주 문왕
주 문왕(중국어:周文王zhōu wén wáng)은 주(周)나라의 터전을 마련한 상(商)나라 말기의 제후(諸侯)이다.
개요[편집]
주 문왕은 이름 창(昌). 계왕(季王)의 아들, 무왕의 아버지, 어머니는 상(商)나라에서 온 태임(太任). 서백(西伯)이라고도 한다. 주나라의 기초를 닦은 명군이다. 덕치에 힘썼고, 상나라와 화평주의적 태도를 취했으며 제후들의 신뢰를 얻었다. 유가로부터 이상적 군주로 칭송받았다. 상나라에서 크게 덕을 베풀고 강국으로서 이름을 떨친 계(季)의 업을 계승하여, 점차 인근 적국들을 격파하였다. 웨이수이강(渭水)을 따라 동진하여 지금의 시안(西安) 남서부 펑이(豊邑), 즉 호경(鎬京)에 도읍을 정하였다.
주 문왕은 만년에 위수(渭水)에서 만난 현상(賢相) 여상(呂尙: 태공망 太公望)의 도움을 받아 덕치(德治)에 힘썼다. 뒤에 상나라로부터 서방 제후의 패자(覇者)로서 서백의 칭호를 사용하도록 허락받았다. 상나라와는 화평주의적 태도를 취하였으며, 우(虞) ·예(芮) 등 두 나라의 분쟁을 중재하여 제후들의 신뢰를 얻어 천하 제후의 대다수가 그를 따랐다. 죽은 뒤 그의 아들 무왕(발 發)이 상나라를 멸망시키고 주나라를 창건하였으며, 그에게 문왕이라는 시호를 추존하였다. 뒤에 유가(儒家)로부터 이상적인 성천자(聖天子)로서 숭앙을 받았으며, 문왕과 무왕의 덕을 기리는 다수의 시가 《시경(詩經)》에 수록되어 있다.[1]
주 문왕의 생애[편집]
주 문왕(기원전 1152년~1056년)은 중국 상나라 말기 주(周) 씨족의 수령이다. 성은 희(姬), 이름은 창(昌)이다. 둘째 아들인 서주 무왕이 주나라를 세운 후 문왕으로 추숭했다. 후세에선 도통(道統)의 전인(傳人)들 중 하나로 보기도 한다.
상(商)나라 말기에 서백(西伯)이 되었고, 이 때문에 백창(伯昌)으로 일컫기도 한다. 임용(任用) 태전(太顚), 산의생(散宜生) 등의 유능한 사람들을 등용하고, 백성들의 삶을 넉넉하게 해 주는 정책을 시행하니 국력이 날로 성하게 되었다. 이는 상나라 주왕(紂王)이 꺼리는 바가 되어 유리(羑里)에 갇히게 되었다. 수금된 기간 동안, 주역 일서(一書)를 써냈다. 이후에 유신씨(有莘氏)의 딸과 려융(驪戎) 문마(文馬) 등 보물을 바치고 조정 신하들과 소통하여 비로소 풀려날 수 있었다.
주 문왕은 일찍이 우(虞), 예(芮) 두 나라의 쟁단을 해결해 주었고, 병사를 내어 견융(犬戎), 밀수(密須), 려(黎), 한(邗)을 공격했고, 또한 숭(崇)을 쳐 멸했다. 풍읍(豐邑, 지금의 섬서성(陝西省) 후이구(户县))을 수도로 정했으며, 세력을 넓혀 강수(江水), 한수(漢水), 여수(汝水) 등의 유역까지 이르렀다. 상나라를 멸망시키기 위하여 준비하면서 제후들이 모두 문왕에게 복속하였는데, 전해오는 말로는 그의 만년에 이미 셋으로 갈라진 천하 중 둘을 취한 국면이었다고 한다. 주 문왕은 임종 시에 둘째 아들인 서주 무왕을 불러 서둘러 상나라를 멸망시킬 것을 도모하라고 당부했다. 현재 통용되는 주역 및 후천팔괘(後天八卦, 또는 문왕팔괘(文王八卦))가 모두 문왕의 저서라고 한다.
측천무후가 무주를 세웠을 때 스스로 무씨(武氏) 가문은 문왕의 후대라고 일컬었고, 이에 문왕을 시조(始祖) 문황제(文皇帝)로 추숭했다. 유교의 고전인 주역의 괘사(卦辭)를 지었으며, 복희 선천 팔괘를 연역(演易)하여 문왕 후천 팔괘를 지었다고 전해지나, 괘사나 효사는 점(占)의 전문가들 사이에서 생겨 고정된 것으로, 후대에 문왕을 찬미하기 위한 서술로 지적된다. 오늘날에는 주역이 기원전 403년 이후 사이에 체제가 갖추어진 것으로 보고, 문왕, 주공, 공자가 주역을 나누어 지었다는 설이 있다.
서주의 건립[편집]
서주(西周, 기원전 1046년~기원전 771년)는 수도를 호경(鎬京)에서 낙읍(洛邑)으로 옮기기 전의 주나라를 말한다. 주나라의 판도는 상나라보다 대폭 확대되어 황하 일대에 세력을 미쳤다. 또한 서쪽과 남쪽에 자리 잡고 있었던 비한족들과 접촉했다. 서주는 기원전 771년 내부 반란과 이에 합세한 견융(犬戎)의 침략으로 멸망하였으며, 이 일을 계기로 주나라 왕실은 유명무실해지고, 산하의 제후들이 사실상의 독립국으로 행세하게 된다.
원래 주나라는 상나라의 서부 제후국으로, 황하가 굽어 올라가는 지역인 오르도스 지방에 자리를 잡고 있었다. 상나라의 주왕 시절, 주나라의 문왕은 상의 서쪽 제후들에 대한 총 책임권을 가지고 있던 서백의 지위에 있었다. 당시 주왕의 폭정으로 상나라의 인심은 흉흉하였고, 서백 창은 주왕의 측근으로 주왕에게 반역하는 다른 제후들을 여러 차례 평정하는 등 공을 세웠다. 부하들은 그를 새로운 왕으로 옹립하려 하였고, 백성들도 그를 따랐으나 서백 창은 끝까지 주왕에 대한 충성을 버리지 않다가 고령으로 죽게 된다.
서백은 주왕과는 동시대의 인물로서 50년간 재위에 머물렀으며 말년에 강태공(姜太公)을 위수(渭水)에서 만나 그를 국사(國師)로 임명하였다. 뛰어난 지략을 갖춘 강태공의 눈부신 활약에 힘입어 주(周)는 천하의 2/3를 차지할 수 있었고, 이것은 장차 무왕이 상을 무너뜨리는데 큰 토대가 되었다. 문왕의 뒤를 이어 태자 발(發)이 즉위하였으니 그가 무왕(武王)이다. 그는 강태공을 사(師: 군사 참모)로 삼고 아우인 주공(周公)을 보(輔: 천자를 보좌하여 관원들의 오류를 바로잡는 관직)로 삼아 문왕의 위업을 더욱 확대해 나갔다. 문왕이 붕어한 지 9년 후에 무왕이 동쪽 지방을 정벌하여 맹진(盟津: 지금의 하남성 낙양시 동북쪽 황하 연변에 있음)에 이르자, 주왕을 버리고 무왕에게 모여든 제후가 800명이 되었다고 한다.
무왕은 다시 문왕의 위패와 함께 주왕에 대한 2차 반란을 일으켰다. 무왕의 군대는 은허의 남쪽인 목야에 도착했고, 주왕도 마지막 여력을 짜내어 토벌군을 파견하였다. 이때 주나라의 진영에 있던 점쟁이가 갑골로 점을 쳤는데, 이번에는 저번과 반대로 큰 흉조가 나타났다. 이때 강태공은 이를 무시하고 길흉의 점과 상관없이 전투에서 이기면 된다고 주장해, 무왕의 원정은 계속되었다.
목야에서 무왕은 상나라 병사들을 향한 선전포고문을 발표했는데, 달기의 말만 듣고 정사를 멀리하는 주왕을 탓하고, 하늘이 뜻이 자신에게 있음을 밝혔다. 이에 상군의 많은 수가 흔들렸으며, 결국 목야의 싸움은 주나라의 대승으로 끝난다. 전투에서 패한 상의 주왕은 자살했으며, 은허에 입성한 주의 무왕은 주왕의 시체에 활을 세 번 쏘고 검으로 벤 후 효수하여 하얀 깃발 위에 높이 내걸었다. 이어 후궁으로 들어가 달기를 비롯한 주왕의 후비들을 벤 후, 이 역시 상나라를 상징하는 하얀 깃발 위에 걸었다. 장엄한 입성식이 끝난 후, 무왕은 주나라의 개국을 선언하였으며, 강태공, 주공 단 등의 공신들을 포상하여 강태공은 제나라, 주공 단은 노나라에 봉했다. 주왕의 태자인 녹보에게도 온정을 베풀어 작은 땅을 다스리게 하였으며, 삼황오제 및 하나라의 후손들도 작은 영지에 봉하였다.
강태공[편집]
강태공(姜太公)은 주(周)나라 초기의 정치가이자 공신이다. 무왕을 도와 은나라를 멸망시켜 천하를 평정하였으며 제(齊)나라 시조가 되었다. 본명 강상(姜尙)이다. 그의 선조가 여(呂)나라에 봉하여졌으므로 여상(呂尙)이라 불렸고, 태공망이라고 불렀지만 강태공이라는 이름으로 알려져 있다. 주나라 문왕(文王)의 초빙을 받아 그의 스승이 되었고, 무왕(武王)을 도와 상(商)나라 주왕(紂王)을 멸망시켜 천하를 평정하였으며, 그 공으로 제(齊)나라 제후에 봉해져 그 시조가 되었다.
강태공은 동해(東海)에서 사는 가난한 사람이었고, 집안을 돌보지 않아 그의 아내가 집을 나갔다고 전한다. 하루는 웨이수이강(渭水)에서 낚시를 하고 있는데, 인재를 찾아 떠돌던 주나라 서백(주 문왕이)을 만났다. 서백은 노인의 범상치 않는 모습을 보고 그와 문답을 통해 인물됨을 알아보고 주나라 재상으로 등용하였다고 전해진다. 그를 태공망이라고 불렀는데 이는 주나라 무왕의 선군인 태공(太公)이 바랐던 인물이었기에 그렇게 불렀다고 전해진다. 강태공 대한 전기는 대부분이 전설적이지만, 전국시대부터 경제적 수완과 병법가(兵法家)로서의 그의 재주가 회자되기도 하였다. 병서(兵書) 《육도(六韜)》(6권)는 그의 저서라 하며, 뒷날 그의 고사를 바탕으로 하여 한가하게 낚시하는 사람을 강태공 혹은 태공이라 하는 속어가 생겼다.
주 문왕에 대한 기록[편집]
주 문왕에 대한 기록은 정사(正史)로서는 『서경』과 『사기』에 등장하고, 『시경』과 『논어』·『맹자』 등의 유가경전에 그에 대한 언급이 보인다. 『서경』에서는 「상서(尙書)」 ‘서백감려(西伯戡黎)’ 편에 조금 언급되어 있고, 주나라의 역사서에 해당하는 「주서(周書)」의 ‘태서(泰誓)’ 편에는 무왕이 주왕을 정벌하는 데 있어 주왕의 폭정과 부도덕성을 고발하여 정벌의 정당성을 밝히는 내용이 주를 이룬다. 종종 아버지 문왕에 대해 언급하기는 하지만 문왕에 대한 구체적인 사실들은 나타나 있지 않다. 그리고 사마천(司馬遷)의 『사기』에 문왕의 행적을 알 수 있는 내용이 나오는데, 「은본기(殷本紀)」06 끝 부분과 「주본기(周本紀)」 서두이다. 앞에서 문왕과 관련하여 서술한 내용은 주로 『사기』의 내용을 정리한 것이다.
『논어』에서 공자는 문왕의 시호가 '문(文)'이 된 것에 대해 주나라 문화의 담지자로서 상징성을 부여하고 있다. 사문(斯文)이 문왕으로부터 시작되어 무왕을 거쳐 주공에 이르러 주나라의 예악문물과 제도가 완성되었다고 공자는 생각했다. 그래서 공자는 꿈에서도 주공을 그리워했으며, 이 문을 통해 춘추시대의 난맥을 바로잡고자 하는 염원이 있었다. 그 시원(始原)에 주 문왕이 있는 것이다. 이러한 공자의 사유는 유가의 전통적인 사유로 굳어져 오늘날까지도 동아시아에서 주 문왕은 유학의 인문주의(人文主義)를 개창한 인물로 추앙받고 있다.
동영상[편집]
각주[편집]
참고자료[편집]
- 〈문왕(文王)〉, 《두산백과》
- 〈주 문왕〉, 《위키백과》
- 〈문왕(주)〉, 《나무위키》
- 오디세이, 〈피를 흘리며 때를 기다렸던 주문왕〉, 《네이버블로그》, 2024-10-22
- 이여심, 〈덕(德)으로 민심을 모으다 - 기산에서 제사를 올린 주문왕(周文王) 희창(姬昌)의 리더십〉, 《네이버블로그》, 2024-11-17
같이 보기[편집]