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윤봉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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윤봉길

윤봉길(尹奉吉)은 대한제국의 대표적인 독립운동가이다.

개요[편집]

  • 윤봉길은 일제강점기의 독립운동가이다. 1932년 4월 29일 일왕의 생일날 행사장에 폭탄을 던져 일본 상하이파견군 대장 등을 즉사시키는 거사를 치르고 현장에서 체포되어 총살되었다. 충청남도 예산에서 아버지 윤황(尹璜)과 어머니 김원상(金元祥) 사이에서 태어났다(1908). 본관은 파평(坡平)이고 호는 매헌(梅軒)이다. 10세 되던 해인 1918년 덕산(德山)보통학교에 입학하였으나, 1919년에 3·1운동이 일어나자 민족정신의 영향으로 식민지 교육을 거부하고 자퇴하였다. 동생인 윤성의(尹聖儀)와 함께 한학을 공부하였고, 1921년부터는 오치서숙(烏峙書塾)에서 사서삼경 등 한문학을 계속하였다. 한문학 공부를 마치고, 1926년부터는 농민계몽·독서회운동 등 농촌사회운동을 펴나갔다.[1]
  • 윤봉길은 대한제국의 독립운동가이며 교육자·시인 겸 저술가이다. 본관은 파평(坡平)이다. 아명은 윤우의(尹禹儀), 호는 매헌(梅軒)이고, 충청남도 덕산(현 예산군) 출생이다. 홍커우 공원에 폭탄을 던진 훙커우 의거를 일으킨 독립운동가로 잘 알려져 있다. 2005년 12월 18일 매헌 윤봉길의사기념사업회는 순국 73주기를 맞아 유언 친필 사본을 공개했다. 윤의사는 거사가, 조선청년단에 대한 당부의 시, 김구 선생에 대한 존경의 시, 두 아들에게 남기는 유언 등 4편의 시를 2시간여 만에 썼다. "너희도 피가 있고 뼈가 있다면 반드시 조선을 위하여 용감한 투사가 되어라. 태극 깃발을 높이 드날리고 나의 빈 무덤 앞에 한잔 술을 부어 놓으라. 그리고 아비 없음을 슬퍼하지 말라. 사랑하는 어머니가 있으니……" 두 아들 종과 담에게 남긴 시에는 거사를 앞둔 비장한 심경과 자식과의 이별을 아쉬워하는 마음이 담겨 있다고 평가된다. 국민회의 부주석 김구는 일본에 있던 박열에게 3의사(윤봉길, 이봉창, 백정기)의 유해 발굴을 부탁하였다. 유해봉안 추진위원장을 맡은 박열은 재일동포들과 1946년 3월 6일 사형장에서 남쪽으로 3km 떨어진 가나자와(金沢)시 노다(野田)산 시영공동묘지 북측 통행로에서 윤봉길의 유해를 발굴하였다. 1946년 6월 16일 서울에 도착하여 6월 30일 국민장으로 안장되었으며 장지는 효창공원이다. 1962년 대한민국 정부는 윤봉길에게 건국훈장 대한민국장(1등급)을 추서하였다.[2]
  • 윤봉길은 대한민국의 독립유공자이자 교육자. 1932년 4월 백범 김구의 지시를 받아 상하이 홍커우 공원에서 열린 일본 천장절 및 전승 기념식에 폭탄을 투척하는 의거(義擧)를 성공시켰다. 본관은 파평 윤씨 판도공 제학공 공간공파 32대손, 호는 매헌(梅軒)이다. 1922년, 14세에 자신보다 1살 많은 배용순과 결혼했다. 슬하에 3남 1녀를 두었으나 둘째 아들 윤경과 딸 윤안순은 홍역으로 어린 나이에 죽었다. 망명 당시 첫째 아들 윤종은 고작 세 살이었으며, 셋째 아들 윤담은 아내의 뱃속에 있었다.[3]윤봉길은 대한민국 임시정부의 특무부대 한인애국단의 단원으로서 1932년 4월 29일 상하이 훙커우공원(현재 루쉰공원)에서 거행된 일본군의 상하이사변 전승기념행사에 폭탄을 투척하여 일본군 총사령관을 비롯하여 다수의 일본군을 폭살 시키는 의거를 단행함으로써 일제의 대륙침략에 타격을 가하였다. 이를 통하여 한국인들의 항일의식을 고취시켰고, 세계만방에 대한민국 임시정부 및 한국인들의 반제투쟁의지를 보여주었으며, 향후 임시정부가 중국과 연대하여 본격적인 항일투쟁에 나설 수 있는 밑거름이 되었다.
  • 윤봉길은 일제강점기 때, 한인애국단에 입단하여 훙커우공원 투탄 의거를 전개한 독립운동가이다. 본관은 파평(坡平). 본명은 윤우의(尹禹儀). 호는 매헌(梅軒). 충청남도 예산 출신. 아버지는 윤황(尹璜)이며, 어머니는 경주김씨로 김원상(金元祥)이다. 1931년 8월 대한민국임시정부가 있는 상해로 활동무대를 옮겨야 보다 큰일을 수행할 수 있을 것이라 믿고 상해로 갔다. 그는 노동조합을 조직해 새로운 활동을 모색하였고 임시정부의 김구(金九)를 찾아가 독립운동에 신명을 바칠 각오임을 호소하였다.[4] 1932년 4월 29일 일왕의 생일을 축하하는 이른바 천장절(天長節) 겸 전승축하기념식이 열린 중국 상하이 홍커우공원(지금의 루쉰공원) 행사장에 폭탄을 던져 일본 상하이파견군 사령관 등을 즉사시키는 거사를 치르고 체포되어 일본의 형무소에서 순국하였다. 윤봉길의 저술인 『농민독본』은 농민 구제와 농민 부흥의 뜻을 밝혀 민족정신과 자주·자립정신을 일깨우는 내용을 담고 있다. 본래 3권이었으나 현재 2권만이 남아 있으며 인쇄물이다.

윤봉길의 생애[편집]

  • 윤봉길은 1908년 6월 21일 충청남도 덕산군 현내면 조량리(현 예산군 덕산면 시량리 178번지 목바리마을) 광현당에서 출생하였고 지난날 한때 충청남도 예산군 예산읍 예산리에서 잠시 유아기를 보낸 적이 있는 그는 고려 시대의 명장이었던 윤관의 후손으로 아버지는 윤황(尹墴)이며, 어머니는 경주 김씨 김원상(金元祥)이다. 1911년 3월 4세 때 광현당에서 저한당으로 옮겨와 23세까지 생활하였다. 1918년 덕산보통학교(현 덕산초등학교)(德山普通學校)에 입학하였으나, 조선인이 조선말을 못 쓰고 일본말을 써야 하는 것과 교장이 일본인인 것에 불만이 많았고, 게다가 다음 해에 3·1운동이 일어나자 이에 자극을 받아 일본말을 배우는 것과 일본인 교장 밑에서 교육을 받는 식의 식민지 노예 교육을 배격하면서 부모님 앞에서 학교를 자퇴할 것을 선언하였고, 그렇게 학교를 그만두었다. 대신 최병대(崔秉大) 문하에서 동생 윤성의(尹聖儀)와 함께 한학을 공부하였으며, 1921년 유학자인 매곡 성주록(成周錄)의 서당 오치서숙(烏峙書塾)에 들어가 그의 문하생이 되었다. 오치서숙에서 윤봉길은 사서삼경 등 중국 고전을 두루 익혔다. 1922년 15세에 성주 배씨 배용순(裵用順)하고 결혼하였다. 학업 성적이 우수하여 1923년 16세에 오치서숙 춘추 시회에서 장원을 하기도 했다. 1926년 윤봉길은 매헌(梅軒)이라는 아호를 얻었다. 1928년 18세 되던 해에는 시집 <오추>(嗚推), <옥수>(玉睡), <임추>(壬椎) 등을 발간하였다. 1929년 오치서숙을 졸업, 한학수업을 마쳤다.
  • 윤봉길은 농민계몽을 위해 《농민독본(農民讀本)》이란 교재를 집필하여 야학회를 조직, 학교에 다니지 못하는 농촌의 불우한 청소년을 가르쳤다. 농촌의 발전을 위해 '부흥원(復興院)'이란 단체를 설립하여(1929), 농촌 부흥운동을 본격적으로 추진하였다. 1929년 2월 18일 부흥원 주관으로 학예회를 열고, 촌극인 '토끼와 여우'를 공연하였는데, 농촌에서 문화활동이 많지 않던 당시여서 관람객이 매우 많이 모여 성공리에 마쳤다. 이것이 원인이 되어 일본 경찰의 주목을 받게 되었다. 그러나 그 후에도 농촌활동을 계속하였고, '월진회(月進會)'라는 농민단체를 만들어 회장에 추대되었고, 이를 기반으로 농촌자활운동을 펴나갔다. 또한 건강한 신체 위에서 농촌의 발전과 민족독립정신이 길러질 수 있다는 신념으로 '수암체육회(修巖體育會)'를 조직하여 농민들의 건강증진활동도 이끌어 나갔다.
  • 윤봉길은 조국을 위해 목숨을 바쳐 무엇인가 큰일을 해야겠다는 신념으로, '장부(丈夫)가 집을 나가 살아 돌아오지 않겠다.'는 내용의 편지를 남기고 만주로 떠났다(1930. 3. 6). 이 정보를 입수한 일본 경찰이 미행을 하여, 평안도 선천(宣川)에서 체포되어 45일간의 옥고를 치렀다. 출옥 후 만주로 망명하였고, 만주에서 같은 길을 걷는 김태식(金泰植), 한일진(韓一眞) 등을 만나 함께 독립운동을 결의하였다. 윤봉길은 대한민국임시정부에 가야 성공적인 독립운동을 추진할 수 있을 것으로 판단하고, 상하이로 향했다. 혼자 랴오둥 반도의 남단에 있는 다롄(大連)을 거쳐 산둥(山東)반도에 있는 칭다오(靑島)로 건너가 그곳에서 일을 하면서 돈을 모으고 독립운동할 곳을 물색하기도 하였다. 결국 1931년 8월 임시정부가 있는 상하이에 도착하였다. 그리고 상하이의 대한민국 임시정부의 지도자인 김구(金九)를 찾아가 그의 뜻을 말하고 조국의 독립을 위해 몸과 마음을 바칠 것을 다짐하였다. 3·1운동 이후 독립운동의 거점이 중국으로 옮겨지면서 항일운동은 주로 중국, 만주에서 진행되었으며, 대한민국임시정부를 중심으로 한 지원과 안내를 받아 조직적으로 움직였는데, 윤봉길도 그 가운데 한 사람이다.
  • 일본은 1932년 자작극인 일본 승려 살해사건을 이유로 상하이사변을 일으켰고, 시라카와(白川義則) 대장의 지휘하에 전쟁에서 승리하였다. 이에 일본군은 일왕의 생일축일인 천장절(天長節)과 전쟁 승리 두 가지를 축하하는 기념식을 갖기로 하였다. 윤봉길은 이 기회를 택하여 기념식장에서 거사를 하기로 결심하였다. 그리하여 1932년 4월 26일 한인애국단에 입단하여 김구를 비롯한 이동녕(李東寧), 이시영(李始榮), 조소앙(趙素昻) 등 지도자들과 협의하여 거사를 구상하였다. 윤봉길은 야채상으로 가장하여 미리 기념식에 대한 정확한 정보를 입수하고, 기념식장에서 투척할 수류탄도 제조하였다. 폭탄 제조 전문가인 김홍일(金弘一)의 도움을 받았다. 1932년 4월 29일 윤봉길은 폭탄(저격용 물통 모양의 폭탄 1개, 자결용 도시락 모양의 폭탄 1개)을 감추고 식장에 입장하였다. 그리고 식이 한참 진행 중일 때 식장으로 다가가 수류탄을 던졌다. 이 폭발로 일본군 대장 시라카와 요시노리(白川義則)와 일본인 거류민단장 가와바타 테이지(河端貞次)는 즉사하였고, 제3함대 사령관 노무라 기치사부로(野村吉三郞) 중장과 제9사단장 우에다 겐키치(植田謙吉) 중장, 주중공사 시게미쓰 마모루(重光癸) 등이 중상을 입었다. 윤봉길은 현장에서 일본군에 체포되었고, 일본 군법회의에서 사형을 선고받았고 25세의 젊은 나이에 순국하였다. 이 사건은 중국 등 세계에 알려졌고, 중국의 지도자 장제스는 '중국 100만 대군도 하지 못한 일을 조선의 한 청년이 해냈다.'고 격찬하였다. 1962년 건국훈장 대한민국장이 추서되었다.

윤봉길의 상훈[편집]

  • 윤봉길은 1932년 일본에서 총살된 후 표식도 없이 매장되었다. 해방 후 유해봉안추진위원회의 주도로 1946년 3월 6일 사형장에서 남쪽으로 3㎞ 떨어진 가나자와(金澤)시 노다(野田)산 시영공동묘지 북측 통행로에서 윤봉길의 유해를 발굴하여 서울특별시 효창동의 효창공원에 국민장으로 안장하였다. 1963년 대한민국 정부는 윤봉길의 공적을 기려 건국훈장 대한민국장을 추서하였다. 1968년 윤봉길의 고향인 예산군 덕산면에 충의사가 세워졌으며, 1972년 생가와 고택 및 충의사경역이 예산 윤봉길 의사 유적이란 명칭으로 사적 제229호로 지정되었다. 1987년 윤봉길 의거 55주년을 기념해 국민 성금을 모아 서울특별시 서초구 양재동 양재 시민의 숲에 매헌기념관을 세웠다. 홍커우공원 폭탄 투척 사건이 있었던 중국 상하이 홍커우 공원(루쉰공원)에도 기념관 매정(梅亭)이 있다.

예산 윤봉길 의사 유적[편집]

  • 예산 윤봉길 의사 유적(禮山 尹奉吉 義士 遺蹟)은 충청남도 예산군 덕산면 시량리에 있는 독립투사 윤봉길이 태어나 농촌운동을 벌였던 사적지이다. 1972년 10월 14일 사적으로 지정되었다. 면적은 147,072㎡이고, 건조연대는 1908∼1930년이다. 생가, 생장가, 부흥원(復興院), 충의사(忠義祠), 윤봉길의사기념관 등으로 이루어져 있다. 생가는 시량리 178번지의 남향으로 앉은 아담한 초가인데 잘 보존되어 있으며, 집 뒤에 윤의사가 심은 은행나무 한 그루가 자라고 있다. 윤의사는 4세까지 생가에서 자라고, 같은 마을 139번지의 초가로 이사하여 1930년 2월 7일 23세 때 광복의 뜻을 품고 고국을 떠날 때까지 이 집에서 공부하고 혼인하였으며, 부흥원을 지어 야학을 열고 농촌계몽운동을 했다.
  • 충의사(忠義祠)는 예산 윤봉길 의사 유적 내에 있는 사당이다. 윤봉길의사기념관에는 유물 56점이 전시되어 있으며, 윤봉길의 짧은 삶을 매직비전, 각종 영상, 디오라마 등으로 연출하여 보여주고 있다. 해마다 4월 27~29일에는 윤봉길의 애국과 충의 정신을 기리기 위하여 매헌문화제를 개최하고 있다.

윤봉길의사기념관[편집]

  • 윤봉길의사기념관(尹奉吉義士記念館)은 충청남도 예산군 덕산면 시량리에 있는 윤봉길의 독립운동 행적을 알리고 유물을 보관·전시하는 전시관이다. 충청남도 예산군 덕산면 시량리에 있는 윤봉길(尹奉吉:1908~1932)의 사적지 충의사에 자리한다. 1,411.57m²의 한옥 전시관으로, 2001년 12월 22일 건립되었다. 보물 제568호로 지정되어 있는 의거 당시 소지했던 지갑, 중국 화폐, 회중시계, 도장을 비롯해 의거에 사용된 물통형 폭탄과 자결용으로 준비했던 도시락형 폭탄 등 28종 56점의 유물도 함께 전시하고 있다.

동영상[편집]

각주[편집]

  1. 윤봉길(尹奉吉)〉, 《두산백과》
  2. 윤봉길〉, 《위키백과》
  3. 윤봉길〉, 《나무위키》
  4. 윤봉길(尹奉吉)〉, 《한국민족문화대백과사전》

참고자료[편집]

같이 보기[편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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