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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충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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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충헌(崔忠獻)은 고려 무신정권의 제5대 집권자이자 최씨 정권 초대 수장이다. 본관은 우봉 최씨이고, 초명은 최난(崔鸞)이다.

개요[편집]

  • 최충헌은 고려 시대 중기 ~ 후기의 무신이자 군인, 정치인이다. 최씨 정권의 첫 번째 지도자이다. 본관은 우봉(牛峰)이며 초명은 최난(崔鸞)이고 시호는 경성(景成)이다. 1196년부터 1219년까지 23년 동안 고려 왕조의 실권을 맡았다. 최씨 정권을 연 첫 권력자이자 장군이다. 강종의 서녀사위이자 고종의 서매부이고, 원종에게는 고모부이자 처외증조부가 된다. 정순왕후의 외증조부이자 충렬왕의 외외고조부였다. 또한 수성택주 임씨와 사위 임효명(이칭 임효순)을 통해 의종, 명종, 신종의 모후 공예왕후와도 사돈이 된다.[1]
  • 최충헌은 고려 최고위 무관직인 상장군을 역임한 최원호의 아들로 그의 외조부인 유정선도 상장군을 지낸 전형적인 무인 가문 출신이다. 하지만 문신이 득세하던 시절이라 당시 부친의 뜻에 따라 글을 배워 처음에는 음서로 문관 벼슬에 진출했다. 문관이 된 후 양온령에 임명되었으며 성릉직, 위위주부 등을 거쳤다가 스스로 도필리가 되는 것을 부끄럽게 여겨 흥위위, 보승, 산원으로 옮겼다. 1170년 8월 무신정변이 일어나자 문관에서 무관으로 빠르게 탈바꿈했으며, 제19대 명종 4년인 1174년 서경유수 조위총의 난이 일어났을 때부터 출세 코스를 타게 되는데 당시 무신정변에 동참한 공로로 권력을 얻었던 부원수 기탁성에게 발탁되어 별초 도령이 되었고, 전투에서 큰 공을 세워 흥위위 별장으로 승진했다. 1176년 지안동부사부사(知安東府事副使)에 임명되면서 서리들에게 엄하면서도 백성들에게 관대하여 찰방사가 그 공이 으뜸이라 보고했으며 임기가 끝나자 1180년 응양부 섭[낭장, 1181년 응양부 낭장에 임명되었다. 하지만 승진가도를 달리던 그의 관직 승진 속도는 이의민 집권기부터 쭈욱 줄어든다. 1187년 경상진주도 안찰사에 임명되었다가 이의민의 뜻에 거슬려 탄핵을 받아 임기를 마치지 못하고 용호군 섭중낭장에 임명되었다가 1188년 용호군 중낭장이 되었다. 1193년 감문위 중랑장, 감문위 차장군이 되었다가 1194년 감문위 섭장군이 되었다. 10년도 채 안 되어서 낭장까지 오르다가 중랑장으로 가는 속도가 꽤나 오래 걸렸고, 이후에는 섭장군에 머무르는 것만 보더라도 이의민 집권기 때 그가 철저하게 승진 인사에서 배제되었음을 알 수 있다. [2]
  • 최충헌은 고려 후기, 무신 집정 이의민을 제거하고 무신 정권의 최고 권력자가 되어 교정별감(敎定別監)을 역임한 무신이다. 본관은 우봉(牛峰). 초명은 최란(崔鸞). 아버지는 상장군(上將軍) 최원호(崔元浩)이다. 상장군 송청(宋淸)의 딸 송씨(宋氏) 부인에게서 장남 최이(崔怡: 초명은 최우(崔瑀))와 차남 최향(崔珦)을 낳았고, 강종(康宗)의 서녀(庶女) 정화택주(靜和宅主) 왕씨(王氏) 부인에게서 아들 최구(崔球)를 낳았으며, 첩으로는 수성택주(綏成宅主) 임씨(任氏)와 자운선(紫雲仙)이 있었다. 처음에 음보(蔭補)로 양온령(良醞令)이 되었다가, 1174년(명종 4) 조위총(趙位寵)의 저항 때 원수(元帥) 기탁성(奇卓誠)의 휘하에서 용감히 싸워 별초도령(別抄都令)에 발탁되었으며, 뒤이어 섭장군(攝將軍)에 올랐다. 권력을 장악한 최충헌은 왕의 측근 50명을 추방한 뒤 좌승선(左承宣)을 거쳐 지어사대사(知御史臺事)가 되었다. 1197년(명종 27)에는 충성좌리공신(忠誠佐理功臣)에 봉해졌고, 아버지 최원호에게는 봉의찬덕공신수태위문하시랑(奉議贊德功臣守太尉門下侍郞)을 내렸다. 그해 9월에 명종이 '봉사십조'를 이행하지 않고 국고를 낭비한다는 핑계로 왕을 창락궁(昌樂宮)에 유폐한 뒤 그의 아우 평량공(平凉公) 왕민(王旼)을 새로운 왕[神宗]으로 추대하였다. 1212년(강종 1)에는 흥녕부를 고쳐 진강부(晉康府)라 하였고, 자신은 문경무위향리조안공신(文經武緯嚮里措安功臣)에 봉해졌다. 1214년(고종 1)에 최충헌의 처 임씨(任氏)는 수성택주(綬成宅主), 왕씨(王氏)는 정화택주(靜和宅主)가 되었다. 1218년(고종 5)에 나이 70세가 되어 궤장(几杖)이 하사되었고, 1219년(고종 6)에는 고종이 왕씨(王氏) 성을 내려 주기도 하였다.[3]
  • 최충헌은 1149년(의종 3)부터 1219년(고종 6)까지 생존했던 무신으로서 정권을 장악하여 이후 4대 60년 동안 이어진 최씨 무신집권기를 열었던 인물이다. 그는 20여 년 동안 집권하면서 네 명의 국왕을 갈아치웠다. 스스로 중서령(中書令)이라는 고려 최고위의 관직과 진강공(晉康公)이라는 최고위 작위까지 취하였고, 자신의 거처인 흥덕궁(興德宮)을 왕궁에 못지않은 규모로 꾸미고서 거기에 진강부(晉康府)라는 관부를 개설하여 정사를 오로지하였으며, 진주(晋州)를 식읍으로 차지하는 등 정치적, 경제적으로 국왕을 능가하는 권위를 차지하였다. 또한 그의 사후에는 그 지위가 최우(崔瑀), 최항[중기](崔沆), 최의(崔竩) 등 그의 가문으로 이어졌다. 1209년 학자 이규보를 발탁, 무신정권으로 피폐해진 문운(文運)을 재흥시키려고 힘썼는데, 청교역(靑郊驛)의 관리들의 자기네 부자살해 미수사건이 생기자 영은관에 교정도감(敎定都監)을 설치, 실질적인 무인정권의 중앙기관으로서 국정 전반을 감독케 했다. 본부인이 있는 상태에서 강종의 서녀인 왕씨와 결혼하여 부마의 직책까지 겸했다. 사후 조선에서 쓴 고려사, 고려사절요에 의해 반역자로 격하당했다.

쿠테타와 이의민 제거[편집]

  • 최충헌은 1196년(명종 26) 음력 4월 8일, 아우 최충수와 이지영(李至榮)과의 사감(私憾)이 동기가 되어, 최충수의 권유로 먼저 당시 정권을 잡고 있던 이의민을 미타산에 있는 그의 별장(別莊)을 습격하여 죽인 뒤에 그 머리를 저자에 효수케 하는 한편 군사를 모아, 이의민의 아들 지순(至純)·지광(至光)이 거느린 가병을 물리치고는 명종을 움직여 이의민의 삼족과 그 일당을 모조리 잡아 죽였다. 그의 숙청 공작은 자못 철저하여 그를 제거하려던 승려들의 반란이 있자 평장사 권절평(權節平)·손석(孫碩)·대장군 이경유(李景儒) 등과 참지정사 이인성(李仁成)·상장군 강제(康濟)·승선 문적 등 36명이 딴 뜻을 품고 있다 하여 3월을 전후해서 모두 잡아 인은관에 유폐한 뒤 죽였고, 또 이의민 시기의 무인 실력자였던 두경승을 숙청한 뒤 판위위사(判衛尉使) 최광원(崔光遠)·소경(小卿) 권신(權信)·장군 권식(權湜)·두응룡(杜應龍) 등을 귀양 보냈다.
  • 최충헌은 두경승의 사위인 장군 류삼백을 매수하여 두경승을 유인한 뒤 체포하여 자연도로 유배를 보낸다. 1197년 9월 최충헌은 왕을 폐하려 저잣거리에 병사를 다스려 정돈하며 의논할 일을 맡긴다며 류삼백을 시켜 두경승을 유인하여 체포, 두경승은 자연도(紫燕島)에 유배했고, 두경승의 사위 장군 류삼백(柳森栢)을 반역을 한다고 의심하여 스스로 목찔러 죽게 했으며, 류삼백의 부친 류득의(柳得義)는 남쪽 변방에 류배했다. 고려사에 의하면 두경승은 섬에 있으며 근심하고 분해 피 토하고 졸했는데 혹 이르길 두경승은 금이 있어 그 종이 훔치려 몰래 독살했다 했다. 최충헌은 정적을 제거한 뒤에 명종에게 10조목의 봉사(奉事)를 올려(봉사십조), 그릇된 정치의 시정과 함께 임금의 반성을 촉구하였다. 이 봉사는 당시의 폐단을 적절히 나타낸 것으로서 그의 이런 정치적인 식견은 정중부·이의방·이의민 등에게서는 찾아볼 수 없었다. 그가 군웅을 물리치고 오랫동안 정권을 장악할 수 있었음도 이런 장점을 지녔기 때문이었다.

최충헌의 집권[편집]

  • 최충헌은 명종의 측근을 몰아내고 좌승선(左承宣)과 어사대지사(御史臺知事)를 겸하였으며, 1197년(명종 27) 충성좌리공신(忠誠佐理功臣)에 봉해졌다. 그러나 왕이 봉사십조를 이행하지 않고 최충헌의 신변을 위협하게 되자 창락궁에 유폐시키고, 평량공(平凉公) 민(旼)을 옹립하니, 그가 신종이다. 이에 최충헌은 임금에게 말하여 다시 명종 때의 근신을 모두 내쫓아 정권은 완전히 최씨 일가에서 독차지하게 되었고, 정국공신 삼한대광대중대부 상장군주국에 책봉되었다. 최충수가 그의 딸을 태자(뒷날의 희종)의 비로 삼으려 임금에게 강요하고 태자의 본비를 내보내므로 그는 이에 반대하여, 드디어 무력 충돌에까지 이르러 최충수를 살해하였다. 이는 신종이 옹립된 다음 달의 일인데, 이로써 본래는 그의 아우 충수와 나누어 가졌던 군국(軍國)의 대권을 독점하기에 이르렀다.
  • 1204년 신종에게 강제로 양위를 강요하여 태자(희종)에게 왕위를 양위케 하였고, 최충헌은 문하시랑동중서, 문하평장사, 상장군상주국, 병부어대판사, 태자태사 등에 책봉되었다. 희종은 그를 신하의 예로서 대하지 않고, 은문상국(恩門相國)이라 하였다. 얼마 뒤에 문하시중 진강후(晋康候)가 되었으며, 진강군(晋康郡)을 식읍으로 받았다. 1209년 학자 이규보를 발탁하여 무신정권으로 피폐해진 문화를 중흥시키려고 힘썼다. 1209년 4월 청교역(靑郊驛)의 관리들의 최씨 부자 살해 미수 사건이 생기자 영은관에 교정도감을 설치하여 혐의자를 색출하기도 하였는데, 실질적인 무인정권의 중앙기관으로서 국정 전반을 감독케 했다. 이 도감은 뒤에 최씨 일문이 무단정치를 함에 한동안 일본의 막부와 같은 구실을 하였다.
  • 1211년 희종이 그의 권세에 눌려 항상 불안한 생활을 하자 내시 왕준명이 중심이 되어 참지정사 우승경(于承慶)·장군 왕익(王翊) 등과 함께 그를 꾀어 죽이려 했으나 실패하였다. 그 뒤, 희종과 태자를 폐하고, 명종의 아들인 한남공 정(貞)을 옹립하여 즉위시켰다. 1212년 그의 식읍이 진강부로 변경됨과 동시에 공신[8]에 책봉되고, 1213년 강종이 왕위에 즉위한 지 3년 만에 죽자, 태자 진(瞋)을 세우니 이가 곧 고종이다. 1217년 다시 자신을 암살하려는 흥왕사 승려들의 음모를 적발·처형하였다. 최충헌은 일생 중에 신종·희종·강종·고종의 네 임금을 자기 마음대로 행함으로써 최씨 집권의 기반을 확고히 하였다.

최충헌에 대한 평가[편집]

  • 최충헌이 이의민과 그 여당(與黨)을 제거하여 집권할 수 있었던 것은 명종 대의 정치적 불안과 지방 사회의 계속된 저항에 따른 사회적 분위기 때문이었다. 최충헌은 사회 분위기를 쇄신하기 위하여 '봉사십조'를 제시하였다. 안으로는 명종 대의 잦은 정변에 따른 무신 세력들의 이합집산을 불식시켜 정권을 안정시키고, 밖으로는 지방 사회의 동요를 무마하려는 목적에서였다. 그러나 최충헌 정권 역시 이전 시기 무신 정권의 연장선상에서 이루어졌던 것으로 그 자체가 새로운 수탈자의 면모를 보여 주었다.
  • 경주를 중심으로 한 저항은 왕조 자체를 부정한 '신라부흥운동(新羅復興運動)'이라는 점에서 집권 무신 세력과 일반 지배층에게는 큰 충격이었고 최충헌의 정권 유지에도 중요한 걸림돌이었다. 따라서 그들은 경주 지역에 대한 강경 진압 이후 이전의 무신 정권보다 더욱 강력한 지배 구조를 구축하였다. 그 결과 지방 사회의 저항은 희종 대 이후 점차 위축될 수밖에 없었다. 최충헌 정권은 정권 유지를 확고하게 하려고 지배 기구를 재편하였는데, 그 일환이 교정도감 · 서방(書房) · 정방(政房) · 도방 · 가병(家兵) 등과 같은 사적 지배 기구의 확대였다. 이러한 기구들은 국가 권력의 유지보다는 최충헌 정권 자신의 영달이 우선적인 목적이었다. 최충헌은 기존의 관료 체제를 무력화시켜 1인 독재의 틀을 구축함에 따라 많은 인적 · 물적 토대가 필요하였다.

동영상[편집]

각주[편집]

  1. 최충헌〉, 《위키백과》
  2. 최충헌〉, 《나무위키》
  3. 최충헌(崔忠獻)〉, 《한국민족문화대백과사전》

참고자료[편집]

같이 보기[편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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