년 314일로 역대 7위의 기록이다.

고건 전 총리는 문민정부의 마지막 총리로 1년, 참여정부의 총리로 1년 2개월 재임하였고, 특히 임기 후반 64일은 고건 권한대행 체제로 대통령 권한대행직을 수행하였다. 제6공화국에서 서로 다른 정부에서 지명되어 총리를 지낸 것은 첫 번째 사례이며, 두 번째는 참여정부, 윤석열 정부에서 총리를 지낸 한덕수 총리이다.

제6공화국에서 총 재임 기간이 가장 긴 총리는 오늘 기준으로 +1099일째 재임중인 현임 총리 한덕수이며, 그 다음으로 2위 이낙연 959일, 3위 김황식 880일, 4위 고건 816일, 5위 이한동 742일 순이다.

대통령이 후임자를 지명하지 않는 한 이전 정부의 총리는 자리를 유지하게 된다. 이렇게 자리를 유지한 총리는 고건(1998년 3월 3일까지), 김석수(2003년 2월 26일까지), 한덕수(2008년 2월 29일까지)이며, 황교안 전 총리도 5월 10일 대통령 권한대행을 마친 당일 사의를 표명해 명목상 다음 날인 5월 11일까지 문재인 정부의 국무총리로 재임하였다. 이런 불편한 동거의 경우, 신임 대통령이 국무총리의 각료 제청권을 요청하게 된다. 고건 전 총리와 한덕수 총리의 경우엔 정권이 교체된 사례임에도 불구 새 정부의 국무회의를 주재함은 물론, 각료 제청권을 사용하였다. 고건 총리의 사례. 한덕수 총리의 사례 반면 각료 추천권을 사용하지 않은 사례로는, 참여정부의 대통령 권한대행을 마친 고건 전 총리와 즉각 사임한 황교안 전 총리가 있었다. 권한대행직의 특수성은 물론, 물러나는 총리의 신임 각료 제청이 부적절하다는 점을 고려했다는 긍정적 평가와, 대통령과의 알력 때문이라는 부정적 평가가 엇갈린다. 김석수 전 총리의 경우 고건 후보자의 국회 인준이 2월 26일 조기에 통과되어 당일 즉각 사퇴, 각료제청권을 사용하지 않아도 되었다.[2]

권한

법적 권한

국무총리는 대통령을 보좌하며, 행정에 관하여 대통령의 명을 받아 행정각부를 통할한다.

대한민국 헌법 제86조 제2항

① 국무총리는 대통령의 명을 받아 각 중앙행정기관의 장을 지휘·감독한다. ② 국무총리는 중앙행정기관의 장의 명령이나 처분이 위법 또는 부당하다고 인정될 경우에는 대통령의 승인을 받아 이를 중지 또는 취소할 수 있다.

정부조직법 제18조(국무총리의 행정감독권)

국무총리는 대한민국 헌법에 따라 대통령의 명을 받아 행정각부를 통할(통괄 및 관할)한다. 또한, 정부조직법에 의거해 국무위원과 중앙행정기관장의 임명제청권과 해임건의권을 가지며 이들을 지휘 · 감독한다. 이에 근거해 국무총리는 만약 중앙행정기관장이 위법 또는 부당한 명령이나 처분을 한 경우에는 대통령의 승인을 받아 중지 또는 취소할 수 있다. 그 외에도 국회출석 발언권, 국정행위문서 부서권(副署權), 총리령 발동권 등을 가진다. 무엇보다도 가장 큰 권한은 바로 권한대행권. 국무총리는 행정부 서열 2위로 만약 대통령의 궐위나 사고 시 1순위로 그 직위와 권한을 대행한다. 보통 이런 경우 국무총리를 대통령 권한대행이라고 부르지만, 이 직함은 편의상으로 사용될 뿐 법적으로 규정된 단어는 아니다.

국회의 인준을 받은 정식 국무총리가 아닌 국무총리 서리의 경우 국무위원 제청권이 없다. 재밌는 것은 노태우 정부 시절에는 여러 명의 총리 서리가 국무위원 제청권을 수차례 행사했는데, 김대중 정부 시절 총리 서리의 국무위원 제청권 유무를 두고 뜻밖에 갑론을박이 벌어졌다. 김대중 정부에서도 김종필 총리 서리가 제청권을 행사했으나, 이한동 총리부터는 총리 서리가 인사청문회를 거치게 되었고, 후술하듯 참여정부부터는 총리 서리제가 사라지게 되었다. 앞으로도 그럴 일이 없을 것으로 보여 이 논란은 하나마나 하게 되었지만, 재미있는 부분이 아닐 수 없다.

또한 국가의 1급 기밀을 보고 다룰 수 있다.[2]

실권

국무총리에 관한 헌법상 위의 제 규정을 종합하면 국무총리의 지위가 대통령의 권한행사에 다소의 견제적 기능을 할 수 있다고 보여지는 것이 있기는 하나, 우리 헌법이 대통령중심제의 정부형태를 취하면서도 국무총리제도를 두게 된 주된 이유가 부통령제를 두지 않았기 때문에 대통령 유고시에 그 권한대행자가 필요하고 또 대통령제의 기능과 능률을 높이기 위하여 대통령을 보좌하고 그 의견을 받들어 정부를 통할ㆍ조정하는 보좌기관이 필요하다는 데 있었던 점과 대통령에게 법적 제한 없이 국무총리해임권이 있는 점(헌법 제78조, 제86조 제1항 참조)등을 고려하여 총체적으로 보면 내각책임제 밑에서의 행정권이 수상에게 귀속되는 것과는 달리 한국의 행정권은 헌법상 대통령에게 귀속되고, 국무총리는 단지 대통령의 첫째 가는 보좌기관으로서 행정에 관하여 독자적인 권한을 가지지 못하고 대통령의 명을 받아 행정각부를 통할하는 기관으로서의 지위만을 가지며, 행정권 행사에 대한 최후의 결정권자는 대통령이라고 해석하는 것이 타당하다고 할 것이다.

헌법재판소 결정례 89헌마221(1994.4.28.)

부서권, 내각통할권, 국무위원 인사제청권 등 법적인 권한을 분명 가지고 있지만, 헌법과 헌재결정례에 따르면 국무총리는 어디까지나 대통령의 명을 받아 대통령을 보좌하는 직책이므로 국무총리의 권한 범위는 실질적으로 대통령의 재량에 달려 있다. 게다가 국무총리에 대한 인사권은 전적으로 대통령에게 있기 때문에, 실제 대한민국 정치에서의 위치는 대통령의 방패. 이를 나타내는 말로 방탄총리라는 말이 있을 정도. 명망 있는 사람을 총리로 임명한 다음 국정 운영을 하면서 비난을 받아 점차 그 명망이 '소진' 되면 지지율 저하를 이유로 총리를 교체해서 얼굴마담을 바꾸고 쇄신 분위기를 내는 일이 종종 있었다. 또 대독총리라는 별명도 있다. 대통령이 굳이 참석할 필요 없는 행사에 대통령의 축사 기타 메시지를 대독(代讀) 하는 것이 총리의 주 업무였기 때문이다.

행정부에서 제1인자에 가장 가까운 자리임에도 불구하고, 여태까지 국무총리 출신이 대통령으로 선출된 적이 사실상 없는 것은, 총리가 되면 공격만 계속 받다가 결국 정치력이 모두 소모되어 버리기 때문이라고 분석된다. 그나마 집중받은 이낙연도 대선 최종 후보로 나서지는 못했다. 국무총리 출신이 대통령이 된 사례는 딱 한 번 있었는데, 박정희 전 대통령 사후 최규하 전 총리가 대통령 권한대행이 된 뒤 통일주체국민회의에서 선출되어 대통령이 된 것이 그것이며, 그것조차도 유신체제를 종식하고 새 헌법을 준비할 동안의 과도정부였기에 큰 의미를 부여하기 어렵고 민주화 이후로는 사례가 없다.

역대 대통령들 다수는 헌법이 보장한 총리의 권한을 확실하게 행사하는 이른바 '책임총리' 를 약속했지만 제대로 된 경우는 많지 않다. 당장 이회창은 총리 시절 헌법상 권한인 인사권을 적극적으로 행사하는 책임총리가 되겠다고 말했다가 김영삼 전 대통령에게 바로 찍혀서 단명했다. 그나마 해볼 만한 내각통할권한도 제대로 행사하는 국무총리도 별로 없었다.

총리가 행정부 2인자임에도 불구하고 실권이 별로 없는 가장 큰 이유는 국무총리 고유의 인사권이 없다는 것이다. 예를 들어서 어느 관공서의 공무원이 쉽게 대통령에게 항명할 수 없는 이유는 그 공무원의 인사권이 장관에게 있고, 장관의 인사권은 대통령에게 있기 때문이다. 이 말인즉슨 대통령이 "저 공무원이 계속 내 눈에 거슬리는 행동을 한다. 제대로 조치 안 하면 장관 너를 징계하겠다." 라고 할 수 있고 장관이 "너 때문에 내가 징계받게 생겼다. 제대로 수습 못 하면 너를 징계하겠다." 라고 하는 일이 벌어지는 원인이 바로 인사권이다. 어느 사회에서든 인사권은 권력의 핵심이다.

그런데 하다못해 행정각부의 장관들도 행정각부 및 외청 고위직에 대한 인사권이 있는데 장관들의 상급자인 국무총리가 인사권을 행사할 수 있는 자리는 없다. 심지어 국무총리의 손발인 국무조정실장과 국무총리비서실장도 대통령이 임면권을 갖고 있으며, 그 휘하 주요 보직자들도 대통령의 영향력이 직접적으로 미친다. 실제로 국무총리비서실장의 경우, 문재인 정부의 초대 총리인 이낙연 총리실의 초대 비서실장은 이낙연 총리와 별다른 인연이나 근무연이 없던 부산 지역 민주당 정치인 출신 배재정 실장이었으며 윤석열 정부의 초대 총리 한덕수 총리실의 초대 비서실장 역시 윤석열 대통령이 직접 지명한 검사 출신 박성근 실장이었다. 국무총리를 직접 보좌하는 비서실장부터가 이렇다 보니 총리의 인사권은 법적으로나 사실상으로나 아예 없다고 보아야 한다.

여기에다가 정부의 정책 방향을 정하는 이해관계에는 국회의 여당까지 개입되어 있으니, 총리가 딱히 운신의 여지를 가질 수가 없다. 그래서 대통령의 입지가 약하다든가 혹은 DJP연합과 달리 합의가 있는 것이 아니라면, 단순한 2인자 이상의 역할을 한다는 것은 거의 불가능한 상황이다. 법이나 제도로는 총리의 공간이 사실상 없는 것이나 마찬가지이니 오로지 대통령의 결심으로만 좁은 총리의 운신을 약간 더 넓혀줄 수 있다고 볼 수 있다. 그리고 이런 것이 전제되지 않고 대통령, 여당, 총리가 각자 따로 목소리를 내는 상황은 한국에선 그냥 정권의 레임덕이 갈 데까지 가버린 상황이라는 의미밖에 없다.

1987년 개헌 이후 20명이 넘는 총리가 있었지만 언론 등지에서 확실히 권한이 있었다고 평가한 총리는 단연 김종필 전 총리이다. 김종필은 내각을 총괄하고 각료임명제청권을 행사한 것은 물론, 경제관련 부처의 경우 김대중 전 대통령이 아닌 자기 자신이 실질적인 인선을 했다. 이는 국민의 정부가 집권 초기 김대중 전 대통령의 새정치국민회의와 김종필 전 총리의 자유민주연합의 연립정권이었기 때문에 가능한 일이었다. DJP연합을 결성할 당시 김대중과 김종필은 경제 관련 부처의 인선을 김종필이 하기로 합의했다.

그 외에는 참여정부의 이해찬 전 총리, 문재인 정부의 이낙연 전 총리 정도가 있을텐데, 이 경우들도 본인이 직접적으로 권한을 행사할 힘과 의지가 있었다기보단 대통령이 자신의 의사로 총리에게 재량을 주는 것이므로 대통령의 눈 밖에 나는 순간 목이 잘린다. 이해찬 총리도 2006년 3.1절 기념식에 불참하고 골프를 쳤던 일로 권고사직을 당했다. 이 당시 이해찬의 경질을 노무현 대통령에게 강력하게 권고했던 참모가 문재인 민정수석비서관인데, 총리보다 서열이 낮은 민정수석비서관이 오히려 실권을 갖고 있다는 것을 보여주었다.

문재인 정부는 국무총리에게 어느 정도의 위상을 보장하고 힘을 실어주었다. 기존 방탄 역할로 소모되던 총리들과 달리 인지도 상승과 활동 영역을 넓힐 수 있는 기회를 주고 내각에서의 존재감을 확실히 높였다. 문재인 정부의 첫 총리인 이낙연 전 전남지사는 국무조정실장과 국무총리비서실장 임명권을 행사했고 총리로서의 활동이나 산불 등 재난 대응과 내각 통솔에 존재감을 드러냈다. 이 때문에 당시에는 이낙연이 좋은 평가를 얻었다. 총리 생활을 마친 후에는 총선에 출마하여 종로에서 야당 대표를 누르고 당선되었을 뿐만 아니라 한때 가장 유력한 대선주자였을 만큼 본인의 족적을 확실히 남겼다. 또한 정세균 전 국회의장을 새 총리로 영입하면서 문재인 전 대통령이 삼고초려를 했는데 정 전 의장의 '책임총리를 보장해주면 총리직을 받겠다' 는 제안에 응했다고 하는 걸 보면 국무총리의 행동이 대통령의 의중과 심기를 크게 거스르지 않는 한 어느 정도의 재량권은 계속 보장해줄 가능성이 높았고, 실제로도 문재인은 임기 끝까지 총리의 재량권을 보장해줬다. 특히 정치인 출신을 임명해 비선출 권력이 가지는 한계를 보완했다는 것이 특징이다.

20대 대선에서 어떤 후보가 당선되더라도 국무총리의 권한은 늘어날 것으로 점쳐졌다. 코로나19라는 초유의 사태 속에 국무총리가 관련 업무를 총괄하면서 언론 노출도도 더더욱 증가한 데다 대통령의 권력을 분산시키는 것이 초당적 의제로 떠오른 만큼 그 권력을 나눠받기 가장 적합한 것이 국무총리이기 때문이다.

하지만 관료 출신이라 조용한 성향이 큰 한덕수가 총리에 올랐고, 여러 이유로 모든 스포트라이트를 대통령이 가져가는 바람에 총리의 권한은 그닥 늘어나진 않은 모양새다.[2]

문제점

국무총리의 대통령 권한대행은 정말 임시(臨時)에 불과하기 때문에 정치적 판단이 필요한 결정은 어렵다. 적어도 전시처럼 급박한 상황에 대행이 되는 경우라면 컨트롤 타워의 부재만큼 혼란을 주는 게 없으니 어느 정도 독단적 판단과 리더십 발휘의 명분이 서겠지만, 평시에서는 얄짤 없다. 특히 권한대행일 뿐이므로 대통령보다 의전의 격은 여전히 낮게 취급되어 중요한 외교 이슈 등에 차질이 빚어질 수도 있다.

2004년 노무현 대통령 탄핵소추 및 심판으로 인해 고건 전 총리가 대통령 직무를 대행했을 때 한국의 총리는 형식만 국가원수의 대리인이지, 실제로 외국에선 대한민국의 대통령보다 격이 낮은 것으로 인식되어 대한민국의 모든 외교가 올스톱되었던 적이 있다. 그나마 이 때는 노무현 전 대통령이 탄핵 기각으로 복귀했다. 마찬가지로 2016년 대통령 박근혜 탄핵 정국 당시에도 황교안 전 총리가 대통령 권한대행을 하게 되면서 국가원수급이 참가하는 각종 컨퍼런스와 외교회의에 불참하는 등 국가적 손실이 있다.

이러한 문제점을 해결하려면 개헌을 해야 하는데, 개헌을 하기 위해서는 발의권자인 대통령과 국회의원 재적인원 과반수의 의지, 무엇보다도 국민들의 의지가 결연하지 않다면 현행 헌법의 불완전성은 보완되기 어렵다는 단점이 존재한다.[2]

공관

국무총리에게는 재임 기간 동안 거처할 수 있는 공관이 제공된다. 이를 국무총리 공관이라고 하며 별칭은 "총리 공관" 이라고 부른다. 본래 총리공관은 삼청동 공관촌인 서울특별시 종로구 삼청동에 위치해 있었다. 이곳은 조선시대엔 왕족들이 기거하는 태화궁 자리였으며 광복 후에 국회의장 공관으로 사용했다가 1961년부터는 국무총리 공관으로 사용하고 있다. 세종특별자치시에 행정중심복합도시가 조성된 즈음엔 어진동에 새 총리공관을 만들었다. 따라서 총리 공관은 2곳이다.

세종시가 신행정도시로 자리잡았으므로 세종시 공관이 총리공관 자리를 차지해야 하나, 대통령실이 서울에 위치해 있고 국무총리 본인도 대통령실, 내각, 국회와의 관계를 긴밀하게 유지해야 하므로 삼청동 공관을 버려두기도 곤란한 상황이다. 그래서 일단은 삼청동 공관 또한 함께 사용하고 있다.[2]

국무총리와 대권가도

국무총리 출신으로 대통령이 된 경우는 최규하가 유일하다. 하지만 국민들의 직접선거가 아닌 간접선거로 선출되었고 전두환으로 인해 8개월만에 사임하면서 사실상 그다지 큰 의미를 두지는 않는 편이다. 국무총리 출신 대선 주자였던 허정, 김종필, 이한동, 이회창, 고건, 정운찬 등은 모두 여러 가지 이유로 대권의 꿈을 이루지 못했다. 제20대 대통령 선거를 앞두고도 황교안, 이낙연, 정세균 등 무려 3명의 전직 총리가 대선 출마를 선언하였으며, 특히 황교안과 이낙연은 한때 각자의 당에서 지지율 1위 후보에 오른 적이 있으나 셋 모두 경선에서 떨어졌다.

국무총리 출신 정치인들이 대선에서 힘을 못쓰는 이유는 많지만, 그 중 하나는 야당 공격과 언론 등에 맞서는 '총알받이' 로 소모되기 때문이다. 헌법 62조 2항에 따르면 국회나 그 위원회의 요구가 있을 때에는 국무총리ㆍ국무위원 또는 정부위원은 출석ㆍ답변하여야 하며, 국무총리 또는 국무위원이 출석요구를 받은 때에는 국무위원 또는 정부위원으로 하여금 출석ㆍ답변하게 할 수 있다. 대통령은 실책해도 국회에 들어가 국회의원들에게 까일 일은 없지만 국무총리는 여지없이 국회에 들어가야 한다. 문재인은 언론인 출신에 국회의원을 여러차례 역임한 이낙연을, 또 국회의장 출신인 정세균을 국무총리에 임명하여 국회에 대응했다. 이명박은 '교수들의 시국선언' 이 있었을 당시 서울대 총장 출신인 정운찬을 임명해서 여론과 야당의 공격에 대응하려고 했다.

또한 정권의 내각을 책임지는 2인자 직위로서 해당 정권과 본인의 지지율이 일체화하여 정권의 지지율이 하락세에 들어가면 본인의 지지율 역시 힘을 못 쓰게 된다는 점 또한 주요한 원인이다. 이낙연만 해도 21대 총선 이후 문재인 정부의 지지율이 하락하면서 자신의 지지율이 순식간에 40%대에서 20%대로 내려앉았다. 그렇기에 국무총리 출신의 대선주자는 본인이 국무총리를 지낸 정권이 성공하고 좋은 평가를 받으며 끝나기를 원하지만, 대한민국 정치사에서 퇴임 당시 레임덕을 안 겪고 좋은 평가를 받은 정권은 없었다.

이렇듯 국무총리는 정권의 2인자라는 칭호를 받고 많은 욕을 듣지만 결국 퇴임할 때는 정권의 '국면전환용'으로 이용되면서 명예롭지도 못하고 자신의 성과에 대해 주목을 받지도 못한다. 그런데 막상 국정운영이 순조롭게 돌아가도 국무총리에게는 큰 이득이 안 된다. 국정운영을 잘 하면 그 공은 대통령과 집권여당에 돌아가지 국무총리의 공이라고 추켜 세우는 곳은 없기 때문이다. 즉 국무총리란 자리는 여러가지로 종합할 때 대선을 노리기에 굉장히 애매한 계륵 같은 위치다. 따라서 최종 목표가 대통령이라면 국무총리직을 하지 않는 것이 오히려 낫다. 박근혜는 이 점 때문에 이명박 정부 시절 수 차례 국무총리직을 제안받았으나 응하지 않았다. 그로 인해 이명박에게 자기 역량과 세력을 이용당하지도 않았고, 이명박 정부의 실책에 대해서 어느 정도 자유로울 수 있었으며, 이명박의 하수인 같은 느낌보다는 차기 대선 후보로서의 중량감을 잃지 않았다.

다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대선 후보급 체급을 얻기 위해서는 국무총리만한 자리가 없다는 것도 확실한데, 총리에 지명되면 일단 전국적인 인지도를 얻을 수 있고 정치적 체급을 크게 불릴 수 있다는 점은 확실하기 때문. 이회창, 황교안, 이낙연, 한명숙과 같은 인물들도 총리로 지명되지 않았다면 잠시나마 대선주자급 인지도를 얻을 수도 없었을 것이고 그저 관료나 지역 토호로 남았을 것이다. 인지도가 부족해 대선주자로 거론되지 않는 인물이 총리가 된 이후 대선주자가 되는 사례는 많다. 물론 그래놓고 당선된 인물은 없다는 게 문제지만.[2]

기타

국무총리는 국립묘지 안장 대상이 아니지만 다른 공을 세워 안장된 국무총리들이 있다. 이범석 전 총리 : 독립군으로 활약한 공을 인정받아 건국훈장 수훈 허정 전 총리 : 청조근정훈장을 수훈한 국가유공자 및 독립운동가 박태준 전 총리 : 국민훈장 무궁화장, 국가사회유공자 묘역 최규하 전 총리 : 제10대 대통령, 국립대전현충원 대통령 묘역 노신영 전 총리 : 국립대전현충원 국가사회공헌자묘역 39호

이외에도 더 있다. 국무총리는 수상이라 불리지 않는 경우가 많다.[2]

각주

  1. 대한민국의 국무총리〉, 《위키백과》
  2. 2.00 2.01 2.02 2.03 2.04 2.05 2.06 2.07 2.08 2.09 2.10 국무총리〉, 《나무위키》, 2024-06-24

참고자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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