온조왕
온조왕(溫祚王)은 백제의 시조 (재위 BC 18∼AD 28)이다.
개요
- 온조왕은 고구려의 시조인 주몽의 아들로 비류(沸流)의 동생이다. 《삼국사기》에는 주몽이 난을 피해 북부여(北扶餘)에서 졸본부여(卒本扶餘)로 왔을 때 졸본부여의 왕이 그에게 둘째 딸을 시집보내 비류와 온조 형제가 태어났다고 기록되어 있다. 주몽이 졸본에서 월군(越郡)의 여자에게서 형제를 낳았다는 이야기도 있다고 전하고 있다. 그러나 비류와 온조 형제가 북부여 해부루(解扶婁) 왕의 서손(庶孫)인 우태(優台)와 졸본 사람 연타취발(延陁溴勃)의 딸인 소서노(召西奴) 사이에서 태어났다는 내용의 건국설화도 있다. 소서노는 우태가 죽은 뒤 졸본에서 혼자 살았는데, 주몽이 졸본으로 와서 고구려를 세우고 소서노를 왕비로 삼아 비류와 온조 형제를 자신의 소생처럼 대우했다는 것이다. 왕비에 대한 기록은 전해지지 않으며 백제의 제2대 다루왕(多婁王, 재위 28~77) 등을 낳았다. 《삼국사기》의 기록에 따르면, 주몽이 북부여에서 낳았던 아들이 졸본으로 와서 태자가 되자 온조왕은 형인 비류와 함께 오간(烏干), 마려(馬黎) 등 열 명의 신하를 거느리고 남쪽으로 내려와 기원전 18년 하남(河南) 위례성(慰禮城)에 도읍을 정하고 나라를 세워 국호를 십제(十濟)라 하였다. 형인 비류는 미추홀(弥鄒忽)에 따로 터를 잡았다가 신하와 백성들을 이끌고 다시 위례로 합류했다. 그 뒤 온조왕은 위례로 올 때 백성들이 기꺼이 따랐다고 해서 나라 이름을 백제(百濟)로 고쳤고, 조상이 고구려와 함께 부여에서 나왔으므로 '부여(扶餘)'를 성씨로 하고 동명왕(東明王)의 묘당을 세웠다. 《삼국유사》에는 성씨를 '해(解)'로 했다고 기록되어 있다. [1]
- 온조왕은 백제(百濟)를 건국한 초대 국왕(재위 : 기원전 18년 ~ 28년 음력 2월)이며, 고구려를 세운 동명성왕(東明聖王)의 아들이기도 하다. 《삼국사기》는 온조를 고구려 동명성왕의 아들로 기록하면서, '일설에는 북부여의 우태의 아들이라고도 한다'라는 내용도 함께 기록하였다. 《삼국유사》는 《고전기(古典記)》를 인용하여 온조를 동명성왕의 셋째 아들이라고 기록하고 있고, 《동국통감》을 비롯한 대부분의 역사서 또한 온조를 동명성왕의 아들로 기록하고 있다. 온조의 출생 연도는 기록이 없어 알 수 없지만, 이복 형인 유리명왕과 친형인 비류가 있으므로 적어도 기원전 36년 이후에 태어났음을 추정할 수 있다. 온조를 우태의 아들로 비정할 경우, 출생 연도는 더욱더 추정할 수 없게 된다. 온조의 어머니인 소서노가 동명성왕보다 8살이나 연상인 점을 미루어 볼 때, 소서노가 주몽과 재혼했을 것이라는 《삼국사기》의 기록도 어느 정도 설득력을 갖는다. 온조왕은 28년(온조왕 46년) 2월 사망하였다.[2]
- 온조왕은 680년을 지속한 백제 왕조의 건국자이자 초대 혹은 2대 군주이자 건길지. 고대 삼국의 시조 중 유일하게 탄생 설화나 전설이 내려 오지 않으며 왕자로서 편하게 살 수 있었던 고구려를 떠나 백제를 건국한 인물이다. 부여의 동명왕, 고구려의 고주몽, 신라의 박혁거세 및 석탈해와 김알지, 금관국의 수로왕, 반파국의 이진아시, 고자국의 말로왕 등의 건국 이야기와는 달리 신비적인 요소가 전혀 전해지지 않는다는 점도 중요하다. 고대 국가 가운데 백제의 건국 설화는 고조선의 건국 설화와 더불어 난생설화가 아니고 고조선 역시 신화적 성격이 강하다는 점을 고려하면 백제 건국 설화가 그나마 가장 현실성 있다고 할 수 있다. 삼국유사에 따르면 온조왕에 대해서 "몸이 크고 성품이 효도와 우애가 있었으며 말 타기와 활쏘기를 잘하였다."라고 기록했다.[3]
- 온조왕은 백제의 건국시조이다. 엄밀한 의미에서는 위례성(慰禮城)에 토대를 둔 백제 왕실의 시조. 재위 서기전 18~서기 28. 현존 문헌들에는 백제의 시조로 전하는 인물들이 여러 명이며, 온조는 그 중의 하나이다. 백제 초기에는 북쪽에서 한반도 중서부일대에 남하한 부여족의 여러 집단들이 연맹체를 결성하고 있었다. 그들 중 연맹체를 주도한 대세력으로는 먼저 미추홀(彌鄒忽)에 웅거한 집단이 대두하였고, 그에 뒤이어 패권을 잡은 것이 위례성(현재의 서울 부근 또는 경기도 광주 부근으로 추정)의 집단이었다. 그리고 미추홀에서 일어난 집단의 시조로 전하는 것이 비류(沸流)이고, 그 뒤에 권력을 장악한 위례성 집단의 시조가 바로 온조이다.[4]
온조왕의 생애
- 온조왕은 동쪽의 낙랑(樂浪), 북쪽의 말갈(靺鞨)과 대립하며 백제의 영토를 꾸준히 넓혀갔다. 기원전 17년(온조왕 2) 족부(族父)인 을음(乙音)을 우보(右輔)로 삼아 군사를 맡겼고, 기원전 16년에는 말갈이 북쪽 국경을 침범해오자 직접 정예병을 이끌고 출정하여 그들을 크게 격파하였다. 기원전 15년에는 낙랑에 사신을 보내 우호관계를 맺었으나, 기원전 11년 백제가 마수성(馬首城)을 쌓고 병산(甁山)에 목책을 세운 일로 우호관계가 끊어졌다. 이 해에 말갈이 쳐들어와 위례성을 포위했으나 온조왕은 성을 굳건히 지키다가 퇴각하는 말갈군을 공격해 큰 승리를 거두었다. 기원전 9년에도 말갈족이 북쪽 국경을 쳐들어오자 왕은 직접 정예 기병을 이끌고 봉현(烽峴)으로 출정해 그들을 물리쳤다. 기원전 8년(온조왕 11)에는 낙랑이 말갈을 시켜 병산의 목책을 습격해 파괴하자 독산(禿山)과 구천(狗川) 두 곳에 목책을 세워 낙랑으로 가는 길을 막았다.
- 기원전 6년 왕의 어머니가 죽자 온조왕은 도읍을 옮길 계획을 세워 한산(漢山) 아래에 목책을 세워 위례성의 백성을 이주시켰다. 그리고 성과 대궐을 세워 이듬해인 기원전 5년(온조왕 14) 도읍을 옮겼다. 《삼국유사》 '왕력' 편에는 지금의 광주(廣州)로 기록되어 있다. 이때 백제의 영토는 북으로는 패하(浿河)에 이르고, 남으로는 웅천(熊川)이 경계였으며, 서쪽은 바다, 동쪽으로는 주양(走壤)에 닿았다. 도읍을 옮긴 뒤에 온조왕은 부락(部落)을 돌며 백성들을 위로하고 농업을 장려했으며, 한강(漢江) 서북쪽에 성을 쌓아 한성(漢城)의 주민을 나누어 이주시켰다. 기원전 4년(온조왕 15) 한성에 새 궁궐을 지었고, 기원전 2년(온조왕 17)에는 왕의 어머니를 기리는 묘당을 세웠다. 기원전 2년 낙랑이 쳐들어와 위례성을 불태우면서 낙랑, 말갈과의 대립이 확대되었다. 기원전 1년(온조왕 18) 겨울에도 말갈이 쳐들어왔으나 온조왕은 직접 군대를 거느리고 칠중하(七重河)에서 그들과 싸워 추장인 소모(素牟)를 붙잡아 마한(馬韓)으로 보냈다. 그리고 낙랑의 우두산성(牛頭山城)을 습격하기 위해 구곡(臼谷)으로 갔으나 큰 눈을 만나 회군하였다. 기원후 4년(온조왕 22)에는 석두성(石頭城)과 고목성(高木城)을 쌓았고, 부현(斧峴) 동쪽에서 말갈군을 물리쳤다.
- 나라가 커지고 강해지자 온조왕은 진한(辰韓)과 마한 병합을 추진했다. 기원후 6년에는 웅천(熊川)에 목책을 세웠으나 마한 왕의 항의를 받고 허물었다. 그러나 기원후 8년 사냥 가는 것으로 위장하고는 마한을 기습해 원산성(圓山城)과 금현성(錦峴城) 두 곳을 제외한 영토를 병합했다. 기원전 9년에는 원산성과 금현성도 점령해 그곳 백성들을 한산 북쪽으로 이주시켰으며, 대두산성(大豆山城)을 쌓았다. 마한을 병합한 온조왕은 기원후 10년 맏아들인 다루(多婁)를 태자로 삼아 그에게 군사를 맡겼다. 그리고 통치체계를 정비해 13년에는 나라의 민호(民戶)를 나누어 남부(南部)와 북부(北部)를 설치했으며, 15년에는 동부(東部)와 서부(西部)를 더 설치했다. 16년 옛 마한의 장수인 주근(周勤)이 우곡성(牛谷城)에서 반란을 일으켰으나 온조왕은 직접 5천의 병사를 이끌고 이를 진압했다. 18년에는 탕정성(湯井城)을 쌓아 대두성(大豆城)의 주민을 나누어 이주시켰다. 온조왕은 기원후 28년(온조왕 46) 봄에 사망했고, 맏아들인 다루왕이 왕위를 계승했다.
남한산성 숭렬전
- 남한산성 숭렬전(南漢山城 崇烈殿)은 경기도 광주시 남한산성면 산성리에 있는 온조왕의 위패를 모시기 위하여 창건한 사당이다. 2022년 11월 25일 보물로 지정되었다. 이 사당은 원래 조선시대인 1464년(세조 10) 충청남도 직산에 백제 온조왕의 위패를 모시기 위하여 창건한 사당이었다. 그러나 정유재란 때 불에 타서 1603년(선조 36)에 재건되어 경기도 광주(廣州)로 옮겼다. 그 뒤 1795년(정조 19)에 왕이 사액(賜額)을 하사하자 이곳을 수리하고 숭렬전으로 바꾸었다. 1626년(인조 4) 수어사로서 남한산성의 수축에 힘쓰고 병자호란 때 남한산성에서 적과 싸우다 병사한 이서를 함께 배향하고 있다.
- 숭렬전이 있는 남한산성은 북한산성과 함께 도성을 지키던 남부의 산성이었다. 남한산성은 초기 백제 400년 역사의 중심 무대였고, 고려 시대에는 몽골군에 승전한 곳이며, 또 항일 의병운동과 3·1운동의 중심지 역할을 한 곳이다. 지금은 동·서·남문루와 장대·돈대·암문·우물·보·누 등의 방어 시설과 군사 훈련 시설 등이 있다. 이 산성의 주변 지역에는 숭렬전과 온조왕묘 등 백제 초기의 유적이 많이 분포되어 있어서, 일찍부터 온조왕 때의 성으로도 알려져 왔다.
온조왕의 업적
- 한강 유역 점령이다. 백제의 첫 번째 수도인 위례성은 한강 유역에 위치해 있었다. 이곳은 교통이 편리하고 물자가 풍부하여 경제적으로 발전하기 좋은 조건을 갖추고 있었다. 또한, 중국과의 교류에도 유리한 위치였다. 이러한 이유로 온조왕은 한강 유역을 점령하고자 노력하였고, 결국 성공하였다. 이를 통해 백제는 경제적, 외교적으로 큰 발전을 이룰 수 있었다.
- 마한 지역 통합이다. 당시 한반도 남부에는 여러 개의 작은 국가들이 존재했다. 그중에서도 가장 강력한 국가는 마한이었다. 하지만 온조왕은 마한 지역을 차례차례 정복하면서 백제의 세력을 넓혀갔다. 그리고 마침내 마한을 완전히 통합함으로써 백제는 한반도 남부에서 가장 강한 국가 중 하나가 되었다.
- 영토 확장이다. 온조왕은 북쪽으로는 황해도 일대까지, 서쪽으로는 서해안 지역까지 영토를 확장하였다. 이를 통해 백제는 더욱 넓은 영토를 확보하게 되었고, 다양한 자원을 얻을 수 있게 되었다.
- 국가 제도 정비에 관한 강화이다. 온조왕은 국가의 제도를 정비하여 왕권을 강화하고 국가의 기반을 튼튼히 하였다. 세금 제도를 개선하고 군사력을 강화하였으며, 법률을 제정하여 사회 질서를 유지하였다.
- 불교 수용이다. 온조왕은 불교를 받아들임으로써 백성들의 정신적 통일을 추구하였다. 당시 불교는 인도에서 시작되어 중국을 거쳐 한반도로 전파되었으며, 많은 사람들에게 인기를 끌었다. 이렇게 함으로써 백제는 문화적으로도 크게 발전할 수 있었다.
동영상
각주
참고자료
- 〈온조왕〉, 《위키백과》
- 〈온조왕〉, 《나무위키》
- 〈온조왕/생애〉, 《나무위키》
- 〈온조왕〉, 《향토문화전자대전》
- 〈온조왕(溫祚王,?~28)〉, 《두산백과》
- 〈온조왕과 백제 초도 위례성〉, 《향토문화전자대전》
- 김준호 기자, 〈"백제 시조 온조왕과 사비시대 왕들 기린다' 부여에 숭목전 준공〉, 《연합뉴스》, 2019-09-25
같이 보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