박연 (음악가)
박연은 조선 초기의 문신, 도학자, 경세가, 문장가, 천문학자, 음악가이다.
개요[편집]
박연의 초명은 연(然), 자는 탄보(坦父), 아호는 난계(蘭溪), 당호는 송설당(松雪堂)이다. 시호는 문헌(文獻)이며, 밀양 박씨 좌복야공파후 난계파조이다. 조선 전기의 문신·음률가(音律家)로 세종 당시 불완전한 악기 조율(調律)의 정리와 악보편찬의 필요성을 상소해 자작한 12율관(律管)에 의거 음률의 정확을 기했다. 또 궁중음악을 전반적으로 개혁했다. 1767년 영조 43년 문헌공의 시호가 내려졌다. 1972년 대한민국 정부에서 영동에 난계사를 세우고 1973년부터 매년 연례 행사로 난계예술제를 지내고 있으며 서울에 난계로와 난계공원이 있다. 특히 적(笛)의 명 연주가였으며 조선 초 미비한 궁정 음악을 정비하여 고구려의 왕산악(王山岳), 신라의 우륵(于勒)과 함께 3대 악성(樂聖)으로 불린다.[1]
박연의 생애[편집]
박연은 1378년(고려 우왕 4년) 지금의 충청북도 영동군 심천면 고당리 308에서 태어났다. 그는 아주 총명하고 학문이 탁월하였으며, 효심이 지극하여 여(시)묘를 6년 하여 1402년(조선 태종 2년)에 조정에서 효자 정려(旌閭)가 내려졌다. 1405년(태종 5년)에 생원시에 급제하고 1411년 문과에 제1위(장원)로 등과하였다. 세종이 대군 시절 세자시강원 문학으로 세종을 가르쳤다. 집현전 교리(敎理)를 거쳐 지평(持平)·문학(文學)대제학을 역임하였다.
세종이 즉위한 뒤 악학별좌(樂學別坐)에 임명되어 음악에 관한 일을 맡아 보았다. 당시 불완전한 악기의 조율(調律)의 정리와 악보 찬집(撰集)의 필요성을 상소하여 허락을 얻고, 1427년(세종 9) 편경 12매를 제작, 자작한 12율관(律管)에 의거한 정확한 음률로 연주케 했고 3년 후 다시 미비한 율관을 수정했다. 당시 불완전한 악기 조율(調律)의 정리와 악보편찬의 필요성을 상소하여 허락을 얻고, 1427년(세종 9) 편경(編磬) 12장을 만들고 자작한 12율관(律管)에 의거 음률의 정확을 기하였다. 또한 조정의 조회 때 사용하던 향악(鄕樂)을 폐하고 아악(雅樂)으로 대체하게 하여 궁중음악을 전반적으로 개혁하였다. 1433년 유언비어 유포혐의로 파직되었다가 용서받고 아악에 종사, 공조참의·중추원첨지사(中樞院僉知事)를 거쳐 중추원동지사를 지냈다. 1445년 성절사(聖節使)로 명나라에 다녀와서 인수부윤(仁壽府尹)·중추원부사를 역임한 후 예문관 대제학(大提學)에 올랐다.
조정의 조회 때 사용하던 향악을 폐하고 아악의 사용을 건의하여 실행케 했다. 세종실록 9년 5월 15일조 기사를 보면 악학별좌(樂學別坐) 봉상 판관(奉常判官)으로 1틀에 12개 달린 석경(石磬)을 새로 만들어 올렸다고 기록되어 있다. 그리고 세종실록 1428년 2월 20일 조 기사에는 세종으로부터 세상일에 통달한 학자라는 평을 얻었다. 1431년 남급(南汲)·정양(鄭穰)과 회례(會禮)에도 아악을 채택케 하고, 조회와 회례에서 종전까지 기생이 추던 춤을 무동(舞童)으로 대치하여 문무이무(文武二舞)의 작변지절(作變之節)과 속부남악지기(俗部男樂之伎)를 추게 하여 궁정 음악과 예법을 전반적으로 개혁했다.
1433년 유언비어를 유포했다는 죄로 파직되었다가 용서되어 아악에 종사하였으며, 공조 참의·첨지중추원사를 지냈다. 1445년 성절사로 명나라에 다녀와서 인수 부윤(仁壽府尹)·중추원 부사(中樞院副使)를 역임하였다.
1453년 10월 10일(단종 1) 계유정난 때 집현전 한림학사이었던 셋째 아들 박계우가 교형 되었으나 악학도제조인 수양대군이 악학제조인 박연이 4조(三朝)에 걸친 원로임을 인정하여 3족을 멸하는 죽음을 면하였으나 자손들의 안위를 위하여 1458년 2월 2일까지 고산에 자원 안치되었다가 풀려나 49일만인 1458년 3월 23일 죽었다. 가훈 17장을 지으니 도암(陶庵) 이재(李縡, 1680 ~ 1746)가 서문을 찬(撰)하였다. 영동의 초강서원(草江書院)에 제향 되고, 지금도 고향 영동에서는 해마다 '난계음악제'가 열려 민족음악 발전에 남긴 업적을 기리고 있다. 시문집 《난계유고(蘭溪遺稿)》 《가훈(家訓)》이 있다.
박연의 묘[편집]
박연은 궁중음악으로 아악(雅樂·의식 따위에 정식으로 쓰던 음악)을 연주하도록 했으며 1431년(세종13) 아악에 맞는 악기를 제작하여 왕에게 올렸고, 마침내 세종 20년대 종묘에 제사를 지낼 때 쓰는 음악으로 정통적인 아악을 확립함으로써 조선 음악의 체계를 잡았다. 박연 묘를 위시해 반대쪽 산등성이 아래에 위치한 생가는 금강이 휘감으며 흘러가는 안쪽에 자리하고 있다. 이것은 강물이 생기가 흐트러지거나 새는 것을 막아줄 뿐만 아니라 강한 지기(地氣·땅기운)를 지속적으로 머금고 있게 한다는 것을 의미한다.
혈(穴·정기)을 응집한 범위는 그리 넓지 않기 때문에 용세(龍勢·산줄기의 형세)와 땅속의 성분이 고운 흙인지 수맥이 있거나 공극(토양 입자 사이의 틈)이 크거나 바위가 있는지 등을 파악하는 것이 무엇보다 중요하다. 땅기운의 근원인 국사봉(501.9m)에서 북동진한 용맥(龍脈·산줄기)이 힘차게 전진을 거듭하다가 90도로 틀면서 뻗어 내려가 혈을 맺은 '횡룡입수(橫龍入首)'의 형상이 박연 묘를 포함한 주변 터이지만 정작 생기를 알차게 간직한 곳은 박연 묘의 위에 자리한 부인 여산송씨의 묘이다.
국세(局勢·산의 형세)를 살펴보면 내청룡(좌측산)과 내백호(우측산)는 박연 묘의 산줄기와 나란히 있어 측면에서 치는 계곡풍과 살기(殺氣)를 막고 있지만 땅심(땅의 기운과 활력)을 강화시키지는 못한다. 그러나 박연 묘를 측면부터 앞면까지 두르고 있는 외백호(내백호를 다시 바깥에서 감싸는 산줄기)가 앞쪽에서 불어닥치는 흉한 바람을 차폐시키며 내청룡과 내백호 사이의 계곡수와 내백호와 외백호 사이의 계곡수가 합류해 묘 앞을 지나 흘러감으로써 묘의 땅심을 굳건히 하고 있다. 물이 땅을 강화시킨다는 뜻이다.
흙과 돌이 섞여있어 풍화가 덜 된 입구 부분의 토질에 대한 실망감은 묘역 초입에 형성된 마사토 성분의 고운 흙을 보고 좋은 자리가 있음을 알 수 있다. 박연 묘와 여산송씨 묘는 전형적인 배산임수의 지형이며 지맥(地脈·땅속 정기가 순환하는 줄)에 순응한 터이지만 땅속 정기가 멈춘 길지(吉地)에는 여산송씨의 묘가 있다.
박연의 업적[편집]
박연은 한국 전통 음악과 서양 음악에 대한 깊은 이해와 연구를 바탕으로 음악 이론을 개발하였다. 그의 연구는 한국 전통 음악의 음성, 리듬, 형식을 조사하고 문헌으로 남겼으며, 그것을 음악 작곡과 공연에 적용했다.
박연은 혼성 합창을 개발한 한국 최초의 음악가 중 하나이다. 혼성 합창은 남성과 여성 목소리를 함께 사용하여 부르는 형태로, 그의 음악 작품에 많이 적용되었다. 이는 한국 음악에서 현대적인 감각과 국제적인 영향을 받은 중요한 변화 중 하나이다.
박연은 다양한 음악 작품을 창작하였으며, 그의 작품은 국악과 서양 음악의 특징을 결합하여 현대적인 음악 양식을 형성했다. 그의 작품 중 일부는 교향곡, 협주곡, 합창, 실내악 등 다양한 장르에서 나왔으며, 한국 음악의 발전과 현대화를 위한 중요한 역할을 하였다.
박연은 음악 교육에 열정적으로 헌신했다. 그는 첫 번째 음악 학교 중 하나인 "효문학교"를 설립하고, 많은 학생들을 가르쳐 한국 음악 교육을 끌어올리는 데 기여하였다. 박연은 한국 음악의 발전과 현대화에 큰 영향을 미쳤으며, 그의 작품과 연구는 한국 음악의 역사적 발전을 이해하는 데 중요한 역할을 한다.
난계유고[편집]
난계유고(蘭溪遺稿)는 조선 전기의 문신·학자이며 음악가인 박연(朴堧)의 유고집. 활자본. 1권 1책. 1822년(순조 22)에 16세손 경하(景夏)가 간행하였다. 중간본은 1903년(광무 7) 후손 심학(心學)이 수집 간행하였다. 내용은 시(詩)·소(疏)·잡저(雜著)·시장(諡狀)·신도비명(神道碑銘) 등이 수록되어 있고, 그중 39편의 상소(上疏)는 거의가 악률(樂律)에 관한 것들이다. 책머리에 김학진(金鶴鎭)·송태헌(宋台憲)의 서문이 있고, 책끝에 김조순(金祖淳)·김로경(金魯敬)·김태제(金台濟)의 발문과 16세손 경하의 지(識)가 실려 있다. 조선 전기 세종 때의 음악 및 의절 연구에 좋은 자료이다.
동영상[편집]
각주[편집]
- ↑ 〈박연 (1378년)〉, 《위키백과》
참고자료[편집]
- 착한 산적, 〈현풍곽씨 충,효,열의 십이정려각, 음악가 난계 박연의 흔적을 찾아서...〉, 《네이버블로그》, 2022-12-08
- 화산풍수, 〈조선시대의 위대한 음악가 박연〉, 《네이버블로그》, 2023-06-09
- 〈박연 (1378년)〉, 《위키백과》
- 〈박연〉, 《나무위키》
- 〈박연 (朴堧)〉, 《한국민족문화대백과사전》
- 달뫼, 〈3월 23일 / 음악가 박연 죽음〉, 《네이버블로그》, 2022-03-23
같이 보기[편집]