검수요청.png검수요청.png

푸이

위키원
Jinshi2068 (토론 | 기여)님의 2024년 12월 5일 (목) 15:07 판 (새 문서: 썸네일|250픽셀|'''푸이''' '''푸이'''<!--선통제-->(중국어:溥仪{{발음|溥仪}})는 중국 청(淸)의 마지막 황제인 선통제(宣統帝)...)
(차이) ← 이전 판 | 최신판 (차이) | 다음 판 → (차이)
이동: 둘러보기, 검색
푸이

푸이(중국어:溥仪pǔ yí)는 중국 청(淸)의 마지막 황제인 선통제(宣統帝)이다.

개요[편집]

푸이는 아이신 교로 푸이(爱新觉罗溥仪 1906년 2월 7일 ~ 1967년 10월 17일)는 청나라의 마지막 황제이다. 만주국 집정으로는 대동왕(大同王), 황제로는 강덕제(康德帝)이며 중화인민공화국에서 중국인민정치협상회의의 전국위원을 지내기도 했다. 중국 역사상 마지막 황제로 널리 알려져 있고 도광제의 증손자이다. 민제(愍帝), 양제(襄帝), 손제(遜帝), 폐제(廢帝), 말제(末帝)로 불리기도 한다. [1]

생애[편집]

푸이는 1906년 청나라 제11대 황제인 광서제의 동생 순친왕 재풍(載灃)과 서태후의 측근인 대학사 겸 군기대신 영록(榮祿)의 딸 유란의 아들로 순친왕부에서 태어났다. 1908년 3살의 나이로 청의 12대 황제가 되었지만 1912년 신해혁명으로 퇴위했다. 1934년 일본에 의해 만주국의 황제가 되었으나 일본의 패전으로 소련에 체포되었다가 중국으로 송환되었다.

푸이(溥儀)는 중국 청의 마지막 황제인 선통제의 이름이다. 본래 이름은 '아이신줴뤄 푸이(愛新覺羅 簿儀)'이며, 광서제(光緖帝)의 이복동생인 순친왕(醇親王) 재풍(載豊)의 아들이다. 1908년 10월 서태후(西太后)는 동치제(同治帝)와 광서제의 뒤를 잇기 위해 푸이에게 제위를 잇게 하겠다는 교서를 발표했고, 그해 11월 14일 광서제가 죽자 푸이는 3살의 나이로 청의 12대 황제가 되었다. 연호는 '선통(宣統)'이라 했으며, 아버지인 순친왕과 광서제의 황후인 융유황태후(隆裕皇太后)가 섭정했다. 순친왕은 황족이 절대다수로 구성된 내각을 구성하여 황족 중심의 집권화를 도모했다.

1911년 신해혁명이 일어났고, 혁명의 진압 과정에서 위안스카이(袁世凱)가 청 조정의 정치와 군사의 실권을 장악했다. 위안스카이는 난징(南京)에 쑨원(孫文)을 임시대총통으로 하여 수립된 중화민국(中華民國) 임시정부와 협상을 진행했다. 그리고 청을 물러나게 하고 공화정을 선포하는 대신 총통 자리를 물려준다는 쑨원의 약속을 받고, 북부의 군벌들을 동원해 공화정을 선포하도록 청 왕조를 압박했다. 결국 1912년 2월 12일 융유황태후가 푸이를 대신해 퇴위 조서를 반포했고, 3월 10일 위안스카이가 베이징(北京)에서 중화민국 제2대 임시 대총통으로 취임했다. 이로써 청 왕조는 멸망했고, 푸이는 중국의 마지막 황제가 되었다.

푸이는 퇴위 후에도 쯔진청(紫禁城)에서 생활했다. 1916년 위안스카이가 죽은 후 그의 직할 부대였던 베이양(北洋) 군벌은 안후이(安徽)파와 즈리(直隷)파, 펑톈(奉天)파 등으로 나뉘어 파벌 갈등을 일으켰다. 이러한 혼란을 이용해 1917년 6월 안후이 독군(督軍) 장쉰(張勛)은 캉유웨이(康有爲) 등의 보황당(保皇黨) 일파와 함께 청의 부활을 추진하는 복고적 정변을 일으켰다. 장쉰은 군대를 이끌고 베이징에 입성하여 위안스카이의 총통 자리를 계승한 리위안훙(黎元洪)을 퇴진시키고 푸이의 복벽(復辟)을 선언했다. 그러나 돤치루이(段棋瑞)가 공화정을 유지한다는 명목으로 장쉰을 제거하면서 푸이는 다시 퇴위를 선포했다.

1924년 즈리파와 펑톈파 군벌 사이에 일어난 제2차 펑톈즈리전쟁 당시 푸이는 베이징을 점령한 펑위샹(馮玉祥)에 의해 쯔진청에서 쫓겨났다. 순친왕 재풍의 거처로 옮겼다가 다시 일본 공사관으로 도피했다. 그리고 일본인에 의해 톈진[天津]으로 호송되어 일본 조계(租界)에 머물렀다. 1931년 9월 일본 관동군(關東軍)은 만주전쟁을 일으켜 중국 북동부를 점령했으며, 1932년 3월 1일 만주국을 세워 푸이에게 집정(執政)을 요구했다. 수도는 신징(新京, 지금의 吉林省 長春), 연호는 '대동(大同)'이라 했다. 1934년 3월에는 제정(帝政)을 선포하고 연호를 '강덕(康德)'으로 고쳤다. 푸이는 만주국의 황제가 되었고, 중국인 총리와 각부대신과 함께했지만, 만주국의 모든 실권은 일본의 관동군 사령관이 장악하고 있었다.

1945년 8월 소련의 참전으로 일본 관동군이 괴멸하자 곳곳에서 민중반란이 일어나 만주국은 붕괴되었다. 푸이는 8월 17일 선양(瀋陽)에서 소련군에 체포되어 전범으로 하바롭스크(Khabarovsk)에 억류되었다. 1946년 극동국제군사재판 때 증인으로 출두했으며, 1950년 8월 초 중국으로 압송되어 푸순(撫順) 전범관리소에 수감되었다. 1959년 12월 4일 국가 주석 류샤오치의 전범에 대한 특사령을 받아서 12월 9일 푸이는 모범수로 사면되었다. 푸이와 함께 수용소에 수감되었던 동생 푸계도 1960년 11월 20일 석방되었다. 1960년 1월 26일 중난하이에서 푸이는 총리 저우언라이와 회담하여, 석방 이후의 장래에 관하여 대화하였다. 일반 시민의 생활에 익숙해지기 위한 목적으로 저우언라이의 추천을 받아서 중국과학원이 운영하는 베이징 식물원의 정원사로 근무하게 된다. 이후 정협 제4기 전국정치협상회의 문사연구위원회(文史硏究委員會)의 전문위원이 되어서 문사 자료를 연구한다.

1962년 푸이는 저우언라이의 배려로 한족 출신의 간호사 리수셴와 재혼한다. 리수셴은 푸이의 말년을 함께 하지만 자녀를 갖지는 못했다. 1964년 다민족국가가 된 중화인민공화국에서 만주족과 한족 사이의 조화를 목적으로 저우언라이에 의해서 만주족을 대표하여 중국인민정치협상회의 전국위원으로 선출되었다. 저우언라이는 푸이에 대해서 항상 동정적이었다.

1966년 문화대혁명 시절에 푸이는 암에 걸리지만, 청조 황제라는 반혁명적 출신 때문에 홍위병의 공격을 염려한 다수의 병원이 그의 입원을 거부하였다. 저우언라이의 지시로 베이징 내의 북경 반제 병원(현, 베이징 협화의원에 입원하지만, 푸이는 이미 입원할 때부터 암이 말기로 진행된 상태였다. 1967년 10월 17일 새벽 2시 30분, 베이징에서 신장암과 심장병으로 사망한다.

푸이의 유해는 중화인민공화국의 법에 따라 화장되어 베이징 교외의 바바오산 혁명공동묘지에 매장된다. 1995년 허베이 성 이셴의 청조 역대 황제의 능묘인 청서릉 근처의 민간 묘지 '화룡황원(華龍皇園)'의 경영자가 리수셴에게 푸이의 묘를 조성하는 것을 제안하였고, 이에 동의한 리수셴은 푸이의 유골을 동 묘지로 이장하였다. 이후 푸이의 묘 곁에 완룽과 탄위링의 묘도 조성되었지만, 완룽의 유골이 발견되지 않아서 유품을 묻었다. 중국 정부는 손제(遜帝)라는 칭호만 인정한다.

퇴위와 청 멸망[편집]

1909년 순친왕은 형인 광서제를 배반하고 무술변법을 실패하게 만든 북양대신 겸 직례총독 위안스카이를 실각시키고, 위안스카이는 하남성(河南省) 창덕(彰德)에 칩거한다. 1911년 10월 10일 신해혁명의 시발점이 된 우창 봉기가 발생하자 위안스카이는 이를 진압한다는 명목으로 정계에 복귀했다. 청 조정은 위안스카이의 요구대로 위안스카이를 총리대신에 임명하였고, 순친왕은 섭정에서 물러나야 했다. 위안스카이는 쑨원으로부터 난징 임시정부(중화민국) 임시 대총통의 지위를 양보하겠다는 밀약을 받고 적극적으로 청 왕조 타도에 나섰다.

1912년 1월 16일 위안스카이는 융유 황태후(隆裕皇太后, 1868년 ~ 1913년)에게 공화정을 수용하라는 협박을 하였고 황족회의에서는 찬반 양론이 격렬하게 대립하였다. 선기와 푸웨이(溥偉)는 푸이의 퇴위에 격렬하게 반대했지만 황태후는 황제의 퇴위에 찬성하였다. 1월 30일 내각에 공화정 선포를 준비하라는 지시가 내려졌다. 2월 3일 청 황실은 위안스카이에게 전권을 부여하고 난징 임시정부 측과 퇴위 조건에 관한 구체적인 협상을 하게 했다. 2월 9일 황제에 대한 퇴위 후 우대 조항 8개 조가 확정된다. 2월 11일 황태후가 황실 우대 조건을 받아들였고, 2월 12일 자금성 양심전(養心殿)에서 마지막 조회(朝會)가 열렸다. 황태후는 공화국체제의 도입을 위하여 황실의 통치권을 포기하며 만한몽회장(滿漢蒙回藏)의 5족으로 중화민국을 구성한다는 뜻을 담은 퇴위 조서를 공표하게 했다. 이로써 푸이는 황제에서 퇴위하였고 286년간 중국을 통치한 청나라 황조는 공식적으로 멸망했다.

숙친왕은 일본 조차지인 뤼순(旅順)에서, 공친왕은 독일 조차지인 칭다오에서 복벽운동을 전개한다. 청 조정과 중화민국 정부의 협의에 따라 자금성은 건청문 광장을 경계로 하여 외조(外朝)의 삼대전과 문화, 무영 등의 전각은 중화민국 정부의 소유가 되었고, 내정(內廷)의 후삼궁과 동쪽과 서쪽에 있는 육궁 등은 청 조정이 소유하는 것으로 결정되었다.

만주국[편집]

푸이는 1934년 3월 1일에 만주국 황제에 즉위하여 강덕제가 되었다. 푸이의 황제 즉위에 아울러 국명도 만주 제국으로 불리는 것이 많아졌다. 연호도 '강덕(康德)'으로 변경되었다. 만주국 측에야는 당초는 '계운(啓運)'으로 예정하고 있었지만, 관동군의 간섭에 의해서 변경하였다. 동시에 자금성 시절부터의 내무부 대신이었으며 푸이와 일본 관동군과의 사이를 주선한 정샤오쉬가 국무원 총리로 취임했다. 만주국 정부에서는 이것은 청조의 복벽을 의미하지 않는다는 취지의 성명이 나와 있었다.

푸이의 황궁은 집정 당시와 같이 만주국의 수도의 신징 중심부에 있었다. 당초 푸이 부부는 집정부의 집희루(緝煕樓)에서 살고 있었지만, 황궁으로의 위엄이 부족하다고 생각한 만주국 정부에 의해서 1938년 새롭게 동덕전(同德殿)이 황궁으로서 지어졌다. 그러나 관동군에 의한 도청을 경계해 푸이 자신은 한 번도 황궁으로 이용하지 않았다.

푸이가 황제로 즉위한 4년 후인 1937년 7월 7일 베이징의 루거우차오에서 일어난 발포 사건을 계기로서 일본군과 중국군 사이에서 중일 전쟁이 발발했다. 내전 상태에 있던 국민당과 공산당은 일본군에 대항하기 위한 항일 민족 통일 전선인 제2차 국공합작을 구축했다. 1941년 12월 7일 태평양 전쟁의 개전에 의해서 일본이 연합국과 교전 상태에 들어가면서 만주국도 일본과 아울러 연합국 각국에 대해 선전포고를 하여 사실상 추축국의 일원으로 제2차 세계대전에 참전하게 되었다. 그러나 전투 지역으로부터 떨어져 있었고 만주국의 종주국인 일본과 소비에트 사회주의 연방공화국과의 사이에 <일소중립조약>이 존재하여 만주국은 국민당과 공산당에 의한 게릴라 공격이 자주 행해지고 있었지만 평정이 계속되었다. 일본군은 1944년 가을에 들어가면서 각 전선에서 점차 패퇴하기 시작하였다. 일본은 1945년 8월 15일 연합국에 대해 항복을 선언한다. 8월 17일 총리대신 장징후이의 주재로 열린 국무원 회의에서 만주국의 해체를 결정하고, 8월 18일 푸이는 퇴위의 조칙을 읽어내려 만주국은 탄생한지 13년 만에 멸망한다.

푸이의 저서[편집]

1959년 12월 4일 마오쩌둥(毛澤東)의 특별사면령으로 풀려난 후 베이징 식물원에서 정원사로 일했다. 전범관리소에서 교화 생활을 하면서 1957년 자신의 죄상을 고백하는 형식으로 '내 죄악의 전반생'이라는 반성문을 집필했다. 1964년 이를 바탕으로 《나의 전반생(我的前半生)》이라는 자서전을 정식 출간했다. 이 책의 내용을 기반으로 삼아 1987년 이탈리아의 영화 감독인 베르나르도 베르톨루치(Bernardo Bertolucci)가 《마지막 황제(L'ultimo imperatore)》라는 영화를 만들어 세계적인 반향을 일으키기도 했다.

동영상[편집]

각주[편집]

  1. 푸이〉, 《위키백과》

참고자료[편집]

같이 보기[편집]


  검수요청.png검수요청.png 이 푸이 문서는 역사인물에 관한 글로서 검토가 필요합니다. 위키 문서는 누구든지 자유롭게 편집할 수 있습니다. [편집]을 눌러 문서 내용을 검토·수정해 주세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