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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쓰시마섬'''<!--대마도-->(일본어: 對馬, 対馬 츠시마, 영어: Tsushima Island)은 [[한반도]]와 [[규슈]] 사이의 [[대한해협]] 중간에 있는 [[일본]] 나가사키현의 [[섬]]이다. 섬 크기는 남북으로 82km, 동서로 18km, 면적은 696.1km²로 한국 제주도의 8분의 3, 거제도의 1.8배 정도 크기이며, 인구는 약 2만8천 명이다. 한국식으로 한자음을 그대로 읽은 '''대마도'''(對馬島)라고도 부른다.<ref>〈[https://ko.wikipedia.org/wiki/%EC%93%B0%EC%8B%9C%EB%A7%88%EC%84%AC 쓰시마섬]〉, 《위키백과》</ref>
 
'''쓰시마섬'''<!--대마도-->(일본어: 對馬, 対馬 츠시마, 영어: Tsushima Island)은 [[한반도]]와 [[규슈]] 사이의 [[대한해협]] 중간에 있는 [[일본]] 나가사키현의 [[섬]]이다. 섬 크기는 남북으로 82km, 동서로 18km, 면적은 696.1km²로 한국 제주도의 8분의 3, 거제도의 1.8배 정도 크기이며, 인구는 약 2만8천 명이다. 한국식으로 한자음을 그대로 읽은 '''대마도'''(對馬島)라고도 부른다.<ref>〈[https://ko.wikipedia.org/wiki/%EC%93%B0%EC%8B%9C%EB%A7%88%EC%84%AC 쓰시마섬]〉, 《위키백과》</ref>

2023년 8월 9일 (수) 16:53 판

쓰시마섬 위성사진
쓰시마섬 위치
나가사키현 지도

쓰시마섬(일본어: 對馬, 対馬 츠시마, 영어: Tsushima Island)은 한반도규슈 사이의 대한해협 중간에 있는 일본 나가사키현의 이다. 섬 크기는 남북으로 82km, 동서로 18km, 면적은 696.1km²로 한국 제주도의 8분의 3, 거제도의 1.8배 정도 크기이며, 인구는 약 2만8천 명이다. 한국식으로 한자음을 그대로 읽은 대마도(對馬島)라고도 부른다.[1]

개요

쓰시마섬은 지리적으로는 일본 영토 가운데 한반도에 가장 가까우며 예로부터 유라시아 대륙일본열도의 문물이 오가는 창구였고, 일본 역사에서 대륙으로부터의 문화적, 경제적인 창구 역할을 맡아왔던 지역이다. 일본에서 바다 낚시의 명소로써도 유명하다. 쓰시마섬은 지정학적으로는 초크 포인트에 해당하기 때문에 예로부터 국경의 섬으로써 국방상 중시되었고, 메이지 시대 때부터 일본 육군은 쓰시마 경비대(対馬警備隊)와 쓰시마 요새(対馬要塞)를 두었으며 패전으로 군대가 해산된 뒤에는 1956년부터 항공자위대 우니시마 분둔기지(海栗島分屯基地)가 설치되어 1961년부터 육상자위대의 쓰시마 주둔지(対馬駐屯地)도 설치되었고 쓰시마 경비대로 발전하였다. 또한 메이지 시대에는 일본 해군의 시설이 설치되기도 하였으며 2019년에는 일본 해상자위대 쓰시마 방비대(対馬防備隊)도 소재하고 있다. 쓰시마섬에는 부속 도서로 우니시마(海栗島), 도마리지마(泊島), 아카지마(赤島), 나카노지마(沖ノ島), 시마야마지마(島山島) 등 5개의 유인도와 102개의 무인도가 있다. 쓰시마섬과 부속 도서들을 아울러 쓰시마 열도(対馬列島)나 쓰시마 제도(対馬諸島)로 부르기도 한다. 고대에는 쓰시마국이나 다이슈(対州), 또는 《일본서기》의 기재 대로 쓰시마(対馬島)로 기술되기도 한다.

쓰시마섬은 규슈 본토 사가현 카라츠시 하도 곶 에서 북서쪽으로 82km 떨어져 있으며, 남동쪽에 위치한 이키 섬까지의 거리는 47.5km이고, 한반도와의 거리는 약 49.5km이다. 농경지는 전면적의 3.3%이며, 섬 전체 면적의 대부분인 80~90%가 산지이다. 원래 하나의 큰 섬이었으나 1672년에도 시대 때 오후나코시 운하, 1900년 메이지 시대 때 만제키 운하가 인공적으로 만들어지며 3개의 섬으로 나뉘었다. 쓰시마는 아소 만과 만제키 운하로 섬이 양분되는 지형이기 때문에, 크게 북쪽을 가미지마(上島), 남쪽을 시모지마(下島)로 부른다. 마을은 해안 지대를 둘러가며 띄엄띄엄 자리하고 있다. 이즈하라, 미쓰시마, 도요타마, 미네, 가미아가타, 가미쓰시마 등 6개의 정(町)이 있었는데 2004년 모두 합병하여 통합 쓰시마시로 개편되었다. 6개 정이 통합되었고, 지형이 복잡하기 때문에 좁은 시가지가 분산되어 있는 것이 특징인데, 한국인 관광객들이 주로 가는 곳은 부산항국제여객터미널에서 직항편이 있는 남쪽의 이즈하라와 북쪽의 가미쓰시마의 히타카쓰이다.[2][3]

지리

동해 서쪽 어귀에 위치한 쓰시마 섬은 규슈 본토에서 현해탄(玄界灘)과 쓰시마 해협 동수도(東水道, 좁은 의미에서의 쓰시마 해협)을 끼고 약 132km, 한반도와의 거리는 쓰시마 해협 서수도(西水道, 대한해협)을 끼고 약 49.5km이다. 사가현 가라쓰시 하도곶에서 북서쪽으로 82km 떨어져 있으며, 남동쪽에 위치한 이키섬까지의 거리는 47.5km이고, 섬 크기는 남북으로 82km, 동서로 18km로 갸름하며, 섬 넓이는 약 700km²로 일본의 섬 가운데서 10위 규모이다. 농경지는 전 면적의 3.3%이며, 섬 전체 면적의 대부분인 80~90%가 산지이다. 관광업이 번성하였고, 대한민국 이외에, 일본, 중국 등에서 많은 관광객이 방문한다. 쓰시마 섬 전체 인구는 1960년에 6만9556 명을 정점으로 감소하여 1980년 말에 5만 810명, 2000년 말에 4만1230 명, 2020년 말에는 2만9465 명까지 줄었다. 반면, 세대수는 2020년 말 기준으로 1만4821 세대이며 1980년 말의 1만5176 세대에 비해 별로 줄지 않았다. 이는 섬에 젊은이가 일할 수 있는 일자리가 적고 핵가족화와 고령화가 진행되고 있기 때문이다.

지형

쓰시마 동쪽 해안 일부와 시모시마(下島)의 서해안 일부를 제외하면 거의 대부분이 리아스식 해안이 발달해 있고, 해안선 총길이는 915km에 달한다. 특히 본섬 한가운데에는 서쪽으로부터 크게 뻗은 아소 만(浅茅湾)이 있고, 동쪽으로부터도 미우라 만(三浦湾), 오로시카 만(大漁湾) 등이 깊이 뻗어와 다도해를 형성하고 있다. 또한 아소 만의 자연 해안선의 길이는 일본에서도 가장 긴 것으로 알려져 있다. 이밖에 각지에 작은 곶이 있으며 대부분은 고기잡이 항구로써 이용되고 있다. 단애절벽도 자주 보이며 그 가운데는 표고차가 100미터에 달하는 곳도 있다. 본섬은 과거 1개의 섬이었으나, 지협이 되고 있었던 부분에 운하를 팠다. 간분(寛文) 12년(1672년)에 오후나고시 세토(大船越瀬戸), 1900년(메이지 33년)에 만제키세토(万関瀬戸)가 개통되어 가늘고 길었던 섬은 남북 세 곳으로 분리되었다. 과거에는 남부를 가미시마(上島), 북부를 시모시마로 불렀으나, 오늘날에는 만제키세토 북부를 가미시마, 남부를 시모시마로 부르고 있다. 전체적으로 산이 매우 높은 편이며 특히 시모시마 방면에 표고가 높은 산이 많다. 시모시마 중앙부에는 최고봉 야타테 산(矢立山, 해발 고도 648.40m 등이 야타테 산줄기를 이루어 우치야마 분지(内山盆地)를 에워싸고 있다. 그 북동쪽으로 아리아케 산(有明山, 표고 558.09m)이 있고, 아소 만 남안에 시라타케(白嶽, 표고 518m)이 있다. 가미시마 최고봉은 북부에 위치한 미타케(御嶽, 표고 479m)이다. 섬 안의 분수계는 동쪽으로 치우쳐 있는데 주요 6개 하천 가운데 사고가와(佐護川), 니타가와(仁田川), 미네가와(三根川), 사쓰가와(佐須川), 세가와(瀬川) 다섯 곳은 서쪽을 향해 흐른다. 동쪽으로 흐르는 가장 큰 하천으로 섬 안 유역 면적 5위에 해당하는 것이 슈시가와(舟志川)이다. 각 하천 하류 부분에는 곡저 평야가 있고 경작지로 쓸 수 있는 평지는 적고 육상교통도 매우 불리하다. 이러한 지형은 쓰시마 사람들의 생활이나 역사에 큰 영향을 끼치게 된다.

지질

쓰시마의 지질은 대부분이 신생대고(古)제3기에 형성된 이질(泥質) 퇴적층으로 「쓰시마층」(対州層)이라고도 불리는데, 북부 일부에는 신(新)제3기층도 보인다. 쓰시마층은 주로 흑탄색 셰일이나 점판암으로 이루어져서 여기에 사암이 섞인 경우가 많고 곳곳에 석영반암(石英斑岩)이나 반려암, 화강암이 박혀 있다. 가미시마 북부의 미타케 주변에는 현무암, 시모시마 동부에는 석영반암, 시모시마 중앙부에는 우치야마 분지 주변에 화강암, 그 주변으로 야타테 산줄기에 단단한 혼펠스가 곳곳에 분포하고 있다. 갱신세(更新世) 중반까지 일본열도와 대륙은 육지로 이어져 있었지만 그 종말기에 바다가 밀고 들어 오면서 한반도와 일본 규슈 지역이 틈이 생겼고, 쓰시마는 이키(壱岐)와 함께 현해탄에 뜬 징검다리 지형의 섬으로 남게 되었다. 해안지형과 해저지형으로 보아 융기와 침강을 반복하면서 오늘날에 이른 것으로 추정되고 있다. 육지 대부분이 낮은 산으로 덮여 있고 평지는 적으며 산꼭대기 부분은 평탄면도 보인다. 산지는 융기준평원에 의하면 것으로 생각되고 있다. 북부 미타케나 가노키 산(香ノ木山, 표고 307m)는 준평원 위에 돌출된 남은 지형으로 남부 우치야마 분지를 파고들었던 화강암이 침식되어 구덩이가 생겨난 것으로 추정된다.

기후

쓰시마 해협에서는 난류인 쓰시마 해류(対馬海流)가 흐르고 있기 때문에 그 영향으로 연간 통틀어 비교적 따스한 비가 많이 내리는 전형적인 해양성 기후이다. 봄에는 서쪽으로 아시아 대륙으로부터 불어오는 계절풍 때문에 고비 사막 등지로부터 황사의 영향을 받게 된다. 여름에는 30°C를 넘는 날이 좀처럼 없으며 비교적 시원하게 지내기 쉽다. 가을에는 비교적 비가 적고 겨울에는 대륙으로부터 불어오는 계절풍의 영향으로 몹시 춥다.

생태

섬의 면적 약 88%를 조엽수 등의 숲이 점하고 있다. 원시림이나 삼나무, 큰소철 등이 국가 혹은 현(県) 단위로 천연기념물로 지정되어 있으며, 섬 전체가 풍부한 자연림으로 뒤덮여 있다. 본래 식생은 활엽수림이나 임업 과정으로 조성된 침엽수림도 많다. 식생은 전반적으로 규슈 본토와 유사하지만 규슈에서는 산지에 많은 낙엽수가 쓰시마의 경우는 저지대에도 보이고 있다. 동식물 종의 경우에도 대륙계 종, 쓰시마 고유종, 쓰시마 고유 아종 및 일본 본토 계통의 종이 혼재하고 있다. 규슈 본토에 많은데 쓰시마에서는 전혀 찾아볼 수 없는 종이나, 쓰시마에는 많은데 규슈 본토에서는 보기 드문 종도 있어서 쓰시마만의 독특한 생태를 형성하고 있다. 2017년 2월에는 수달의 모습이 쓰시마에 설치된 류큐 대학 카메라에 포착되었고 그 해 8월에 발표되었다. 일본 국내에서는 1979년에 고치현에서 마지막으로 목격되었던 일본수달이 쓰시마에서 38년만에 목격되기도 했다. 수달의 종류(일본수달인지 유라시아수달인지) 등의 상세한 사안에 대해서는 향후 조사 및 연구가 있을 예정이다. 쓰시마 연안부 곳곳에 소규모의 산호초가 분포하고 있다. 2007년에는 쓰시마의 산호초에도 백화현상이 확인되었다.

역사

선사시대

구석기 시대에 대륙과 이어져 있었던 쓰시마를 따라 인류가 일본열도를 통과했으며, 당시 인류가 통과했던 발자취가 쓰시마 곳곳에서 확인되고 있다. 오늘날까지 확인된 쓰시마 섬 안의 가장 오래된 선사 유적은 신석기 시대에 속하는 조몬 문화(縄文文化)의 것으로 이 시대에는 이미 대륙과 쓰시마가 단절되어 쓰시마가 섬으로써 고립되어 있었다. 대륙으로부터 온 나우만코끼리 등의 포유류 화석도 발견되지 않았다. 조몬 시대의 미네 정(峰町) 사가 패총(佐賀貝塚)이나 가미아가타 정(上県町) 시타루 패총(志多留貝塚)에서는 외양성 물고기의 뼈가 발굴되었으며, 미네 정에서는 가이와(貝輪, 팔에 차던 장식품) 재료가, 오키나와(沖縄) 조개(이모가이イモガイ, 고우보라ゴウボラ 등속)와 홋카이도산 조개(유키노카사ユキノカサ 외)를 사용했던 것이 확인되고 있다. 또한 석기 재료는 규슈 사가 현(佐賀県) 이마리 시(伊万里市) 고시타케(腰岳)에서 난 흑요석이었다. 나아가 미네 정 깃타 패총(吉田貝塚)에서는 조몬 시대 후기의 야구식 토기(夜臼式土器), 야요이 시대 전기의 판부(板付) 1식 토기 등이 출토되어 규슈 지방 북부와 같은 문화권에 속해 있었던 것이 판명되고 있다. 이들 석기, 가이와 토기는 미네 정 역사민족자료관(峰町歴史民俗資料館)이나 도요타마 정 향토관(豊玉町郷土館) 등에 소장 전시되어 있다. 북부 규슈에서는 이 무렵부터 벼농사가 시작되고 평야가 개발되어 갔지만 쓰시마에서는 하천이나 낮은 충적지에도 불구하고 산지가 대부분인 지형으로 논을 넓게 경작할 수 없었으므로 야요이 시대에 이르러서도 수렵이나 채집, 고기잡이 등의 생업이 여전히 큰 비중을 차지하고 있었던 것으로 추정되며, 벼를 수확하는 도구였던 반달돌칼은 출토되지 않고 있다(다만 대륙 계통의 간석기나 청동기, 철기 등의 금속 도구 등은 출토되고 있다). 야요이 시대 전기의 박래품(舶載品)인 유병식(有柄式) 돌칼이 다수 발견되는 한편으로 기타큐슈에서 제작된 나카히로도보코(中広銅矛), 히로카타도보코(広形銅矛)도 많이 출토되고 있다.

고대

고대부터 대륙과의 교류가 이어졌으며, 역사적으로는 한반도와 왜국, 왜인, 야마토를 잇는 교통의 요충지였다. 중국의 역사책인 《삼국지》 위지 왜인전에 왜의 일원으로써 등장하며 대방군에서 야마타이국으로 가는 경로로써 구야한국(狗邪韓國, 한국의 경상남도 김해시)에 대한 기술에 이어 "바다 하나를 건너서 1천 리" 남쪽에 위치해 있다고 되어 있다. 쓰시마는 이 시점에서 왜국 즉 야마타이국에 복속된 30여 나라의 하나로 알려져 있었다. 여기서 쓰시마는 거주하는 지역이 절해고도로 토지는 산이 험하고 깊은 숲이 많아 그 길은 짐승이나 다닐 듯 좁고 1천여 호 정도의 집이 살고 있었는데 좋은 밭이 없어서 해산물을 캐어 먹고 살며 배를 타고 남북을 오가며 쌀을 사온다고 기록되어 있다. 또한 다른 왜의 여러 나라와 마찬가지로 히코(卑狗)라 불리는 대관(大官)과 히나모리(卑奴母離)라 불리는 부관에 의한 통치가 행해지고 있었다고 한다. 쓰시마 섬에서 고훈 시대 초기에 축조된 데이즈카 고분(出居塚古墳)은 전방후원분으로써 버들잎을 닮은 형태의 동제 화살촉과 철검 파편, 대롱옥 등이 출토되었다. 전방후원분은 3세기 일본 열도에서 생겨난 고분 형태로 출토된 버들잎을 닮은 형태의 동제 화살촉은 고식 기나이형 고분(畿内型古墳)의 전형적인 출토품 가운데 하나로, 이 시대 쓰시마의 수장이 야마토 왕권과 밀접한 관계에 있어 그 영향을 강력하게 받고 있었음을 보여준다. 수장급 무덤 가운데 비교적 규모가 큰 무덤은 쓰시마 시 미쓰시마 정(美津島町) 다카하마소네(高浜曽根) 바닷가에 집중분포하고 있다. 에베스노쿠마 고분(えべすのくま古墳)은 전방후원분으로 보기도 하지만 전방후방분(前方後方墳)일 가능성도 있는데, 봉분의 전체 길이는 약 40m이다. 상자 형태의 관으로 동제 화살촉 12점, 대롱옥 1점, 철검이 출토되었고 동제 화살촉은 교토부 묘켄 산 고분(妙見山古墳)나 후쿠오카현의 이시즈카야마 고분(石塚山古墳)의 것과 유사하고 고훈 시대 전기(4세기경)에 축조된 것으로 추정된다. 미쓰시마 정의 게치네소(鶏知ネソ) 1호분은 전체 길이 30m로 상자 형태의 관 뿐 아니라 대롱옥과 철제 화살촉, 외날칼이 출토되었다. 게치네소 2호분은 전체 길이 36m로 주실은 상자식 관뿐 아니라 스에키(須恵器)나 철제 외날칼이 출토되었으며, 부실에서는 상자식 관에서 하제키(土師器)와 철검이 출토되었다. 두 무덤 모두 돌무지무덤(적석총)이다. 다이카 개신 이후 왜국에 율령제가 시행되고 쓰시마는 사이카이도에 속한 령제국(令制国)으로써 쓰시마 국으로써 오늘날의 이즈하라에 고쿠후(国府)가 설치되었고, 지쿠시도독부 즉 다자이후가 설치된 뒤에는 관할 안에 들게 되었다. 스이코 천황 8년(600년)과 15년(607년) 견수사(遣隋使)로 수에 파견된 오노노 이모코, 조메이(舒明) 2년(630년) 이누가미노 미타스키(犬上御田鍬)를 비롯한 초기 견당사들도 모두 이키섬과 쓰시마를 그들의 기항지로 삼았다.

중세

지쇼-주에이의 난(治承・寿永の乱) 당시 쓰시마 고쿠시(国司)였던 후지와라노 지카미쓰(藤原親光)는 미나모토노 요리토모의 외척이었기 때문에 겐지에 마음이 기울어 주에이 2년(1183년) 쓰시마를 떠나 교토로 향하려 했으나 헤이케가 규슈 전역을 제압하고 있었으므로 쓰시마를 출발할 수도 없었다. 헤이케의 무장 다이라노 토모모리(平知盛)는 다자이노쇼니(大宰少弐)를 맡고 있던 하라다 다네나오(原田種直)를 통해 사이카이도 지역 무사들에게 야시마로 와서 헤이케에 합류할 것을 명하였지만, 지카미쓰는 이를 거부했고 세 번에 걸쳐 헤이케의 추토를 당하였다. 지카미쓰의 주종은 이에 고려로 달아났고, 헤이케가 멸망한 뒤인 분지 원년(1185년) 6월에 쓰시마로 돌아왔다. 중세 일본의 쓰시마는 장원 제도(荘園制度)의 발전이 보이지 않는데 가마쿠라 막부(鎌倉幕府)는 각 구니마다 슈고(守護)를 배치하면서 쓰시마 국의 슈고는 쇼니 씨(少弐氏, 무토 씨武藤氏)에게 맡겼다. 12세기에는 훗날 소 씨(宗氏)의 시조가 되는 고레무네 씨(惟宗氏)가 쓰시마에 들어 왔다. 고레무네 씨는 원래 다자이후의 관인이었는데 지쿠젠 국(筑前国)의 무나가타 군(宗像郡)에서 쓰시마로 왔다고 한다. 사료에서 고레무네 씨의 이름이 쓰시마의 재청관인으로써 확인되는 최초의 사례는 겐큐(建久) 7년(1196년)의 것이다. 고레무네 씨(소 씨)는 쇼니 씨의 슈고다이(守護代)로써 차츰 쓰시마에서 세력을 키워나갔고 무사(武士)화되었다. 기존에 쓰시마에서 세력을 지니고 있었던 아비루 씨(阿比留氏)는 당시 일본과 공식적인 국교를 맺고 있지 않았던(상인이나 민간교류는 행해졌다) 고려와의 교역을 행하고 있었고, 다자이후의 힐문도 따르지 않았다. 간겐(寛元) 4년(1246년) 다자이후의 명으로 고레무네노 시게히사(惟宗重尚)가 게치 땅을 중심으로 강한 세력을 지니고 있던 아비루 재청(阿比留在庁, 헤이타로平太郎)를 쳐서 쓰시마의 지배권을 확립하게 되었다.

근세

덴쇼(天正) 15년(1587년) 도요토미 히데요시(豊臣秀吉)의 규슈 정벌에 즈음해 소 씨는 사전에 도요토미 정권에 신종할 것을 결정하고 쓰시마 본령(本領)을 안도(安堵)받았다. 덴쇼 18년(1590년) 소 요시토시(宗義智)가 종4위하 시종(侍従), 쓰시마노카미(対馬守)에 임명되고 난 뒤로 소 씨의 당주는 대대로 쓰시마노카미에 임명되는 것이 관례가 되었다. 임진왜란에서는 공격에 앞서 덴쇼 19년(1591년) 이즈하라에서 옛 가네이시 성의 배후에 시미즈 산성(清水山城)이, 가미쓰시마의 오오우라에 撃方山城]이 수축되어 일본군의 중계 기지가 되었다. 쓰시마에서는 소 요시토시가 5,000명을 동원하였다. 요시토시가 거느린 쓰시마 군세는 1번대부터 9번대까지 편성되어 있던 일본군 안에서도 최선봉을 맡은 고니시 유키나가의 1번대에 배속되었다. 분로쿠(文禄) 원년(1592년) 요시토시 등은 일본 전군의 선봉으로써 바다를 건넜고 조선군이나 명나라군과 교전해, 부산진, 한성에 이어 평양까지 차례로 공략하였다. 요시토시는 전투뿐만 아니라 장인인 유키나가와 함께 일본측의 외교를 맡아 활동하기도 하였으며, 유키나가와 함께 양국간 강화를 도모하였다. 또한 일본의 30만 군대가 바다를 건너는 중계지로 변한 쓰시마에서는 삼았기에 식량 부족에 시달렸고, 체류하던 병사들이 닭, 개, 고양이 등을 주민들로부터 약탈하는 일까지 벌어져 이를 막는 금령이 내려질 정도였다. 한편 쓰시마에서는 고니시 유키나가가 썼다는 투구가 전해지고 있다. 요시토시는 게이초 5년(1600년) 세키가하라 전투에서는 유키나가를 따라 서군에 가담하였고 그 자신은 후시미 성 공격에도 참가하였으며, 오쓰 성(大津城) 공격이나 세키가하라 본전에서는 가신을 보내 참전하게 하였다. 서군이 패배한 뒤에는 도쿠가와 이에야스로부터 용서를 받고 이후 대대로 도쿠가와 씨에 신속하면서 조선에 대한 외교창구로써의 역할을 맡게 되었다. 이렇게 에도 시대 내내 소 씨가 쓰시마 후추 번(対馬府中藩, 통칭 쓰시마 번対馬藩)의 번주를 맡아 조카마치(城下町)를 쓰시마 후추(府中, 이즈하라)에 뒀다. 게이초 14년(1609년)에는 조선과의 기유약조(일본명 게이초 약조慶長条約)가 체결되고 부산포에 왜관이 재건되었다. 왜관은 네덜란드 상관이 위치해 있던 나가사키 데지마의 25배에 달하는 약 10만 평 부지에 설치되었고 500명에서 1,000명에 이르는 쓰시마 번사(藩士)나 도민들이 거류하면서 교역을 맡았다. 2대 번주 소 요시나리 대인 겐나 원년(1615년) 오사카 전투에서 쓰시마는 도쿠가와측으로써 참가하였다. 이후 요시나리와 쓰시마 번 가로(家老) 야나가와 시게오키와의 사이에서 야나가와 잇켄이라 불리는 사건이 벌어졌는데, 간에이 12년(1635년) 3대 쇼군 도쿠가와 이에미쓰에 의해 재가되어 요시오키가 패소하였다. 간에이 14년(1637년)부터 이듬해에 걸쳐 벌어진 시마바라의 난에서 쓰시마 번은 막부측으로써 참가하였다. 사쓰 광산(佐須鉱山)을 다시 채굴하기 시작한 것도 요시나리의 시대에 이르러서였다.

쓰시마 번은 참근교대 제도에 기초해 3년에 한 번 에도의 세이이타이쇼군(征夷大将軍)에게 출사하여야 했고, 에도에 번저를 두고 이즈하라와의 사이를 번주 자신이 가신들을 거느리고 성대한 행차를 갖추어 오고 갔다. 외교면에서는 쇄국체제 아래 일본에서 조선통신사를 맞이하는 등 조일외교의 중개자로써의 역할을 맡았다. 또한 조선과 일본 양국의 중앙권력으로부터 부산포의 초량왜관에서의 교역권을 허가받았다. 야나가와 잇켄 이후 조선과 일본 양국의 외교 체제가 정비되고 후추(府中)의 이테이안(以酊庵)에 교토 5산(京都五山)의 선승(禅僧)들이 번갈아 부임해 외교문서를 맡는 이테이안 윤번제(以酊庵輪番制)가 확립되는 등 막부의 통제도 강화되었다. 간분(寛文) 3년(1663년)에 쓰시마 번은 다섯 척의 배가 정박할 수 있는 항구를 조성하였는데, 오늘날 오후나에 터(お船江跡)라는 유적으로 당시의 모습 그대로 보존되어 있다. 이보다 2년 전인 간분 원년(1661년) 니이 군 검지(仁位郡検地)라 불리는 토지조사가 실시되었다. 쓰시마 번은 10만 석 수준의 다이묘로 간주되었지만 실제 쓰시마의 지형과 환경상 쌀 4500석에 보리 15,000석 정도가 쓰시마의 실제 수입이었고 번의 수입은 대부분 조선과의 교역으로부터 오는 것이었다. 경작지 면적 내에서 가장 많은 것은 밭이었고, 다음으로 고바(木庭)라 불리는 화전이었으며, 검지(토지조사)에서는 고바도 백성지고(百姓持高)로 포함되었다. 또한 석고(石高) 제도 대신 겐다카(間高) 제도라는 특별한 생산단위가 채용되었다. 17세기 후반에 이르러서 조일무역과 은 광산의 융성으로 쓰시마는 큰 번영을 누렸고, 아메노모리 호슈(雨森芳洲)나 스야마 도쓰안(陶山鈍翁), 마쓰우라 가쇼(松浦霞沼) 등의 인재도 배출되었다. 당시의 소 씨의 번영은 쓰시마 소 씨의 보리사(菩提寺)였던 반쇼인(万松院) 뿐 아니라 가이진 신사(海神神社)나 와다쓰미 신사(和多都美神社)의 장려함을 통해 오늘날까지도 남아 있다. 조쿄 2년(1685년) 번주 소 요시자네(宗義真)가 후추에 소학교(小学校)라는 이름이 붙은 학교를 세워 가신의 자제들에 대한 교육을 맡게 하였는데, 이는 일본에서 소학교(小学校, 한국의 초등학교에 해당하는 교육기관이다)라는 이름의 시설이 설치된 최초였다. 18세기 초에는 스야마 도쓰안의 힘으로 10년 가까운 이지카오이쓰메(猪鹿追詰, 해수구제사업)이 실시되었다. 이를 통해 당시 쓰시마의 화전경작에 해를 주던 멧돼지들이 쓰시마에서 절멸되었다.

한국과의 교류

고려 말부터 고려에 조공을 하고 쌀 등의 답례를 받아갔다. 6세기전반 아스카 시대에는 쓰시마 국주가 일본왕부의 임명장을 받기도 하였다. 이러한 관계를 바탕으로 평화 시에는 한반도와 일본 열도 간의 교역을 독점하였으며, 전쟁 시에는 두 나라 사이의 징검다리 역할을 하기도 했다. 그러나 이곳이 한때 왜구의 소굴이 되자, 1389년(고려 창왕 2년)에는 박위가 쓰시마를 토벌하였다. 본래 쓰시마는 아비루 가문이 지배하였으나, 12세기 고레무네노 시게히사가 아비루가에서 일어난 반란을 평정한 이후, 시게히사의 후손인 소가가 지배하게 되었다. 그 뒤로도 고려와 조선으로부터 관작을 받았으며, 쇼군으로부터 다이묘로 임명을 받는 등 조선과 일본 사이에서 양속관계를 유지하였다. 조선과 지리적으로 가까워 외교창구로 중요한 역할을 하였다. 조선통신사가 일본을 방문할 때 가장 먼저 이곳에 도착하였다. 조선 국왕은 왜구들에 대한 회유책으로 통상의 편의도 봐 주고 또 귀화 정책을 쓰는 등 우대를 해 주기도 하였다. 그렇지만 이곳을 근거지로 한 왜구의 행패가 여전하자 세종 때인 1419년 음력 6월 세종이 이종무에게 명을 내려 군사 1만 7285명을 동원하여 대마도 원정을 하는 등 강경책을 쓰기도 하였다.

대한민국의 초대 대통령 이승만은 정부 수립 직후인 1948년 8월 18일 성명에서 '대마도는 우리 땅'이니 일본은 속히 반환하라고 했다. 일본이 항의하자 이승만은 외무부를 시켜 1948년 9월 '대마도 속령(屬領)에 관한 성명'을 발표했다. 또한 1949년 1월 7일에도, 같은 주장을 하였다. 또한 1951년 샌프란시스코 강화조약 초안 작성 과정에서 4월 27일 미국 국무부에 보낸 문서에서 대마도의 영유권을 돌려받아야 한다는 요구를 한 적이 있다. 그러나 미국은 이러한 요구를 거부하였다. 2013년 3월 22일에는 의정부시의회가 대마도 반환을 촉구하는 한편 대한민국정부차원의 반환 촉구를 요청하고 있다. 최근에는 일본의 한 언론에서 "한국이 쓰시마를 넘본다"라는 기사를 써서 영토분쟁화될 가능성이 높아지고 있다. 그리고 산케이 신문에서는 "쓰시마가 위험하다"라는 쓰시마 위기론을 기사로 써 넣었다.

2008년 일본 정부가 중학 교과서에 독도 관련한 자국 영토 주장을 하기로 하자 대한민국에서는 이를 상대하기 위한 쓰시마 섬의 영유권 주장을 언급하는 일이 있었다. 집권 여당인 한나라당 최고위원 허태열은 2008년 7월 16일 한나라당 지도부 회의에서 이승만 대통령의 영유권 주장의 예와 B형간염유전자의 유사성을 예로 들며 쓰시마 섬의 영유권을 주장해야 한다고 하였다. 이에 대해 2008년, 야쓰나리 쓰시마시 시장은 "쓰시마는 일본 국가 성립 이래 내내 일본의 영토로 인식되었고 인식해 왔으며, 삼국 시대 이래 한반도 국가들 가운데 어느 곳에서도 쓰시마를 자국 영토로 간주하고 실효 지배를 행했던 왕조나 정부는 한 곳도 없다."라고 주장했다. 2010년 9월 28일 대한민국 국회에서 여야 37명 의원들은 대마도 포럼을 창립하였다. 허태열 한나라당 의원은 이날 포럼 창립식에서 "대마도는 역사적, 문화적, 인종적으로 우리 영토임이 분명하다"며 "대마도에 대한 우리의 관심은 초대 제헌국회에서의 영유권 주장과 샌프란시스코 강화회의에서의 반환 요구 이후로 사실상 전무한 상태로 현재까지 이르러왔다"고 지적하였고 여야 의원들은 일본이 불법으로 강점하고 있는 대마도를 조속히 반환해야 한다는 것이 골자다. 포럼 소속 의원들은 향후 활동과 관련, 매년 상반기(3월)와 하반기(11월)로 나눠 정책세미나를 개최하는 것은 물론 결의안 채택과 국민운동대회를 개최하기로 했다.

지도

일본 행정 지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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동영상

각주

  1. 쓰시마섬〉, 《위키백과》
  2. 쓰시마 섬〉, 《나무위키》
  3. 쓰시마〉, 《네이버 지식백과》

참고자료

같이 보기

동아시아 같이 보기

동아시아 국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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