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박헌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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박헌영

박헌영(朴憲永)은 일제강점기의 독립운동가이자 북한의 정치인이다.

개요[편집]

  • 박헌영은 공산주의 운동가이다. 조선공산당 창립에 참가했고 남조선노동당을 조직했으며 그 당수의 자격을 지니고 북한의 내각 부총리 겸 외무장관이 되었다. 조선노동당이 발족하자 부위원장이 되었고 김일성에 의한 남로당계 숙청작업으로 체포되어 사형당했다.[1]
  • 박헌영은 일제강점기 시대의 공산주의자, 독립운동가, 언론인, 노동운동가였던 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의 정치인이다. 일제강점기의 독립운동가이자 해방 정국에서는 조선공산당과 남조선로동당의 당수로 활동하였고, 좌우합작운동에는 반대하였으나 남북협상에 참여했다. 1948년 월북 이후에는 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의 정치인으로 활동했다. 공산주의계열의 독립운동가이자 반 기독교 운동가로, 마르크스-레닌주의자이기도 한 그는 몰락 양반 가문 출신 지주 박현주(朴鉉柱)의 서자로 태어나 일제강점기에는 사회주의 운동가로 활약하였으며, 조선공산당의 지도자였다. 아호는 이정(而丁, 而靜), 이춘(而春)이며, 자는 덕영(德永)이다. 별칭은 대한민국 반란주모자, 조선의 레닌, 암흑 속의 별, 비운의 혁명가 등이었다. 또한 그는 이두수, 이춘, 왕양옥, 박건일(朴健一), 김성삼(金成三)이라는 가명을 쓰기도 하였다. 충청남도 예산군 출신. 본관은 영해(寧海)이다.[2]
  • 박헌영은 1900년 5월 28일 충청남도 대흥군 거변면 신양동 빗돌마을(현 예산군 신양면 신양리)의 양반가에서 아버지 박현주(朴鉉柱)와 어머니 신평 이씨(新平 李氏) 이학규(李學圭, 1867. 12. 10~1943) 사이의 서자로 태어났다. 어린 시절부터 한문과 국문을 배운 양반가 지식인이었던 박헌영은 서자였던 자신의 처지 때문인지 홍길동전에 관심을 가지기도 했다. 박헌영은 서자로 태어났음에도 경제력을 가진 그의 어머니의 기대 덕분에 학업을 계속할 수 있었다. 박헌영도 학창시절에는 학업이 매우 우수했는데, 대흥공립보통학교를 졸업했고, 이후 경성제일고등보통학교에 진학하였으며 YMCA 활동도 하였다. YMCA에서 영어를 배우던 그는 그 당시까지만 해도 전형적인 양반가의 자제였던지라 자본주의 열강이었던 미국에 유학을 가는 것을 꿈꾸기도 했다. 하지만 미국으로 유학 가는 비용은 매우 높았기도 했고, 박헌영 집안의 도움도 없었기 때문에 미국 유학 시도는 좌절되었다. 독립운동을 하던 1921년에 상하이에서 만난 사람들의 인연이 닿아서 이르쿠츠크 고려공산당파에 가입하여 열성적인 활동을 하였다. 당시 고려공산당은 이동휘의 상하이파 고려공산당과 여운형의 이르쿠츠크 고려공산당파가 있었는데, 이동휘의 상하이파 고려공산당은 젊은 사람들을 가입하는데 조건을 까다롭게 했었다. 반면, 이르쿠츠크 고려공산당파는 그런거 없이 다소 개방적인 조건이었기 때문에 박헌영과 김단야 일행들은 이르쿠츠크 고려공산당파에 가입을 했다.[3]
  • 박헌영은 충청남도 예산 출신의 독립운동가이자 공산주의자·정치인이다. 박헌영은 조선공산당과 남조선노동당 창설에 주도적인 역할을 하였으며, 북조선인민공화국 부수상을 역임하였으나, 한국전쟁 이후 숙청되었다. 박헌영의 본관은 영해(寧海)이다. 아버지는 박현주(朴鉉柱)이고, 어머니는 이학규(李學圭)이다. 첫 번째 부인인 주세죽(朱世竹)과의 사이에 딸 박비비안나를 두었고, 두 번째 부인 정순년(鄭順年)과의 사이에 승려 원경(圓鏡)을 두었다. 그리고 세 번째 부인 윤옥과의 사이에 1남 1녀를 두었다. 박헌영은 1900년 5월 28일 예산군 신양면 신양리에서 태어났다. 어려서 한문을 배우다가 12세가 되던 1912년 대흥보통학교에 입학해 1915년 졸업하였다. 같은 해 3월 경성고등보통학교에 입학하여 1919년에 졸업할 때까지 조선중앙기독교청년회(YMCA)에서 활동하였다. 경성고보 졸업 후 승동교회에 나가면서 미국 유학을 시도하였으나 성사되지 않자 3.1운동 이듬해인 1920년 9월 상하이로 건너가 이르쿠츠크파 고려공산당 상하이지부에 입당하였다. 1922년 김단야, 임원근 등과 함께 국내 공산당 조직을 위해 잠입하다가 신의주 경찰에 잡혀서 신의주 지방법원, 평양복심법원에서 징역 1년 6월형을 선고받고 투옥되었다. 출소한 뒤인 1925년 조선공산당창당대회를 개최하여 국내에서 공산당 조직을 창설하였으며, 블라디보스토크와 상하이 등지에서 활발한 활동을 전개하였다.[4]

박헌영의 생애[편집]

  • 박헌영의 본관은 영해(寧海), 호 이정(而丁), 충청남도 예산(禮山)에서 태어났다. 1919년 경성고보(현 경기고등학교)를 졸업하였다. 그 후 상하이(上海)로 건너가서 1921년 이르츠크파 고려공산당 상하이 지부에 입당, 그해 고려공산청년동맹 책임비서가 되었다. 1922년 1월 김단야·임원근과 함께 모스크바에서 개최된 코민테른의 극동인민대표대회에 참가하였고, 4월 국내공산당 조직을 위하여 귀국하다가 일본 경찰에 체포되어 징역 1년 6개월을 선고받고 복역하였다. 1924년 출옥 후 《동아일보》와 《조선일보》에서 기자로 활동하였으며, 그 후 1925년 4월 18일 서울에서 비밀리에 조직된 조선공산당 창립에 참가하였다. 이때 고려공산청년회를 결성하여 그 책임비서가 되었다. 1946년 12월 남조선신민당·조선인민당을 조선공산당에 흡수, 남조선노동당을 조직하였으며 초대 부위원장이 되었다. 그리고 신탁통치 지지 등 공산주의 활동을 지휘하다가, 1946년 9월부터 미군정의 지명수배를 받자, 북한으로 도피하였다. 1948년 9월 남조선노동당 당수의 자격을 지닌 채 북한의 내각 부총리 겸 외무장관이 되었다. 그러나 1950년 4월 남·북노동당이 합쳐 조선노동당으로 발족하자, 부위원장이 되어 위원장인 김일성의 밑으로 지위가 전락하였다.
  • 박헌영은 1933년 김단야와 『코뮤니티』라는 잡지를 제작하여 국내에 배포하려다가 상하이 일본 경찰에 잡혀 치안유지법과 출반법 위반으로 징역 6년을 선고받고 서대문형무소와 대전형무소에서 복역하였다. 1939년 만기 출소한 후 다시 김상룡 등을 만나 경성콤그룹을 지도하였으며, 1942년 광주로 피신하여 김성삼이라는 가명으로 공장 인부 생활을 하다가 광복 후 상경하여 김형선·이관술·김삼룡·이현상 등과 함께 조선공산당의 재건에 주력하였다. 1945년 9월 장안파를 흡수하여 조선공산당을 재건하였으며, 당 책임비서에 취임하였다. 이후 미군정 시기에 지하조직으로 활동하던 국내의 좌익 단체를 통합하여 1946년에 남조선노동당을 창당하였다. 이후 남조선노동당 부위원장에 선출되었으나 그해 7월 정판사 위조지폐 사건을 계기로 미군정이 좌익 세력에 대한 탄압을 강화하자 1948년 월북하여 북한에서 부수상 겸 외무장관을 역임하였다. 그 뒤 계속하여 북한에 머물면서 「박헌영서한」 등을 통해 남로당 활동을 지도하였다. 그 후 군사위원회 위원, 노동당 중앙위원회 부위원장 등의 직위에 있었으나 1953년 김일성에 의한 남로당계 숙청작업으로 8월 3일 체포되었다. 그 후 평안북도 철산(鐵山)에 감금되어 고문을 받다가 1955년 12월 5일 반당·종파분자·간첩방조·정부 전복음모 등 7가지 죄목으로 사형당했다.

박헌영의 공산주의 활동[편집]

  • 1921년 3월 박헌영은 고려공산청년회 상해지회의 비서가 되었다. 1921년 5월에는 김만겸 등이 이끄는 이르쿠츠크파 고려공산당에 입당하게 되었다. 이후 공산당의 열성적 조직원으로 활동하여 가장 위대한 영도자라는 별칭을 얻기도 했다. 한편 '코민테른(국제공산당)의 후원을 받아야 조선을 해방할 수 있고 조선에 소비에트정부를 수립하여 소련의 가맹공화국으로 되여야 한다'는 주장을 했다가 임시정부를 지키던 임정 내무총장 김구의 분노를 사, 눈밖에 나기도 했다고 한다.
  • 박헌영은 고려공산당이 운영하는 사회주의연구소의 직원으로도 활동하던 중 상하이로 유학온 주세죽과 결혼했다. 1921년 8월 베이징에서 열린 고려공청회 중앙총국이 결성되는데 참석했고, 곧 고려공청회 중앙집행위원으로 활동했다. 1922년 3월 박헌영은 고려공산청년회 제2차 중앙총국 회의에서, 공청회 책임비서로 선출되었다. 1922년 모스크바에서 원동인민대표자대회가 열렸을 때, 몽양 여운형, 김규식, 이동휘, 김단야 등과 함께 회의에 참석하였다. 여운형, 김규식, 김단야 등과 몽골까지 자동차로, 몽골에서는 마차와 열차로 소비에트 연방의 모스크바에 도착했다. 그는 모스크바에서 공산주의에 대한 신념을 더욱 굳히고 상하이로 돌아온 뒤, 국내에 잠입하여 '조선공산당을 조직하라'는 코민테른의 지시를 실천하기 위해 국내로 들어왔다.
  • 1922년 4월 박헌영은 김단야, 임원근 등과 함께 비밀리에 조선으로 입국하려 하였다. 그러나 국내로 귀국하기 직전 중국 안동현의 한 음식점에서 신의주 경찰서 경찰에게 체포되어 조선으로 압송되었다. 일제에 의해 곧바로 체포됐고 평양형무소에서 1년 10개월 형을 받고 복역하여 1924년 1월에야 출소할 수 있었다. 1924년 1월 출소한 뒤 곧바로 경성부에 도착, 화요회계열에서 활동하여 2월 신흥청년동맹 결성식에 참석하였다. 1924년 3월 고려공청회 중앙총국 책임비서로 재선임됐다. 1924년 4월에는 《동아일보》에 입사하여 동아일보 사원으로 활동하였고, 그 해 부인인 공산주의 운동가인 주세죽과 정식으로 결혼하였다. 조선청년총동맹 중앙검사위원으로 선임됐다. 1925년 4월 마침내 조선공산당이 비밀리에 결성에 성공하자, 그 산하조직인 고려공산청년회의 책임비서로 재선출 되었다.
  • 박헌영은 1924년 화요회 조직에 참여하였으며, 이후 조선공산당의 창당을 위한 인적, 물적 자원 조달 활동을 하였다. 동시에 비밀리에 연락을 통해 국내 공산주의자와 사회주의자와 연락, 공산당 창당 계획을 알리기도 했다. 1925년 4월 17일 김약수, 김찬(김낙준), 조봉암, 조동호, 강달영, 허정숙, 정칠성 경성 소공동의 중식 식당 아서원(雅敍園)에서 비밀리에 조선공산당의 창당하고 조직에 창당 발기인의 한 사람으로 참여하였다. 4월 17일과 4월 18일 화요회 야체이카의 대표 자격으로 참여하였고, 바로 조선공산당 중앙위원에 선출되었다. 조선공산당 책임비서에는 김재봉(金在鳳)이 임명되었으나 뒤에 박헌영이 주도권을 잡게 되었다. 이후 잇단 체포와 탄압으로 공산당의 지도자들이 옥사하거나 병사한 것 역시 박헌영이 조선공산당 내에서 지도적인 위치로 오르는 요인이 되었다. 공산당 창당 직후인 4월 말부터 그는 직접 공산당의 창당을 알리는 격문과 서신, 홍보를 지하단체를 통해 각지의 학교 및 청년단체 앞으로 배부하였다. 언론을 통해 그는 일본의 제국주의를 비난하는 성명을 언론을 발표하고 격문으로 뿌렸다.
  • 일제에 의한 다섯 번에 걸친 조선공산당 탄압 이후 당이 해체되면서, 그는 조선공산당 재건 운동을 추진했다. 1945년 8월 광복 직후 조선공산당을 재건하였다. 그러나 소련과 중화인민공화국의 지원에 힘입은 김일성이 조선공산당 북조선분국을 세웠다. 1945년 10월 조선공산당 북조선분국 설치를 놓고 김일성이 분국 설치 허용을 요청하였으나 박헌영은 당의 본부는 수도에 둔다는 점과 일국일당주의 원칙을 들어 반대하였으나 소련, 중국 측의 압력으로 허용하였다. 그 뒤 김일성은 북조선분국을 당수인 박헌영의 상의 없이 북조선로동당으로 승격시켰다. 그 뒤 1946년 김일성은 박헌영에게 당대 당의 통합으로 합당을 요구하자 그는 어쩔 수 없이 승복하여 조선로동당을 창건하면서 그가 조직한 공산당은 와해되었다.

동영상[편집]

각주[편집]

  1. 박헌영(朴憲永,1900~1955.12.5.)〉, 《두산백과》
  2. 박헌영〉, 《위키백과》
  3. 박헌영〉, 《나무위키》
  4. 박헌영〉, 《향토문화전자대전》

참고자료[편집]

같이 보기[편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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