영농인
영농인(營農人)은 농업을 경영하는 사람을 말한다.[1]
농업인의 변천[편집]
- 예속농, 자유농, 바이오 영농인
인류의 역사를 통틀어 가장 많은 사람들이 종사했던 업종은 농업이다. 신석기시대가 막을 올리면서 사회가 분화되고 직업이 형성됐는데, 농경과 목축에 종사하는 인구가 절대다수였다. 문명이 발생하고 고대사회가 전개된 데에는 농업생산의 증대에 따라 인구부양력이 높아진 점이 크게 작용했다. 농민이야말로 인류 문명의 개화를 가능하게 한 중요한 직업이었다. 그러나 그들이 이에 걸맞은 대접을 받아온 것은 아니었다.
로마시대에는 대농장(라티푼디아)에 고용된 노예, 혹은 자작농이었다가 치안이 불안한 시기가 되면 유력자에게 토지를 넘기고 사용권만을 얻는 반(半)예속민이 농사를 담당했다. 중세에는 직업선택과 거주이전의 자유가 제한된 농노가 가장 일반적인 농민이었다. 서유럽에서는 14세기 흑사병이 인구의 30% 이상을 죽음으로 몰고 간 이후 농노의 예속성이 약화되어 자유농이 증가하게 됐다.
동아시아에서는 농본주의(農本主義)를 채택한 왕조가 많아 농민이 다른 직업에 비해 우대를 받곤 했다. 벼농사는 단위면적당 수확량이 많아 대규모 인구를 부양하고 인구밀도가 높은 대도시의 성장을 가능하게 했다. 정부의 조세 수입도 농업에 크게 의존했다. 그러나 사회의 상층부는 경제활동에 종사하지 않는 관료집단이 차지하고 있었으므로, 농민이 사회의 중심세력이었다고 볼 수는 없었다. 이슬람 세계에서는 7세기부터 종교의 전파와 더불어 쌀 · 사탕수수 · 면화 등의 재배지가 크게 확대됐다. 관개수로(카나트)의 개발이 농업발전을 이끌었는데, 이 분야의 기술을 가진 장인은 사회적으로 전문성을 인정받았다.
대항해시대의 개막은 농업인의 시야를 전 세계로 확대시켰다. 유럽인들은 중세 내내 아시아로부터의 수입에 의존해야만 했던 후추 · 정향 · 계피 등 향신료의 생산지를 직접 지배할 수 있게 됐다. 아메리카 대륙에서는 주로 아프리카 출신의 노예노동을 이용해 설탕 · 담배 · 인디고 등을 생산하여 유럽으로 수출했다. 일부 유럽인들은 식민지에서 플랜테이션(plantation)을 운영함으로써 본국의 다른 직업에 비해 월등히 높은 소득을 향유할 수 있었다. 플랜터들은 역사상 가장 부유한 농업인 가운데 하나였다.
근대에 접어들면서 농업인에게 중대한 영향을 미친 역사적 사건들이 발생했다. 인클로저(enclosure)는 토지를 공동으로 경작하고 이용하던 관습적 방식을 마감하고 토지 소유자가 자신의 토지를 마음대로 이용할 수 있도록 만드는 과정이었다. 이렇게 근대적인 소유권제도가 형성되면서 농업인은 작물 · 품종 · 농법 등에 대해 완전한 자율권을 갖게 됐다. 산업혁명이 진행되고 확산되면서 농업의 기계화도 이루어졌다. 특히 광활한 경지에 비해 노동력이 부족했던 미국에서는 1831년 맥코믹(Cyrus McCormick)이 수확기를 발명함으로써 영농기계화의 길을 열었다. 이 발명품은 1851년 런던에서 개최된 세계 최초의 박람회에서 최고상을 받으면서 세계적으로 전파되기 시작했다.
예속농이 봉건적 부담에서 벗어나 자유농이 되는 과정은 농노해방을 통해 이루어졌다. 영국은 17세기, 프랑스는 18세기에 시민혁명을 계기로 자유농의 지위가 확립됐고, 독일과 러시아에서는 19세기를 거치면서 농노해방이 이루어졌다. 남북전쟁을 통한 미국의 노예해방도 예속적 농업인을 신분제의 굴레에서 벗어나게 해 준 역사적 사건이었다. 19세기 중후반에는 세계화가 전면적으로 진행되면서 농업의 지리적 특화가 더욱 진전됐다. 예를 들어 미국에서 는 면화재배가 대대적으로 이루어져 영국의 면공업에 대해 안정적으로 원료를 공급했다. 인도에서 재배된 아편은 중국으로 유입돼 영국을 필두로 한 유럽 열강들이 중국을 강제로 개방하는 데 결정적인 역할을 했다. 캐나다와 아르헨티나는 밀 수출국, 오스트레일리아는 양모 수출국, 브라질이 커피 수출국으로 명성을 얻었다. 그러나 개방화와 자유화는 일부 국가의 농업인들에게는 재앙으로 다가왔다.
1870년대 이래 대량의 곡물이 싼 값에 유럽으로 수입되면서 곡물생산비가 상대적으로 비싼 국가들의 농업은 큰 타격을 입었다. 영국의 농업은 붕괴위기에 몰렸고, 프랑스와 독일은 보호주의 정책을 도입했다. 덴마크는 축산과 낙농에 특화함으로써 다행히 위기탈출에 성공했다. 이 시기부터 전 세계 농업인의 소득은 국제 농산물시장의 상황에 직접적으로 영향을 받게 됐다. 20세기 중반에는 새로운 과학기술의 진보가 농업생산을 급속하게 증대시켰다. 특히 인구가 폭발적으로 증가하면서 식량부족에 직면하게 된 개발도상국들에게는 식량 증산이 시급한 과제였는데, 해결의 실마리는 신품종의 개발과 화학비료 및 살충제의 사용이라는 '녹색혁명(Green Revolution)'에 있었다. 한국에서도 1970년대에통일벼라는 신품종이 개발되어 생산량이 크게 증가했다. 시간이 흐르면서 품질 및 환경의 문제가 제기됐지만, 적어도 산출면에서는 급속한 증가를 기록할 수 있었다.
과거 농산품은 생산자가 많고 제품의 질에 별 차이가 없는 완전경쟁시장 재화의 성격이 강했다. 그러나 20세기 후반부터 농산품은 공산품과 마찬가지로 R & D 투자의 대상이자 로열티 소득의 원천이 됐다. 심지어 일부 농산품은 공산품보다도 유행이 빠르게 바뀌며, 생산자와 생산물의 브랜드가 소비자의 선택에 강하게 영향을 미치게 됐다. 독점적 경쟁시장의 형태로 농산품 시장이 개편된 것이다. 특히 종자의 보존 · 개발 · 사용을 둘러싼 국가 간 기업 간 경쟁은 치열하기 이를 데 없다. 오늘날 세계적으로 종자 사용을 위해 지불되는 로열티는 연 200억 달러에 이른다.
세계적으로 10개의 초대형 종자공급회사가 세계 종자산업의 70%를 차지하고 있으며, 그중에서 최대 규모인 몬산토(Monsanto)는 연간 100억 달러 이상의 매출을 기록하고 있다. 농업은 선진국과 개도국의 차이가 매우 두드러진 산업이 되고 있는 것이다. 현대의 농업인은 혁명적 변화를 맞이하고 있다. 이제 농토는 생명공학 연구개발이 치열하게 이루어지는 현장이며, 수많은 전문가가 제시하는 다양한 친환경농법의 실험장이며, 바이오 에너지와 의약품 원료처럼 새롭고 부가가치가 높은 물질을 만들어내는 첨단 생산기지이다. 농업인은 새로운 기술에 능통하고 국제적 경쟁에서 우위를 확보해야 하는 바이오 영농인으로 거듭나는 과정에 있다.[2]
청년농업인 영농정착 지원금[편집]
- 선정규모 및 자격사항
전국 5,000명
- 만 18세 이상 ~ 만 40세 미만
- 사업체 경영자, 공공기관 및 회사의 상근 근로자 제외
- 선정 후 30일 이내 폐업 또는 퇴직예정자는 신청가능
- 독립경영 3년 이하 (예비농업인 포함)
- 독립경영기간은 회계연도 단위로 계산
- 건강보험료 등 일정소득 이상인 자는 신청 제외
- 영농정착 지원금 지급개요 및 의무사항
지원 금액독립경영 기간에 따라 차등지급
1년차- 110만원
2년차- 100만원
3년차- 90만원
지급기간- 최장 3년(최초선발 시 영농 경력에 따라 지급기간 차등)
지급방법- 청년농업희망카드 발급 (영농자금 및 일반 가계자금으로 사용범위 제한)
지급인원- 농업경영체(농업인, 농업법인) 당 1명, 법인 공동대표일 경우 각각 지급
의무사항- 독립경영이행, 의무교육과정이수, 재해보험 · 자조금 가입, 경영장부 기록, 영농계획이행, 전업적 독립영농유지, 서류 성실신고, 영농정착지원금 지급의무 및 성실사용, 의무영농기간 준수 등[3]
각주[편집]
- ↑ 〈영농인〉, 《네이버국어사전》
- ↑ 송병건 교수, 〈예속농, 자유농, 바이오 영농인: 농업인의 변천〉, 《KDI경제정보센터》, 2013-06-28
- ↑ 〈청년후계농 영농정착 지원사업〉, 《농촌진흥청》
참고자료[편집]
- 〈영농인〉, 《네이버국어사전》
- 송병건 교수, 〈예속농, 자유농, 바이오 영농인: 농업인의 변천〉, 《KDI경제정보센터》, 2013-06-28
- 〈청년후계농 영농정착 지원사업〉, 《농촌진흥청》
같이 보기[편집]