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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편 제주해녀문화는 유네스코 인류무형문화유산으로 등재돼있다.<ref>박미라 기자, 〈[https://www.khan.co.kr/local/Jeju/article/202310191544001 해녀]〉, 《경향신문》, 2023-10-19</ref> | 한편 제주해녀문화는 유네스코 인류무형문화유산으로 등재돼있다.<ref>박미라 기자, 〈[https://www.khan.co.kr/local/Jeju/article/202310191544001 해녀]〉, 《경향신문》, 2023-10-19</ref>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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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https://terms.naver.com/entry.naver?docId=1161887&cid=40942&categoryId=31850 해녀]〉, 《두산백과》 | * 〈[https://terms.naver.com/entry.naver?docId=1161887&cid=40942&categoryId=31850 해녀]〉, 《두산백과》 |
2024년 6월 5일 (수) 13:49 판
해녀(海女)는 제주도, 부산 및 남해 연안 또는 동해 연안, 드물게는 일본, 동남아시아, 러시아 등에서 잠수하여 해산물을 채취하는 여자들을 뜻하는 말이다.
한국표준직업분류에 의한 직업코드가 부여 되어 있다. 코드 번호는 "63023".[1]
목차
상세
해녀는 바닷속에 산소공급 장치 없이 들어가 해조류와 패류 캐는 일을 직업으로 삼는 여성이다.[2]
해녀는 주로 바닷속에 들어가 해산물을 채취하는 여자로 공기탱크 없이 간단한 잠수복과 잠수용 오리발, 마스크를 착용하고 바닷물에 들어가 전복과 성게 그리고 조개(보말, 소라, 미역) 등을 채취한다. 잠수복을 착용하고 오리발을 사용하는 현대 해녀들의 일회 잠수시간 및 표면휴식시간은 5m 잠수시에는 약 32초 및 46초이며 10m 잠수시에는 43초 및 85초로서 5m 잠수시에는 한 시간에 46번 정도, 그리고 10m 잠수시에는 한 시간에 28번 정도 잠수한다. 현재 고무로 된 잠수복을 착용하고 있지만 이전에는 다른 장비 없이 면으로 된 잠수복만을 착용하고 물에 들어갔다. 제주도의 해녀들이 수가 감소하고 있지만, 그 전통(문화)을 보존하려는 노력(해녀학교 등)이 있으며, 해녀허벅춤과 같은 노래가 구전되고 있다.[3]
잠녀(潛女)라고도 한다. 주로 제주도에서 볼 수 있다. 해녀의 기원은 인류가 바다에서 먹을 것을 구하기 시작한 원시산업시대부터 시작되었다고 할 수 있으며, 제주 해녀의 역사도 고고학적으로 볼 때 기원을 전후한 시기로 거슬러 올라간다. 또한 어부와 해녀를 관장하는 신당(神堂)이 고대로부터 전해오는 것으로도 짐작할 수 있다.
문헌으로는 1105년(고려 숙종 10) 탐라군(耽羅郡)의 구당사(勾當使)로 부임한 윤응균이 "해녀들의 나체(裸體) 조업을 금한다"는 금지령을 내린 기록이 있고, 조선 인조 때도 제주목사가 "남녀가 어울려 바다에서 조업하는 것을 금한다"는 엄명을 내렸다.
이건(李健)의 《제주풍토기》에는 제주 해녀들의 생활모습이 상세하게 묘사되어 있는데, 그녀들이 관가나 오리(汚吏)들에게 가혹하게 수탈당하고, 생활이 매우 비참함을 말하고 있다.
옛날부터 제주의 여성은 밭에서 김을 매지 않으면 바다에서 물질을 해야 하는 운명에 순종하여 왔다고 할 수 있다. 제주의 소녀들은 7∼8세 때부터 헤엄치는 연습을 시작하여 12∼13세가 되면 어머니로부터 두렁박을 받아 얕은 데서 깊은 데로 헤엄쳐 들어가는 연습을 했다. 15∼16세가 되면 바닷속에서 조업(操業:물질)을 시작하여 비로소 잠녀, 즉 해녀가 되고, 17∼18세에는 한몫잡이의 해녀로 활동한다. 이때부터 40세 전후까지가 가장 왕성한 활동시기이다.
해녀의 장비로는 ① 망사리(그물로 주머니처럼 짜서 채취한 해산물을 담는 것으로 아가리가 좁고 그물테에는 뒤웅박이 달려 있어 그물이 가라앉지 않도록 되어 있다), ② 태왁(또는 박새기라고도 하며 망사리에 달린 뒤웅박을 말한다), ③ 빗창(어획도구:30cm 가량의 단단한 무쇠칼), ④ 호미(제주에서는 낫을 호미라고 한다), ⑤ 갈갱이(호미), ⑥ 갈쿠리, ⑦ 소살(1m 정도의 작살), ⑧ 물수건(해녀들의 머리가 흩어지지 않도록 동여매는 수건), ⑨ 눈(방수경:'통눈'과 '쌍눈'의 2가지가 있다), ⑩ 잠수복(무명 잠수복 대신 고무잠수복) 등이 있다.[4]
해녀문화
전문적인 해녀 양성을 위해 해녀학교가 운영되고 있으며, 국가에서 해녀에게 주는 잠수어업증이라는 자격증을 발급받아야 채취물의 판매가 가능하다. 다양한 매체를 통해 공개된 해녀들의 수입은 천차만별이지만, 보통 성수기 기준 하루 30-50만원이다. 1960년대 당시 월세가 200원이던 시절 남편의 한 달 월급을 하루 만에 벌었던 적이 있다는 해녀도 있다. 해녀들은 가족의 생계 때문에 물질을 시작했지만, 해녀로서 강한 정체성과 경제적 어려움을 극복했다는 자부심을 가지고 살아가고 있다. 집안의 가장 역할을 하는 독립적이고 강한 여성상으로 한국 최초의 일하는 어머니로 여겨지며, 공동체 문화가 뿌리 깊게 남아있어 능력에 따라 공동작업을 하며 이익을 나누고 서로의 안전을 보살펴준다.[3]
- 고령화
서귀포시가 2020년 발표한 통계에 따르면 서귀포시의 해녀는 총1,579명이고, 이중 60대 이상이 1,442명으로 91.3%에 달했다.[3]
지역과 성별
보통 해녀하면 제주도를 많이 떠올리지만, 남해 연안의 섬이나 수심이 깊은 동해 연안의 어촌에도 제주도 못지 않게 해녀가 많다. 다만 겨울에도 어느정도 따듯한 수온을 가지는 제주도와는 달리, 동해는 가을이 지나 겨울이 되면 수온이 급격하게 떨어지기 때문에 조업의 어려움이 훨씬 더하다. 다만 제주 이외 한국 다른 지역의 해녀도 대부분 제주 출신이 예전에 이주한 케이스가 많다. 부산의 동삼중리 해녀촌 같은 곳에 가보면 사투리가 제주도 사투리인 것을 들을 수 있다.
해녀하면 여성이지만, 현대에도 남자 잠수부가 없지는 않다. 잠수복을 입고 수면 위에서 기체를 공급받으며 바다를 누비는 남자 잠수부는 머구리라고 부르는데 해녀와 같이 물질하는 남자 잠수부가 없어서 아예 잠수부 전체를 퉁쳐서 부르는 것이다. 'MBC스페셜 북에서 온 머구리'이나 'SBS 스페셜 심해, 마지막 머구리' 같은 프로그램에서 자세히 다룬다. 어촌에 산다면 흔하게 볼 수 있다.[1]
등급
오랫동안 활동한 해녀는 인정 받으며, 이로 인해 해녀들 사이에도 계급이 존재한다고 한다.
똑같아 보이는 해녀들 사이에도 엄격한 계급이 있다. 상군, 중군, 하군이다. 한번 잠수해 2분가량 바닷속에 머무르는 상군은 수심 15m 이상의 바다에서 작업하는 베테랑 해녀이고, 중군은 수심 8~10m, 하군은 5~7m에서 작업한다. 물론 수심이 깊을수록 비싼 해산물을 채취할 수 있다. 해산물이 많을 때 상군은 한달에 100만원, 중군은 60만원, 하군은 30만원 정도 번다. 이 계급은 노력에 의해 극복되는 것이 아니다. 그것은 태어나는 순간 결정이 된다.
참고로 지역마다 등급이 조금씩 달라서 최하급인 '똥군', 최상급인 '대상군'도 있다고 한다. '똥군'은 보통 이제 막 물질을 배우기 시작한 사람에게 쓰는 말이라고 한다.
유네스코에서는 제주 해녀 문화를 인류무형문화유산으로 지정하였다.[1]
위험도
낭만적인 인상이 있지만 사실 해녀의 직업 특성상 잠수하는 시간이 최대 7시간 정도로 꽤 길기 때문에 감압병, 이명, 저체온증 등 상당히 위험한 극한직업이다. 전직 해녀의 증언에 의하면 물질을 하다 보면 바닥에서 수면으로 올라오면서 정신이 아득할 때가 종종 있다고 한다. 이때 정신줄 놓으면 바로 죽는다. 과장이 아니라 물질 자체가 욕심을 부리거나 아차하는 순간 죽을 수도 있는 일이다. 그래서 해녀들이 내쉬는 숨비소리를 '생과 사의 경계'라고 표현하거나 '생애 최후의 날숨'이라 하는 경우도 있으며, 해녀들이 부르는 민요에서 조차 '저승길 왔다 갔다'라는 표현이 반복적으로 등장한다. 워낙 힘든 직업이다 보니 딸이 태어나면 해녀짓을 시킬 수 없으니 차라리 죽도록 엎어버린다는 민요마저 있을 정도. 또한 해녀는 불턱에서 쉰다.
지구 온난화로 상어에게 공격받아 목숨을 잃는 경우도 일어나고 있다고 한다. 1981년 충남 보령군에서 해녀가 상어에게 물려 실제로 목숨을 잃은 일도 일어났다.[1]
역사
남자가 아닌 여자들이 물질을 맡게 된 데에는 신체적인 유리함 이외에도 고통의 역사가 있다.
조선 시대에는 해녀와 비슷하게 프리 다이빙으로 작업하는 남자 잠수부는 포작인(鮑作人), 포작간(鮑作干), 포작한(鮑作漢), 복작간(鰒作干) 등으로 불렀다. 포작(鮑作)이라는 업에 종사하며 진상역을 담당한다고 해서 붙여진 이름인데 원래는 보자기(혹은 보재기)라고 부르는 것을 한자음을 빌려 포작이라고 쓰기 시작한 것으로 추측된다. 어부면서 동시에 잠수사 역할을 하였으므로 신량역천(身良役賤)이다. 포작인은 깊은 수심에서 전복, 소라, 고둥 등을 전문적으로 채집하고, 해녀는 비교적 얕은 수심에서 해조류를 중심으로 채집하여 역할이 비교적 구분되어 있었다.
어부 겸 잠수부 겸 수군 격군의 역할을 겸하는 포작인은 일이 힘들고, 공물로 바쳐야할 전복 등의 할당량은 늘면 늘었지 줄지는 않다 보니 결국 견디지 못하고 죽거나 도주해 버리는 일이 빈번하게 일어났다. 조선 정부에서는 문제를 해결할 생각은 안하고 조천(朝天)과 별도(別刀)의 두 포구만 개방하고 나머지는 폐쇄해 버리는 꼼수를 썼지만 당연하다면 당연하게도 제주도민은 더욱 적극적으로 도주를 꾀하는 역효과만 나버렸다. 그러자 조선 정부는 꼼수를 강화해 아예 출륙금지령을 내리고 어선 건조마저 금지시키는 등 더욱 적극적으로 제주도에 묶어두려 애를 썼다. 진상해야 할 공물은 많은데 남은 인원으로는 할당량(덤으로 관리들이 부정부패할 분량도 좀 많이 추가하고)이 도저히 감당이 안되자 이번엔 다른 방향으로 또 꼼수를 부렸다. 포작의 역을 아예 숫자가 많은 해녀에게 전부 떠넘겨 버렸다. 해녀 입장에선 날벼락 맞은 셈이다. 어쨌든 결과적으로 포작간이라는 직업은 아예 없어져 잠수부는 해녀만 남게 되었다.
잠수병, 이명 등의 직업병을 달고 살아야 되는 어렵고 위험한 직업이라, 정조가 해녀들 이야기를 듣고 그 좋아하던 전복을 끊었다는 일화도 있다. 정조뿐만 아니라 조선 시대 내내 제주 목사로 부임해서 순찰 나갔다가 한 겨울에 온 동네 여자들이 알몸으로 바다에 우르르 뛰어드는 모습을 보고 충격받고 전복을 끊었다는 경우도 여럿 있다. 허나 정조 이후로 공물부담은 오히려 늘어 민란이 반복적으로 일어나게 된다. 그 결정판이 바로 신축민란이었다.
19세기에 한국을 방문한 서구인들을 통해 유럽에도 그 존재가 전해졌다. 오리엔탈리즘에 기반한 과장이 섞여 있었기에 나체로 자유롭게 바다를 가르며 사는 여인들이라는 편견 가득한 시각으로 소개되었는데, 이 때문에 해녀에 대해 이슬람 제국의 하렘에 대해 그랬듯이 에로틱한 환상을 품는 사람들도 꽤 있었다고 한다. 동서양 인어 전설의 모티브가 되었다는 주장도 찾아볼 수 있다.
일제강점기 시절에도 해녀들은 크게 시달렸는데 일본에서 잠수기 어업자들이 와서 해산물을 쓸어가버렸기 때문. 해녀들과 달리 이들은 물에 오랫동안 잠수하여 해산물들을 닥치는 대로 채취해댔다.[1]
복장
지금이야 잠수복을 입고 오리발을 신고 물질을 하지만 옛날에는 알몸인 상태로 바닷속으로 들어갔으며, 1105년(고려 숙종 10) 탐라군(耽羅郡)의 구당사(勾當使)로 부임한 윤응균이 "해녀들의 나체(裸體) 조업을 금한다"는 금지령을 내린 기록이 있고, 일본에서는 개화 이후인 비교적 최근까지 대부분 달랑 팬티 하나만 걸치거나 전라(全裸)의 상태로 물질을 했었다.
실제로도 방수가 되는 잠수복이 아닌 이상에야 옷을 걸치고 바다에서 활동하는 건 굉장히 비효율적이다. 육지에서의 옷의 기능인 체온유지를 전혀 할 수 없는데다, 너풀거리고 몸에 달라붙어 물속에서의 움직임도 제한된다. 거기에 대부분의 섬유들은 물보다 비중이 높아, 물에 젖으면 무거워 떠오르기도 힘들다. 그리고 물에 젖은 옷을 입고 육지에서 활동하면 옷이 무거워 쉽게 피로해지고 물이 증발하면서 체온도 빼앗겨 감기에 걸리거나 저체온증에 걸릴 수도 있다. 그리고 바닷물이 마르면 소금이 맺히기 때문에 빨래를 한번 더 해야 하는 단점까지 있으니 바다에서 활동하기에는 맨몸이 훨씬 효율적이다.[3]
물옷
고무옷이 나오기 전까지 착용했던 전통 해녀복으로, 상기했듯 원래 해녀는 거의 알몸으로 물질하는 것이 당연시되었고, 이를 금지한다는 지시도 여러 차례 나왔던 것으로 보인다. 물옷이 언제부터 쓰였는지는 정확히 알 수 없지만 1702년에 그려진 탐라순력도에 물소중이를 입고 물질하는 해녀의 모습이 보이며, 이로 보아 최소 18세기 초부터 물옷을 입었던 것으로 추정된다. 물옷은 크게 물소중이와 물적삼으로 나뉜다. 탐라순력도에 그려진 해녀복을 고안하게 한 사람이 당시의 제주목사 이형상이라는 이야기가 있다.[3]
물소중이는 상반신까지 가릴 수 있도록 원피스 형태로 되어있는 반바지로서, 제주도 여성들의 전통적인 속옷으로도 널리 쓰였다. 본래 상반신을 가리지 않는 형태였다가 차차 길어져 상체까지 가리게 변화된 것으로 추정되며, 한 개 혹은 두 개의 어깨끈으로 흘러내리지 않게 고정시켜 준다. 매듭단추로 여미는 옆트임이 되어 있으며, 입고 벗기 편하게 디자인 되어있다. 하얀색, 검정색 두 종류가 있는데, 원래는 속옷처럼 흰색을 주로 입었으나, 얼룩이나 변색 등의 문제로 검은 물을 들이는 경우가 많아졌다.[3]
물적삼 물적삼은 물소중이와 함께 착용하는 상의로서, 보온이나 햇볕을 막는 용도로 사용되었다. 앞섶을 매듭단추로 여미는 형태이며, 소맷부리와 도련에는 끈이나 고무줄을 달아 조일 수 있게 되어 있다. 1930년대 서양 블라우스의 영향을 받아 만들어진 비교적 최근의 의복으로서, 항목 상단 탐나는도다의 주인공 장버진이 입은 물옷은 하의-흰색, 상의-검정색이나, 본래 물적삼은 흰색을 주로 만들며 소중이는 흰색, 검정색 두 종류가 있다. 퓨전 사극의 극적 허용으로 볼 수 있을 듯.
이외에도 머리에 두르는 물수건(두건)이나 머리와 목덜미 전체를 덮는 모자인 까부리 등이 있다.[3]
고무옷
고무옷은 잠수복과 매우 유사한 디자인과 형태를 지니고 있고, 그 용도도 대동소이하다. 재질은 안감은 흔히 잠수복에 쓰이는 네오프린 소재며, 겉부분에는 고무를 댄다.
흔히 그냥 가게에서 사이즈에 맞게 사면 될 것 같다고 생각하기도 하지만, 사실 전문 장인이 직접 각 해녀의 신체치수나 취향에 맞게 맞춤으로 제작하는 것으로, 가격대도 2013년 기준 30~35만원으로 꽤 높은 편이다.
본래 1970년대 일본에서 사용하던 것이 그대로 한국으로 건너와 퍼진 것으로, 최초 보급 당시 가격은 30,000원 정도로 역시 만만찮은 가격이었기에 각 마을마다 고무옷을 사용하는 해녀는 손에 꼽을 정도로 적었지만, 보온성이나, 내수압 능력등 여러모로 물옷을 입고 물질하는 것에 비해 작업능률이 매우 높아져서 순식간에 보급되었다. 이는 해녀들의 안정적인 생계유지에 도움이 되는 긍정적인 변화를 가져왔다.
물론, 보급 초기에는 해녀복의 비싼 가격과, 요상한 생김새에 대한 반감. 해녀복을 입은 해녀와 그렇지 않은 해녀들의 작업능률의 격차로 인한 반발이 있었고, 보급이 널리 이루어진 뒤에도 피부질환이나, 장시간 잠수로 인한 두통, 이명, 요통 등 해녀들의 직업병이 부각되는 단점을 가지고 왔고, 이는 현대에 들어서도 변함없이 발생하고 지적되는 문제점이다. 실제로 해녀들은 진통제 등을 달고 사는 경우가 많다. 물옷에 비해 입고 벗기도 불편해서 착용하거나 벗을 때 서로 도와줘야 한다.
물갈퀴와 특유의 수경이 한 세트로 취급된다.[3]
위기
스쿠버 다이버들과 해녀간의 갈등이 점점 심해지고 있다. 물론 같은 바다에서 헤엄치고 있다고 싸우는 건 당연히 아니지만, 일부 무개념 스쿠버 다이버들이 마을 공동어장으로 돼있는 바다에 자꾸 쳐들어가서 해산물을 멋대로 채취해가는게 문제이다. 수산업법 상 어업인이 아닌 스쿠버 다이버들이 스쿠버 장비를 사용해 어업 해산물을 채취하는 것은 수산자원관리법과 그 시행령에 저촉되는 불법행위이다.
해녀들이 조업하는 곳은 어업허가권을 내준 지역이고 어업허가권이 없는 다이버들이 해산물을 채취하는 건 절취행위이며 해녀들이 신고할 경우 수사 착수도 가능하지만 * 문제는 해녀들이 이를 신고하는 게 영 쉽지 않아서 난관이다. 야밤에 와서 쓸어가면 그냥 당하는 것이다. 밤이 되면 그냥 철수해야 하는 해녀와 달리 스쿠버 다이버들은 산소통과 라이트 등, 장비 면에서 우월하기 때문이다.
해삼, 전복등은 해녀들이 직접 종묘를 하며 어장을 키웠기 때문에 권리가 있는 것이 맞다. 당연한게 아무리 숫자가 적다고 해도 해녀들이 먹고살 정도의 소득을 올릴 양의 해산물을 종묘를 뿌려 키우지도 않고 마냥 채취만 하면 해산물의 씨가 마른다.
무분별한 해루질을 하는 관광객들과의 마찰도 문제가 되고 있다.[1]
제주도 해녀 현황
제주에서는 신규 해녀 양성을 위해 해녀학교를 운영 중이다.
2023년 제주시와 서귀포시로부터 제출받은 자료를 보면, 최근 5년간 제주시 한림읍에 있는 한수풀해녀학교의 직업반 졸업생 86명 중 어촌계에 가입해 신규 해녀가 된 비율은 29%(25명)로 집계됐다. 같은 기간 서귀포시에 있는 법환해녀학교 졸업생 156명 중 해녀가 된 비율도 30.1%(47명)로 나타났다.
해녀학교는 제주시와 서귀포시에서 각 1곳씩 운영 중인데, 일반적으로 5월에서 7~8월까지 해녀를 직업으로 원하는 이들을 대상으로 해녀 잠수법과 해산물 채취 기술 등을 교육한다.
해녀학교 졸업생이 실제 해녀로 활동하는 비율이 낮은 것은 해녀가 의무적으로 속해야 하는 어촌계 가입 장벽이 높은 점, 신규 해녀의 경우 소득이 적어 생계 유지가 어려운 점 등이 복합적으로 작용하는 것으로 보인다.
해녀학교롤 졸업했다고 곧바로 해녀가 되는 것은 아니다. 어촌계 합의를 거쳐 회원으로 승인을 받아야 하는데 이 과정이 녹록지 않다. 제주 해녀 특유의 끈끈한 공동체 문화를 이해하지 못해도 해녀 활동이 쉽지 않다. 도의회 농수축경제전문위원실 관계자는 "해녀들은 바다의 일정 구역을 함께 관리하면서 수입을 나눠 갖는 만큼 무작정 신규 해녀를 받아들이는 것을 꺼린다"고 설명했다.
교육생들 역시 막상 교육을 받아보면 해녀가 바다에서 겪는 육체적 어려움을 알게 된다. 해녀학교에 등록했지만 당장 직업으로 삼기보다는 추후 해녀가 될 것이라는 체험 형식으로 접근하는 이들도 적지 않다. 경험이 많고 깊은 곳까지 잠수하는 상군 해녀와 달리 신규 해녀들은 물질(해녀들이 해산물을 채취하는 행위)만으로 생계 유지를 하기 어려운 점 역시 전업 해녀로 전환하기 쉽지 않은 요인이다.
2015년 법환해녀학교 설립 후 매년 1억2000만원의 예산이 지원되고 있으나 졸업생의 어촌계 가입률은 저조하다. 특히 2020년 제주도 어가실태조사를 보면 해녀의 연간 수입은 대략 678만원으로 신규 해녀가 해산물 채취만으로 생계유지가 어려운 만큼 소득을 높일 수 있는 방안이 필요하다.
현재 제주도는 40세 미만의 신규 해녀에게 100만원 가입비와 36개월 동안 월 50만원의 정착지원금을 지원한다.
제주도의 등록 해녀는 2020년 3613명, 2021년 3437명, 2022년 3226명으로, 매년 200명 안팎이 줄고 있다. 반면 새롭게 등록하는 해녀는 2020년 36명, 2021년 40명, 2022년 28명에 불과하다. 특히 전체 해녀의 64.8%가 70~80대라는 점에서 향후 해녀수는 빠르게 감소할 것으로 전망된다.
한편 제주해녀문화는 유네스코 인류무형문화유산으로 등재돼있다.[5]
동영상
각주
참고자료
같이보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