중생
중생(衆生)은 불교에서 생명을 가진 모든 것을 말한다. 중생(重生)은 영적으로 거듭난 구원 상태를 말한다.[1]
목차
중생(重生)과 중생(衆生)의 차이는?[편집]
사전을찾아 보면 중생이라는 단어는 다음과 같이 나온다.
- 중생(重生) : <기독교> 같은말- 거듭남(원죄때문에 죽었던 영이 예수를 믿음으로 해서 영적으로 다시 새사람이 됨).
- 중생(衆生) :
1. 많은 사람.
2. <불교> 모든 살아 있는 무리.
둘 다 발음은 [중ː생]로 동일하다.
똑같이 발음되는 낱말이지만 의미가 너무 다르다. 하나는 구원 받은소수(좁은 문)을 의미하고,다른 하나는 구원 받지 못한 자연인(넓은 문, 많은사람)을 뜻한다.
같은 발음이 나는 말을 쓰지만 믿음에 따라서 정 반대에 의미로 쓰이기도 함을 발견하게 된 흥미로운 경우이다.[2]
중생(衆生)[편집]
중생(衆生)은 산스크리트어 사트바(sattva)의 번역어로 유정(有情)이라고도 한다. 모든 삶을 누리는 생류(生類)를 가리키며, 초목이나 흙 · 돌 같은 비정(非情) · 비유정(非有情) 또는 무정물(無情物)에 대하여 인간을 비롯한 의식감정을 지닌 생물을 말하고, 특히 미망(迷妄)의 세계에 있는 것의 뜻으로 쓰인다.[3]
연원 및 변천[편집]
일반적으로 '사람(人)'을 뜻하는 중생(衆生)은 산스크리트어의 '바후자나(bahujana), 잔투(jantu), 자가트(jagat), 사트바(sattva)' 등을 한역한 것이지만, 원래 불교 용어가 아니라 『예기(禮記)』, 『장자(莊子)』 등의 중국 고전에서 나온 단어였다. 구마라집(鳩摩羅什, Kumārajīva: 343 ~ 413)이라는 걸출한 대역경사 등장 이전인 고역(古譯)의 시기는 불교의 개념을 중국의 전통적인 개념을 차용하거나 음차로 한역하던 시기로, 이때부터 '윤회하는 존재'을 중생으로 옮기기 시작했다.
어원을 통해 살펴보면, '바후자나, 잔투, 자가트'는 '태어나다, 생산하다' 등을 뜻하는 어근 '잔(√jan)'에서 파생한 것이며, '사트바'는 '~이 있다, ~이다, 존재하다' 또는 영어의 'be' 동사에 해당하는 어근 '아스(√as)'에서 파생한 것이다. 즉, 무언가 존재하는 것, 존재하게 된 것이 산스크리트어에 따른 중생의 일반적인 정의다. 업과 윤회를 기초로 한 인도의 전통 문화 풍조에서는 윤회하는 존재를 가리키는 것이었으나 윤회라는 개념이 없었던 중국에서는 불교의 동진(東進) 결과 기존 개념을 차용하는 의미 변용을 겪으며 불교 용어로 정착되었다.
중생이란 단어가 산스크리트어의 원래 의미와 충실하지 않다고 본 대역경사 현장(玄奘: 622 ~ 664)은 이를 '정(情), 즉 인식이 있는 것'이라는 뜻의 '유정(有情)'이라는 새로운 번역 용어를 만들어 내었다. 그러나 이미 대중들에게 널리 알려진 중생이 보편적으로 사용되었기 때문에 '유정'은 유식사상을 비롯한 불교 교리를 설명할 때만 종종 등장할 뿐이다. 현장은 '윤회하는 존재' 가운데 특히 인간을 뜻하는 '푸드가라(pudgala)'를 '보특가라(補特伽羅)'라며 명확하게 구분하여 쓰려고 했으나, 이미 알려진 중생이라는 단어의 대중성을 넘지 못하였다.[4]
내용[편집]
'윤회하는 존재'를 뜻하는 중생은 인간을 비롯한 삼계육도(三界六道), 즉 욕계(欲界) · 색계(色界) · 무색계(無色界)를 오가는 지옥 중생 · 아귀 · 인간 · 아수라 · 천신 등을 가리킨다. 이 때문에 '생류(生類)'라고 옮기기도 했으나, 이것은 오늘날 인도의 대표적인 소수교파로 초목도 윤회하는 존재로 취급하는 자이나교의 이론과 명확하게 구분되지 않는다. 불교에서는 식물의 경우 꺾꽂이나 접목 등을 통해서도 번식할 수 있다는 예를 들어, 식물을 중생에 포함하는 자이나교의 주장을 논파한다.
초기 경전인 『잡아함경(雜阿含經, Saṃyuktāgama)』을 비롯해 『아비달마구사론(阿毘達磨俱舍論, Abhidharmakośa śāstra)』 등의 논서뿐만 아니라 대승경인 『법화경(法華經, Saddharma puṇḍarīka sūtra)』, 『유마경(維摩經, Vimalakīrti nirdeaśa sūtra)』과 대표적인 대승 논서인 『대지도론(大智度論, Mahāprajñāpāramita śastra)』 등에도 '중생'이라는 표현은 두루 등장하며, 그 의미는 생로병사의 사고(四苦)를 받는 색수상행식(色受想行識)의 오온(五蘊)을 갖춘 존재를 뜻한다. 즉, 열반적정(涅槃寂靜)을 얻지 못한 지옥 중생부터 천신까지 모든 윤회하는 존재를 가리키는 것이었다.
그러나 산스크리트어 경론에 등장하는 다양한 이름을 뜻하는 '윤회하는 존재'가 '중생'으로 한역되면서 발생한 가장 큰 문제는 '윤회하든 하지 않든' 사람(人)과 동일하게 취급됨으로 인해 정교한 교학상의 논의를 가로막았다는 점이다. 대표적인 것이 '윤회하는 존재로서의 인간'을 뜻하는 '푸드가라'로, 역경사들에 따라 '부특가라(富特伽羅) · 복가라(福伽羅) · 보가라(補伽羅) · 부가라(富伽羅) · 불가라(弗伽羅) · 부특가야(富特伽耶) · 인(人) · 중생(衆生) · 수취취(數取趣)' 등 음차, 의역 등을 통해 다양한 한자로 옮겨졌다.
이 '푸드가라'와 '윤회하는 존재'를 구분하기 위해서 현장은 중생을 '유정(有情)'으로 엄격하게 구분하며 옮겼으며, 그 반대되는 '정을 가지지 않는 존재'를 '무정(無情)'으로 한역하였다. 그리하여 지수화풍(地水火風)의 4대(四大)로 구성되어 있으며 유정과 같이 무상(無常)하지만 윤회하지 않는 존재인 초목과 바위 등의 사물과 구분하였다. 현장의 이와 같은 새로운 역경 언어에 대한 집착은 유식사상에서 반드시 필요한 제팔식(第八識)인 일체종자식(一切種子識, sarva bīja vijnāna)을 뜻하는 '아뢰야식(阿賴耶識, ālaya vijñāna)'의 전변을 통한 윤회를 설명할 때 정(情), 마음(心), 또는 식(識)에 관련된 것을 명확하게 표현해야 되는 필요성 때문이었다.
그가 인도로 구법(求法) 여행을 떠났던 7세기 중엽의 중인도는 소승 정량부(定量部, Sāṁmitīya)가 대세를 이루고 있었으며 그들은 '윤회하는 인간'인 푸드가라를 '오온의 집합체이기도 하며 아니기도 하다'며 이 주제를 피해 갔었다. 이 때문에 한역 경전권에 절대적인 영향을 끼쳤던 북인도 유부(有部, Sarvāstivada)의 『아비달마구사론』에 따르던 현장은 중생과 푸드가라 등을 명확하게 설명할 필요성을 절실하게 느꼈던 것으로 보인다.
'중생'을 '유정'으로 굳이 바꾸고자 한 현장의 이와 같은 문제는 최소한 한역이 시작된 지 5세기 이후에나 자신들의 언어로 경론을 옮기기 시작한 티벳에서는 전혀 문제가 되지 않았다. 문화적 층이 얕아 기존에 없는 새로운 개념을 만들어 내야 했던 티벳의 역경사들은 일반적인 '사람'을 '미(mi)'로, 중생 또는 유정을 '마음을 가진 것'이라는 뜻의 '셈쩐(sems can)'으로, 푸드가라는 '강삭(gang zag)'으로 명확하게 구분하여 썼다.[4]
현황 및 의의[편집]
삼국시대 불교가 전래된 이후 불교는 언어, 관습 등 다양한 문화적 기조에 지대한 영향을 끼쳤다. 현장이 지적한 '윤회하는 존재'로서의 인간인 유정의 의미가 체화되지는 못하였을지라도 오늘날 "이 중생아, 중생아!" 등의 표현을 자연스럽게 쓸 정도로 '중생'은 사람을 가리키는 우리말의 일부가 되었다. 또한 우리말 '짐승'의 어원 또한 '중생'에 있다. 본래 생물 일반을 가리키던 '중생'이 15세기 이후에는 사람 이외의 동물을 가리키는 의미로 사용되고 있으며 15세기 말에는 네 발 달린 동물만을 가리키는 것으로 의미가 변형된 것이다. 이처럼 중생은 우리말에도 깊이 뿌리를 내린 불교 용어라 할 수 있다.[4]
중생(重生)[편집]
중생(重生, regeneration)은 기독교 용어로는 개인의 죄가 사해져 성령에 의해서 영적으로 새롭게 다시 태어나는 것이다. 이 말은 주로 신교도의 복음주의, 복음파, 기독교 근본주의, 성령파에서 주로 사용되어 보기 드물게 에큐메니칼파가 사용되는 일이 있다.[5]
중생의 성경적 근거[편집]
성경적 근거는 요한의 복음서 3장 5절로, 예수 그리스도는 유대교의 랍비 지도자 니고데모에 영적인 중생이 필요한 것을 말하고 있다.
정말 잘 들어두어라. 물과 성령으로 새로 나지 않으면 아무도 하나님 나라에 들어갈 수 없다.
- 요한복음 3장 5절, 공동번역 개정판[5]
개념[편집]
몇 개의 기독교의 교파에서는, 중생한 사람이 기독교인이며, 이 말로 명백하게 이것을 나타내고 있다. 덧붙여서, 모든 진정한 기독교인은 중생하고 있다고 생각할 수 있다.
신학에서 구원의 교리는 구원론이라는 이름으로 불린다. 사도 바울로는, 중생은 '새로운 창조'이며, 하나님의 일하심으로 죄로 물든 생활에서 해방되고 새로운 걸음을 해, 성령에 의해서 그리스도와의 관계가 주어져 생명 있는 새로운 생활을 시작할 수가 있다는 구원론을 가르치고 있다.
누구든지 그리스도를 믿으면 새 사람이 됩니다. 낡은 것은 사라지고 새것이 나타났습니다.
- 고린토인들에게 보낸 둘째 편지 5장 17절, 공동번역 개정판[5]
교파별 이해[편집]
중생의 개념은 모든 기독교 교파가 가지고 있지만, 개신교 가운데 역사적으로 대각성 운동, 부흥운동으로 이어지는 복음주의 등에서 특히 강조되어왔다.[5]
중생을 강조하는 교파에서[편집]
성령에 의해서 새롭게 태어나 예수 그리스도와 결합하는 영적인 침례(세례)를 받은 것을 말한다.
- 성령에 의한 중생
복음파 및 성령파에서는 십자가의 복음을 받아 들여 신앙을 고백해, 성령에 의해서 새롭게 태어난 사람만이 기독교인이라고 인정한다. 그리고, 교회에 출석하고, 세례를 받은 것만으로는 중생하지 않는다고 가르친다. 성령에 의해서 중생한 기독교인은 자각적인 회심을 경험한다고 여겨지고 있지만, 이것은 반드시 극적인 회심 체험을 의미하고 있지 않다. 또, '중생은 신의 옆으로, 회심은 인간의 옆이다'라고 해진다. 조나단 에드워즈는 회중을 향해 '중생 체험이 없는 사람은 신의 분노 아래에 있다'라고 말했다. 사람이 구해진 것을 가리켜 중생의 말을 사용하는 복음주의자, 근본주의자, 오순절주의 기독교인은 성령에 의한 중생과 개인적인 회심 경험을 묶는다. 이 파 기독교인은, 진정한 기독교인은 회심을 경험한다고 단언한다. 성령에 의한 중생을 믿는 교회에서는 세례 (침례)를 받고, 교회원이 되는 자격을 가지는 사람은 중생한 사람뿐이다.
청교도는 참된 중생(중생)은 반드시 어떤 표시가 나타난다고 주장하였다. 어느 정도의 시간이 걸릴 수도 있지만, 눈깜짝할 순간에 경험할 수도 있다고 생각하였다. 윌리엄 에임스는 중생을 체험한 사람은 참된 은혜의 영향을 내적으로 보여주는 표시들이 나타난다고 주장하였다.(17세기 뉴잉글랜드의 지성, 51쪽)
- 웨스리계
알미니안주의를 지지하는 성결교나 오순절주의에서는 중생과 구별하고, 새롭게 다시 태어나는 체험을 '제2의 회심'이나 '성화'를 강조하고 있다. 이들 교회에서는 성령에 의한 침례, 성령의 침례라고도 말한다.
- 성령에 의한 침례와 성령의 침례
중생은 예수 그리스도를 믿었을 때에 성령이 자신 중에 산다는 성령의 내주를 나타내고 있다. 다만, 이 이해를 취하는 입장에서도, 성령의 침례의 말은 교파에 따라서 다른 사용법을 하는 경우가 있다.
복음파의 지도자 마틴 로이드 존스와 오야마령인은 중생을 '성령에 의한 침례'라고 해, 그리스도에 의한 '성령의 침례'와 구별하고 있지만, 반드시 이어를 수반하는 것과는 하고 있지 않다. 로이드젼즈의 '번영으로 가득 찬 기쁨'은 복음주의와 성령파의 공통점을 분명히 하는 것이라고 한다.
- 중생을 명칭으로 하는 단체
중생을 강조하는 선교 단체에 고교생 전용의 전도 단체 Hi.B.A 고교생 성경 전도 협회 (High School Born Again)가 있다.[5]
중생을 세례와 묶는 교파에서의 이해[편집]
정교회나 가톨릭교회, 성공회, 복음 교회 등의 교파에서는 세례에 의해서 새롭게 태어난다고 이해한다.
이에 비해 복음파는 '세례에 의한 중생 (세례에 의한 중생)'의 이해는 이단이라고 하여 치우고 있어, 개혁파 교회에 의해도 '세례에 의한 구제'는 이단이다고 생각되고 있는. 또, 프린스턴 신학의 찰스 홋지는 '세례를 받는 것을 명령받고 있는 것은 확실하다. 그러나 차등은 신앙에 의해서 복종할 의무이며, 도움의 손길단이 아니다', '세례에 의해서 사람은 신의 아이로 여겨져 천국의 세상 상속인이 된다는 것을 가르치는 사람은 비그리스도'라 하고 있다.
그러나, 원래 '세례에 의해서 새롭게 태어난다'라고 이해하는 이들 정교회나 가톨릭교회 등의 교파에서는 '중생'의 말 그 자체나 '세례에 의한 중생'이라는 표현이 사용되는 것은 거의 없고, 강조도 하고 있지 않다.
- 정교회
정교회에서는 세례 기밀에서 낡은 자신이 죽음에 소생해 새로운 생명으로 태어난다고 여겨진다 (다만 '중생'의 어휘는 우선 이용되지 않는다). 세례 기밀로 사용되는 성수는 지금까지의 자기욕구 · 육체 · 물질 중심의 생활을 죽이는 물이며, 새로운 사람을 낳는 생명의 물이라고 한다.
세례를 받아 하리스트스 (그리스도)에 묶어 합쳐져 새롭게 태어나 성신 (성령)의 은사를 받아 신도로서 하리스트스에 있는 새로운 생활에 들어가, 신의 초를 얻어 가는 과정에 들어간다고 여겨진다.
- 가톨릭교회
가톨릭교회에서는, 세례에 대해 신약 성경의 '테트스에의 편지' 3장 5절을 근거로서 '성령을 통하여 거듭나고 새로워지도록 물로 씻어 구원'이라고 표현해, '누구라도 물과 영혼에 의해서 태어나지 않으면, 신의 나라에 들어갈 수 없다.' ('요한의 복음서' 3 - 5)로 하고 있다. 또, 세례는 구제에 불가결한 것으로 하고 있지만, '중생'이라는 말 · 표현은 사용되지 않는다.[5]
다른 종파에서의 이해[편집]
세계 기독교 통일 신령 협회에서는 영적 중생 뿐만이 아니라, 덧붙여 육적 중생을 받는 것에 의해서, 원죄를 청산해야 하기 때문에, 예수는 인간의 육적 중생에 의한 육적 구제 때문에, 필연적으로, 재림되게 된다고 하고 있다.[5]
각주[편집]
참고자료[편집]
- 〈중생〉, 《위키백과》
- 〈중생(重生)과 중생(衆生)의 차이는?〉, 《네이버블로그》, 2011-10-24
- 〈중생(불교)〉, 《위키백과》
- 〈중생(衆生)〉, 《한국민족문화대백과》
- 〈중생 (기독교)〉, 《위키백과》
같이 보기[편집]