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탤런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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sms1208 (토론 | 기여)님의 2024년 6월 14일 (금) 16:47 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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탤런트(talent)는 재능, 능력을 지칭하는 단어며 어원은 달란트다. 특정 작품에 연기자로 고용한 인물, 특정 작품의 작가, 연출가, 제작자예술, 기술, 사업 부문을 막론하고 오락 산업 종사자들을 폭넓게 이르는 말이다. 방송에 등장하는 아나운서, 배우, 가수, 뉴스 해설자, 시나리오 작가, 제작 부원의 총칭이기도 하며 우수한 재능을 지닌 카피라이터나 아티스트를 말하기도 한다.[1]

개요

탤런트는 TV 방송국 전속 연기자 말한다.

탤런트의 어원은 그리스어 탈란톤(talanton)에서 나왔다. 고대에는 저울눈이나 화폐의 단위였으나, 점차 재능이나 재주 있는 사람을 뜻하게 되었다.

민간방송이 성행하면서 사회자 · 해설자 등 종래의 배우가수가 아닌 분야의 출연자와 학자 · 화가 등, 이를테면 아마추어가 방송 프로그램에 출연하여 인기를 얻게 되었다. 또 방송광고(CM)에 나와 인기인이 되었다. 텔레비전이나 라디오에서 활약하는 예능인도 탤런트라고 한다.[2]

대한민국 방송국에서는 공채 탤런트를 뽑아 이들을 주로 드라마에 기용하였다. KBSSBS는 극회를 직접 관리하지만 MBC는 1995년 자회사 MBC예술단에 관리업무를 넘겼고, 2000년 MBC예술단이 MBC프로덕션으로 합병되면서 관련 업무가 그리로 넘어갔다.

1990년대까지만 하더라도 탤런트가 되는 길은 방송사의 공채 시스템으로 방송국 배우가 되는 것이 일반적이었고, 주로 공채로 뽑았지만 가끔 연극/영화배우를 탤런트로 특채하는 경우도 있었다. 하지만 나날이 발전하는 기획사의 연습생 시스템과 방송가의 공채 폐지가 맞물려 현재는 개별 오디션이나 각 소속사의 로비와 입김을 통해 데뷔하는 경우가 대부분이다. 때로는 드라마 작가의 깜짝 발탁으로 신인급 연기자들이 드라마의 주연으로 발탁되는 경우도 있다. 전소민 같은 경우가 대표적이다.

1990년대부터 인기를 쌓은 영화배우 중에서 공채 탤런트로 배우 커리어를 시작한 경우가 꽤 많다. 대표적으로 한석규, 이병헌 등의 배우가 이런 케이스. MBC는 2004년, KBS는 2008년, SBS는 2009년까지 탤런트를 뽑았다. 이후 연예 기획사의 활성화로 공채가 폐지되었다.

2010년대 이래 배우라는 단어를 많이 쓰는 추세라 탤런트의 사용 빈도가 많이 떨어진 상황이다. 아직은 중장년층 및 노년층이 많이 사용하지만 앞으로 사어가 될 가능성이 높다. 무엇보다 방송국에서 공채 탤런트를 뽑지 않기 시작한 이후로 연기자 본인들도 의미가 모호해진 탤런트보다는 전문성이 있어 보이는 단어인 배우를 더 선호한다.

조선일보 인물검색, JOINS 인물정보, 헬로아카이브(연합뉴스) 등 대다수 인물정보 검색사이트에선 영화 출연 배우는 영화배우, 드라마 출연 배우는 탤런트로 나누는 분류를 계속 사용하고 있으며 네이버포털사이트도 이를 따르고 있다. 이 두 분류는 가수나 기업인 같은 다른 직업 분류와 마찬가지로, 인물 정보와 연결되는 출연작이 네이버 정보에 등록되면 자동으로 형성되는 분류다.[3]

한국 최초 탤런트

  • KBS에서 최초로 텔레비전 연기자를 모집, 탤런트라는 용어가 공식적으로 사용.
  • 1961년 12월 31일 KBS 텔레비전 방송국 개국, 25일 이후 1기 탤런트 38명 선발.
  • 100대 1의 경쟁률을 뚫고 남자는 24명, 여자는 14명이 선발됨. 고졸 이상의 24세.
  • 4·19 특집극 <그날이 오면>에 첫 출연해 주인공 이기붕역을 맡은 탤런트는 최길호.

한국에서 탤런트라는 용어가 공식적으로 사용된 것은 KBS에서 최초로 텔레비전 연기자를 모집할 때였다. 당시 방송국은 남산에 있었고, 텔레비전 수상기는 전국에 8천여 대밖에 되지 않았다.

1기 탤런트를 모집하기 전에도 TV 드라마는 있었다. 즉, 1956년에 개국한 최초의 텔레비전 방송국인 HLKZ–TV에도 <나도 인간이 되련다> <사형수> 등의 드라마가 있었고, 1961년 말에 개국한 KBS-TV에도 <금요극장> <유머클럽> <나의 경우> 등이 있었다. 그러나 이때의 연기자는 주로 '제작극회' '신협' 등에 소속돼 있는 연극배우들과 영화배우들이었고, 아직 탤런트라는 용어는 사용되지 않았다.

방송국에서 텔레비전 드라마를 위한 연기자의 필요성을 느낀 것은 당연한 일이었다. 그렇지 않아도 그 동안의 드라마가 연극인들에게 맡겨져 무대적인 인상을 준다는 평을 듣던 터였다.

따라서 1961년 12월 31일 KBS 텔레비전 방송국을 개국하고 제1기 탤런트 38명을 선발, 발표했다. 개국 25일 만의 일이었다.

급속하게 이루어진 것은 방송국 개국도 마찬가지였다. 원래 국영 텔레비전 방송국을 세우겠다는 계획은 1958년부터 나왔다. 「한국방송 60년사」는 당시 오재경 공보실장의 1959년 연두사를 이렇게 소개하고 있다.

"우리 서울 중앙방송국에서도 텔레비전 방송시설을 마련하고 시내 요소요소에 텔레비전 수상기를 공설하여 누구나가 다 즐길 수 있게 하는 한편, 국가의 시책과 우리 생활의 자라나는 모습을 널리 알려주려고 계획하고 있다. 특히 우리 공보실에는 우수한 시설을 갖춘 영화 스튜디오와 영화 현상소가 있으므로 이것을 활용하면 우리의 텔레비전 방송은 매우 효과적으로 운영될 것이다."

그러나 계획이 진척을 보지 못하고 있다가 4 · 19와 5 · 16을 거치고 불과 110일 만에 스튜디오를 짓고 전파를 발사하게 된 것이다. 그렇게 되기까지의 준비작업은 주야가 따로 없었다. 콘크리트 배합을 하는데 기온이 떨어지면 소금을 섞어가면서 강행군을 할 정도였다. 그렇게 시작된 KBS-TV는 초기엔 4시간밖에 방영하지 못했고, 그나마 대부분은 영화였다. 시청할 수 있는 지역서울 일원으로 한정돼 있을 정도였다.

그런데 어느 날 화면에 눈에 뜨이는 모집광고가 하나 나왔는데, 그것이 바로 처음으로 탤런트를 선발하겠다는 광고였다. 당시 텔레비전에 공고했던 모집요강의 명칭은 '한국 텔레비전 방송국 연기자 모집'이었다. 이때의 텔레비전 연기자를 방송국에서는 탤런트라 부르기 시작했고, 차츰 일반에게도 알려져 보편적으로 사용하는 용어가 된 것이다.

제1기 38명 중 남자는 24명, 여자는 14명이었다. 그들은 3천여명의 응시자 가운데 뽑힌 사람들이었다.

텔레비전은 세계적으로 각광받는 매체였다. 1956년 텔레비전 방송국을 보유하고 있는 나라는 15개국에 불과하던 것이 5년 후엔 70개국으로 늘어났다.

최초의 탤런트를 선발하는 데 100대 1의 경쟁률을 보인 것은 탤런트라는 직업에 대한 선호보다도 텔레비전이라는 매체에 대한 매력 때문이었다.

제1기 탤런트 모집에는 연령이 24세, 학력은 고졸 이상이라는 제한이 있었다. 시험은 학과와 실기로 나누어 치러졌다. 그중 학과는 방송 용어를 얼마나 아는지 묻는 정도였고, 실기는 복혜숙 · 이서구 · 박동근씨 등이 심사위원으로 앉아 까다롭게 테스트했다.

이때 선발된 연기자들이 출연했던 첫 작품은 4 · 19특집극인 <그날이 오면>이었다. 두 시간짜리 생방송이었는데, 주인공 이기붕 역을 맡은 탤런트는 최길호였다.

당시 탤런트에 대한 시청자의 관심은 도가 지나칠 정도였다. 탤런트들은 연일 신문 · 잡지의 인터뷰 요청에 시달려야 했고, 음식점에도 가지 못할 정도였다.

대우는 엉망이었다. 출연료를 가장 많이 받는 주연급의 경우 그 출연료를 가지고 같이 출연한 동료들과 막걸리를 몇 잔 마시고 나면 겨우 집에 갈 버스비만 남았을 정도였다고 한다. 그들이 자주 갔던 대폿집은 명동 돌체다방 옆에 있던 허름한 집이었다.

90년대로 접어들어서도 계속 활동하고 있는 사람으로는 박주아 · 김혜자 · 정혜선 그리고 최정훈 · 박병호 · 양영준 · 최길호씨가 있을 뿐이다.[4]

명칭

탤런트라는 명칭은 영어가 아니라 재플리시인 타렌토(タレント)를 어원으로 한다. 일본에선 가수, 연기자, 코미디언, MC, 예능 패널 등 TV를 중심으로 활동하는 연예인들을 통틀어 일컫는다. 그런데 이 단어가 한국으로 넘어 오면서 TV 드라마에 출연하는 연기자만을 지칭하는 단어로 의미가 변화했다.

영어권에선 talent가 부가 설명 없이 단독으로 쓰이면 연예계 인물이라는 뉘앙스가 바로 생기기 힘들다. 그래서 일본의 탤런트를 설명할 때 일본의 TV 유명 인사(Television personalities in Japan)라는 명칭을 쓴다. 다만 '재능 있는 인물'이라는 talent의 본래 의미를 연예계와 접목 시키는 경우는 있다. 보통 신인 발굴 프로그램에서 talent를 타이틀에 다는 경우가 많은데 대표 프로그램으로 아메리카 갓 탤런트가 있다. 이런 프로그램들을 통틀어 탤런트 쇼(Talent show)라고 부른다.

그리고 미국에선 탤런트 에이전시(Talent agency)나 탤런트 에이전트(Talent agent) 같은 명칭을 통해서도 연예계의 틀에서 talent를 이해한다. 하지만 탤런트 에이전트는 한국의 연예 기획사와 기능상 큰 차이가 없다. 실제로 미국에서 가장 역사가 오래된 탤런트 에이전시인 윌리엄 모리스 에이전시는 19세기 말, 즉 영화 산업이 생겨나기도 전에 설립된 회사로 초창기 클라이언트는 무대에 서는 엔터테이너들이었다. 무성영화가 생겨난 후에는 영화에 집중하여 찰리 채플린, 막스 형제, 매이 웨스트 등 쟁쟁한 헐리웃 스타들을 대표한 회사가 생겨났지만, 기본적으로는 영화계를 넘어 연예계 전반을 아우르는 기획사란 의미로 쓰인다.[3]

영화 배우와의 관계

전통적으로 극 콘텐츠 중 가장 큰 자본이 들어가는 분야가 영화인데 투자가 제대로 이뤄지지 않으면 엎어지는 경우도 많아 배우 입장에서 안정적인 수입원은 아니었다. 방송사 공채 시험을 통과해 텔레비전 배우로 기반을 다진 후 영역 확대 차원에서 영화판으로 진출하는 사례가 흔했다. 배우 최진실은 방송사 특채 배우 1년차에 영화 배우로도 입문해 양 진영에서 모두 성공한 드문 케이스. 물론 TV 드라마에서 인기를 끈 후 충무로로 진출했다가 흥행에 실패해 하향세를 타거나 조연급 배우로 강등되어 대중의 뇌리에서 사라지는 경우도 있었다. 한석규는 '서울의 달'과 '호텔'이라는 TV 드라마로 대중적인 인기를 다진 후 1990년대 후반 영화계로 진출해서 첫 영화 '닥터봉'이 흥행에 성공하자 계속 영화판에서 잘 나갔다.

1990년대는 컬러TV가 일반적인 시청 수단이 되면서 '텔레비전 배우의 시대'라고 해도 과언이 아니었던 반면 영화는 1990년대 후반까지 '방화'라고 불리며 외국 영화에 비해 외면을 받았고 '스크린 쿼터제'가 메인 이슈였다. 텔레비전 배우는 안방 극장을 통해 대중을 만나니 인지도 올리기도 좋고 컬러TV 보급으로 광고 시장도 비약적으로 발전하자 방송사는 드라마 제작비도 넉넉하게 확보하게 된다. 그러니 텔레비전 배우 입장에서 영화 배우에 아쉽지가 않았다. '영화 배우' 로망, '스크린' 로망으로 할 뿐이지.

예술가연 하기에는 '영화 배우'가 때깔이 나는 감성은 있었다. 한국 전쟁 이후 국가 재건 과정에서 라디오, 텔레비전도 귀하던 시절 대중예술은 영화가 전부이다시피 했고 그걸 향유하는 사람도 극소수였기 때문에 영화 배우에 대한 로망이 한국사회 기저에 깔려 있을 수밖에 없었다. 그래서 영화판에서만 놀던 배우들이 브라운관으로 활동 영역을 넓히면 '급' 타령하는 경우도 있었다. 하지만 배우 정선경은 영화 배우로 자리잡은 후 텔레비전 배우로도 연착륙한 배우에 해당된다.

TV 드라마에서는 시청률 보증 수표지만 영화판에서는 흥행력이 저조한 배우들은 탤런트로만 남는다. 예를 들면 김희선, 최수종 등이 있다. 영화는 잘되는데 TV 드라마에서는 흥행이 저조한 배우도 있다. 예를 들면 문소리 등이 있다. 안성기처럼 영화판에서만 연기하고 TV 드라마에는 진출하지 않는 배우들도 있다. 즉 텔레비전 배우, 영화 배우, 연극 배우 중 어느 하나, 혹은 두 가지, 혹은 셋 모두를 섭렵하는 배우 등 배우 개인의 상황이나 성향에 따라 재량대로 간다. 대표적인 예가 배우 김혜자. 김혜자는 연극 배우, 텔레비전 배우, 영화 배우로 종횡무진 활동한 배우다.

과거 TV 드라마판과 영화판의 촬영 시스템이 너무 달라서 적응을 못하고 탤런트로만 남는 배우, 영화 배우로만 남는 배우가 갈렸다. TV 드라마에선 거의 실시간에 가까운 스피디한 촬영이 이뤄지고 쪽대본이 성행했던 반면 영화는 감독의 의지에 따라 촬영 기간에 융통성이 있고 재촬영이 들어가기도 하는 등 연기 흐름이나 환경에 차이가 있다. 인터넷이 발달하고 촬영 시스템이 유사해지면서 이 둘의 간극도 좁혀져 갔다. 그리고 사전 제작 시스템이 도입이 되고 2020년대 OTT 시장에서 영화 감독 중에 TV 드라마 연출을 하는 경우도 생겨 더욱 경계 자체가 사라져 간다. 게다가 코로나19 이래 극장 개봉은 맛보기로 하고 냉큼 넷플릭스 등 OTT에 올려서 수익 증대를 꾀하는 영화들도 많아졌다.

1992년 중국과 수교가 이뤄지면서 1993년 MBC 드라마 <질투>(1992년)가 처음으로 중국 시장에 진출한 후 MBC 드라마 <별은 내 가슴에>가 중화권에서 빅히트를 치는 등 한국 드라마의 세계적 위상이 높아져 갔고 2000년대에 들어서자 그 흐름이 한 단계 더 업그레이드돼 TV 드라마가 해외 시장에서 날개를 달게 되고 텔레비전 배우들의 인기도 고공행진했다. 2000년대 초반 '욘사마' 열풍 배용준이 대표적인 예다. 배우들은 '탤런트 -> 한류 스타 -> 월드 스타' 테크트리를 탔다.

1990년 후반 영화계에 '100만 관객 시대'의 서막이 오르고 2000년대에 들어서면서 '100만 관객 시대'가 안정적으로 구축되자 영화 배우도 안정적 수입원이 된다. 블록버스터가 대거 제작되면서 영화 배우의 위상도 전과 달라지고 한국 영화 위상도 외국 영화를 능가한다.

2010년대부터는 영화 활동 없이 TV 드라마만으로 한류 스타로 자리잡는 경우가 더욱 많아졌다. 이민호가 그 예다. 2010년대에는 영화계에도 '500만 관객 시대'가 열리고 '영화 배우 -> 탤런트 -> 한류 스타 -> 월드 스타' 테크트리를 타는 경우도 생겼다. '기생충', '미나리'를 거치면서 2020년대 영화계는 '1000만 관객 시대'를 열었고 세계적으로 한국영화 배우의 위상도 한국 텔레비전 배우의 위상과 다르지 않게 되었다. '영화 배우 -> 한류 스타 -> 월드 스타' 테크트리를 타는 경우도 가능해 졌다.

전 세계적인 한류 열풍 속에 TV 드라마 시장, 영화 시장 모두 급성장하자 영화 배우와 텔레비전 배우로 소위 말하는 '급'을 나누는 분위기도 거의 사라졌고 그 경계도 사라져 이제는 배우가 영화와 드라마를 가리지 않고 고루 나오는 경향이 대세가 되었다. '탤런트'라는 단어가 사어화의 계단을 밟고 있는 2010년대 들어서 이러한 경향은 더욱 강해졌다. 영화판에서 잘 나가는 전도연, 이병헌, 김혜수, 전지현 등이 TV 드라마 출연도 병행한다는 게 그 증거다.[3]

각주

  1. 탤런트〉,《용어해설》
  2. 탤런트〉,《두산백과 두피디아》
  3. 3.0 3.1 3.2 탤런트〉, 《나무위키》
  4. 한국 최초 탤런트〉, 《한국 최초 101장면》

참고자료

같이보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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