농민
농민(農民, peasant)는 토지에서 농업에 종사하는 자로서, 임노동자가 아닌 사람이다. 농민은 소규모 토지 소유인이거나 차지인이다. 전자를 소농이라 하고 후자를 소작농이라 한다. [1]
상세
농민은 기본적으로는 타인에게 고용되지 않고 또 타인을 고용하지도 않으며 자기자신과 그 가족의 노동력으로 자기 토지 또는 차지(借地)하여 농업을 경영하는 생산자를 말한다.
세계적인 관점에서 보면 농민은 중세사회의 주요 생산자 계급이었으나 상품경제 ·자본주의경제의 전개는 그들을 봉건적 속박에서 해방시켜 자유계급으로 만들었다. 한편 그에 따른 토지의 사유화(私有化)와 노동력의 상품화는 농민의 토지매각과 임금노동자화(賃金勞動者化)를 촉진하게 되었다. 결국 자본주의 공업의 발전에 의하여 농가경영의 존립(存立)의 기둥이었던 가내공업(家內工業)이 패퇴(敗退)하고 농민은 임금노동자화되어 갔다. 이 과정에서 자립적인 농민(보통 소농이라 한다)은 점차 농업만으로는 생계를 유지할 수 없고, 임노동(賃勞動)을 겸업하는 빈농(貧農)과 농업경영을 확대하여 타인의 노동력까지도 착취하는 부농(富農)으로 나뉘었다. 이것이 농민층의 분화이다. 이 과정이 더욱 진행되면서 농민의 대부분은 농업 또는 공업의 임금노동자로 바뀌고 나머지 소수는 자본가로 성장하여 갔다. 이것을 농민층의 분해라고 한다. 그러나 현실의 농민은 이상과 같이 단순하게 분화 ·분해의 과정을 거쳐간다고 할 수 없다. 자본주의는 국가와 발전단계에 따라 농민층의 동향에 여러 가지 규제인(規制因)이 있기 때문이다. 중상주의(重商主義) 단계와 자유주의(自由主義) 단계의 영국에서 분화 ·분해 경향이 진전한 것과는 달리 제국주의(帝國主義) 단계의 독일에서는 농민층의 겸업화 경향은 강화되어 가면서 오히려 분해 경향은 둔화되어 갔다. 이것이 농업문제 발생의 근거가 되었다.[2]
농민의 개념
농민의 개념은 크게 직업적 · 계층적인 두 측면에서 살펴볼 수 있다. 직업적 측면에서 볼 때, 농민이란 가족노동을 기반으로 농산물을 직접 생산하는 데 종사함으로써 생계를 영위해 나가는 사람들이라고 규정할 수 있다. 이러한 개념규정에서 생계활동, 농업생산, 직접적인 생산활동 참여라는 세 가지 점에 대하여 좀 더 상세히 알아보기로 한다.
첫째, 농민은 농업을 생계의 바탕으로 삼고 있다. 따라서 농업을 부업이나 여가활동의 일환으로 영위하는 사람들은 농민의 범주에서 제외된다.
둘째, 농민의 농업생산활동이란 농업자재 생산, 농산물의 유통 · 가공 등 넓은 뜻의 농업활동이 아니라, 경종(耕種:논밭을 갈고 씨를 뿌려 가꿈) · 사육 등 좁은 뜻의 농업생산활동에 한정된 의미로 파악되어야 한다.
종래 자급자족적 농업생산하에서는 농업관련산업도 대체로 농민들의 직업활동의 일부로 편성되어 있었으나, 오늘날 시장경제 체제하의 노동분화에 따라 농민들의 기능은 토지를 기반으로 한 직접적인 농업생산활동에 한정되는 경향을 보여주고 있다.
셋째, 농민은 직접 생산활동에 종사하는 사람들이다. 물론 스스로 생산활동에 종사하면서 다소간에 타인의 노동을 활용하기도 하지만, 토지를 기반으로 한 소득에 의존하고 있다 하더라도 자신이 생산활동에 참여하지 않는 경우는 농민의 범주에서 제외되어야 한다.
이와 같이 직업적 측면에서 농민을 규정할 때에는 농촌에 거주하는 경우라도 순수한 지주는 농민의 범주에서 제외되고, 농업노동자는 토지가 없더라도 농민 범주에 포함된다.
계층적 측면에서 농민은 토지소유관계와 노동관계에 따라 규정된다. 특히 농민의 성격은 농업의 일차적 생산수단인 토지의 소유 혹은 점유형태에 따라 크게 달라진다. 농민은 토지소유관계에 따라 흔히 자작 · 자소작 · 소자작 · 소작 · 농업노동자로 구분된다.
이 가운데 농업노동자는, 농민의 성격이 일정한 토지를 기반(소유 혹은 점유)으로 농업생산에 종사하는 층이라는 규정하에서 볼 때 농민의 범주에서 제외되기도 한다.
경지규모에 따라서는 농민을 대농 · 중농 · 소농으로 나누거나 더 세분화하기도 한다. 그러나 오늘날 자본 · 노동 · 기술 등의 다른 생산요소에 비하여 토지의 상대적 중요성이 줄어들고 있어서, 토지만으로 농민들의 계층구분을 하기는 어렵고 소득의 중요성이 많이 강조되고 있다.
또한 노동관계도 농민의 계층구분에 중요하다. 일반적으로 농민은 단순노동자와는 달리 토지 및 기타 생산수단을 다소간 가지고 있다고 보고, 얼마나 자기 노동에 입각하여 농업경영과 가계를 유지해 나가고 있는가에 구분 기준을 두고 있다.
즉, 충분한 생산수단을 갖지 못하여 고용노동에 종사하는 경우를 빈농, 또 상대적으로 많은 생산수단을 소유하여 항상 고용노동에 의존하는 경우를 부농이라 하며, 자가노동(自家勞動)으로 경영과 생활을 유지하는 경우를 중농이라 부른다. 이러한 구분은 농민층 분해라는 계급적 시각에 더 강조를 두고 있다.
농민의 성격은 또한 전체 사회의 계층적 맥락에서도 규명되어야 한다. 농민층 내부의 끊임없는 분화과정도 중요한 것이나 농민이 하나의 집단으로 특정 사회에서 차지하고 있는 계층적 지위도 그냥 지나쳐서는 안 된다. 더구나 우리 나라 사회에서처럼 농민층의 대부분이 영세한 토지를 기반으로 한 소상품생산자라는 관점에서 볼 때 더욱 그러하다.
사회에 있어서 농민층의 지위는 전체사회에 있어서 지배 · 피지배의 성격, 농민층이 소유하는 자원의 상대적 중요성, 국가경제에 있어서 농업 부문의 상대적 기여도 등에 따라 달라진다.
봉건사회에서는 사회계층이 지배층(봉건지주층)과 피지배층(소작농민층)으로 양극화됨에 따라 농민은 사회의 하층을 구성하게 되었다. 산업사회로 접어들면서 농민층은 신분적 예속에서 벗어나 독립적으로 영농에 종사할 수 있는 기회를 가지게 되었다.
그러나 오늘날 자본주의 시장경제체제하에서 농민층은 사회의 중 · 하층 중심으로 편성되어 있음을 보게 된다. 이것은 자본주의체제하에서 농업 부문이 가지고 있는 경제적 취약성과도 곧바로 연결되어 있다.[3]
농민의 역사적 존재 형태
조선시대 이전의 농민들의 생활상이나 계층관계에 대해서는 기록이 많지 않기 때문에 정확한 것을 알 수는 없다. 특히 고대의 농민생활에 대하여는 몇 가지 제한된 문헌을 가지고 추정할 수밖에 없다.
서기 1세기에 김해지방에 세워졌던 원시취락에서 수도작농업(水稻作農業)을 중심으로 농경이 이루어졌던 점으로 보아 이 시기에 이미 안정된 농민층이 형성된 것으로 추정된다. 또한, 이 취락들은 수도작농업을 해나가는 데 필요한 관개용수(灌漑用水)의 조절뿐만 아니라 하천의 통제를 위하여 공동노동의 조직을 이룩하였던 것으로 보인다.
신라시대에는 8∼15호(戶)의 집촌부락을 형성하여 농민들이 영농에 종사하였으며, 이미 노비를 비롯한 계층분화가 농촌 내부에 광범위하게 나타났던 것으로 밝혀지고 있다.
고려시대에 접어들면서 토지제도의 확립을 통하여 농민의 사회적 신분이 보다 명확히 나타난다. 고려 초기에 제정된 전시과제도(田柴科制度)는 주로 문무백관에 대하여 토지와 시지(柴地)를 분배해준 관인중심의 토지분배제도이다.
농민층은 직역(職役)을 부담하는 특수계층인 정호(丁戶)와 직역을 부담하지 않는 백정(白丁)으로 나누어졌는데 단지 정호에 한하여 토지분급의 혜택이 주어졌다. 이에 비하여 백정은 대대로 상속되는 경작지를 가지고 있었다. 관인층은 자기의 등급에 할당된 양의 토지를 국가로부터 받아 농민들로 하여금 경작하도록 하였다.
따라서, 관인은 지주의 신분으로 농민을 지배하는 것이 아니라 국가권력에 의하여 인정된 토지의 전조(田租:田地의 조세)를 일정기간 취득할 뿐이었다. 이처럼 전시과체제하의 농민들은 토지를 매개로 하여 관인들에게 예속되어 있기보다는 국가권력에 의한 노동력의 징발대상으로 다루어졌다. 즉, 생산기반인 토지를 농민들에게 주어 자유롭게 농경에 종사하도록 하고 필요에 따라 노동력을 수취할 수 있게 하였다.
그러나 고려 후기에 이르러 권세가들의 토지탈점(土地奪占)으로 전시과체제는 붕괴되었다. 이 때문에 토지를 잃은 농민들은 권세가들의 땅을 빌려 경작하는 전호(佃戶)로 변하여 무거운 소작료를 지불하거나 공사노비(公私奴婢)로 전락함으로써 비교적 자유스럽던 고려 농민의 신분적 지위가 지배층에 대한 예속적 지위로 전환되었다.
고려 후기사회의 토지제도의 부조리는 농민반란을 초래하게 되었고, 결국 고려왕조의 멸망을 재촉하게 되었다.
조선시대에 접어들면서 사회신분은 양반 · 중인 · 양인 · 천인으로 엄격하게 구분되었다. 농민은 양인과 천인층으로 구성되었는데 농민 중의 4분의 3 이상이 양인층이었던 것으로 파악된다. 조선시대의 농민은 고려시대에 비하여 한층 더 토지에 묶여 있었으나, 그들 중에는 토지를 소유하고 스스로 경작하는 자작농이나 그밖에 자작 겸 소작농의 경우도 있었다.
특히 서북부지역이나 산간지역에 비교적 많은 자작농 및 자소작농이 혼재하여 있었던 것으로 보인다. 그러나 당시의 자작농은 근대적 의미의 자작농과는 그 성격이 달랐다. 즉, 이들은 국가소유 토지의 경작인에 불과하였다.
농민의 소유지는 본질상 단순한 사적 점유에 지나지 않아 조세를 납부하는 동안 그 소유가 인정되었고, 호족이나 관리들의 횡포에 따라 언제든지 소작인화될 수 있는 불안정한 지위에 있었다.
소수의 자작농 및 자소작농 이외의 대다수 농민은 양반들의 토지나 국가기관에 소속되는 토지를 빌려서 경작하는 이른바 전호였다고 할 수 있다. 이들은 수확물 중에서 조세를 전주(田主)나 국가기관에 납부하고 그 나머지로 생활을 영위하였다.
또 양인 농민들은 지방 특산물을 현물세로 공납해야 하였고, 16세 이상 60세까지의 정남(丁男)은 군역(軍役)과 부역(賦役)의 의무를 져야 하였다. 이처럼 양인 농민들은 전세 · 공납 · 역(役) 등과 같은 과중한 부담을 강요당함으로써 궁핍한 생활을 면하지 못하였다.
결국 양인 농민은 봉건적 예속민으로서 국가와 지주에게 이중적으로 예속되는 입장에 있었다. 천인도 대다수가 그들의 소유주인 상전(上典)의 농업경영에 종사하였다. 천인은 토지와 같은 물적 존재로 여겨져 상전이 자기 마음대로 매매 · 증여 · 상속을 할 수 있었고, 상전이 직접 형벌을 내릴 수 있었기 때문에 전적으로 상전에 예속된 생산수단의 일부가 되었다.
이와 같이 천인은 상전의 농장경영을 위한 단순한 노동제공자라는 성격을 넘어선 노예적 위치에 있었다는 점에서 양인 농민과 다른 성격을 가지고 있었다. 결국, 조선시대의 농민은 양반지배층으로부터 압박과 수탈을 당하는 하층민의 신분적 위치에 있었다고 보여진다.
농민층에 대한 압박과 수탈은 16세기 촌락사회의 폐허화를 초래하는 원인의 하나가 되었다. 조부(租賦)와 공역(貢役)을 담당하는 농민층이 각처로 흩어짐에 따라 촌락의 양민호수가 격감되었고, 농경지의 황폐가 가중되었다.
특히 임진왜란은 촌락의 경제기반 및 농민들의 생활기반을 파탄의 상태로 몰아넣었다. 임진왜란 이전의 농경지 면적이 170만8000결(結)이었는데 비하여 임진왜란 뒤에는 54만2000결로 3분의 2 이상 감축된 결과를 초래하였다.
또, 임진왜란 중에 토지대장인 장적이 많이 소실되어, 특히 충청 · 전라 · 경상 등의 하삼도지방에서는 서리들의 횡포가 극심하여졌다. 임진왜란 뒤 농경지를 수복하고 촌락사회의 행정수습을 위하여 양전사업을 추진하였으나 촌락생활을 재건하는 데 별다른 기여를 하지 못한 채 끝나고 말았다.
이와 같이 조선 후기에 이르러 종전의 중앙집권적 토지소유관계가 점차 해체되고 관료지배층에 의한 토지의 사적 점유가 확대되어 농민은 봉건적 농노와 비슷한 지위로 고착되고 말았다. 그러나 이 시기에도 극소수나마 농민적 지주의 성장이 나타났다. 즉, 일반 농민들 스스로 부를 축적하거나, 상인 및 수공업자에 의한 상공업자본의 축적과정을 통하여 지주층으로 부상하게 되었다.
조선시대 말기 양반 지주층과 소작 농민층간의 사회 · 경제적 격차는 점점 더 심해지고 소작농민층의 생활이 극단적인 궁핍에 이르게 되자, 농민 중심의 민란이 각처에서 일어났다. 특히 지식있는 몰락 양반층이 농민의 지도자로 활약함에 따라 기성 지배층에 대한 농민들의 각성과 비판의식이 향상된 것도 농민반란의 자극제가 되었다.
이렇게 19세기 우리 나라 근대사는 농민반란으로 점철된 한 세기라고 할 수 있다. 특히, 그 가운데 1894년의 동학농민반란(東學農民反亂)은 농민봉기의 절정을 이루었다. 동학란의 지도층은 몰락한 양반계급 출신자들이었으나, 당시 지방관리들의 극심한 수탈과 핍박의 대상이 된 농민들이 동학란의 주역을 담당하였다.
봉기에 가담한 인원수는 연 300만 명으로, 절대다수는 동학교도가 아닌 농민들로 이루어졌다. 또, 동학란의 지도층도 몰락한 양반이기는 하였으나 직접 농민과 함께 생활한, 사실상의 농민적 신분에 있었다. 결국 동학란은 실패로 끝나고 말았으나 농민들의 의지는 민족항일기의 농민운동으로 이어진다.
민족항일기의 농민들의 생활은 일제에 의한 수탈과 억압의 연속으로 특징 지워진다. 일제는 1910년을 기점으로 하여 근대적인 토지사유제의 확립이라는 명분하에 토지조사사업을 실시하였다. 이 토지조사사업을 통하여 당시 수조권자(收租權者)들이 직접 토지소유권자로 전환되었고, 토지를 경작하던 대다수의 농민은 토지를 빼앗기거나 경작권을 빼앗겼다.
토지로부터 유리된 많은 농민들은 상공업 부문으로 흡수되지 못하고 그대로 농촌에 남아 지주에 대하여 전시대보다 훨씬 예속적인 소작농으로 재편성되었다. 특히 일본인의 대농장설립, 동척이민(東拓移民) 등으로 많은 토지가 일본인에게 넘어감에 따라 농민의 지위는 한층 악화되었다.
결국, 민족항일기의 농촌에는 자작농층이 상당히 몰락하여 지주와 소작농층으로 거의 양극화된 계급구조가 형성되었다.
한편 이와 같은 계급구조의 양극화에 따라 지주를 대리하여 소작지의 경영을 관리하는 마름[舍音]이 농촌사회의 중요한 구실을 담당하게 되었다. 마름은 소작인의 선정과 해제, 소작지의 변경 등 지주를 배경으로 삼아 소작농민들의 생활에 막강한 영향력을 행사하였다.
이처럼 당시 전인구의 8할을 차지하던 농민은 대부분 땅이 없는 소작계급으로 생활하였다. 1930년대의 한 조사에 따르면 소작농의 68%에 해당하는 농가가 보릿고개를 겪고 있고, 75%의 농가가 평균 65원(圓)에 해당하는 부채를 지고 있는 것으로 밝혀져 소작농민의 경제적 궁핍을 잘 보여주고 있다.
광복 후 1949년 6월 21일에 <농지개혁법>이 공포되고 다음해 4월 28일에 그 시행규칙이 공포되었다. 이 개혁은 무엇보다도 소작제도를 해소하고자 함이었다. 농지개혁은 여러 가지 이유로 소기의 성과를 거두지는 못하였으나 지주적 토지소유질서를 농민적 토지소유질서로 전환시켰고, 극소수 지주층이 대다수의 하층농민을 지배, 통제하는 억압적 체계를 시정하는 데 역사적 전환점으로 볼 수 있다.
따라서 1950년대 이후 소작농의 비율이 격감하였을 뿐만 아니라 남아 있는 소작농의 경우에도 전통적인 신분적 예속관계에서 벗어나 점차 계약관계로 이행되는 경향을 보여왔다.[3]
농민의 생활양식과 가치관
한국 농촌의 기본적인 형태는 집촌(集村)이라고 할 수 있다. 집촌이란 마을 주위에 경작지가 흩어져 있고 농가가 서로 밀집하여 있는 촌락을 말한다. 또한 우리 나라의 전통적인 농촌에서는 배산임류(背山臨流)를 전형적인 입지조건으로 삼아 물(식수 및 농업용수) · 임야(땔감) · 평야(경작지)가 마을형성의 기본 요건이 되었다.
이와 같은 지형 · 수원(水源)의 고려 때문에 마을은 평야의 한가운데보다는 산록 · 구릉지 등에 집촌의 형태로 형성되었다. 이러한 집촌형태의 정주집단은 흔히 자연부락이라고 불려진다.
한국의 농민에게는 이 자연부락이야말로 생산 및 생활의 전반적인 무대였다. 농민 대부분의 인간관계 및 영농활동은 자연부락의 범위를 넘어서는 경우가 드물었고, 따라서 전통적인 농민들에게는 자연부락이 소우주(小宇宙)와 같은 것이었다.
또, 농촌사회에서 농민이 구성하는 많은 집단, 예를 들면 동제집단(洞祭集團), 각종 계 집단, 두레 · 품앗이 등의 생산조직, 물의 이용분배를 관리하는 수리조직(水利組織) 등도 이 자연부락이 모체를 이루었다. 이러한 자연부락의 전통적 성격은 교통 · 통신망, 사회적 이동의 확대로 점차 약화되고 있다.
이처럼 폐쇄된 사회환경 속에서 신분적 예속을 오랫동안 겪어야 하였던 우리 농민의 가치관은 흔히 숙명적 신분의식으로 표현된다. 때로는 극심한 억압과 수탈에 대한 대응으로 농민저항이 역사상 여러 차례 나타난 것이 사실이나 사회전체에 대해 적극적으로 개선하지는 못하였다.
전통적 도덕과 윤리관에서는 권선징악 · 사필귀정 등을 강조하여 지배층의 억압에 대한 울분과 체념을 소극적으로 나타냈다. 겉으로는 관료층에 대한 복종하는 체 했지만 속으로는 비웃는 농민들의 이중적 의식이 조선 말기의 서민소설에서도 풍자적으로 잘 나타나 있다. 이 숙명적이고 폐쇄적인 농민들의 가치관은 1900년대 중반의 농촌사회연구에서도 많이 반영되고 있다.
한국 농민들에 관한 몇몇 연구는 농민들의 일반적인 가치관의 특성을 다음 몇 가지로 제시하고 있다.
① 전통주의:과거의 생활양식에 밀착되어 있고 비합리적 사고가 지배적이다.
② 권위주의:남녀관계 · 부모자녀관계 · 장유노소관계가 평등적이기보다는 권위주의적이다.
③ 가족주의:혈연중심적이며, 개인보다 가족이 우선시되고 가족적 집단내의 결속성과 다른 집단에 대한 배타성이 강하다.
④ 경제적 재부(財富):부가 존중되고 있으나 획득방법에는 합리성이 결여되어 있다.
⑤ 안정지향성:정치 · 경제 · 사회 전반에 걸친 변화보다 안정을 선호한다. 물론 이러한 가치관의 특성은 농민이라는 특정층에게만 특징적으로 나타난 것이라기보다는 한국인들의 전통적인 가치관으로 공통된 면이 많을 것으로 보인다.[3]
오늘날의 농민
농지개혁을 계기로 하여 한국의 농민은 소작농으로부터 자작농으로 전환되었다. 농지개혁 이전의 가장 큰 농민문제는 토지개혁 즉 소작문제 해결이었으나 농지개혁 이후 농민문제는 영세자작농 체제의 극복이었다. 농지개혁으로 탄생한 영세자작농은 생산적 투자, 토지의 합리적 이용 등의 측면에서 근대적 농민과 거리가 멀었기 때문이다.
북한은 협동농장을 건설하여 영세소농문제를 해결하고자 하였다. 농업에서도 공업과 같은 규모의 경제를 이룩하려는 것이었다. 남한에서도 협업화를 주장하는 학자들이 많았다. 특히 1960년대 초반에는 정부의 농업정책으로 실시되기도 하였다. 그렇지만 일부 종교계의 협업농장을 제외하고는 별다른 성공을 거두지 못하였다.
농지개혁과 6·25전쟁의 종결에도 불구하고 1950년대 농민들의 처지는 별로 나아지지 못했다. 정부는 전쟁 수행과 복구과정에서 농민들에게 과도한 부담을 지웠다. 1950년대 농민들의 부담은 일제시기의 소작료만큼이나 과중하였다. 1951년부터 실시된 임시토지수득세는 고율의 현물세였다. 게다가 분배농지의 상환곡 부담도 존재하였다.
더욱이 미국 잉여농산물의 도입은 농산물 가격을 하락시켜 농민들의 생활을 곤궁하게 하였다. 이리하여 1950년대는 머슴이라는 전근대적 농업노동자가 농촌에 광범하게 존재하였다. 머슴은 1960년대까지 농촌에 널리 존재하였다. 머슴은 농민 문제의 한 표현이라고 할 수 있다.
이 시기에 다시 소작제가 증가하여 이후 농민문제 해결에서 소작문제가 등장하는 주요계기가 되었다. 소작관행은 일제시대의 것과 유사하였으나 지주제도가 붕괴되었기 때문에 일제시대의 소작제와는 성격이 다르다. 그렇지만 소작지 증가는 당시 농민들의 경제적 어려움을 잘 말해주고 있다.
농민들은 어려운 상황에 있었지만 이익집단으로서 조직화되지 못하였다. 농민은 국가의 정책대상으로만 존재하였다. 농지개혁으로 말미암아 농민들이 체제내화된 탓도 있지만 1940년대 봉기의 실패, 한국전쟁의 경험 등으로 말미암아 농민들은 탈정치화되고 있었다.
도시에 비해 낙후되었지만 1960년대부터 농민들의 생활은 어느 정도 개선되기 시작하였다. 농민생활을 개선하기 위해 1960년대에 취해진 정책으로는 농어촌 고리채 정리, 농산물가격유지, 고미가정책 등을 들 수 있다.
특히 고리채 정리와 종합농협 창설로 말미암아 농촌금융제도가 크게 개선되었다. 그러나 종합농협은 농민의 자율성과 주체성을 억압하였기 때문에 농협민주화는 이후 농민운동의 목표가 되기도 했지만 농촌금융의 근대화에 상당히 기여하였다.
1970년대의 새마을운동은 농민생활을 크게 변화시켰다. ‘근면 · 자조 · 협동’이라는 정신운동의 성격이 강하긴 했지만 국가의 선택적 지원 정책과 맞물리면서 농촌개발에 큰 영향을 주었다. 새마을 운동은 초기에는 초가지붕 없애기, 마을 안길 확장 등 환경개선사업을 주로 벌였지만 점차 소득증대 사업을 강조하여 상품작물의 재배를 증대시켰다.
상품작물재배가 증대됨에 따라 농민들의 소득도 높아졌다. 새마을 기간 동안 농민들의 소득이 향상되면서 ‘여촌야도(與村野都)’라는 말이 생길 정도로 농민은 정권 안정의 기반이 되었다. 새마을운동은 ‘근면 · 자조 · 협동’을 기본원리로 제시하였지만 실제로는 국가의 주도하에 이루어져 농민들의 자율성 향상에는 부정적 영향을 미쳤다.
1980년대 이후에도 농민의 경제생활은 향상되었다. 생산비가 증대하고 농산물가격이 불안정해서 농민들이 경제생활에 어려움을 겪기도 했지만, 대체로 농민들의 경제생활은 향상되었다. 채소 · 축산 분야의 발전이 농민의 경제생활 향상에 크게 기여하였다.
겨울에 들판에 나가면 들판이 비닐하우스로 덮여있는 것을 쉽게 발견할 정도이다. 축산농민들은 주곡재배도 하면서 농업경영의 다각화 즉 복합영농의 일환으로 축산을 한다. 1980년대부터 축산농가가 크게 늘어났으나 1985년의 ‘소몰이싸움’이라는 농민시위에 나타나듯이 축산농가는 외국농축산물의 수입, 가격 불안정 때문에 어려움을 겪기도 한다.
1980년대 후반부터 한국농민은 외국농축산물의 수입이라는 큰 도전에 직면해 왔다. 외국농축산물의 수입개방은 미국을 비롯한 농업수출국들의 집요한 압력 때문이다. 해외수출에 의존하는 한국경제는 농민의 권익보다는 수출시장 확보를 위해 외국의 압력에 굴복할 수밖에 없었다.
1980년대 말부터 일어난 농산물의 무역자유화 움직임은 우루과이라운드로 구체화되었다. 농산물의 무역 자유화는 시대의 대세라는 인식하에 정부는 1990년대에 농업경쟁력 강화를 부르짖으면서 쌀전업농, 축산 · 채소 · 특작분야의 지원을 강화하였다. 특히 신농정이라는 이름 아래 농업구조개선에 막대한 자금이 농업 부분에 투자되었다.
이 결과 유리온실, 비닐 하우스, 기계류 등 영농시설과 운영자금에 대한 특혜융자가 실시되었다. 농지구입과 농기계구입에 대해서도 특혜융자가 실시되었다.
그러나 농민들 가운데 정부의 융자를 합리적으로 이용한 사람도 많지만 대다수는 마케팅, 수요예측 등과 같은 합리적인 기업가 정신 없이 정부의 특혜 융자를 무분별하게 이용한 나머지 막대한 부채를 짊어지게 되었다. 1997년 대통령 선거에서 농가부채가 농촌문제의 중요한 쟁점이 될 정도였다.
외환위기로 인하여 국제통화기금(IMF) 관리체제가 수립되면서 농민들은 더욱 어려움에 부딪히게 되었다. 달러와 유류가격의 상승, 농업자재 가격의 상승 때문에 농민들의 부채가 늘어나고 부채를 상환할 수 있는 가능성은 더욱 낮아졌다.
특히 융자를 얻을 때 농민들간의 연대보증 때문에 농촌 전체가 파산한다는 말까지 나올 정도이다. 그러나 농민들이 많은 부채를 짊어지고 있다고 해서 빈농화되었다고 생각하는 것은 잘못이다. 이들 가운데 상당수는 매출규모가 도시의 소기업에 해당하는 농민도 있다.
살펴본 것처럼 농지개혁 이후 1990년대까지 이루어진 농민의 경제생활은 크게 향상되었다. 농민의 경제활동 방식도 크게 달라졌다. 우선 겸업농이 증가하였다. 이에 따라 농민들의 소득 가운데 농외소득이 차지하는 비중이 크게 늘어났다. 농가소득에서 농외소득이 차지하는 비중을 보면 1960년 17.9%, 1970년 24.2%, 1991년 28.0%, 1995년 31.8% 등이다. 농업에만 종사하는 농민이 줄어들고 있다는 사실을 알 수 있다.
다음으로 농민들의 작업 방식 변화를 지적할 수 있다. 대표적으로 두레와 같은 공동노동은 농촌에서 자취를 감추었다. 품앗이도 그 비중이 현저히 줄어들고 친척과 친지를 기반으로 하는 품앗이만이 명목적으로 존재할 정도이다. 대신 기계화, 임노동이 널리 보급되었다.
쌀 등 주곡을 주로 생산하는 농민들은 기계 작업에 주로 의존한다. 기계를 소유할 수 없는 농민들은 기계를 가진 농민이나 위탁영농회사, 영농조합법인들에 임작업을 부탁한다.
채소특작 분야의 농업경영은 미곡 분야의 농업경영과는 달리 기술, 마케팅, 정보, 자본 등 기업적 경영과 유사하다. 화훼 분야의 농민 가운데 일부는 완전히 근대적 기법을 동원하여 자본가적 경영을 하기도 한다.
주곡농업과 특작을 겸하는 농민들은 농협이나 영농조합법인의 도움을 얻어 마케팅, 정보, 자본, 기술 등의 문제를 해결한다. 채소특작분야는 작물의 성장단계에 따라 방대한 임금노동을 고용한다. 이들 농업노동자는 농촌의 빈민 또는 도시 빈민들이다.
1990년대 후반에는 일부 지역에서 외국인의 고용도 나타나고 있다. 채소특작 지역과 도시를 연결하는 곳에서는 인력시장이 형성되고 있다.
과거에 농민들은 품앗이, 두레 등을 통해서 노동력 부족을 해소하거나 주로 자기 마을이나 이웃마을에서 일꾼을 고용하였으나 채소특작 농민들 가운데 대농들은 이처럼 비면접적(非面接的) 인력시장을 이용한다. 그러나 채소특작 분야의 임금노동고용은 특정 시기에 농가의 부족한 일손을 돕는 것이기 때문에 기업적 고용구조라고 볼 수는 없다.
농민의 경제생활이 개선되고 있지만 도시와의 격차는 여전히 존재하기 때문에 1960년 이후 전체 사회에서 농민이 차지하는 비중은 크게 줄어들었다. 1991년 국민경제에서 농업생산이 차지하는 비중은 7%, 농업 부문의 고용이 차지하는 비중은 16%이다. 1995년에는 각각 6.5%, 12.5%로 줄었다. 1960년에 농민이 전체경제활동 인구 가운데 58.2%였던 것을 감안하면 농민의 숫자가 얼마나 급격히 줄었는가를 알 수 있다.
전체 인구 가운데 농민의 비중이 급감함에 따라 정치무대에서 농민의 영향력도 크게 줄어들었다. 농업과 농민들에 대한 사회적 평가도 낮아졌다. 1990년대에 농민들은 사회적 위신을 높이기 위해 '농민'이라는 말 대신에 '농업인' 또는 '농업경영인'이라는 말을 즐겨 사용하고 있다. 정부에서도 농업인의 날 행사를 거행하고 있다.
도시인과 비교할 때 농민들의 문화생활은 아주 불리하다. 교육시설, 의료시설, 복지시설, 여가시설 등의 격차가 심하다. 도시인과의 문화생활 격차 때문에 농촌에는 젊은층이 급격히 줄고 있다. 특히 학령기 아동의 도시 전출이 심하였다.
1990년대에 오면 농촌마을에서 어린이를 찾아보기 어렵다는 말까지 나올 정도이다. 폐교되는 초등학교의 숫자가 날로 늘어나고 있다. 초등학교는 농민들을 연결해 주는 중요한 구심점이었는데 이러한 구심점들이 하나씩 사라지고 있다.
도시와 농촌의 문화적 격차가 확대될 뿐 아니라 농민들의 전통문화마저 사라지고 있다. 농악, 마을축제, 노동요, 사랑방 등 전통적 농민문화는 이제는 거의 사라졌다. 그 대신 텔레비전, 노래방, 단란주점, 다방 등이 농민들의 문화생활에서 중요한 구실을 한다. 단체관광도 새로운 농민문화로 등장하고 있다.
젊은이들이 농촌을 떠나는 반면 귀농인구는 보잘 것 없기 때문에 농민의 고령화는 급속히 진행되고 있다. 15∼29세의 청년 농민이 농민 전체에서 차지하는 비중을 보면 1965년에는 40.1%였으나 1990년에는 6.9%에 불과하다. 한편 50세 이상의 농민이 농민 전체에서 차지하는 비중을 보면 1965년에는 18.6%였으나 1990년에는 56.3%나 된다.
특히 60세 이상을 보면 급속한 고령화를 알 수 있다. 1965년에는 5.0%였으나 1990년에는 23.7%나 된다. 농민의 고령화에 따라 연령이 농민가족의 계층분화에 상당한 영향을 미치게 되었다. 젊은 층은 채소특작 재배에서 고령농민보다 유리하기 때문이다.
거꾸로 젊은 농민이 상대적으로 많은 지역은 채소 등 특작재배가 활발하다. 노령농민들은 젊은층에 비해 계 가입활동도 낮고 그 밖의 지역사회활동에도 소극적인 것으로 조사되고 있다. 즉 사회적 고립현상을 보여주고 있다.
농촌의 고령화와 젊은층의 이농으로 인하여 1980년대부터 농촌 총각의 결혼 문제가 심각해졌다. 결혼난을 악이용한 위장결혼, 티켓다방과 같은 사회문제들도 일부 지역에서 나타나고 있다. 농민의 고령화와 결혼난은 농민가족의 재생산 위기를 단적으로 보여주고 있다.
농민 가족의 재생산 위기는 곧 커뮤니티의 재생산 위기로까지 발전된다. 정부는 농민들의 결혼문제 해결을 위해 조선족 여성과 한국 농민의 결혼을 주선해 왔다. 1990년대부터 민간차원에서도 조선족 여성과 한국 농민 사이의 결혼 사업을 추진하여 지금 농촌에서는 이러한 국제결혼 사례를 쉽게 발견할 수 있다.
농촌총각의 결혼난은 여성농민들의 생활이 어렵다는 사실을 말해준다. 여성농민들은 힘든 농사일을 담당하면서도 농업 노동의 보조자로만 인식된다. 게다가 농촌은 도시에 비해 상대적으로 보수적이라 전통적 가부장제가 강하게 남아 있어서 여성들이 농촌으로 시집가는 것을 기피한다. 농촌의 낙후된 문화생활도 여성들을 외면하게 하는 중요한 이유이다.
도농간의 생활격차 이외에도 농민들은 현재 여러 가지 도전에 직면하고 있다. 사회전반에 걸쳐 일어나고 있는 정보화와 전지구화는 1990년대 농민들에게 커다란 도전이다. 정보화와 영농의 과학화는 새마을 운동기부터 시작되었다고 할 수 있으나 1990년대 들어 본격화되고 있다.
과거 육체노동에 의존하던 것이 이제는 스위치 작동만으로 되는 것도 많다. 농산물의 공급이 넘치면서 영농에서도 정보, 마케팅, 수요예측의 중요성이 커지고 있다.
농민들은 전지구화를 피부로 체험하고 있다. 1980년대부터 시작된 외국농축산물의 대량도입, 1990년대의 WTO체제 등은 농민들을 위기로 내몰고 있다. 이러한 위기에 직면하여 농민들은 영농의 과학화와 정보화를 통해 세계시장으로의 진출을 강화한다. 채소특작에서 수출은 대단히 중요하다.
다른 한편으로 농민들은 전지구화에 맞서 국산농산물 애용운동인 신토불이(身土不二)운동을 전개하기도 한다. 또 농민들은 생산협동화운동, 지역농업운동 등을 통해 위기를 극복하고자 한다. 유기농업과 환경농업에 대한 관심도 증대하고 있다. 유기농업에 전적으로 종사하는 농민은 아직 소수이다.
전략적으로 보면 유기농업은 해외농산물에 대항할 수 있는 중요한 자원이다. 또 소비자들의 기호가 다양화되고 건강에 대한 관심이 증대함에 따라 유기농업에 대한 관심은 앞으로 더욱 높아질 것이다.
사회변동에 따라 농민과 국가의 관계도 크게 변하고 있다. 정부가 경제발전을 주도하고 경제성장을 최우선 목표로 채택하였기 때문에 한국을 발전주의국가라고 부르기도 한다. 발전주의국가는 농업정책에서도 농민들의 의견을 듣기보다는 정부가 세운 목표를 농민들이 수행하도록 요구하는 편이었다.
특히 1980년까지는 정부가 농업발전의 목표를 주도적으로 선정하고 농민이 그에 따르는 것이 많았다. 그러나 1980년대 농민운동단체들이 성장하면서 정부정책에 대해 비판하고 저항하는 일들이 빈번하였다. 즉, 자신의 이익을 주장할 수 있는 대자적(對自的) 농민이 형성되었다.
농민은 일제시대나 해방공간에서는 농민운동단체를 통해 자기의 주장을 표현하였으나 한국전쟁 이후 오랫동안 침묵하였다가 1980년대 이후에는 적극적으로 자기 집단의 주장을 표현하였다. 1990년대에도 부채탕감, 우루과이라운드 반대 등 격렬한 시위를 벌였다.
그러나 아직도 농민들은 농업발전 프로그램을 주도적으로 입안하는 단계까지 발전하고 있지 못하다. 스스로 문제를 해결하기 보다는 정부가 해 주기를 바라는 태도가 형성되어 있다. 이것은 그 동안 정부가 농민의 자율성을 제한하고 정부 주도로 농업정책을 펴 온, 잘못 때문이라 할 수 있다.
이제 시장기능이 강조되는 WTO 체제와 전지구화 시대에서 정부는 분명한 한계를 갖고 있기 때문에 농민 스스로 합리적으로 투자하고 예측하는 능력, 그리고 정책개발 능력이 중요하다.[3]
동영상
각주
참고자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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